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서울역>, <부산행>보다 더 독하다

 

<부산행>에서 시작해 <터널>로 이어지고 <서울역>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만 같다. 올 여름 영화 시장을 뜨겁게 달군 키워드는 다름 아닌 재난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좀비 영화로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우리네 현실을 떠올려보면 왜 이런 신드롬이 일어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좀비만도 못한 우리네 현실에 대한 서민들의 공감이다.

 

사진출처:애니메이션<서울역>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서울역><부산행>의 프리퀄의 성격을 갖지만 훨씬 더 독한 현실 비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본래 연상호 감독 자신의 영역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실의 디스토피아를 가감 없이 그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연상호 감독은 이번 <서울역>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의 현실이 어떤 지옥을 만들고 있는가를 여실 없이 드러내주었다.

 

서울역의 한 켠을 채우고 있는 노숙자 중 한 사람이 좀비의 시작점이라는 건 이 애니메이션이 하려는 이야기를 압축한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부산행>은 막연하게나마 부산이라는 목적지가 제시되지만(물론 그게 해결점은 아니겠지만) <서울역>은 애초에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섬뜩하다. 그들은 좀비들이 출몰하는 서울역 주변을 도망 다니며 헤매다 좀비가 되거나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집 나온 소녀 혜선은 남자친구인 기웅과 동거하며 근근이 살아가기 위해 몸을 팔기도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인 주인공이다. 어느 날 기웅이 인터넷에 하룻밤 파트너를 찾는다며 혜선의 사진을 올리고 그걸 본 아빠 석규가 좀비들이 득시글대는 서울역 근처에서 그녀를 찾아다니는 게 이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보다 더 흥미로운 건 좀비들이 출몰하는 상황들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네 현실을 아프게도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좀비들에 쫓겨 서울역 근처를 탈출하려 하지만 이미 전경들에 의해 봉쇄되어 시위대 취급을 받게 된 생존자들 속에서 갑자기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한 사내가 나서는 장면이 그렇다. “난 나라를 위해 일한 애국자야. 아마도 빨갱이 놈들이 저지른 짓 같은데 난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과 같이 죽을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외치는 사내의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해 섬뜩하게 다가온다.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지하철 철로를 걸어가던 혜선이 같이 탈출한 노숙자에게 아빠가 절 찾고 있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울며 말하자 그 노숙자가 난 갈 집이 없어.”라고 울먹이는 장면이나, 마지막 시퀀스에 혜선이 종착점처럼 당도한 곳이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모델하우스라는 것도 연상호 감독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돌아갈 집이 없는 그들에게 모델하우스는 진짜 집이 아니지만 너무나 환상적인 공간처럼 다가온다. 물론 그곳은 결코 그들의 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결말이지만.

 

<서울역>은 그래서 비극적인 우리네 삶의 밑바닥을 그려내고 거기서 현실의 비정함을 끝까지 담아내는 결코 해피엔딩 따위를 기대하게 만들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구마만 만 개 먹는 것 같은 무거움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네 삶이 좀비만도 못하다는 걸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통쾌함을 주는 면이 있다. <부산행>보다 더 독하고 끔찍한 상황이 펼쳐지지만 우리네 답답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흥미로워질 수 있는 작품, 바로 <서울역>이다

만화와 영화의 공조, 새로운 콘텐츠 전략 자리잡나

 

영화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넘어선 가운데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서울역>이 이토록 관심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부산행>의 프리퀄 성격을 갖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갑작스레 부산행 KTX에 들어온 좀비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지만, <서울역>은 그 같은 사건 이전에 생겨났을 이야기를 서울역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사진출처:애니메이션<서울역>

<부산행>을 봤던 관객이라면 당연히 <서울역>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산행>의 이야기는 KTX라는 공간을 뚝 잘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서울역>은 서울이라는 좀 더 폭넓은 함의를 가져올 수 있는 공간이 직접적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좀 더 심층적인 이야기가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도 <부산행>이 영화적 재미에 더 많이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반면, <서울역>은 더 사회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흥미롭게 보이는 건 <부산행><서울역>의 순차적 상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다. 이것은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콜라보라는 점에서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사실 국내에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반응은 뜨겁지만 흥행은 그리 크게 되지 않았다. <돼지의 왕>19천여 명, <사이비>22천여 명 들었을 뿐이다. 물론 상영관이 그리 많지 않았던 두 애니메이션에서 이 정도 관객도 적은 건 아니다. 하지만 해외 애니메이션이 거둬가는 흥행성적을 보면 턱없이 적은 수치다.

 

여기에는 일련의 연상호 감독 애니메이션이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야 돈이 된다는 국내 시장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역>은 어떨까. 일단 등급이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점에서 다른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보다는 확실히 유리하다. 게다가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사실은 <서울역> 또한 기본 이상의 흥행을 담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일단 <서울역>은 개봉관이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먼저 만들었던 <서울역><부산행> 이후에 개봉한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신의 한수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성공이 애니메이션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애니메이션도 대중의 관심이 적어 개봉관이 적게 잡히게 되면 그만한 흥행을 거둘 수 없는 게 우리네 극장가의 시스템이다.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웹툰이 영화와 공조해 이런 성과를 낸 사례는 이미 영화 <내부자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은 영화로 만들어져 그 결말을 영화를 통해 공개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내부자들>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에도 불구하고 감독판을 합쳐 9백만 관객을 동원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내부자들>이 웹툰과 영화의 새로운 공조를 통해 시너지를 만들어냈고, 만일 이번 <서울역><부산행>과의 순차적 상영을 통해 그만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면 이건 영화와 만화업계의 새로운 제작 방식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웹툰이나 만화를 영화화하는 건 익숙한 제작관행이지만 웹툰으로 시작해 영화로 끝내거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연작으로 내놓는 방식은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웹툰, 만화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건 지금 현재 극장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내부자들>에 이어 <서울역>이 어떤 성과를 낼지 관객들은 물론이고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그래서다

<터널>, 재난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건

 

<터널>이라는 영화의 예고를 잠깐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질 지도 모른다. 무너진 터널에 갇힌 사람의 처절한 사투를 담은 영화라니! 그잖아도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에 이런 선입견은 영화 <터널>에는 하나의 커다란 진입장벽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단언컨대 <터널>은 그런 퍽퍽한 고구마 같은 영화가 아니다.

 

사진출처:영화<터널>

물론 <괴물>에서부터 현재의 <부산행>까지 관통하는 우리네 재난 영화의 공식과 메시지가 <터널>에도 여전히 깔려 있다. 재난 상황보다 우리를 더 절망적으로 만들어내는 콘트롤 타워의 부재와 선정적인 언론,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를 저버리는 공직자들, 생존자의 구출보다는 자신이 언론에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만을 생각하는 정치인들 등등.

 

하지만 <터널>은 흥미롭게도 이러한 재난 영화의 공식처럼 등장하는 절망적 현실의 이야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재난 영화에서 터널에 갇힌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또한 그렇게 갇힌 생존자를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119 대원들의 이야기도 그 절실함과 간절함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 곳에서도 역시 훈훈한 웃음이 피어나고 유머 역시 멈추지 않는다. <터널>에 갇힌 답답한 이야기? 오히려 <터널>은 그런 폐쇄적인 공간에 갇힌 이를 구해내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감동적이고 희망적인 웃음을 멈추지 않는 영화다.

 

이것이 가능해진 건 매몰된 터널에 갇힌 주인공 정수(하정우)와 그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소방대원 대경(오달수)의 독특한 캐릭터 덕분이다. 정수는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이다. 처음 터널이 무너져 내리고 간신히 살아남아 스마트폰으로 119와 연결됐을 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언제 자신을 구하러 올 거냐는 낙관적인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 구조작업은 의외로 지난한 사투로 돌변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절망하기보다는 그래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것은 대경도 마찬가지다. 그는 구조작업에서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며 반드시 정수를 구하겠다고 단언한다. 기자들이 취재를 명목으로 특종만을 노릴 때, 정치인들이 도룡뇽 하나 때문에 건설이 멈춰져 입은 경제적 손실 이야기를 하고 터널 붕괴로 멈춰버린 제2 터널 공사 재개를 얘기할 때, 대경만은 거기 묻혀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이처럼 답답한 터널 속에서도 훈훈한 웃음이 피어나올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은 하정우와 오달수라는 배우들의 저력이 한 몫을 차지한다. 이미 <테러 라이브>에서 두 시간 가까이 그 얼굴만 쳐다봐도 쫄깃한 긴장감과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던 하정우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물론 신스틸러의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국민배우가 되어가는 오달수의 웃음과 감동을 넘나드는 천연덕스런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결코 시원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무더위처럼 실로 <터널> 같은 현실이다. 하지만 영화 <터널>은 그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터널을 빠져나오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무더위에 답답할 것 같다는 건 선입견이다. 오히려 무더위 때문에라도 그 답답함을 어떻게 이겨내는가를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영화다

마동석, 라미란과 함께라면 좀비도 일제도 안 무섭네

 

마동석, 라미란 보러 영화관 간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만한 상황이다. 올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가장 먼저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부산행>의 마동석이 그렇고, 입소문을 타고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2백만 관객을 돌파한 <덕혜옹주>의 라미란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이 두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신스틸러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이 사실상 흥행 보증수표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을 이들에게 부여한 걸까.

 

사진출처:영화<덕혜옹주>,<부산행>

<부산행>에서 마동석이 연기하는 상화는 아내와 함께 부산행 KTX를 탔다가 좀비들과의 일전을 벌이게 되는 평범한 인물이다. 조금 껄렁껄렁한 건달 같은 느낌을 보이지만, 아내인 성경(정유미)이 하는 말 한 마디면 무조건 복종하고 또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같은 걸 지키는 그런 사내. 어찌 보면 대단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이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그의 우직한 상식은 하나의 판타지로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 상화라는 인물이 가진 매력은 마동석이라는 배우로부터 나온다. 잘 단련된 몸으로 터질 듯한 근육을 드러내며 좀비가 아니라 괴물이 등장해도 맨 주먹으로 때려눕힐 것 같은 그 이미지는 그 두렵고 황당한 상황 속에서 관객들이 그에게 의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는 머리 쓰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내며, “욕 먹더라도 자신을 희생하는 게 아빠들이라는 서민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가 <부산행>에서 주인공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는 이유다.

 

<부산행>에 마동석이 있다면 <덕혜옹주>에는 라미란이 있다. 물론 영화적 장르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며 사건도 전혀 다르지만, 두 영화 속에서 마동석과 라미란은 닮은 구석이 많다. <부산행>의 상화가 KTX의 생존자들을 지켜내는 인물이라면, <덕혜옹주>에서 라미란이 연기한 복순이란 인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덕혜옹주(손예진)를 옆에서 때론 엄마처럼 때론 언니처럼 든든히 지켜주는 인물이다.

 

친일파 앞잡이인 한택수(윤제문)의 행태 앞에서 꼿꼿이 맞서며 때론 주먹까지 날리는 복순이의 행동은 <덕혜옹주>라는 비장하고 슬플 수밖에 없는 영화 속에서 시원한 사이다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온 몸을 던져 덕혜옹주를 지키려는 그 마음은 고스란히 관객들의 마음으로 공유되기도 한다. 물론 덕혜옹주의 그 비극적인 이야기가 가진 무게감이 이 영화의 중요한 매력이긴 하지만, 그 안에 숨통을 트게 해주는 라미란의 역할은 그 어떤 것보다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산행>의 마동석이 그렇하듯이, <덕혜옹주>의 라미란 역시 복순이라는 캐릭터에 더해 배우로서 그녀가 갖고 있던 이미지가 일조한 면이 있다는 점이다. <응답하라1988>에서부터 영화 <히말라야>까지 라미란이 주는 든든한 면모는 <덕혜옹주>의 복순이라는 캐릭터가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마동석과 라미란이 이처럼 관객들에게 박수 받는 존재가 된 건 이들이 독특한 서민 영웅의 판타지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났고 신분이 다르고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조금 못났고 신분도 비천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서민이지만 그래도 상식이 살아있고 든든히 기댈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그런 존재들. 지금의 대중들이 희구하는 영웅이란 이런 인물이 아닐까.

 

마동석과 라미란. 물론 <부산행><덕혜옹주>라는 좋은 작품이 있고 또 그걸 전면에서 끌어주는 공유나 손예진 같은 배우들의 저력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지만, 마동석과 라미란은 이 두 영화를 보는 이유가 될 정도로 잘 어우러진 면이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신스틸러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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