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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정덕현
꿈 하나로 충분한 그들, 영화인들에게 박수를 꿈이란 단어 하나면 충분했다. 그 단어 하나로 청룡영화제에 모인 영화인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개그콘서트’ 뮤지컬 팀이 청룡영화제 2부의 시작과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저 축하무대 정도로만 생각됐다. 하지만 힘겨운 영화인들의 일상이 겹쳐지면서 인순이의 ‘거위의 꿈’이 뮤지컬 팀에 의해 번갈아 노래되고 안성기가 올 한해 어려웠던 우리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영화인들의 가슴은 뭉클해졌다. 인순이가 피날레를 장식하고 영화인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칠 때 카메라에 잡힌 영화인들의 얼굴은 모두 숙연해졌다.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에서도 ‘어려운 한 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아한 세계’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송강호는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하는 건 아..
모성과 스릴러를 결합시킨 ‘세븐데이즈’ 지연(김윤진)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린다. 승률 99%의 잘 나가는 변호사, 하지만 딸에게는 빵점 짜리 엄마인 그녀는 딸에게 1등을 선사하기 위해 운동회 달리기에서 전력질주를 한다. 그리고 1등으로 골인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갑작스레 유괴된 딸을 찾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지연을 따라서 달리는 카메라도 숨가쁘다. 인물 동선의 중간이 생략된 채 계속해서 점프하는 컷들과 멀리서 엿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망원렌즈로 당겨진 컷들의 연속은 관객들의 숨까지 턱에 차게 만든다. 지연이 변호사이며 유괴범의 목적이 희대의 강간살인범의 무죄방면이란 점에서 영화는 법정 안에 인물들을 가둬놓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공판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연은 스스..
‘색, 계’, 관념의 속살을 뱀처럼 파고드는 영화 “그는 나를 뱀처럼 파고들었어.” 왕치아즈(탕웨이)의 묘사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살들이 마치 서로의 몸 속으로 파고들겠다는 듯이 꿈틀거린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걷어내고 하나가 되기 위한 몸부림은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것은 적나라한 살점과 몸의 촉점(觸點)들이 서로의 빈틈을 파고드는 두말 할 것 없는 정사장면이지만, 또한 하나가 되기 위한 욕망 속에 안간힘을 쓰면서도 결국에는 경계지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암살하기 위해 막부인으로 위장하여 접근한 왕치아즈. 점차 서로에게 끌리게 되면서 파국으로 가게 된다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어찌 보면 단순..
소시민들의 영웅 환타지, ‘히어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히어로’의 영화판은 드라마의 재연에 가깝다. 특별히 영화로 소재를 가져오면서 과장의 흔적도 없고, 스케일이 커진 것도 그다지 없다. 드라마에서 카메라가 사건 현장과 법정, 도쿄 검찰청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영화도 줄곧 포커스를 그 곳에 맞춘다. 조금 다른 것은 우리나라의 관객들을 의식해 부산이 잠깐 등장하고 이병헌이 카메오로 출연한다는 정도랄까. 이것은 ‘히어로’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자극하는 거창한(?) 제목의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 그대로다. 도대체 히어로(영웅)는 어디에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그래도 영화인데 좀 거창한 스케일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똑같은 의아함에 사로잡힐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점이..
요리영화의 새장 연 ‘식객’, 그 아쉬움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란 원작만화는 일본의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을 보며 입맛을 다셨을 독자들에게 우리네 입맛을 되돌려준 고마운 작품이다. ‘우리 음식의 재발견’이라 할 정도로 만화는 철저한 사전 취재와 실제사례들을 통해 생생한 우리네 맛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것을 영화화한 ‘식객’은 기본적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들어가는 이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식객’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요리영화라는 점에서 먹고 들어가는 영화다.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담뽀뽀(1986)’가 있다면 중국에는 ‘금옥만당(1995)’, ‘식신(1996)’이 있고 우리에게는 ‘식객’이 있다고. 그걸 보여주기라도..
‘M’의 작품성과 상품성 이명세 감독의 ‘M’에 대한 반응이 양극단으로 엇갈리고 있다. 한편은 이 기존 내러티브 형식을 파괴한 영화의 시도를 참신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다른 한편은 관객을 지독한 혼란 속에 빠뜨리는 이 영화를 감독 자신의 과잉된 자의식의 산물로 보는 쪽이다. 무엇이 이렇게 엇갈린 반응을 만들었을까. 내러티브 vs 비내러티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내러티브의 세계다. 내러티브는 일정한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로 엮어진 실제 혹은 허구적인 사건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즉 현실에 있을 법한 그럴듯한 세계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이며, 보기를 기대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M’이 그리는 세계는 내러티브의 세계만이 아니다. ‘M’은 꿈이라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그려내..
대중문화 시대, 낯선 작품의 가치 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M’이 떠올리게 하는 두 인물이 있다. 그것은 난해한 시와 소설로 당대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던 천재적인 시인 이상과, 불우한 삶을 거름 삼아 전복적인 소설을 써냈던 카프카가 그들이다. 스토리로 보자면 결혼을 앞둔 민우(강동원)가 첫사랑이었지만 잊고있었던 무의식 속의 미미(이연희)를 떠올린다는 것이 전부. 하지만 이 단순한 스토리는 이명세라는 독특한 자의식을 만나 기묘하고 낯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상, 질주하는 그들과 거울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오감도의 첫 소절처럼 영화 ‘M’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쫓고 쫓기는 긴박한 꿈에서 시작된다. 민우(강동원)는 먼저 도심의 거리에서 자신을 쫓는 알 수 없는 시선에 두려움을..
여성적 시각 돋보인 ‘궁녀’의 아쉬움 최근 개봉한 ‘궁녀’와 움베르토 에코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은 여러 모로 닮았다. ‘장미의 이름’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면, ‘궁녀’는 궁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다. ‘장미의 이름’에서 사건을 다루는 윌리엄 신부(숀 코넬리)가 있다면 ‘궁녀’에는 내의녀인 천령(박진희)이 미궁의 사건을 조사한다. 윌리엄 신부에게 수련제자 아조(크리스찬 슬레이더)가 있었다면 천령에게는 숙영(한예린)이 있다. 무엇보다 유사한 점은 수도원과 궁이라는 이 두 공간이 주는 느낌이다. 먼 거리에서 봤을 때 신성한 장소로 생각되어온 이 공간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 곳은 기괴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야만의 공간이 된다. 주로 어둠 속에서 등에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