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활', '퀵'보다 빠르고 '7광구'보다 팽팽한 이유

'최종병기 활'(사진출처:(주)다세포클럽)

이것은 활 그 자체다. 시위가 당겨진 화살이 목표물을 향해 곧장 날아가듯, '최종병기 활'은 군더더기 없이 시작에서 끝까지 정직하게 날아간다. 활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면서도 섬뜩한 것처럼, 영화는 시종일관 그 활의 팽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첫 시퀀스의 강렬함으로 잔뜩 시위가 당겨진 화살은 그 힘 그대로를 유지하며 끝까지 날아가고, 관객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끝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정도의 몰입과 집중력이라면 할리우드에서 내놓는 그 어떤 블록버스터와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최단기간에 3백만을 넘어 5백만을 향해 달려가는 그 흥행의 속도 또한 영화의 속도감을 그대로 빼닮았다.

막상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 '최종병기 활'에 대한 기대감은 별로 없었다. 사전 홍보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퀵'이나 '7광구'에 대한 기대감은 컸다. 짧은 광고에 담겨진 예고편은 건물 옥상을 날아다니는 오토바이와 어딘지 한국판 에일리언을 떠올리게 하는 괴물로 대중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막상 영화는 기대에 못 미쳤다. '퀵'은 장르의 균형이 어긋났다. 오토바이는 액션으로 달려가려하는데 그 때마다 김인권의 코미디가 그 속도를 잡아챘다. '7광구'는 오밀조밀한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볼거리에만 치중하면서 긴장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최종병기 활'은 달랐다. 사극이라는 장르 속에서도 역사에 묻히지 않았고 활이라는 소재에 천착하면서도 스케일과 스토리를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 속에서 쫒고 쫓기는 추격전을 마치 사냥의 풍경으로 그려낸 점은 이 영화의 백미다. 처음에는 청나라 정예부대를 이끄는 쥬신타(류승룡)에 의해 말 그대로의 '사냥(그들은 무고한 민간인 약탈을 이렇게 부른다)'이 벌어지고, 잡아간 누이 자인(문채원)을 구출하기 위해 남이(박해일)의 반격이 이어진다. 남이와 쥬신타의 대결은 쫓고 쫓기는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실제 맹수들 간의 사냥을 연상케 만든다.

물론 '최종병기 활'은 영화적 메시지가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락영화로서 장르적 재미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블록버스터로서 '최종병기 활'은 활이라는 소재가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미요소들을 보여준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그 느낌과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그 속도감은 음향효과에 의해 극대화되고 그것은 영화를 촉각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마치 '원티드'의 활 버전을 보는 것 같은 바람을 타고 휘어지는 활의 모습 역시 대단히 흥미로운 시각적 자극이다.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최종병기 활'이 올 여름 블록버스터의 최종병기가 된 이유는 이 작품이 장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병기 활'은 사극이라는 장르에 추격전이라는 스토리의 긴장감을 활이라는 소재로 절묘하게 이어 붙였다. 장르란 하나의 흐름이다. 그 흐름을 관객들은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그 기대에 부응하는 흐름이 들어있어야 관객들은 만족한다. '최종병기 활'은 그 흐름에 제대로 부응하는 영화다. 속도감과 팽팽함으로 무장한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활 같다고 연상하게 되는 것은 이 영화의 장르적 완성도를 잘 말해주는 것일 게다.


'고지전', 원근법이 백미인 전쟁영화

'고지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은 무엇을 보는가 하는 점만큼 중요하다. 멀리서 볼 것인가, 아니면 가까이서 볼 것인가. 또 어느 쪽의 시점으로 볼 것인가. 그것이 전쟁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쟁영화를 먼 거리에서 보다보면 스펙터클의 덫에 걸릴 수 있고,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면 지나치게 인물들의 감정 속으로만 매몰될 수 있다. 전쟁영화는 스펙터클이 될 때 비판받을 수밖에 없고, 감정에만 매몰될 때 소소해질 위험성이 있다. 또 실제 겪었던 전쟁을 다루는 경우 어느 한쪽의 시각에 맞추다보면 다른 편의 시각이 소외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지전'만큼 적절한 원근법을 고수하고 있는 전쟁영화는 보기 드물다. 일단 그 '애록고지'라는 영화의 공간이 그렇다. 한국전쟁의 끝 무렵 남북분계선을 가름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애록고지. 그 고지를 중심으로 영화는 시선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영화는 이 애록고지를 지도 위에 놓여진 하나의 점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 지도 위의 몇 미리에 불과한 땅을 더 갖기 위해 남과 북의 대표자들은 격렬한 언쟁을 벌인다. 그러나 이 다소 심심해 보이는 협상의 결과는 실제 애록고지로 날아가면 살벌한 결과로 이어진다. 지도에서 현장으로 다가가는 이 시선의 전환은 그래서 이 영화의 반전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애록고지의 전황을 포착하는 시선 역시 이 지도에서 전장으로 가는 시선과 동일하게 이동한다. 방첩대 소속으로 후방에 있던 강은표(신하균)의 시선을 쫓아가기 때문이다. 강은표는 뭔가 적과 내통하는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수사하기 위해 애록고지에 주둔한 악어부대로 들어간다. 즉 철저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애록고지에서 과거 친구였던 김수혁(고수)을 만나고, 그 하루에도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애록고지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차츰 그들과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멀리서 봤던 풍경과 가까이서 보는 현실 사이에 괴리감을 만들어내며 한국전쟁으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만큼의 거리를 갖고 있는 현재의 관객들을 좀 더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든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악어부대의 병사들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알 사이를 달려가는 장면은 원경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인다. 마치 거대한 흙더미 위에 개미들이 뒤엉켜있는 것처럼 누가 누구편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그 원경의 그림은 그러나 이미 관객들에게 익숙한 이 영화의 몇몇 주인공들의 사투를 따라가는 근경에 이르면 하나의 지옥도로 다가온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인물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가는 현실을 그 원근법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뺏고 빼앗기는 끝없는 전투장면의 반복 속에서 변해가는 이 전쟁에 대한 생각이다. 그들은 이제 차츰 이 전쟁이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 자체와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애록고지를 중심으로 남과 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몇몇 시퀀스들은 그래서 이 전쟁영화를 휴먼드라마로 만드는 이유다. 고지는 그저 거기 우뚝 솟은 땅일 뿐이고 이쪽에서 노래하면 저쪽에서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은 점점 자신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한다. 그래서 군인으로서는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서로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이 멀고 가까움과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놓여진 대결구도의 간격을 공감의 시각으로 채워놓는다.

고지 하나를 놓고 이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포착해내는 원근법이 있을까. 그 원근법은 공간적으로도, 인물과 인물 사이에도, 남과 북이라는 대치 상황 속에서도, 또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다양한 시각들을 포섭해낸다. 그리고 이 원근법은 전쟁영화가 가진 위험성과 한계를 ‘고지전’이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써니', 당신의 추억만큼 재밌는 건 없다

'써니'(사진출처:토일렛픽쳐스(주))

익숙한 80년대 풍경.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일렬로 도열해 있는 전경들. 그리고 그들과 대치해 있는 학생들. 일촉즉발의 상황. 그리고 급기야 뒤엉켜버리는 전경들과 학생들, 시민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순간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Joy의 'Touch by touch'. 80년대를 살았던 사람치고 이 잿빛 기억의 시대를 순식간에 발랄한 추억으로 만들어놓은 이 장면에서 빵 터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써니'가 위치한 유쾌한 지점은 바로 이 장면 속에 압축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유쾌하고, 어떻게 보면 도발적인 '써니'의 이 기묘한 조합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광주 민주화 운동을 초반에 겪은 80년대는 시대적으로만 보면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담하기까지 한. 그러나 이것은 사진처럼 찍혀진 현실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기억을 통과해 덧붙여지고 각색된 추억의 그림이 아니다. 기억이란 우리가 겪었던 그 힘겨운 삶과 고통스런 시간들마저 달콤한 추억으로 바꾸어놓는 기묘한 생물이 아닌가. 피가 튀고 심지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살벌한 데모의 현장마저 Joy의 'Touch by touch'가 흐르는 고고장의 한 풍경처럼 발랄해질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써니'가 관객들을 흐뭇하게 만드는 것은 다소 왜곡되어 있지만 그것이 허용되는 추억의 시간대를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재 중년이 된 나미(유호정)가 여고시절 써니파 7공주의 리더였던 춘화(진희경)를 병원에서 만나면서 시작한다. 말기암인 춘화는 죽기 전에 써니파 7공주들이 보고 싶다 말하고 나미는 그녀들을 찾아 추억의 여행을 떠난다. 특별할 것 없는 뻔하디 뻔한 '영화는 사랑을 싣고'류의 스토리인 셈이다. 하지만 '써니'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당대를 살아왔다면 겪었을 만한 공감대 가는 이야기들을 줄줄이 풀어놓는다.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하는 물음에 "얼마 못산대."하는 드라마의 클리쉐 앞에 병실이 온통 뒤집어지는 풍경은 위안 없던 시절 드라마에 푹 빠져 살던 서민들의 씁쓸하지만 우스꽝스런 삶을 공감가게 포착하고, 패싸움에서 기가 눌리자 뒤돌아서며 괜스레 "젊음의 행진 보러 안가냐?"하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당대의 코드들이 우리의 추억을 자극한다.

특히 80년대라면 꼭 있었을 법한 캐릭터들은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늘 고등학교라면 존재하던 18대1의 신화로서 진덕여고 의리짱 춘화(강소라)가 있고, 외모에 집착하는 쌍꺼풀에 목숨 건 못난이 장미(김민영), 욕으로 싸우는 욕쟁이 진희(박진주), 문학소녀 금옥(남보라), 미스코리아를 꿈꾸는 복희(김보미) 그리고 누구나 꿈꾸었을 하이틴 잡지 표지모델 수지(민효린)가 있다. 영화는 이 어디선가 누구나 한번쯤 봤음직한 캐릭터들에, 당대의 코드들인 나이키, 교복자율화, '젊음의 행진'이나 '영11' 같은 TV 프로그램,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소피 마르소 등등 추억의 그림들을 덧붙여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처럼 굳이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코드들만으로 관객들이 저마다 자신의 추억을 끄집어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써니'는 타자의 이야기에서 이제 관객들 자신의 이야기로 전화된다. 물론 추억이라는 필터를 낀 청춘의 달콤 상큼한 이야기로.

무엇보다 '써니'에 깔리는 음악은 이 영화가 전해주는 추억 불러내기 효과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Joy의 'Touch by touch'는 물론이고, 나미의 '빙글빙글'이나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보니엠의 ‘Sunny'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 또 소피 마르소가 주연했던 영화 '라붐'의 주제가로 리차드 샌더슨의 'Reality'가 이 영화를 오마주해 흘러나오는 장면은 '써니'라는 추억 열차를 타는 마법의 열쇠 역할을 한다. 음악만큼 즉각적으로 추억과 접점을 만들어주는 장르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악은 또 얼마나 이성을 무장해제시키며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가.

입소문을 타고 점점 흥행을 향해 달려가는 '써니'의 성공은 추억이 어떻게 대중들을 열광시키는 콘텐츠로 자리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굳이 어떤 특정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그저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것만으로 추억은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추억을 다루는 콘텐츠는 물론 과거라는 부품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모든 게 만들어져 나오는 완제품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것으로 재조립되는 조립품의 특징을 갖는다. 저마다의 기억을 환기시켜 추억으로 조립되는 콘텐츠일수록 저변은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써니'는 이 저변을 넓히기 위해 심지어 '7공주'가 가질 수 있는 여성들만의 공감대라는 틀마저 깨버린다. 여성의 시선이 아니라 남녀를 떠난 인간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담아놓은 것. 그래서 '써니'는 출연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여성이지만 남성들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된다. 그 누구의 것이든, 또 아무리 힘겹다고 하더라도, 추억 속에서 찬란하지 않은 청춘이 있으랴. 눈물이 나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은 그 추억이 갖는 힘겨움과 찬란함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써니'는 그 햇빛 가득한 나날의 한 자락을 환기시키는 유쾌한 영화다.

히틀러와 라디오로 한 판 붙은 말더듬이 왕, '킹스 스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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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

말더듬이가 연설을 했다. 만일 이런 스토리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더듬이가 한 국가의 왕이라면? 흥미를 느낄만하지만 그다지 확 끌만한 매력적인 스토리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하지만 그 말더듬이 왕이 전쟁을 맞아 라디오로 대국민 연설을 해야 한다면? 이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을 듯하다. 말이 가진 힘이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증폭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히틀러를 다룬 저술들이 말해주듯이 라디오는 나치즘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다. 만일 라디오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나치즘도 없었을 것이라 말해질 정도로. 라디오는 전형적인 일방향적인 매체다. 한쪽에서만 말을 한다. 그것은 당연히 듣는 다수를 상정한다. 한쪽이 입이면 다른 한쪽은 무수히 많은 귀가 있다. 선전도구로서 히틀러가 이만한 도구가 없다고 여긴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게다가 라디오가 사용하는 청각이라는 감각은 시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본다는 행위는 능동적인 주의집중을 더 필요로 하지만, 듣는다는 건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그 메시지가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말이 가진 청각적인 특징은 종교적인 힘으로까지 발휘되기도 한다. '성서'에 그토록 많은 메시지들을 우리는 '말씀'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킹스 스피치'는 바로 이 라디오라는 매체가 말을 만나던 그 시대에 벌어지는 정치적인 변화의 상황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앨버트 왕자를 차기 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더듬이 때문에 고민에 빠진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그에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제 왕들은 국민들을 이끌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것보다 라디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앨버트 왕자의 말더듬이를 고치는 인물이 학위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연기자인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왕이 연기를 해야 하는 시대. 미디어 정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조지 6세가 된 앨버트 왕자가 히틀러의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을 보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말은 청산유수네"라고 하는 말은 그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이제 앨버트가 인정하면서 거기에 맞서 말로서 승부해야 될 시점이 다가온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라디오라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한 앨버트가 말더듬이가 된 내적인 문제들, 즉 왕실의 억압을 벗어나는 그 성장의 과정을 담아냄으로서 스토리에 힘을 부여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그 내면을 평민인 로그에게 차츰 열어가는 그 치유의 과정은 두 사람이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지 6세가 말더듬이를 극복하고 연설을 하는 그 장면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그 개인적인 성장이나 극복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여기에는 히틀러로 대변되는 라디오 독재에 맞서는 자가 다름 아닌 말더듬이 왕이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연설문 내용은 통상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영화는 그 연설문의 한 줄 한 줄을 읽어가는 과정을 마치 말더듬이 왕이 벌이는 힘겨운 전투의 한 장면처럼 그려놓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지 6세 앞에 서 있는 로그라는 평민의 존재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은 그 후에도 루즈벨트에 의해 활용된 적이 있었고,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전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굳이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라디오라는 매체의 속성 자체(일방향적, 청각적)가 가진 운명이다. '킹스 스피치'에서 히틀러와 다르게 조지 6세의 라디오 활용이 그려진 것은 거기 로그가 앞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로그는 조지 6세가 연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저를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하라고. 즉 친구로 상정되는 듣는 대상이 서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조지 6세는 진심을 담아 연설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영화는 낭만적이다. 로그와 조지 6세는 그 후로도 친구처럼 나머지 생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라디오 권력자들이 조지 6세처럼 로그 같은 친구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물론 매체는 또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이른바 미디어 정치 시대는 활짝 열렸다. 이미 라디오의 그 일방향적 속성은 인터넷의 쌍방향과 만나고 SNS와 연결되어 어느 쪽으로든 정보가 흘러가는 시대다. 따라서 이 시대에 라디오 같은 미디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면, 이제 말더듬이 같은 외형적 장애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진 건 그 말이 갖는 진심일 것이다. 과연 지금 그 진심은 우리 대중들에게 닿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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