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타자에 대한 폭력은 어떻게 일어날까

 

<손님>은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영화다. 유명한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갖고 있지만 1950년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겹쳐지면서 무국적성의 이야기는 특수한 우리네 상황의 이야기로 전화된다. 공포를 다루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판타지가 있고 그 안에는 사회 비판적인 요소들이 은유적으로 담겨져 있다. 중요한 건 공포가 갖고 있는 장르적 속성 따위가 아니다. 대신 그 공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진출처:영화 <손님>

이 공포의 연원은 제목에 이미 들어가 있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다. 주인이 제 집처럼 생각하라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다. 그런데 만일 주인들이 손님을 철저히 타자로 바라보고 낯선 이방인으로 경계를 그어버린다면 어떨까. <손님>의 피리 부는 사나이 우룡(유승룡)이 아들 영남(구승현)과 들어가게 된 마을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마을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그 마을사람들이 외부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우룡은 아들 영남의 이름을 설명하며 호남에서 태어났지만 이름은 영남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호남과 영남으로 대변되는 오랜 세월동안 반복된 지역갈등과 경계, 타자화를 적어도 우룡과 그 아들은 뛰어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자신들을 타자로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건 그래서 오로지 이 우룡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우룡이 가까워지는 걸 탐탁찮게 바라보는 이도 있다. 그것은 이 배타적이고 고립된 마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촌장(이성민)이다.

 

마을 사람들이 촌장과 공동운명체가 된 이유로 원죄가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네 불행한 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짓밟은 땅 위에 세워진 공동운명체는 그래서 공포를 기반으로 유지된다. 쿠데타의 이미지와 그로 인해 권력을 쥐게 된 권력자의 이미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전쟁의 이미지 그리고 고양이를 잡아먹는 쥐의 공포는 두렵지만 이 마을이 유지되는 이유다. 공포로서 유지되는 마을과 지도자가 독재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와 이 마을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를 신비로운 피리소리로 물러나게 만드는 악사는 권력자에게는 자신의 권력 유지 기반을 지워내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촌장과 악사는 약속으로 맺어지지만 그 약속이 파기되면서 죽고 죽이는 비극은 시작된다. 공포는 이미 주인과 손님,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이미 심어져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구분이 비정상적인 이 마을의 권력체계를 유지하는 기반이었으며, 따라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그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것이다.

 

<손님>이 놀라운 건 이 작은 마을의 가상의 이야기 속에 우리네 현대사의 비극들을 대부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대적 배경으로 한국전쟁의 상황을 두고 있다는 건 이처럼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시선이 바로 그 비극적인 전쟁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공포와 권력의 이중주는 우리네 비극적인 현대사를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손님>은 그러나 이러한 사뭇 현대사의 복잡한 심리적 배경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판타지와 영상 미학 또한 담아내고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가진 그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그림들은 그래서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잘 살려내고 있다. 우룡이라는 주인공을 악사이자 광대로 세워놓은 것은 그래서 이런 영화 미학과 맞물려 잘못된 권력의 악순환을 폭로하고 저항하는 예술의 힘을 에둘러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은 이처럼 그 미적인 장치를 통해서 현실과 대적한다.

 

<손님>은 한 가지로만 해석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상징적 이야기를 그리면서 어떤 주석을 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리네 현실이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들이 권력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인이어야 마땅한 우리들이 어쩐지 늘 손님으로만 대해져 왔다는 그 불편함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반색, <인사이드 아웃>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혹은 화가 날 때나 두려움에 떨 때 당신의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인사이드 아웃>은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감정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을 각각의 캐릭터로 보여준다. 그 캐릭터들이 있는 곳은 라일리라는 소녀의 감정 콘트롤 본부.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온 라일리는 그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감정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진출처 : 영화 '인사이드 아웃'

낯선 환경에서 기쁨이 어떤 자신감을 준다면, 버럭은 용기를 갖게도 해주고, 까칠은 쿨한 모습을 보여주고 소심은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라일리를 보호해준다. 그런데 도대체 슬픔은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그 슬픔이라는 감정이 가진 비밀스럽지만 신비로운 힘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감정을 캐릭터화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애니메이션의 발상이 남다르다는 걸 말해준다. 우리가 막연히 느낌으로만 갖고 있던 그 감정들을 시각적인 세계로 구현해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곳은 마치 상상으로 그려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오즈의 마법사>가 살 법한 세계들이다. 그 세계의 구조는 우리의 감정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가 생존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를 슬쩍 보여주기도 한다.

 

라일리가 외부의 자극들을 보고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그저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녀가 좀 더 잘 적응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들이다. 거기에 외부의 자극들이 주는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감정 콘트롤 본부에서는 옛 기억들을 이를 테면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가족과의 추억 같은 소환해오기도 하고, 두렵거나 아팠던 기억은 저 무의식 속으로 집어넣기도 하며, 때로는 빙봉 같은 상상의 캐릭터를 통해 스트레스를 극복하려 한다.

 

사실 라일리가 이 애니메이션에서 겪는 일이란 사건이라고 할 만큼 큰 일처럼 여겨지진 않는다. 즉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 겪는 외로움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 내부로 들어가면 이 작은 라일리의 감정적 사건들은 엄청난 스펙터클로 변모하게 된다. 감정 콘트롤 본부로부터 이탈하게 된 기쁨과 슬픔이 본부로 돌아가는 과정은 그래서 앨리스나 오즈가 걸어가는 모험의 길이 된다.

 

흥미로운 건 이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특히 세월호에서 메르스까지 갖가지 사태들은 물론이고 회복될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 경제나 그로 인해 취업이 어려운 청춘들과 밀려나 퇴직을 걱정하는 중년들에게 이 애니메이션은 각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겪는 감정 상태들을 저 라일리가 겪는 스트레스에 빙의시켜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감정들 중에서 전면에 나와 있는 건 기쁨이지만, 이 애니메이션이 궁극적으로 들여다보려는 건 슬픔이라는 감정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후반부에 이르면 뭉클한 감동에 어쩔 수 없이 찡한 눈물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지금 이 땅에 사는 어른들에게는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터미네이터>, 이병헌은 안보이고 노익장 아놀드만 보이네

 

먼저 이병헌 때문에 안 본다는 분들은 그럴 걱정이 전혀 없을 듯하다. 이병헌의 분량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액체로봇인 t-1000을 연기하기 때문에 대사도 딱 한 번 나올 뿐이다. 표정도 없다. 그저 무표정에 무대사로 뛰고 공격하는 액션만 선보일 뿐이다.

 


사진출처:영화<터미네이터 제네시스>

그 액션이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미 <터미네이터2>에서 봤던 액체로봇이 보여준 액션 그대로다. 그러니 이병헌에 대한 비호감 때문에 이 영화를 피한다는 분들의 우려는 없는 셈이다. 일찌감치 등장했다가 일찌감치 사라지는 캐릭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신 눈에 띄는 건 역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하는 원조 터미네이터다. 이제는 나이 들어 할아버지가 된 터미네이터. 그래서 미래에서 과거로 와 그를 본 카일(제이 코트니)은 무슨 터미네이터가 늙었냐고 투덜댄다. 그러자 터미네이터가 변명처럼 말한다. 터미네이터의 겉을 싸고 있는 피부는 나이를 먹는다고.

 

하지만 할아버지 터미네이터라고 해도 실망할 건 없다. 나이 들었고 노쇠했어도 아직 쓸모 있는 터미네이터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터미네이터는 그래서 인간적인 면모까지 갖춘다. 액체로봇인 t-1000이나 나노 입자 로봇인 t-3000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비록 로봇이긴 하지만 늙어가는 터미네이터라니.

 

영화는 기대만큼 충분한 재미를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결국 1탄에서 발아해 2탄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액체 로봇이라는 기상천외한 캐릭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줬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제네시스>의 나노 로봇은 새로운 캐릭터이긴 하지만 저 액체로봇만큼의 충격과 반전을 선사하진 못하고 있다. 나노라는 소재가 가진 특징이 잘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액션 역시 <터미네이터2> 그 이상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달리기만 해도 섬뜩함을 주었던 당시 <터미네이터2>t-1000의 압도감을 능가하긴 어려웠고, 자동차 액션 신도 마치 이전 시리즈를 자기 복제하듯이 비슷비슷한 장소에서 유사한 액션 장면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기 전개도 계속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왔다가 다시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식으로 시간여행을 계속 하다 보니 심플하게 전진하는 속도감을 오히려 방해하는 느낌을 주었다. 또 너무 과거와 미래가 중첩되어서 스토리도 복잡해진 감이 있다. 이건 아무래도 확실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지 못함으로써 이야기를 꼬는 것으로 영화가 흘러가면서 생긴 일일 것이다.

 

한마디로 <터미네이터 제네시스>는 전작의 액션들을 넘어서는 새로움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여전히 건재한 아놀드 슈워제네거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는 특유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로봇이 사람을 웃기는 그런 효과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이 나이 들어버린 터미네이터는 묘하게도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 제네시스>는 좀 더 새로운 캐릭터와 액션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실망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열광했던 관객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일 것이다. 특히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향수한다면 이보다 멋진 영화도 없다



관객, 스크린, 노이즈까지, 다 가진 <연평해전>에 없는 하나

 

영화 <연평해전>은 지독할 정도로 상업적인 영화다. 누군가 이 영화가 정치적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일면일 뿐이다. 정치적인 것, 그 위에 상업적인 것이 뒤덮고 있다. 먼저 영화관 풍경이 그렇다. 평일 840분에 하는 조조영화를 보러간 필자는 그 시간에 영화관이 가득 메워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른 조조시간도, 그 공포라던 메르스의 여파도 뚫고 가득 메운 관객들.

 


사진출처: 영화 <연평해전>

그런데 그 관객들의 거의 대부분이 같은 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낯설게도 다가왔다. 군부대에서 단체 관람을 온 것이다. 해군 6만 병력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외부단체관람을 나섰다는 뉴스는 <연평해전>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철저히 상업적인 전략을 구사했다는 걸 말해준다. 이미 제작에서부터 육, , 공군이 모두 참여했고, 그 이야기는 군인들의 단체관람을 어느 정도는 예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예비 관객을 갖고 있는 영화라면 실패할 위험성의 거의 없다. 영화적 재미를 떠나서 이건 군인들의 자발적인 선택만은 아닐 것이다. 보라면 봐야 하는 게 군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기본 관객이 준비된 데다, 무슨 일인지 멀티플렉스 체인 영화관들은 일제히 이 영화의 상영관을 한없이 늘려놓았다. 첫날 667개였던 스크린 수가 5일 후 1013개까지 늘어났다. 누군가의 압력이나 지시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오지만 사실 이건 지극히 상업적인 선택이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군인 같은 예비 관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관들로서도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스크린 수도 늘렸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애국주의를 설파하려는 정부의 뜻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음모론에 불과한 것이지만 영화가 연평해전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건 이 땅에 사는 국민들로서는 그 누구도 그 의미를 부인하거나 퇴색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은 장병들이 희생됐다는 건 어떠한 정치적인 입장을 뛰어넘는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니 영화의 애국주의적 입장은 휴머니즘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전해질 수 있다. 그런 애국주의적인 잣대만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애국주의 마케팅을 쓴다고 해도 영화관으로서는 오히려 득이 되는 일이다. 그건 잘만 풀리면 엄청난 상업적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니 이러한 선택 또한 지극히 상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이 애국주의 마케팅이나 스크린 독점 같은 이슈들이 터져 나오면서 어떤 노이즈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이 상업적 선택의 덤과 같은 것이다. 이 노이즈를 보수와 진보 같은 전선을 가르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마케팅은 이미 저 <디 워>에서 그 효과를 본 바 있다. 이런 마케팅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힘을 발휘한다.

 

<연평해전>은 그러니 확보된 관객에 확보된 스크린 수 게다가 준비된 노이즈까지 완벽하게 상업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걸 다 가진 영화가 갖지 못한 한 가지가 있다. 그건 영화적 재미다. 상업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영화가 주어야 하는 긴장과 이완, 중간 중간을 채워주는 소소한 에피소드의 재미가 하나하나 축적되어 후반부의 거대한 감동으로 이어주는 그런 흐름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결국 당일 날 벌어진 연평해전의 그 핏빛 전쟁 속에서도 숭고하게 희생하고 버텨내려 했던 그 장병들이 주는 먹먹한 감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주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실제 그 연평해전에서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분들이 그렇게 차가운 서해 바다 한 가운데서 어떻게 싸웠는가를 더 생생하게 들여다보며, 당시 편안히 월드컵을 즐겼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의미 있다면 바로 그 점 한 가지일 것이다.

 

<연평해전>은 대단히 상업적인 영화지만 그 상업적이라는 것은 영화가 대중적이라거나 웰 메이드라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소재와 마케팅적으로 상업적인 영화를 뜻한다. 영화는 본래 상업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영화적으로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 대중적이어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은 21세기라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까. 하긴 마지막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우리네 현실이 시대착오적이니 어쩌겠는가. 여전히 보수니 진보니 하며 편 가르기만 하면서 민생은 돌보지 않는 정국도 그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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