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과학에 헌사한 우주판 로빈슨 크루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야심작, <마션>은 여러 모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 코미디 영화로 재해석한 톰 행크스의 <캐스트 어웨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홀로 고립무원의 오지에 떨어지고 그 곳에서 절망하지만 다시 일어나 하루하루를 생존해나간다.

 


사진출처 : 영화 <마션>

하지만 <마션>이 이들 로빈슨 크루소류의 작품들과 다른 건 그 배경이 화성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여러 모로 과거 항해의 시대에 무인도가 생존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개척해야할 공간으로 그려졌던 것에서 이제는 우주의 시대를 맞아 우주의 행성들이 이제 새로운 생존과 개척의 공간이 되고 있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륙과 무인도는 단지 떨어져 있는 공간일 뿐 자연적 조건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지만 화성과 지구는 그 자연적 조건 자체가 다르다. 외부에 나가려면 반드시 우주복을 챙겨 입어야 하고 몸을 움직이고 이동하는 것도 지구와는 완전히 다르다. 물론 식량과 물이 자연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 곳에 혼자 떨어진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너(맷 데이먼)의 상황이 저 무인도에 떨어졌던 로빈슨 크루소와 같을 수는 없다.

 

그는 화성에 혼자 떨어진 직후 이런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화성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헤르메스(우주선)나 지구와 교신할 방법도 없다. 모두들 내가 죽은 줄 알고 있다. 내가 있는 이 거주용 막사는 31일 간의 탐사 활동을 위해 설계된 것이다. 산소발생기가 고장나면 질식사할 것이다. 물 환원기가 고장 나면 갈증으로 죽을 것이다. 이 막사가 파열되면 그냥 터져버릴 것이다. 아니더라도 결국 식량이 떨어져 굶어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다. 나는 망했다.’

 

이건 일종의 미션 상황이다. 마치 과학 실험의 난제들을 제시한 후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 이것이 <마션>이라는 영화가 가진 의외로 쏠쏠한 재미다. 통신이 끊기고 산소와 물, 식량이 위협받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마크 와트너는 생존해나갈까.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그를 구원하는 건 과학이다. 그나마 축적되어 있는 과학적 지식들은 마크 와트너를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씩 구원해낸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이 그를 그저 죽지 않고 버티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그를 위협하는 건 혼자 남게 된 상황이 주는 그 우울감과 모든 걸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절망적인 마음이다. <마션>은 그래서 지구라면 이제 일상이 되어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만들기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듣던 노래 한 자락과 친구와 생각없이 떠들었던 수다와 농담 같은 것들은 이런 극한 상황이 오면 심지어 구원처럼 다가오는 어떤 것이 된다.

 

영화는 애초에 마크 와트너에게 던져진 질문이 과학적 미션이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네 과학적 지식들을 활용한 문제적 상황의 해결에 맞춰져 있다. 그 하나하나는 나사가 수긍했을 만큼의 꽤 그럴 듯한 과학적 근거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마션>은 그 과학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이나 우주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마션>을 인간의 조건을 들여다보는 관점으로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점은 화성에 혼자 남겨진 한 사내의 분투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다.

 

훙미로운 건 이 결코 짧지 않은 영화를 빠져서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 순간 화성이라는 공간이 꽤 친숙하게 다가오면서 심지어 그 곳 역시 조건만 충족된다면 꽤 살만한 곳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은 채 그저 화성이라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마크 와트너의 과학적 도전들이 만들어내는 친숙함. 결국 삶이라는 건 조건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 조건에 적응해가는 과정들이 만들어낸다는 것. 화성조차 살만한 곳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과학과 인간의 도전정신이 갖는 힘. 아마도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 영화를 과학에 헌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영화 <인턴>이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방식

 

영화 <인턴>은 생각 외의 흥행을 거뒀다. 지난 7일 현재 <인턴>의 관객 수는 170만 명에 육박했다. 소소한 휴먼드라마, 게다가 우리네 정서도 아닌 미국식 정서가 담겨진 영화에 이처럼 우리네 관객들이 많이 찾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사진출처: 영화 <인턴>

물론 로버트 드니로에 앤 헤서웨이의 조합이 주는 기대감은 분명히 있다. <인턴>의 홍보 포인트가 꽃할배 로버트 드니로를 인턴으로 둔 젊은 여사장 앤 헤서웨이라는 건 확실히 그림이 된다. 무수한 작품에서 놀라운 연기력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드러냈던 로버트 드니로. 게다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그 신입이었던 앤 헤서웨이가 이제 젊은 CEO로 나온다니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17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 동원을 한 <인턴>의 의문은 좀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가진 낸시 마이어스 특유의 따뜻한 휴먼드라마의 힘일까. 그런 점이 없지는 않다. 이 영화는 인턴으로 들어온 70세 벤(로버트 드니로)이 인터넷 쇼핑몰로 단 몇 년만에 큰 성공을 거둔 줄스(앤 헤서웨이)에게 일종의 인생 상담을 해주는 영화다. 즉 회사에서는 벤이 줄스의 인턴이지만, 인생에서는 줄스가 벤의 인턴이라고 말해주는 영화.

 

그 안에는 우리에게도 잘 통하는 아날로그 정서가 깔려 있다. 즉 줄스가 운영하는 회사의 대부분은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굴러간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하는 지시도 이메일로 전달되고 고객들도 직접 대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불만사항도 인터넷으로 통해 전해지고 수정된다. 이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온 벤은 다른 인턴이 컴퓨터 주변기기와 스마트폰을 꺼내놓는 장면에, 오래된 가방에서 노트와 펜, 계산기를 꺼내놓는다. 디지털로 어딘지 쿨해 보이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회사에 벤은 따뜻한 아날로그적 인간관계를 풀어놓는다.

 

이러한 아날로그 정서를 바탕으로 사장을 보필하는 충직하고 경험 많은 벤 같은 비서(혹은 친구나 동료)에 대한 판타지도 있다. 워킹맘의 입장인 줄스는 그래서 일과 가정생활 모두를 잘 해내고 싶은 직장여성들과 공감하는 면이 있다. 벤은 정서는 아날로그지만 마인드는 혁신적인 사람이다. 능력 있는 여성이 가정사 때문에 집안에 주저앉는 것을 그는 안타깝게 바라본다.

 

<인턴>의 성공에는 연기자들에 대한 믿음과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아날로그적인 정서의 훈훈함이 분명 깔려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만한 성공의 이유를 모두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의 빈 구석을 채워주는 건 <인턴>이라는 제목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이 영화는 미국의 기업들이 일종의 사회 기여 차원에서 하는 시니어 인턴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즉 은퇴한 시니어들을 기업이 인턴으로 채용하는 일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젊은 인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 속에서의 인턴이 우리나라에서의 인턴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인턴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저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같은 인물이거나 현재 방영중인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황정음)일 것이다. 정규 채용이 되기 위해 시키는 일이면 뭐든 하는 존재. 그렇게 죽어라 일해도 정규채용은커녕 쫓겨나기 일쑤인 그런 존재.

 

즉 이 영화의 인턴이라는 제목은 기묘하게도 일종의 착시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인턴으로 들어갔지만 CEO와 거의 대등한 위상을 보여주고 심지어 그녀의 일은 물론이고 삶까지 인생 상담을 해주는 인턴. 우리네 인턴과는 너무나 달라서 하나의 판타지가 되는 그런 인턴이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인턴이라는 착시효과의 판타지를 보게 된다면, 중년 이상의 관객들은 영화가 말해주는 아날로그 정서와 은퇴해도 여전히 강력한 능력으로 남아있는 경륜이 효용가치가 있다는 판타지를 보게 된다. 물론 워킹맘들은 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일과 가족을 모두 지켜내는 판타지를 들여다볼 것이다.

 

이러니 기묘하게도 <인턴>이라는 영화는 우리네 인턴제와는 너무나 다른 미국식 인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우리 정서와 판타지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인턴판타지와 실버 세대의 인정 욕구 그리고 워킹맘들의 판타지가 그것이다.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네 관객은 이 영화를 우리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탐정>, 권상우 성동일 콤비를 보며 부부를 떠올렸다면

 

미드 <셜록>에서 셜록은 마치 편집증 환자 같은 탐정의 독특한 매력에 전 세계 시청자들을 푹 빠뜨린 바 있다. <셜록>으로 인해 국내에서도 탐정물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셜록 같은 캐릭터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 우리네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상황과 정서에는 거기에 맞는 그만한 캐릭터가 필요할 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탐정 : 더 비기닝(이하 탐정)>은 이러한 질문에 마치 정답지를 내미는 듯한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탐정 더 비기닝>

별 기대 없이 <탐정>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그 소소하고 일상적이며 나아가 비루하기까지 한 시작에 혹시나가 역시나가 아닐까 후회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탐정>은 초반의 이 소소함이 향후의 긴박감 넘치는 추리와 액션으로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해준다.

 

미제사건카페를 운영하는 파워블로거로 탐정을 꿈꾸는 만화방 주인 강대만(권상우)과 레전드 형사였지만 지금은 후배에게 밀려날 처지에 놓여있는 노태수(성동일). 읽고 본 건 많아 촉이 살아있는 강대만과 몸으로 부딪치며 갖게된 감이 살아있는 노태수. 버디 무비의 전형적인 틀을 갖고 있지만 어딘지 덜컥거릴 수밖에 없는 너무 다른 두 사람은 하지만 바로 그 다르다는 점 때문에 살인사건을 수사하는데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환상의 콤비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 다른 성격과 삶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것은 살벌한 살인 현장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뛰고 또 뛰는 이 인물들이 마누라의 한 마디에 !”하고 뭐든 할 것 같은 공처가들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은 깨알 같은 웃음으로 관객들을 빠뜨린다. 이 정도면 코미디로서 괜찮은 조합과 선택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코미디 영화를 만들면서 굳이 더 비기닝이라는 의욕을 내비쳤을까. ‘더 비기닝이라면 이번 영화로 만들어진 설정과 캐릭터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계속 <탐정> 시리즈를 이어가겠다는 포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여겨지는 건, 아내에게 꼭 잡혀 살면서 눈치 보며 그래도 제 하고 싶은 일을 기웃거리는 강대만이나, 살벌한 비주얼과 느낌이지만 역시 빨간 고무장갑이 손에 맞지 않아 설거지가 어렵다는 노태수가 너무나 우리네 정서에 딱 맞으면서도 우리식의 추리와 형사물에 잘 어울리는 조합이기 때문이다.

 

추리물이 갖는 의외의 반전들이 주는 재미와 함께 이들의 일상에 대한 공감이 각자 다른 이야기처럼 움직이다가 후반부에 하나의 메시지로 묶여지는 것도 흥미롭다. 이런 점은 이 영화가 단순한 추리물이나 형사물이 아니라 그 장르를 통해 일상의 메시지까지를 던지는 깊이를 숨기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이 터지고, 그러면서도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렇게 공처가로 내몰린 두 남자가 마치 남편과 아내 같은 케미로 엮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태수가 힘과 경험만을 내세우는 남편이라면 강대만은 꼼꼼하게 생각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아내 같은 느낌. 그래서 마치 남편과 아내가 공조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듯한 이 영화의 느낌은 공처가인 두 남자의 판타지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분위기가 싸해져도 또 뭐가 잘 맞지 않아 툭탁거려도 결국은 문제를 잘 해결해나가는 그런 관계에 대한 판타지. 그 관계가 부부건 아니면 버디무비의 형제 같은 느낌이건.



<사도>, 왜 하필 지금 사도세자의 이야기일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은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으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사도세자를 소재로 한 사극들은 너무나 많다. MBC <조선왕조 오백년>은 물론이고 <이산>, 최근에는 <비밀의 문>에서도 사도세자가 다뤄졌다. 그러니 역사책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사도>는 이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일까.

 


사진출처:영화<사도>

물론 이 <사도>라는 영화를 읽는 독법은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 거의 광인으로 기록해놓은 사도세자에 대해 이토록 온정적인 시선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영화로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나, 제 아무리 왕이라도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그 비정함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영조의 비애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이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에 어떤 상징적인 울림을 주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영화가 사도세자(유아인) 스스로 짠 관 속에서 그가 나와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향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접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궁궐에 무덤을 세우고 그 안에 관을 짜고 누웠다는 것이 역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사도세자는 그것이 산송장 취급당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말해줄 뿐 역모의 뜻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 하지만 그 때마다 영조와 노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미 영조가 보위에 오를 때부터 연결되어 있던 노론 세력을 떨쳐내지 못하고 어떤 합의를 해나가며 오히려 사도세자를 압박하는 영조 앞에서 그는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는 자주 떳떳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앞에서 과녁이 아닌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는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고 말한다. 정해진 과녁에 화살을 던지는 일에서 무슨 자유와 자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뭐든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일을 처결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거침없이 펼쳐내는 정사와 삶을.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미 구축된 영조의 시스템 속에서는 노론 세력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다. 영조 또한 이런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세자를 강건하면서도 노련하게 세우고 싶었을 것이지만 그는 노련함이 결국은 타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부러지기보다는 부러지는 쪽을 선택한다.

 

<사도>에서 이 떳떳함과 관의 이미지는 상당히 대립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져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그의 궁에서의 삶을 보여주는데 그 삶이 뒤주 속의 삶과 다르지 않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왕재가 궁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구속만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스스로 산송장이라 표현했듯 자신이 원하는 뜻을 떳떳하게 펼쳐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있다.

 

거의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영화의 공간은 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궁 안에서 사도세자는 끊임없이 관에 들어가거나 뒤주에 들어가 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영조의 어명이지만 사실은 왕과 신하 사이에 만들어진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다. 영조는 스스로도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왕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고 말한다. 그 역시 자기만의 관과 뒤주에 갇혀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지금 현재 특히 큰 울림을 만드는 건 그 모습이 현재 우리네 청춘들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떳떳하고싶을 청춘들이지만 아버지들의 원죄가 구축해놓은 부조리한 시스템은 그들의 아들들을 저 마다의 뒤주에 가둬놓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저 허공으로 떳떳하게 날아간 화살이 되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 속에 관 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관을 뛰쳐나와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저 사도세자가 처한 상황 그대로가 아닌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사도>라는 영화를 통해 보다가 문득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거기서 우리네 청춘들의 좌절을 읽어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또한 그런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물 또한 들어있다. ‘떳떳한삶을 산다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비틀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관계를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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