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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정덕현
‘다이하드 4.0’에서 아버지가 떠오른 이유 ‘다이하드’시리즈가 여타의 액션영화와 다른 점은 형사라는 노동의 피곤함을 액션에 녹여낸다는 점이다. 일상의 피곤함에 절어있는 귀차니스트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에게 가족과 얽힌(남 일이었다면 이렇게 죽어라 뛰어다녔을까) 테러사건이 벌어진다. 그러자 이 나른해만 보이던 남자는 가부장으로서의 놀라울 정도의 끈질긴 근성을 발휘해 테러를 진압하고 가족을 구해낸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이 설정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액션에 스며들어 있는 아이디어와 유머이다. ‘다이하드’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액션을 선보인다. 1편이 빌딩이고 2편이 공항이며 3편은 뉴욕시가 됐다. 제한된 공간이라는 점은 그 공간이 가진 특성을 활용하는 액션이 가능하다는 역설적 기능을 한다. 빌딩..
군용헬기의 프로펠러가 팽팽 돌아가고, 군인들의 군화발이 절도 있게 움직인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폭약이 터지고 이건 마치 전쟁영화의 도입부분 같다. 그런데 이건 전쟁영화가 아니다. ‘그 평범한 날’ 벌어진 납득되지 않는 일일뿐이다. 택시를 몰며 사는 강민우(김상경)가 그가 사랑하는 박신애(이요원)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코미디 영화를 본다. 그 장면은 마치 멜로 영화의 시작 같다. 그런데 이건 멜로 영화가 아니다. 잠시 후 그들의 몸은 피로 적셔진다. 등장인물들은 마치 전원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정겹기 그지없다. 그건 마치 휴먼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에는 총이 매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든 총알이 날아와 그들의 머리에 꽂힐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화려한 휴가’는 이 모든 일상의..
‘검은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공간에 대한 공포영화다. 그 공간은 전준오(황정민)가 다니는 회사의 칸막이로 둘러쳐진 자신만의 책상이기도 하고, 애인 장미나(김서형)와 함께 편안한 저녁을 보내는 집이기도 하며, 건널목이 고장난 철길이기도 하고, 목욕탕을 개조해 살아가는 박충배(강신일)와 신이화(유선)의 검은집이기도 하다.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그 프레임 안에 유령보다 더 무서운 칼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어 있을 때 더 공포를 느끼게 한다. 반면 무차별적인 살인마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 긴장감과 공포감은 줄어들고 대신 그 감정은 긴박감으로 전이된다. 어둠으로 가려진 빈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공간에 남겨진 누군가(그것이 사람이든 유령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찰나의 소중함을 묻다 청춘시절의 한 때를 생각해보면 꽤 강렬했을 감정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장면들은 단순하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이라든지, 그 하늘을 유유히 움직이던 구름이라든지, 방과후 텅 빈 운동장에서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받던 그 단순한 시간들 같은 그림들이 갈무리된 감정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그 시절에는 너무 강렬했거나, 따분했거나, 때론 급박하게 움직여 볼 수 없었던 시간의 풍경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과 시간들, 그리고 그것들 위로 등장해 우정의 이름으로 스치듯 지나가 버린 사랑의 감정 따위는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라는 능력을 갖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사랑스런 애니메이션은 순..
그녀가 절을 한다. 방귀 깨나 뀐다는 부잣집 양반님네들 앞에서도,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가진 사또 앞에서도, 글 깨나 읽었다며 위선 떠는 선비 앞에서도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녀가 절을 한다. 그녀가 절을 하는 곳은 하녀들이 매일 닦아 반짝반짝 빛나는 마룻바닥이 아니다. 신음과 고열에 젖은 피비린내와 땀 냄새 심지어는 똥 냄새, 오줌 냄새 그것이 뭉뚱그려진 죽음의 냄새가 배어나는 옥사의 맨바닥이다. 그녀가 절을 하는 대상은 가장 천하디 천한 ‘놈이(유지태)’란 남정네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놈이는 저잣거리 왈자패, 색주가의 기둥서방, 그리고 화적 두목으로 살아가는 그 시대, 이 놈도 되고 저 놈도 되는 대부분의 천민들이 그러했던 양반네 눈에는 그저 잡놈인 비천한 사내다. 하..
디지털 극장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운 이유 영화티켓 하나 꼭 쥐고 냄새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그저 스크린만 쳐다봐도 좋던 시절은 가버렸나. 영화가 너무 좋아서 연거푸 몇 번씩 보고 또 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멀티플렉스로 거대해진 극장은 체인화되고 시스템화된 지 오래며 이젠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점점 고급화되어가는 추세다. 이제 레스토랑처럼 보이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최고급 요리를 즐기는 시대다. 250평 규모의 공간에, 일반 스크린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의 고급 스크린이 설치되고, 바닥 스피커까지 갖춘 완벽한 음향시설까지 갖춘 극장은 영화 한 편에 10만 원이라는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연..
어린 시절, 누군가 던진 돌팔매질에 상처 난 이마는 누가 고쳐주었나. 정성스레 솜에 과산화수소를 발라 상처를 소독한 후, 빨간 약을 발라주신 어머님인가. 아니면 과산화수소와 빨간 약인가. 이창동 감독이 들고 온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 ‘재수 없음’으로 치부되는 운명의 돌팔매질에 입은 상처가 과연 인간의 힘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화는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을 아들 준과 함께 찾아가는 신애(전도연)의 자동차에서부터 시작된다. 햇살이 저 멀리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그것은 차창에 가려져 굴절된다. 신애가 밀양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하늘의 태양이 그저 거기 떠 있는 존재로만 알았다. 그러나 밀양에서 겪게되는 참기 힘든 시련(아들이 유괴되고 살해되는) 속에서 하늘을 쳐..
가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는 ‘아들’ 지금 영화 속에서 아버지들은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그리고 ‘우아한 세계’에서는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진창에서 뒹굴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가치관의 퇴조, 여성성이 중요해진 사회, 경제적으로 더 힘겨운 상황에 몰린 남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된 이 시대의 아버지. 최근 들어 이른바 ‘아버지 영화’라고 불릴만한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