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향 감독의 '오늘', 용서란 무엇인가

사진출처: 영화 '오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댈의 조금은 진지한 인문서적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적이 있다. 물론 엄청나게 책이 팔린 것과 많이 읽힌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그만큼 민감해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이 들고 온 신작 '오늘'은 여러모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묻고 있다. 정의는 무엇이고 또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하고 나니 편해?" 영화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죽게 만든 소년을 용서한 다혜(송혜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정말 용서하고 나서 편해졌을까.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심지어 끔찍한 것이 삶이다. 용서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멀리서 바라보는 삶'을 살던 다혜는 어느 날 자신이 용서한 소년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그 끔찍한 사실을 눈앞에 목도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의 편안함(?)이 사실은 자기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용서란 가해자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할 때 해줄 수 있는 일이지, 피해자가 저 혼자 용서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이며, 나아가 정의의 시점으로 보면 또 다른 죄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오늘'이 파고드는 건 바로 이 지점들이다. 끔찍한 사건을 당한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스스로 '용서'할 것을 종용하는 사회. 그래서 용서했으니 죄도 가볍게 사해주는 사회. 하지만 제대로 된 사죄 없이 용서받은 그들이 다시 죄를 짓게 되는 현실. 잘 살겠지 하며 용서해줬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간 소년을 찾아간 다혜는 '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와의 대면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즈음에서 정의는 애매해진다. 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가해자를 위한 것인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 다혜가 극중 인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라는 장치 속에 들어있다. 이 액자구조는 어쩌면 다혜라는 가상의 주인공이 겪는 심경의 변화가 바로 이정향 감독 자신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영화가 마치 심층다큐나 토론 프로그램처럼 여겨지는 건, 이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세계'를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감독의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이라는 영화가 건조하기만 한 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거기에는 이정향 감독 특유의 멜로적인 선이 들어가 있고, 가족적인 코드도 들어가 있다. 그래서 마치 멜로드라마와 다큐가 섞인 듯한 이 영화는 찡한 눈물과 우리의 이성을 두드리는 둔중한 질문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 '피해자들의 풍경'은 실로 처절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그를 죽인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사죄도 하지 않은 그들을 세상은 모범수라는 이름으로 용서해준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은 자를 국가는 무슨 자격으로 용서하는 것일까. 다혜는 피해자들을 찾아가 용서의 모습을 찍으려 하지만, 피해자들은 거꾸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늘어놓는다. 즉 다혜가 찍으러 다니는 인터뷰는 거꾸로 다혜에게 질문한다. '용서하고 나니 정말 편하냐'고.

이 영화는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끄집어냄으로써 '사과 없는 용서'라는 허울 좋은 세상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늘'이 바로 가해자들이 처참하게 빼앗은 피해자들의 미래라는 것을 아프게 말한다. 당신이 숨 쉬고 있는 그 오늘이 당신이 빼앗은 피해자들이 그토록 바라고 간절하게 여긴 그 시간들이라는 것을.

침묵과 공포의 '도가니'가 아프게 전하는 말

'도가니'(사진출처: 삼거리 픽쳐스)

침묵의 대가는 크다. 이 말은 듣는 이에 따라서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혹자는 침묵함으로써 얻게 되는 현실적인 이득을 떠올릴 수도 있고, 혹자는 잃게 되는 양심을 떠올릴 수도 있다. '도가니'는 바로 이 침묵이 가진 이중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묻는 영화다. 당신은 과연 이 진저리처질 정도의 참혹한 사건 앞에서 현실이라는 이유로 침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침묵이 가져오는 양심의 가책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도가니'. 사전적 의미로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을 뜻하지만 우리는 흔히 '침묵의 도가니' 혹은 '공포의 도가니' 같은 표현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애초에 제목을 거기서 가져왔기 때문일까. 이 영화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역시 '침묵의 도가니'와 '공포의 도가니' 이 두 표현이다.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무려 5년 간 교장과 교사들이 청각장애아들을 대상으로 벌인 성폭력과 학대는 '침묵'과 '공포'를 그대로 영화 속에 담는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장애를 가진 피해자들이 침묵을 강요받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인들조차 침묵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없는 짓을 버젓이 저지르는 상황도 그렇지만, 그걸 그 누구도 나서서 막지 않는 상황은 더 큰 공포다. 즉 '도가니'는 '침묵의 도가니' 같은 표현이 그런 것처럼 이 정의니 진리니 하는 추상적인 상황을 지극히 즉물적인 눈앞의 상황으로 낱낱이 보여주는 영화다. 그래서 추상으로 덧씌워져 가려져 있는, 몇몇 글자들로는 도무지 표현하기 어려운 이 짐승 같은 상황을 고스란히 발가벗겨 보여준다. 게다가 법 역시 돈과 권력의 힘에 휘둘리며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공포가 저 어느 지방학교에서 벌어진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영화가 어떤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니'는 참혹할 정도로 보는 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역시 침묵하고 있었던 우리들의 눈과 귀를 아프게도 찌른다. 그럼으로써 가슴으로 담으려 하지 않았던 우리들을 분노하고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끝끝내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영화 속 무진이라는 도시를 뒤덮고 있는 안개처럼 답답하게 가려진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라고만 한다.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고 여전히 그 때의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교편을 잡고 있는 현실에서 영화가 어찌 감히 비전을 보여주겠는가.

하지만 이 비전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 영화가 주는 비전이다. 모두가 침묵하고 덮으려고 했던(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아픈 현실을 영화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법이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그 현실을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 이 영화의 비전이다. 모든 것이 은폐되는 상황 속에서는 그것을 직시하고 잊지 않는 것이 때로는 그 어떠한 행동보다도 더 적극적인 참여가 되기도 한다. '도가니'는 그런 점에서 보는 것이 그 자체로 인권을 향한 한 걸음이 되는 영화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바라보고 우리 기억의 감옥 속에 그들을 가둬두는 것으로, 법이 풀어준 그들을 영원히 봉인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침묵'과 '공포'의 도가니를 느꼈다면 그 아픈 고통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도가니'가 그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우리에게 아프게 전하는 말이다.


멜로 그 이상 세상의 아픔을 담아낸 '통증'

'통증'

세상이 앓는 통증을 당신은 느끼고 있는가. '통증'은 멜로드라마 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저 멜로로만은 볼 수 없는 영화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이 갖고 있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사회적으로 함의하는 바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이 남자를 세상은 두드려 패고, 그 맞는 대가로 이 남자는 돈을 받아 생계를 이어간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설정인가. 통증을 느끼지 못해 맞으면서도,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나 하나도 안 안파"라고 말하는 남순(권상우)의 몸에 난 멍 자국을 보면서 눈물 흘리게 만드는 영화, '통증'은 지독하게도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자, 동현(정려원)은 바로 이 남순이라는 아픈 세상을 겪고 있는 인물을 바라본다. 정작 자신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남순은 너무나 아프다. 이것은 그녀의 캐릭터가 작은 상처조차 치명적인 결과에 이를 수 있는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에서 더욱 그렇다. 그녀는 통증에 그만큼 민감하다. 타인의 상처마저 내 상처로 고스란히 느낄 정도로.

이 통증을 두고 상반된 캐릭터의 만남은 절절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동현이 그렇게 한없이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남순은 처음으로 통증을 느낀다. 자신의 통증은 못 느끼던 그가, 그녀가 우는 모습에는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린다. 이 화학작용을 통해 인물을 바라보는 시점이 생겨난다. 우리는 남순의 시점으로 동현을 바라보고, 동현의 시점으로 남순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이 겪고 있는 깊은 상처와 그 상처를 서로 핥아주는 간절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남순의 정돈되지 않은 집은 상처의 원형이다. 그 속에서 상처를 지워내지 않고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남순의 집에 들어와 그 집을 치우고 닦고 하는 건 '통증'이 전하는 사랑의 해석이다. 누군가의 공간 속에 들어가 그것이 아픈 것이라 해도 보듬어주고 안아주는 것. 남순과 동현의 입맞춤은 그래서 이 공간을 상처만 남은 과거의 공간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가족을 꿈꾸게 하는 미래의 공간으로 바꾼다. 물론 냉혹한 바깥 세계는 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지만.

흥미로운 건 이 멜로 구도 안에서 영화가 자꾸만 그 구도 바깥을 생각하고 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즉 통증이 있다면 그 통증을 만들어낸 주체가 있게 마련이다. 남순을 피 흘리게 만드는 것은 저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욕망이다. 재개발 현장을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폭력과 사건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뉴스 속의 원경으로 봐왔던 실제 사건들을 근경으로 당겨놓는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통증으로 여겨졌지만, 가까이 다가가 남순이라는 캐릭터를 그 안에 두고 바라보니 그 통증이 내 것처럼 절절해진다.

우리는 흔히 '불감증에 걸린 사회'를 말한다. 아픔과 상처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에 쉽게 그 상처를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것처럼 고개 돌려버리는 사회를 얘기한다. '통증'은 바로 그런 우리들 앞에 그 아픔을 던져놓고 직시하라고 하는 영화다. 그래서 남순처럼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가 누군가의 눈물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게 되는 그런 영화이고, 맞으며 희생하는 대가로 이제 맞는 것조차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약자들을 동현의 시선으로 끌어안게 되는 영화다. 돌아누운 남순의 허리에 남겨진 멍자국에 눈물이 난 것은 그의 몸으로 환기되는 세상의 잔혹함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혹성탈출', 원숭이의 시점으로 바라보니

'혹성탈출'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세상? 1968년에 나왔던 '혹성탈출'을 TV로 보며 자란 세대라면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에서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지도 모른다.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으로 집약되는 그 옛 영화에서 우리는 원숭이들에 의해 우리에 가두어진 인간들을 충격적으로 바라봤었으니까. 하지만 2011년 '진화의 시작'이라는 부제를 달고 돌아온 '혹성탈출'은 '진화'라는 그 키워드에 더 집중한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의 얘기가 아니라 진화는 어떻게 일어나고 그 결과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를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다.

애초부터 시저라는 챔팬지가 자신이 떼어낸 목줄을 인간의 목에 걸 의도는 없어 보인다. 결국 갇혀있던 우리를 빠져나와 세상을 일대 혼돈으로 몰아넣는 그 장면들 속에서도 그는 인간을 죽이려는 다른 유인원들에게 "안돼!"하고 소리친다. 즉 시저와 유인원들의 반란(?)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 우리에 갇힌 시저와 유인원들은 자신들의 집(정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다.

흥미롭게도 원숭이가 인간을 압도하며 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새로운 최강자로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진화에 의한 자연선택의 결과다. 인간은 과학의 이름으로 생태계를 교란시켰고, 그래서 환경이 바뀌었으며, 다만 그 바뀐 환경에서 인간보다 원숭이들이 더 잘 적응해낸 것뿐이다. 즉 인간의 추락은 인간 스스로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림으로 해서 생겨난 진화의 결과라는 얘기다.

'인간보다 나은 원숭이와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풍자는 어딘지 고전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원숭이 사냥을 벌이는 인간을 먼저 보여주고 그렇게 잡힌 원숭이의 눈 속으로 카메라가 들어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인간의 시점이 아니라 원숭이의 시점으로 이 영화가 흘러간다는 복선이다. 그래서 한참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이 아닌 원숭이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이 영화를 즐기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인간은 똑똑한 원숭이들을 싫어해.' 우리에 갇힌 시저에게 누군가 건네는 이 말은 우리가 원숭이 같은 유인원을 바라보는 양가적 감정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유인원을 보며 친근감을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지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그들이 어쩌면 우리와 같은 뿌리라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 '혹성탈출'은 이 친근하면서 놀랍지만 섬뜩하고 두려운 유인원이라는 존재에서 시작해 차츰 그 내면으로 들어간다. 두려움 때문에 자연을 수정하고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은 원숭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이다.

그래서 시저의 눈으로 그 폭력적인 인간을 바라보다가 결국 우리를 빠져나와 유리창을 깨고 자동차를 막아 세우며 도시를 질주하는 유인원들의 광경은 놀랄만한 스펙터클의 쾌감을 안겨준다. 만일 이것이 테러리스트들과 대결을 벌이는 형사물이라면 이러한 파괴는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유인원들이 인공을 마구 헤치고 달리는 장면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안긴다.

결국 2011년에 다시 돌아온 '혹성탈출'의 힘은 바로 이 시점의 이동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시저라는, 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난 침팬지의 가면을 쓰고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자 도시가 가진 그 답답함과 저들의 욕망을 토대로 축조된 세상의 부조리함이 보이게 된다. 병을 정복한다는 명분으로 유전자를 마구 조작하고, 인공적인 도시의 안락함 속에 자연조차 우리에 가둬 전시하는 인간의 욕망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1968년에 만들어진 '혹성탈출'의 그 '혹성'이 지구를 제 3자화해 그곳을 '탈출하고픈 어떤 곳'으로 그려낸 것처럼, 2011년 '혹성탈출'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시저의 눈으로 바라본 탈출하고픈 도시가 지구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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