한국형 본격 수사물을 표방했던 MBC 드라마 ‘히트’는 ‘수사반장’이후 보기 힘들었던 형사를 안방극장으로 다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게다가 여성 강력반 반장이라는 설정, 유사가족 형태로 묶여진 팀이 엮어 가는 수사물이란 점, 게다가 우리 식의 수사물(주로 영화 속에서)의 맨발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일상화된 형사의 캐릭터에 동시에 과학수사의 이미지를 덧붙인 점 등등 새로운 시도가 많았던 드라마다.

하지만 종영에 즈음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은 이제 이야기를 좀 해볼만한 상황에 끝나버린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히트’는 초ㆍ중반부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것이 사실이다. 미드(미국드라마) 식의 전문성을 가진 드라마가 이제 막 태동하는 시기인데다, 그것이 우리 식으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니, ‘히트’는 그 첫 시험대에 오른 셈이 되었다. 드라마는 스토리 전개보다 캐릭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캐릭터는 완전 소중, 스토리는 지지부진
작가들은 “사건 자체보다는 인간관계에 중점을 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히트’가 수사물이라는 장르의 틀을 빌어 왔다는 점에서 상충될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은 장르에 대한 어떤 기대감을 갖게 되는데 사건은 지지부진하면서 캐릭터에 집중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인간관계에 더 초점을 맞췄다면 장르를 배반할만한 특별한 대체물이 있었어야 했다. 그래서 캐릭터 설명에 할애된 ‘히트’의 초반부 스토리는 사족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팀원들 한 명씩 캐릭터를 설명하면서 이야기 전개를 하기에 20부작은 너무 짧다. 그들의 캐릭터가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그것은 후반부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차수경과 연쇄살인범의 대립구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어야 했다. 하나씩 설명하는 스토리들이 초반에서부터 중반까지 이어지자 기현상이 벌어졌다. 캐릭터는 완전 소중해졌는데 스토리는 지지부진해진 것이다.

16부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이다
‘히트’의 진짜 얘기는 연쇄살인범의 얼굴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20부작 짜리 드라마는 후반부 16부에 와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즈음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수사물이 갖는 미스테리의 요소를 일찌감치 지워버린다. 연쇄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하고 쫓고 쫓기는 이야기 속으로 바로 뛰어들었다. 그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드라마의 긴장감이 생기면서 중심 이야기 부재로 지리멸렬해진 ‘히트’가 가야할 강력한 목표가 생겨버린 것. 드라마는 그제야 살아나기 시작한다.

연쇄살인범과 차수경의 본격적인 심리전은 ‘히트’가 처음부터 했어야 했던 요소다. 14년 동안 감옥에서 정신병원에서 차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준비했던 범인 캐릭터라면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예 히트 팀원 들 전체를 이 범인이 벌이는 사건과 연관시켰다면 시간도 벌면서 이야기는 더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진화된 ‘히트’를 기대하는 이유
드라마가 끝난 마당에 이런 아쉬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 아쉬움은 ‘히트’가 일정부분 성과를 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는 늘 어렵기 마련이고 그 첫 시행착오를 거쳐 해결의 실마리를 막 잡았다는 점에서 ‘히트’는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전문성 있는 드라마들을 위한 작은 징검다리를 하나 놓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히트’의 시즌2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것일까. ‘히트’가 구축해놓은 캐릭터가 너무 아쉽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감을 잡은 ‘히트’가 이렇게 단발성으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조직된 ‘히트’는 이제 겨우 사건 하나를 해결한 셈이다. 그걸로 이렇게 끝내기가 못내 아쉽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는 없을까. 종반부에 보여줬던 긴장감을 초반부터 유지해간다면 이처럼 잘 구축된 캐릭터에 좀더 진화된 ‘히트’가 나오지 않을까. 실망과 함께 말미에서 보인 가능성이 너무 아쉬워하는 말이다.

누가 알기나 했을까. 감동이 자극보다 더 강하다는 걸. 그 반가운 사실을 알려준 첫 번째 주인공은 이미 종영한 ‘고맙습니다’란 드라마다. 에이즈에 감염된 딸과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미혼모가 세상의 편견을 진심으로서 넘어서고, 그 진심이 에이즈보다 더 강력하게 주변으로 전염된다는 훈훈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서 감동을 전해준 두 번째 주인공, 바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5회에 걸쳐 연속으로 꾸며진 ‘휴먼다큐 사랑’이다. 그 중에서도 2회로 방영된 ‘안녕 아빠’편은 전 국민을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값싼 눈물이 아닌, 값진 감동이었다. 가족과 사별하는 이야기 앞에 어찌 눈물이 없겠냐마는 이준호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된 데는 무언가 다른 이유도 있을 법하다.

‘고맙습니다’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 작은 미혼모 가족의 바람이 거창한 것이 아닌, 그저 함께 그 곳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고맙다고 표현하는 일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호의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이상하다, 뭐가 고맙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의 작은 호의들. 그런데 ‘휴먼다큐 사랑’을 본 시청자라면 그것이 왜 고마운 지를 알게됐을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의 다섯 편 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바라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이며(엄지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 편), 물질이 아닌 자신들의 진짜 사랑을 아이에게 주고 싶다는 것이고(벌랏마을 선우네 편) 가족들과 좀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며(안녕 아빠), 아이의 돌잔치를 보고 싶다(엄마의 약속 편)는 것이다. 놀랍지만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전부이다.

하지만 그 간단한 것들을 막는 것들이 존재한다. 무한정 지속될 것만 같던 삶에 장애와 병 같은 것이 들어오자 삶은 더 진지해진다. 그리고 거기서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 우리가 행복을 위해 원했던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고 일상적이고 작은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작게 보였고, 그래서 무시하거나 실천하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안녕 아빠’ 편에서 아빠가 무한히 반복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미안하다, 사랑해, 고마워” 같은 대단할 것 없지만 평상시 잘 쓰지 않았던 말들이다. 그것이 이제 한 달도 채 생이 남지 않은 아빠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그 진정한 의미들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아빠의 옆을 수호천사처럼 지키고 결국 가슴으로 아빠를 떠나보낸 은희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지금처럼 아빠를 희생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더라면 10년 동안 살아 온 결혼생활이 참 행복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왜 내가 진작 이런 맘으로 남편을 대하지 못했을까. 지금은 저의 모든 것을 다해서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 감동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질문으로 다가온다.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통해서, ‘휴먼다큐 사랑’을 통해서 받은 감동의 실체는 이렇게 우리 삶의 주변까지 둘러보게 만든다. 자신을 그 상황 속에 감정이입시키며 눈물을 흘린 사람이라면 먼저 일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사랑 표현과 점점 서먹해져 가는 관계 같은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TV 속 자극적인 것들에 익숙해진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자신 역시 감동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쩐의 전쟁’의 풍자가 말해주는 것

장태유 PD는 왜 ‘돈의 전쟁’이 아니고 ‘쩐의 전쟁’이냐는 질문에 “쩐이 더 끈끈한 맛이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렇다. 지금은 돈을 돈이라 표현해서는 어딘지 밋밋할 정도로 돈에 대한 욕망과 박탈감이 많은 시대다. 그래서일까. ‘쩐의 전쟁’이란 드라마가 만화적인 연출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는 심각한 이야기를 최대한 부담을 줄여 가볍게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짠한 느낌이 남는 것은.

웃으면서도 짠한 것, 풍자의 힘
박인권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쩐의 전쟁’은 만화 원작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 가질 수 있는 ‘과장의 약점’을 오히려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박인권 화백의 만화는 리얼리티를 다루면서도 만화만이 갖는 과장을 또한 극적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데, 드라마, ‘쩐의 전쟁’ 속에서도 그 심각한 리얼리티와 만화적인 가벼움이 동시에 나타난다.

즉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게 만들고,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짠하게 만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풍자의 힘 때문이다. 풍자는 과장의 기법을 통해 사람들의 웃음을 끌어내지만, 그 과장이 제거됐을 때 드러나는 심각한 현실 때문에 짠한 느낌을 남긴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버지의 유서를 통해 나타난다. 칼처럼 날카롭게 간 카드로 동맥을 끊어 자살한 아버지가 ‘카드 빚 쓰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는 사실은 그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거기에는 자살도구로 쓰인 것이 카드라는 사실과 유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드 빚’이란 단어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비극일 수 있지만 그것을 드라마라는 장치 속에서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게 무슨 유서가 이래?”하며 오열하는 금나라를 보는 시청자들은 웃게 되는 것이다. 그 웃음은 이 과장된 설정에서 비롯되지만 그 현실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간극에서 우리는 작가가 전하려는 사회에 대한 비꼼을 공유할 수 있다. ‘오죽 했으면 카드 빚 쓰지 마라’고 유서를 썼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서주희(박진희)가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긴다”고 할 때 그 말의 묘미에서 웃음을 짓게 되지만 또한 ‘정말 돈돈 하는 세상’이라고 씁쓸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유다.

왜 하필 풍자였을까
그런데 왜 하필 풍자라는 장치를 만들어 썼을까 하는 데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풍자란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대상을 언어유희나 과장된 표현으로 비꼬는 기술이다. 즉 듣는 사람에게 그것이 자신을 비판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쩐의 전쟁’이 풍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피도 눈물도 없고 오로지 돈만 있는 사채업자’로 그려지는 드라마가 처하게 될 사회적 파장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드라마 후반으로 가면서 나올 ‘진정한 돈을 아는 사채업자’의 이야기에서 “혹 사채업자를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에 직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다가는 드라마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는 이상한 오해에 휘말릴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쩐의 전쟁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풍자로 덧대진 악덕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와 그 부하들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거둬 가는 악독한 캐릭터들이지만, 우리가 이들에게 갖는 우선적인 이미지는 코믹함이다. 풍자라는 안전장치를 단 드라마는 더 신랄하게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죽었으니 시체를 가져 가겠다거나, 결혼식장에 들어온 축의금을 강탈해가며, ‘사람은 죽어도 빚은 남는다’는 식의 질깃질깃한 빚 독촉을 해대는 사채업자들의 모습이 풍자라는 옷을 입고 고스란히 그려진다.

우리는 그 속도감 있는 풍자의 틀 속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남는 짠한 느낌은 사실 그 풍자의 대상 속에 자신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돈, 아니 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살아가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웃음이다. 드라마 ‘쩐의 전쟁’은 저네들 사채업자들만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것 또한 자본주의라는 쩐의 세상을 비꼬는 풍자의 장치로 활용되고 있기에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남 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쩐의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내 남자의 여자’의 여자들

김수현의 여자들, 지수(배종옥)와 화영(김희애) 중 당신은 어느 편인가. 이것은 이 시대 남성들에게 그네들의 여성 취향을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지수와 화영 중 어느 쪽에 더 빠져드느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내 남자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또한 가정을 지키려는 지수라는 여성상과, 금기된 욕망의 질주를 하면서 가정을 깨려는 화영이란 여성상이 서로 부딪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질문이다.

아무리 얘기해도 불륜드라마라는 딱지를 떼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시청률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드라마의 속내를 한번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거기에는 그 드라마를 보는 대다수 현대 여성들의 욕망이 또한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수와 화영이란 여자들이 그려내는 이 시대 여성들의 환타지는 무엇일까.

지수, 착한 여자 콤플렉스
“내가 저를 위해 전부를 바쳤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준표(김상중)를 화영에게 보내고 남은 지수는 아버지(송재호) 앞에서 이렇게 오열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그러라고 했어? 네가 좋아하고서는 이제 생색내려고 하지마.”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은수(하유미)가 한 마디 한다. “그래도 지수가 지극 정성한 건 인정해줘야 되요.” 거기에 대해 아버지가 하는 말, “그게 바로 지수 너야.” 그 말에 지수는 멍해진다. 자신의 괴로움은 준표가 준 상처 때문 만이라 여겼는데, 거기에는 자기 스스로 자초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드라마 초반 내내 김수현 작가가 지수를 그려낸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 주변에서 모두 잘한다고 얘기 듣는 그런 여자를 꿈꾼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활에서 찾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데서 찾는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준표를 숨막히게 하는 거라는 걸 그녀는 알아채지 못한다. 착한 여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이상을 하려고 하는 데서 내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자기 삶이 없는 헌신은 때론 자신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는 강요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끝까지 가정을 지켜야 하나
상처 입은 착한 여자가 아픔을 토로하는 식의 드라마는 이제 식상해져버렸고, 김수현 작가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당사자가 갑자기 돌변해 악다구니하는 모습은 자칫 가정을 지키는 여자와 불륜녀가 같은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김수현 작가는 은수라는 지수의 대리인을 등장시킨다. 은수가 등장하자 눈물 흘리고 있을 가정 지키는 여자 편에 든든한 힘이 실린다. 욕망을 향해 뻔뻔하게 질주하는 화영 앞에 주먹을 날리고 업어치기를 하는 은수는, 어려워도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지수편에 선 시청자들의 분노를 대리충족 시켜준다.

많은 시청자들이 은수의 거침없는 말과 액션(?)에 “속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왜 끝까지 가정을 지켜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지수에 대한 감정이입이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학습된 결과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부모와 남편, 아이에게 헌신하는 삶을 가치로서 받아들여왔던 시청자들로서는 “왜 그래야 하는가”하는 질문보다는 “가정을 지키려는 건 당연한 것”이라는 이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대리인으로서 등장해 참으며 가정을 지키라는 은수와 달리 지수가 선택하는 것이 별거라는 것은 이 드라마가 섣부른 결론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드라마가 여타의 불륜드라마와 다른 점이다.

화영, 금기된 욕망의 화신
반면 화영은 윤리적 잣대로 보면 뻔뻔한 불륜녀지만, 또 한 편으로 보면 금기된 욕망에 솔직한 여자이기도 하다. 불륜 사실을 알고 지수가 “왜 그랬니? 넌 내 친구였잖아”하고 항변할 때 화영은 당돌할 정도로 솔직하게 말한다. “불가항력이었어. 죽어도 좋았어. 너 따윈 아무 상관없었어.” 그러자 발끈한 지수가 독설을 퍼붓는다. “너희 짐승이니?” 그러나 화영은 선선히 그 사실도 인정해버린다. “행복한 짐승.”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가는 화영이지만, 그녀의 금기된 욕망을 향한 무한질주는 이 시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억압받아왔던 여성들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구석이 있다. 특히 가정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왔던 중장년층의 주부라면, 가정보다는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지금의 세태 속에서 상대적인 박탈감 같은 것을 느꼈던 여성이라면, 그녀의 도발은 ‘비난하면서도, 속 시원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이것이 그녀를 (윤리적인 잣대에서) 욕하면서도, (금기된 욕망의 표출을 통해) 묘한 매력을 갖게 하는 요인이다.

친구의 가정을 깨고 얻은 것, 결국 가정?
하지만 그런 화영의 거침없는 욕망의 질주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늘 가족들의 생계를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야 했고, 남편조차 자살해버린 그녀에게 가정이 주는 의미는 억압과 고통 그 자체이다. 늘 단란해 보이는 지수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데는 바로 그 점도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지수를 찾아가 “셋이서 같이 살자”는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이것은 가부장제와 기존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한 것과 같다.

그런데 지수에게서 준표를 빼앗아와 자신의 집에 들이자 그것이 가정의 모습으로 돌변하는 묘한 상황이 발생한다. 살을 맞대고 살면서 사랑(이것은 화영의 표현이다)은 퇴색되고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그녀는 그토록 깨고 싶었던 (지수의) 가정을 깨고, 결국 스스로 가정을 만든 셈이다. 그런 그녀가 지수를 찾아가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부분이 이 드라마가 공감을 주는 대목이다. 화영은 악역이 아니고 가정이라는 억압을 주는 단단한 사회적 질서 속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점이다.

불륜드라마와 여성심리극의 갈림길
가정이란 틀을 두고 벌이는 지수와 화영의 대립구도는 이 드라마가 그저 자극적인 설정만을 추구하는 불륜드라마의 틀을 벗어나 금기된 욕망과 억압에 대한 여성심리극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김수현 작가는 지금껏 드라마 속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들이댄 혐의가 짙다. 가부장제의 문제를 꼬집고 비틀면서 한껏 시청자들의 금기된 욕망을 해소시키다가 결국에는 다시 가부장제로 돌아가는 결론으로 끝맺었던 것.

만일 김수현 작가가 여타의 드라마들을 통해 보였던 이중적인 잣대를 이 도발적인 문제제기의 끝에 꺼내든다면 그것은 이 드라마를 그저 자극적인 설정을 통해 시청률만을 노린 불륜드라마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의 틀을 깨는 도발적 제안으로 끝낸다는 것도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 이것이 지수와 화영이란 대타자들을 통해 가정이란 체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김수현 작가가 앞으로 고민해야될 문제다.

또한 이 드라마를 열성적으로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한번쯤 어떤 캐릭터가 자신을 그렇게 공감하게 하는가를 생각해보면서, 김수현 작가의 행보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 보는 재미도 더할 것이지만, 그것이 그럴 듯한 이야기로 포장된 불륜드라마에 기만당하지 않고, 질 높은 여성심리극을 불륜드라마로 싸잡아 비판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수와 화영, 당신은 어느 편인가.
/정덕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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