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425)
주간 정덕현
‘라디오 스타’ 변방에서 중심을 치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이 시대를 갖고 걸판지게 한 마당을 놀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이준익 감독은 이제 한물 간 스타를 매개로 이 시대의 주변인들을 끌어 모아 라디오라는 마당 위에 펼쳐놓는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이 저 왕궁이라는 본진으로 들어가 스스로 민중의 입이 되어주었다면, ‘라디오 스타’의 최곤(박중훈 분)은 영월이라는 변방으로 날아가 DJ의 마이크를 고단한 민중들에게 넘긴다. 한 예술인의 삶으로서 장생과 공길이 왕 앞에서도 거침없이 사설을 늘어놓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은 라디오 방송이라는 규범적 공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엮어낸다. 그리고 ‘왕의 남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라디오 스타’ 역시 변방의 민중들을 끌어안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슬픈 이유‘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은 세 번 자살을 시도한 대학교수 유정과 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 윤수의 만남을 다룬다. 학생시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유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분노를 밖이 아닌 안으로 터뜨리는 중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한편 용서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윤수 또한 빨리 사형이 집행되기만을 기다린다. 한쪽은 피해자고 다른 한쪽은 가해자다. 그런데 그 둘은 모두 소통의 창을 닫고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행시는 그런 둘이 만나 닫았던 창을 열고 소통하면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이야기다. 스타일은 휴먼드라마이고 진행은 전형적인 멜로 신파를 따라간다. 관습적인 장면들과 상투적인 사건전개가 대부분이지만 ‘울고 싶어’..
와 소수자의 문제천하장사와 마돈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할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이미지는 그러나 오동구라는 한 뚱보 소년 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근거 없이 가졌던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천하장사와 마돈나, 남성성과 여성성, 소년과 기성세대, 꿈과 현실, 소수자와 다수자 등등. 전혀 한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결구도를 보여 전혀 결합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편견에 의한 것이라는 걸 꼬집는다. 마돈나와 동구 사이 영화는 어린 동구의 허밍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마돈나의 ‘like a virg다. 그의 귀..
비뚤어진 시각으로 각설탕 보기 ‘각설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달리는 천둥이일까, 아니면 그 말 위에 있는 시은이일까. 반려동물영화라면 당연히 그 포커스는 천둥이와 시은 양쪽에 맞춰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드라마 흐름은 그 포커스를 시은쪽에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는 참혹하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퇴색되고 ‘우정을 빙자한 동물 학대’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이 영화는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극처럼 보여진다. 눈물을 나오지 않고 대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달콤한 이미지의 ‘각설탕’이라는 제목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화적 맥락 속에서 그 제목은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동물’의 주종관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홍상수의 속 이미지의 문제 해변이 주는 이미지는 발랄하다. 그래서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이란 제목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강요한다. 여름, 바닷가,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등등.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단 몇 분만 지나면 알게될 것이다.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들은 사실 우리들의 해변에 대한 잡다한 기억들이 만든 편견이라는 것을. 홍상수 감독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흔히 극장 안은 환상의 세계고 극장 밖이 현실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홍상수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여름? 아직까지 황사가 날리는 봄이다. 바닷가..
김기덕 vs 괴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 ‘1000만’ 관객을 ‘단 21일만’에 돌파한 괴물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며 너도나도 ‘괴물 보자’고 달려가는 지금의 현상은 숫자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것은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숫자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괴물을 보지 않으면 수준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딜 가도 화제가 되는 그 이야기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결과적으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기저에는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일반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날아온 ‘영화제에서의 호평’이라는 외신은 ..
내 청춘에게 고함흔히 ‘마이너리티’라고 하면 숫적으로 적은 집단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마이너리티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건 영화계만 봐도 극명히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계 전체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메이저’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개봉 21일만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전국을 강타한다고 해도 그건 단 한 편의 영화일 뿐이다. 빛의 이면, 즉 그림자 속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인생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다면 ‘청춘’은 어디에 속할까.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속에 잘 적응되어 그 주류사회에 편입한 노회가 메이저라면, 청춘은 단연 모든 것이 미숙하고, 그래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가 될 것이다. 게다가 메이저 사회는 이들 마이..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이유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그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괴물의 모습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고질라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에일리언처럼 작지도 않은 그저 아담한 크기의 괴물은 무엇이든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입과, 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꼬리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갈 때나 사용될 법한 다리가 위협적일 뿐이다. 심지어 축축하게 젖은 눈과 조그마한 공간에 벽을 보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얘기다.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모습은 관객들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고 가는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 속에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괴물의 정체에 대해 다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