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 민란을 웨스턴처럼 보는 즐거움 혹은 불편함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갈아치우며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는 제목이 주는 선입견이 있다. ‘군도민란이라는 단어는 분명 우리가 처한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이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라고 해도 그것이 상영되는 건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지금의 막막한 현실이 투영된 것으로 군도민란이라는 단어를 읽게 된다.

 

사진출처: 영화 <군도:민란의시대>

실제로 영화가 갖고 있는 이야기 설정 또한 지금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가 등장하고 정경유착이 나온다. 그리고 지리산 추설이라는 의적들이 내뿜는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에도 현실의 울림이 들어가 있다.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반복되는 대사만을 생각해보면 영화는 심지어 민중봉기의 의미를 담은 영화처럼 오인된다.

 

하지만 제목과 이런 이야기 설정들이 주는 선입견을 갖고 <군도>를 보게 되면 100%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군도>의 소재일 뿐, 이 영화가 하려는 스토리텔링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군도>는 철저히 오락영화를 지향했다. 그래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말을 타고 떼 지어 달리며 한 사람 한 사람 스틸 컷으로 캐릭터가 설명되는 장면에서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를 그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바로 이 부분에서 호불호는 갈라진다. 만일 <군도>를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웨스턴 오락영화로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 펼쳐지는 활극의 묘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민란이 상기시키는 핍박받는 백성들의 무게감을 떨쳐낼 수 없다면 이런 소재를 이렇게 오락으로 그려도 되나 하는 불편함까지 가질 수 있다.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는 인물이 가진 아픔이나 고통에 집중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로 어떤 재미를 보여줄 것인가에 집착한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가 왜 그렇게 떠돌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심지어 그는 영화 속에서 이름 없는 자로 불린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총을 쏘고 머리를 써 상대방을 속이는가 하는 트릭의 재미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사정은 <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찌 어찌 해 지리산 추설이라는 의적 집단에 들어오게 된 인물들은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를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해주기보다는 짧게 캐릭터를 설명하듯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공감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각자 가진 능력으로 대변되는 캐릭터다. 천보(마동석)는 힘을 대변하고, 금산(김재영)은 빠른 속공을 대변하며, 땡추(이경영)는 전략가를 대변하는 식이다.

 

이처럼 가볍게 캐릭터화된 인물들이 조윤(강동원)이라는 절대 악인이자 고수와 대결하는 과정은 그래서 절절함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액션 활극이 보여주는 재미에 더 치중되어 있다. 심지어 인물의 죽음조차 그다지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카로니 웨스턴을 보면서 인물의 죽음에 감정이입이 과도하게 되지 않듯이 <군도> 역시 액션 활극으로 그려지면서 인물의 감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사실 핍박받는 민중의 봉기를 소재로 한다고 해서 모두 절절한 드라마를 깔아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핍박받는 민중들의 죽음이 절절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액션 활극의 소재처럼 활용되는 부분은 지금의 대중들의 정서에는 상당부분 부딪치는 면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군도>는 그래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액션 활극이거나 혹은 불편한 민중 봉기 소재의 영화거나.

 

<혹성탈출> 변칙 개봉 논란과 영화의 공존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하 혹성탈출)>에서 시저는 유인원 종족들을 이끌고 인간들 앞에 서서 서로의 영역에 대해 말한다. 숲은 유인원들이 사는 공간이고, 도시는 인간 생존자들이 사는 공간이라는 것. 시저는 각자의 영역에서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즉 인간과 유인원 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혹성탈출>20세기 내내 인류를 전쟁으로 내몰았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사진출처: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10여 년을 각각 살아가던 인간과 유인원이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해 총성이 울리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인간은 낯선 숲에서 갑자기 마주친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유인원에게 느낀 공포로 인해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인원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잡혀 갖가지 실험을 당했던 유인원 코바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다른 선택도 있다. 시저와 말콤이 유인원과 인간이라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어 신뢰와 우정으로 나아가는 선택이 그렇다. 말콤이 유인원들의 숲에 죽음을 불사하고 들어간 것은 그 두려움을 공존의 의지로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공존에 대한 노력은 양자 간의 대결이 아니라 평화를 깨려는 내부의 적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블록버스터이면서도 진지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혹성탈출>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개봉에 있어서 아이러니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즉 이 영화는 공존을 이야기 하지만 이 같은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를 점령하다시피 하는 상황은 작은 영화들에게는 공존은커녕 생존을 얘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같은 변칙개봉 논란은 이 거대한 몸집의 영화가 개봉일 변경 하나만으로도 작은 영화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되는 현 영화 생태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논란을 단지 할리우드 vs 우리 영화로 구분해 대결구도를 갖는 건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혹성탈출>의 이야기가 인간 vs 유인원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과 유사하다. 시저는 영화의 말미에 유인원이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그것은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할리우드와 우리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네 영화는 상당 부분 할리우드를 닮아가고 있다. 우리 영화에 있어서도 끝없는 스크린 독점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개봉되면 작은 영화들은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 버린다. 그러니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의 문제는 우리 영화를 포함한 블록버스터들의 독점적인 스크린 장악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이제 자본이 장악하고 있다. 자본 아래 국적성이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진정 <혹성탈출>이 주제로 보여주는 것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전 세계의 영화관을 거의 독점 하다시피 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욕하면서도 우리의 자본은 그 시스템을 철저히 배워 우리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결국 <혹성탈출>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은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은 영역과 종족 구분 없이 전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인간의 총을 가져와 유인원들에게조차 총구를 겨누는 코바의 모습은 그래서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저 할리우드의 습격을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잣대를 내세워 욕할 자격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그 총을 들여와 우리 영화계를 향해 겨눈 것은 우리네 거대자본이 아니던가.

 

시저와 말콤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존을 꿈꾸면서도, 시저의 말대로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유인원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다. 공존하겠다는 의지와 모든 걸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현재 우리네 영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크린 전쟁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 논란은 할리우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현재 처한 문제이기도 한 셈이다.

<신의 한수>가 그토록 잔인해졌던 까닭

 

<신의 한수>는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다. 사실 바둑을 대중적인 소재로 만든 건 만화다. <데스노트>로 유명한 오바타 다케시의 <고스트 바둑왕>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작품으로는 <이끼>를 그린 윤태호 작가의 <미생>이 있다. 바둑이라는 소재가 주로 만화에서 빛을 본 것은 이 게임이 결코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다루면 바둑이 가진 그 신묘한 세계의 재미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진출처: 영화 '신의 한수'

만화처럼 책의 기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장르라면 바둑의 좀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고, 만화의 특성상 판타지적인(우리가 흔히 만화 같다고 말하는) 요소들을 덧붙여 그 어려움과 복잡함을 상쇄시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사실 대략난감이다. 바둑의 그 셀 수 없이 많은 수들을 일반 관객들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렇게 영화를 풀어나가다가는 지독히 마니아적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재미없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신의 한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둑이 소재지만 바둑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전략. 따라서 영화는 바둑의 한 수 한 수가 가진 의미를 짚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한 수가 가진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그 한 수로 인해 생겨나는 끔찍한 결과에 의해서다. 첫 도입부에서 태석(정우성)은 형의 목숨이 달린 도박 바둑을 두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바둑알을 떨어뜨려 악수를 두게 된다. 그런데 그게 왜 악수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태석의 한 수만 물러달라는 처절한 애원이 그 수가 악수임을 얘기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끔찍한 폭력이다. <신의 한수>는 그래서 살수(이범수)라는 강력한 폭력의 공포를 기반으로 해서 바둑이라는 낯선 소재를 끌어안는다. 이제 남는 건 바둑의 신묘한 세계가 아니라 그 대결에서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끔찍한 결과의 차이다. 이기면 몇 십억을 순식간에 벌 수 있고 지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신의 한수>가 찌르고 자르고 때리는 그토록 폭력적인 장면들을 반복해서 심어놓은 건 낯선 바둑이라는 과정을 간단명료한 폭력의 결과로 상쇄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것은 바둑이라는 신선놀음을 일종의 복볼복 게임처럼 만들어버린다. 알다시피 복불복이란 복잡한 게임의 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중요한 건 그 게임의 결과로 빚어질 극과 극의 상황이다. 그 결과의 파장이 크면 클수록 단순한 복불복 게임의 몰입도는 커진다. 이렇게 되면 바둑이라는 소재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가위바위보 복불복에서 중요한 건 가위바위보가 아니다. 홀짝으로 복불복을 해도 그 게임의 묘미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낯선 바둑의 세계는 대중을 상대로 하게 되면서 대신 폭력이라는 복불복 게임으로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과도한 폭력에의 집중은 오히려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놓는다. <신의 한수>는 태석이 살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팀을 짜고 하나씩 그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게임 미션 같은(바둑을 두는 수순을 형식으로 채용하고 있다) 형식을 보여 주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느낌은 어쩌면 당연히 묻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현실감은 갖춰져야 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데도 불구하고 형사나 경찰 하나 등장하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결코 작지 않은 오류다.

 

바둑을 소재로 하지만 정작 바둑의 세계는 보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경찰과 형사 같은 공권력은 삭제되어 있는 세계. 그러니 이 비현실적 공간에 남는 것은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멋진 액션 동작들뿐이다. 마치 <아저씨>의 액션을 보는 듯한 깔끔한 동작들은 특히 그것을 더 멋스럽게 만드는 정우성과 잘 어우러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정우성의 겉면만 살짝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액션이 잘 어울리는 정우성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의 내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만화 같은 영화라도 형이 죽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됐다면 그만한 내적 갈등이나 분노, 증오심이 묻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그 상황을 그저 미션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저씨>의 액션이 힘을 발휘했던 건 그 원빈이 날리는 주먹에 내면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한수>의 정우성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가 정우성을 그저 잘 생기고 액션이 멋진 배우로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의 한수>로 정우성을 캐스팅했다면 그 외면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그의 내면을 보여줘야 했던 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이 영화가 상업적인 선택을 한 결과일 것이다. 복잡한 내면보다는 보여지는 쾌감을 선택한 것. 하지만 바로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인물의 내면이 폭력과 액션의 근거와 쾌감을 오히려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 <신의 한수>에 부족한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트랜스포머4>의 중국, <어벤져스2>의 한국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이하 트렌스포머4)>에는 홍콩에서 시드를 갖고 도주하던 조슈아 박사(스탠리 투치)가 엘리베이터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이를 막는 인물이 중화권 배우인 리빙빙이다. 리빙빙의 격투실력을 본 조슈아 박사는 갑자기 그녀에게 빠진 듯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사진출처:영화 <트랜스포머:사라진 시대>'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더 나온다. 그것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한 중국인 청년이 괴한이 리빙빙을 가격하는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쿵푸 실력으로 괴한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어찌 보면 이 장면은 사족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인들이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즉 이 장면은 누가 봐도 중국인 관객을 염두에 둔 서비스 장면이라는 점이다.

 

<트랜스포머4>의 주요 배경은 중국 상하이와 홍콩이다. 트랜스포머의 재료가 되는 트랜스포뮴을 생산하기 위해 시드를 투하시키려는 곳이 중국의 사막이고, 선사시대에 공룡을 모델로 트랜스포머가 된 다이노봇이 깨어나는 곳도 홍콩이다. 다이노봇을 타고 싸우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모습은 기묘하게도 중세 유럽의 용을 탄 기사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동양의 용을 탄 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 상하이와 홍콩은 트랜스포머들의 전장이 되어 초토화된다. 좁은 공간에 밀집된 고층 건물들을 마구 부숴버리며 싸우는 오토봇과 디셉티콘 그리고 그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다이노봇은 압도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중국인들에게는 새로운 감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 배경이 자신들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다분히 염두에 둔 이러한 로케이션 덕분인지 <트랜스포머4>는 중국에서만 단 3일 만에 910억 원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이 수치는 전체 수입인 2천여억 원의 절반에 달하는 액수다. <트랜스포머3>가 중국에서 약 18백억 원의 수입을 올린 걸 생각해보면 이번 <트랜스포머4>가 그 수입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중국 로케이션이 가진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트랜스포머4>가 상기시키는 건 우리나라에서 촬영된 <어벤져스2>. 당시 2주간 교통을 통제하면서까지 진행된 이 로케이션으로 국내에서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이 <어벤져스2>의 서울 촬영으로 4천억 원의 홍보효과와 2조 원의 국가브랜드 가치 상승이 이어질 것이라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지만 회의적인 시선들이 많았던 것. 즉 파괴되는 공간으로서 활용되는 서울시의 장면들이 해외 관광객을 끌어 들일만큼의 유인이 될 수 있겠냐는 의문이 일었다.

 

<트랜스포머4>의 중국 로케이션을 두고 보면 이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이 중국에 매력을 느끼고 관광을 하러 찾아올 가능성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트랜스포머4>의 중국 흥행을 통해 드러나듯이 오히려 관심을 끄는 쪽은 중국인들이다. 자신들이 사는 공간이 <트랜스포머> 같은 블록버스터 공간으로 어떻게 그려질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어벤져스2>의 서울 로케이션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내용보다는 압도적인 볼거리가 중심이 되는 <트랜스포머4>가 그러하듯이, <어벤져스2> 역시 그 볼거리 속에 들어가 있는 서울의 모습이 우리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잡아끌 것이라는 점. 결국 <어벤져스2>의 서울 로케이션은 관광공사의 국가브랜드 이미지 제고보다는 할리우드의 마케팅 차원이 훨씬 강력할 거라는 점이다. 중국 로케이션이 만들어낸 <트랜스포머4>의 중국 열풍은 <어벤져스2> 서울 로케이션의 진면목을 새삼 바라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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