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견>,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운 까닭

 

<소수의견>이 영화 시작과 동시에 자막으로 넣어놓은 특정한 사건, 사실과 관계가 없다는 얘기는 거꾸로 들린다. 오히려 그 자막은 이 영화가 특정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얘기처럼 보인다. 철거와 대치하는 원주민과 전경들, 그리고 투입되는 용역깡패들, 화염병과 물대포, 그리고 그 대치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 이런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굳이 용산참사를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네 현대사에서 이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사진출처: 영화 <소수의견>

철거는 아마도 포크레인으로 상징되는 우리네 도시들의 화려한 겉면 속에 남겨진 깊은 생채기일 것이다. 포크레인은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 그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본래 있던 자연적인 상태가 뜯겨져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 있던 자연적인 상태 위에 다른 걸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증거를 덮어버리려 하지만 그 상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포크레인이 뜯어낸 곳에서 두 명이 죽음을 맞이한다. 한 명은 경찰이고 다른 한명은 철거에 대항하던 원주민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경찰을 죽게 한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그 현장에 있던 원주민이다. 두 개의 관점이 쟁점화된다. 검찰은 경찰이 죽었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춰 이 사건은 원주민의 의도적인 살해라고 주장한다. 한편 변호인은 아들이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을 밝혀 그 경찰의 죽음이 정당방위에 의한 것이라는 걸 납득시키려 한다.

 

죽은 두 아들들에게는 모두 살아있는 아빠들이 있다. 그래서 이 법정싸움은 당연히 이 아빠들 간의 대립이 될 법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과잉진압을 하게 된 경찰의 뒤에는 그들을 그렇게 움직인 권력자들이 있고, 그 권력자들을 움직이는 건 그 철거가 가져올 이익이다. 그러니 마치 포크레인이 땅을 푸고는 서둘러 그걸 덮어버리는 것처럼 권력자들은 검찰이든 경찰이든 법이든 언론이든 뭐든 이용해 이 사건을 덮어버리려 한다.

 

그러니 법정싸움은 아빠들의 대립이 아니다. 그건 이 사안을 만들어내고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덮으려는 국가와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소수 개인의 대결이 된다.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우는 발상은 이 사건이 어느 개인의 부딪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무수히 얽혀 있는 권력과 관계자들에 의해 생겨난 일이라는 걸 말해준다.

 

정작 아빠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이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입장에 서 있다. 죽은 경찰의 아빠가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고 말한 대목은 영화가 왜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우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즉 아빠들이나 죽은 자식들은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었고 그런 죽음을 맞이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그들을 대립하게 했고 희생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였다. 누군가에게 의해 내몰리면서 벌어진.

 

권력의 부패나 누군가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화라는 이름의 개발은 국민을 희생자로 만든다. 도시화라는 미명하에 포크레인을 들이대고는 그 안에서 쏟아지는 서민들의 피눈물은 금세 마치 없었던 일처럼 덮어버린다. 때로는 희생자는 가해자가 되어 법정에 세워지기도 한다. 약자로서의 서민들은 늘 소수의견취급 받는다.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지만 덮어버리면 무시되는 소수의견.

 

영화는 그 소수의견이 절대 무시될 것들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또 서민과 서민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걸 통해 이득을 가져가려는 저 뒤편의 움직임들을 이 영화는 조망하게 해준다. 끊임없이 서민들의 이야기를 소수의견으로 치부하며 덮으려는 시도들이 영화 속에서 반복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한숨은 그것이 영화 속 극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주산골영화제, 그 소박함의 역발상

 

영화 <시네마천국>의 토토가 사는 작은 마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이럴까. 어둑해진 야외, 운동장과 야외 캠프장에 소박하게 만들어진 작은 영화관(?)에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어찌 보면 반딧불이가 사랑을 할 때 내는 불빛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을 온 몸으로 느낄수록 영화에 대한 애정 어린 눈빛은 더 깊어진다.

 

'무주산골영화제(사진출처:MJFF)'

영화는 스크린 위에만 펼쳐지는 게 아니다. 고개를 들면 저 하늘 위에 펼쳐진 대자연의 스크린 위에 별들이 펼쳐놓는 영화가 쏟아져 들어오고, 귀를 기울이면 숲속 풀벌레 소리가 영화와 어우러져 기막힌 정서를 만들어낸다. 세상에 이런 영화제가 있을까 싶지만 지금 현재 무주에서 펼쳐지고 있는 산골영화제가 바로 그것이다.

 

등나무 운동장에서 열린 무주산골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찰리 채플린의 <유한계급>이 상영되었다. 1921년에 만들어진 영화. 흑백 화면에 무성영화지만 지금 봐도 충분히 재밌는 그 영화는 김종관 감독과 뮤지션 모그가 참여해 독특한 퍼포먼스가 곁들여졌다. 영화 속 찰리 채플린이 영화 밖으로 튀어나온 듯 똑같은 분장을 한 인물들의 무대가 영화와 어우러졌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 듯한 개막작 퍼포먼스는 무주산골영화제만이 가진 소박하고 아날로그적이며 복고적인 정서를 잘 표현해냈다.

 

메르스 공포가 전국을 강타했지만 무주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영화제 자체가 시끌벅적한 도시의 영화제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이 거의 없는 무주라는 지역에 자연 속에 스크린을 걸고 영화를 틀자는 소박한 취지에서 시작한 이 영화제는 인구가 고작 2만 명인 이 조용한 산골 마을에 기막힌 역발상의 묘미를 선사했다.

 

산골영화가 어떻게 기묘한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는 그 무주라는 공간에 들어와 보면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도시의 밤풍경이란 불야성에 가깝지만 무주의 밤은 칠흑 같은 어둠이 포근하게 마을을 감싼다. 그러니 야외 어디고 스크린을 걸고 영사기를 돌리면 영화관이 되는 것이다. 이 어찌 기막힌 역발상이 아닐 수 있을까. 무주하면 먼저 떠오르는 반딧불이 축제의 반딧불은 그래서 산골영화제에서는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가 되는 셈이다.

 

상대적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 최근의 문화 트렌드가 지향하는 소박함이나 스몰 지향 그리고 자연 같은 키워드는 산골영화제가 도시인들에게 하나의 로망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삼시세끼> 같은 시골의 소박한 삶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에 열광하고, 화려한 호텔 예식장이 아니라 소박한 시골의 밀밭이 협찬(?)해준 식장에서 치러진 원빈과 이나영의 결혼식에 열광하는 것처럼, 산골영화제는 작고 소박하고 자연친화적인 특색을 모두 담고 있다.

 

화려한 레드카펫 대신 소소한 그린카펫을 지향하고, 복잡한 인파를 벗어나 소박한 가족, 친구, 연인과의 추억을 만들어내며, 화려한 도시의 불빛 대신 어두워 더 잘 보이는 별빛을 지향하는 그런 영화제. 상상 속으로만 꿈꾸던 그런 영화제가 바로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풀벌레 소리 들으며 보는 영화라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화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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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한>, 표현을 안 해 더 절박해진 사랑이라니

 

<무뢰한>은 독특한 멜로다. 사실 멜로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이게 실제로는 멜로의 실체라는 생각도 든다. 어딘지 달달하기만 한 멜로는 너무 관습적이기도 하고 그것이 실제 현실을 담아낸 듯한 느낌은 거의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본래 그렇게 비현실적인 거라고? 맞는 얘기지만 그 비현실이 달달함으로만 구성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결정들을 내리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사랑은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법이니 말이다.

 

사진출처: 영화 <무뢰한>

강력계 형사와 범죄자의 여자. 이 둘의 조합은 너무 뻔한 장르물의 한 틀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뻔해서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단순하다. 형사가 범죄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범죄자의 여자에게 감정을 느끼는 것. 하지만 이런 단순한 한 줄의 해설은 이 영화가 전해주는 기묘한 감정과 정서들을 전혀 담아낼 수 없다. 그것은 영화 속에 한 번 푹 담가져야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다.

 

사람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감정은 때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엉뚱한 표현이기도 하다. <무뢰한>이 그렇다. 여기 등장하는 형사 재곤(김남길)과 범죄자의 여자 혜경(전도연)은 마치 마음의 문을 누군가 들어올까 무섭다는 듯 꼭꼭 닫아 잠근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의 삶은 그래서 사적인 감정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직업적인 모습들로만 표현되는 삶이다. 재곤은 그 지긋지긋해보이는 형사질로서만 자신을 드러내고, 혜경은 범죄자의 여자로서 때론 퇴폐적이고 때론 아련해 보이는 단란주점 마담으로서만 존재를 보인다.

 

그런데 이런 남녀가 만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진짜 속내는 저 밑으로 꾹꾹 눌러놓고 괜스레 주변만 빙빙 돌며 서성대는 재곤은 그래서 그것이 사랑의 설렘 때문인지 아니면 형사로서 그녀를 예의주시하는 직업적 태도 때문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사도 거의 없거나 몇 마디 툭툭 던지는 것으로 끝내는 이 인물은 그래서 영화의 끝까지 진심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이것은 혜경도 마찬가지다.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내면화하고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그녀에게는 심지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낯설다. 그런 그녀에게 재곤이 불쑥 들어온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인지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처럼 보였던 것이 금세 그걸 뒤집어버리는 재곤의 허허로운 거짓말로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녀 역시 드러냈던 진실을 숨겨버리고 본래 가면의 그녀로 돌아가버린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과 사랑은 전혀 지금까지 우리가 멜로에서 봐왔던 그런 장면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뢰한>이 한 편의 하드 보일드한 스릴러나 형사물처럼 여겨지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처럼 형사물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건 저 두 남녀가 사랑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삶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은 <무뢰한>이란 영화가 식상한 멜로로 흐르지 않고 어떤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들이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한 극한 상황이 아닐 뿐, 우리 역시 철저히 일을 위한 가면을 쓴 채 일터로 나간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일터란 칼과 주먹만 안 들었을 뿐 저 <무뢰한>들의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곳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곳이란 점에서 비슷하다.

 

어쩌면 그래서 <무뢰한>은 더 이 시대에 현실적인 사랑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허공으로 몇 센티씩 붕붕 떠오르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저 밑으로 자꾸만 내동댕이처지는 바닥의 사랑이다. 그들이 감정을 잔뜩 숨긴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통을 참아내려는 얼굴들이 못내 마음을 쿡쿡 찌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떤 공감과 각성이 생겨난다. 우리 역시 <무뢰한>들의 세상에 살고 있다.

 

<간신>이 노출을 쓰는 방식은 에로티즘이 아니다

 

파격. 아마도 영화 <간신>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파격이 될 것이다. 지금껏 연산군의 폭정을 다룬 사극들이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왔어도 이처럼 폭력적이고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은 심지어 낯설게 다가올 정도다. 갑자사화를 짧게 묘사하면서 시작하는 방식은 마치 <글래디에이터><300>의 한 장면처럼 핏빛 폭력을 심지어 경쾌한 터치로 그려낸다. 연산군은 발가벗은 궁녀들이 기묘한 포즈를 취하게 하면서 그걸 그림으로 담아놓는다. 목이 날아가고 팔이 잘려지는 폭력은 살벌할 정도로 리얼하고,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출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하다.

 

사진출처: 영화 <간신>

거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듯한 폭력과 노출은 그래서 서로 그 살을 뒤섞으며 기묘한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낸다. 육체와 살은 이 두 감정을 하나로 보여주는 오브제가 되어 피를 튀기거나 흥건한 땀에 젖는다. 때로는 고통의 원천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쾌락의 끝으로도 보이는 이 살들은 그래서 어느 비등점을 넘어서면 기묘한 슬픔 같은 걸 드러내기도 한다.

 

연산군이 채홍사를 통해 1만 명의 궁녀들을 끌어 모아 실제로 꾸렸다는 흥청이 망청이 되어가는 과정은 육체에 쓰여진 쾌락과 고통의 기록처럼 보인다. 채워지지 않는 모성에 대한 결핍을 1만 명의 여성들의 살을 통해 채워 넣으려는 연산군의 광기. 그 폭정에 휘둘려 억지로 끌려오거나, 채홍사의 사적 복수에 의해 끌려온 누군가의 여식들, 그리고 가난한 부모가 먹고 살기 위해 팔아치운 자식들은 이 광기 아래 살아가는 백성들의 분신들처럼 보인다. 연산군에 의해 자행되는 육체의 유린은 그래서 권력이 착취하고 유린하는 백성들의 고혈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건 폭력과 노출이 거의 끝까지 밀고 나갈 정도로 파격적이지만 그것이 그리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파격적인 성행위를 선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현대무용의 한 장면처럼 육체의 퍼포먼스로 보이고, 실제로 이런 장면들 앞에서 연산군은 그것을 화포에 그림으로 담아내는 예술적 행위에서 오히려 더 쾌감을 느낀다. 즉 이들의 성적 행위들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무언가 예술적인 표현을 위해 구성된 행동처럼 다뤄진다.

 

그래서 그 동작들은 힘겨운 백성들의 삶을 표현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자 앞에서 피를 튀기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검투사들처럼, 온 몸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파이널 매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왕의 여자가 되려 싸우는 여자들의 육박전은 슬픔이 묻어나고 때로는 그들을 각성시키기도 한다. 검투사들이 그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과정을 거치며 반란을 꿈꾸게 되듯이.

 

<간신>은 그래서 폭력과 노출 수위만을 두고 보자면 대단히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 폭력과 노출이 에로티즘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 상업적인 영화라고 보기가 힘들어진다. 19금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보다 야하지 않았다는 느낌은 그래서 두 갈래 평가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별로였다거나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는. 어쨌든 <간신>은 그런 점에서 독특한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토록 강렬한 폭력과 노출을 보여주면서도 그리 자극적으로만 치닫지 않는 그런 작품. 그래서 나아가 누군가의 쾌락을 위해 바쳐지는 고통의 몸들이 지금의 민초들과 겹쳐지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하는 그런 기묘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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