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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정덕현
임권택 감독 영화에 길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가 만드는 영화가 인생을 담고, 그 인생의 비의를 담지한 시대를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 위의 풍경은 임권택 영화가 가진 영상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먼저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길 자체가 내포한 표정이다. 길은 장관을 이루다가도 애조 띤 정서로 감아 돌고 때론 바다를 만나 반짝거리다가 인간에 의해 매몰되기도 한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구성진 소리처럼 구불구불 논길 사이로 이어진 길 풍경으로부터 우리네 구비진 인생살이의 고단함까지 잡아낸다. 그리고 그 풍경을 자세히 보면 길 위를 걷는 사람이 보인다. ‘천년학’에서는 소리꾼의 비루한 삶과 아버지에 의해 누이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여인 송화(오정해)로부터 도망친 동호(조재현)가 그 길 ..
‘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의 딜레마 “또 조폭영화야? 한국영화는 소재가 겨우 조폭 밖에 없냐?” 영화 개봉 시점에 맞춰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최근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은 ‘조폭영화’ 범주 속에 자신의 작품이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린다.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도 그렇다. ‘생활 느와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이 영화, 분명 조폭영화다. 조폭영화? 느와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미국에 서부영화, 갱스터영화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영화가 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조폭영화란 어찌 보면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장르영화가 아닐까. 조폭영화라며 싸잡아 욕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조폭이라는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소재에 기대 자극적인 설정으로..
최양일 감독의 신작, ‘수’는 대사는 적고 액션이 대부분인 영화. 말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는 행동으로 상황을 얘기한다. 영화는 난데없는 자동차 액션(사실 액션이라기보다는 있는 대로 부순다는 의미가 크다)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생각하기보다는 그 끝간데 없이 부서지고 부딪치는 자동차와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피를 보며 진저리를 치게 된다. 이 영화를 보통의 액션영화로 본다면 정말 지독히도 재미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액션영화의 틀을 벗어나 있기 때문. 액션의 통쾌함을 목적으로 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가 튀기는 장면들은 끔찍하다는 느낌을 줄뿐이다.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대도 극도로 얇게 구성되어 있다. ‘동생을 찾는 청부살인자→찾은 동생이 암살된다→복..
퓨전사극, ‘300’의 역사논쟁 영화 ‘300’에 대한 간략한 스포일러. 다가오는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 앞에 맞서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 그들의 숫자는 불과 300명. 팬티 하나에 망토 하나씩 걸친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창과 방패, 헬멧 그리고 칼이 전부다. 시간적으로는 단 3일이며 공간적으로도 영화는 테르모필레 협곡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300’의 단순한 줄거리다. 그런데 이렇게 줄거리를 다 얘기해도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건, 이 영화가 스토리를 보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스토리는 하나의 장을 마련해줄 뿐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역사보다는 재미이며, 멋진 대사보다는 그림 같은 액션이고 스토리보다는 근육이..
이성을 비웃는 본능, ‘향수’ 영화의 첫 장면. 감옥,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르누이(벤 위쇼)가 앞으로 나온다. 그러자 코 하나만 달랑 빛 속으로 튀어나온다. 어둠의 섬 위로 떠오른 그르누이의 코. 이 간단한 장면 하나는 그러나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모두 압축하는 힘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이 영화가 다루려 하는 후각과 시각, 어둠과 빛, 이성과 본능에 대한 상징이 숨겨져 있다. 어둠과 빛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영화가 앞으로 다룰 이야기가 바로 코, 후각에 대한 것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먼저 봐야 할 것은 이 첫 장면에서 보이는 어둠과 빛의 대비다. 어둠 속에 없는 듯 서 있는 그르누이는 영화 전체에서 드러나듯 그림자 같은 존재. 늘 거기 있지만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어떤 존재다. ..
샬롯과 글쟁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 밤이 되면 샬롯이란 이름의 거미는 여러 개의 다리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면서 거미줄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밤이면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텅 빈 거미줄 같은 화면을 글자들로 채워 넣는 모습. 그것은 영락없는 글쟁이의 모습 그대로다. 샬롯이 그렇게 글자를 새기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웰버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돼지를 위해서이다. 가만 두면 햄이 될 운명을 가진 웰버는 심지어 비천하기까지 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비천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거미줄이라는 빈 원고지를 가진 거미 샬롯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들을 떠올리게 만..
한류 vs 반한류 최근 들어 한류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한류열풍 4년 만에 이뤄낸 1억불에 달하는 무역흑자!’, ‘올해를 신한류를 이뤄내는 해로 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낸 문화관광부.’ 같은 핑크빛 전망이 있는 반면, 한편에서는 ‘이미 한류는 끝났다’, ‘한류는 애초에 없었고 욘사마만 있었다’, ‘반한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제 한류라는 국가상표를 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류라는 상표에 민족주의가 붙으면서 발생하는 주변국의 ‘반한류’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다. 대중문화에 붙은 한류라는 태극마크 박진영씨는 이후에도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통해 굳이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이름..
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는 ‘그놈 목소리’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는 여러 모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뉴스앵커라는 설정 이외에는 거의 실제상황과 같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던 199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아릿한 기억 속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고 스쳐지나갔던 한 아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경배와 관객에게 남 일이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뉴스앵커 한경배(설경구 분)가 한 아이의 유괴 살해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한시도 아이를 마음놓고 내보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화면 밖에서는 함께 진행하던 여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받는 한경배 앵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