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완’, 예술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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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사진출처:20세기폭스)

“느꼈어요. 저는 완벽했어요.”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무대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건넬 때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 완벽함에 대한 전율을.

‘블랙스완’. 발레를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백조가 아닌 흑조를 다룬다. 그러니 발레라는 백조의 겉모습을 생각하고 극장문을 들어선 관객이라면, 그 충격적인 흑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할 지도 모른다. 휴먼드라마 같은 장르를 기대했다면, 심지어 공포에 가까운 파격적인 영상으로 주인공의 이상 심리를 포착한 이 작품을 과잉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의 겉면이 아니라 그 뒷면을 경험하거나 목도한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그 소름끼치게 충격적인 장면들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과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니나에게서 전율을 느낄 지도 모른다.

백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우아함을 보여주는 발레리나 니나. 솔로이스트로서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 그녀의 꿈이지만, 그 우아함 이상의 욕망의 흑조를 더불어 연기해야 하는 (재해석된)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어떤 역이든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또 늘 완벽해지고 싶은 그녀에게 이 공연을 총감독하고 있는 토마스 르로이(뱅상 카셀)는 말한다. “완벽함이란 통제하는 것만이 아니야, 흘러가게 두는 것이기도 해.” 즉 겉면으로서의 백조가 아닌 내면에 잠재된 욕망으로서의 흑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통제하려는 자신을 버리고 본능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끝없이 통제되도록 훈련되어져 왔다. 발레리나를 꿈꾸었지만 자신을 임신한 것 때문에 그 꿈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늘 죄책감에 빠뜨리는 엄마는 그녀를 오르골을 열면 돌아가는 발레리나 인형처럼 통제하려 한다. 게다가 솔로이스트로 서 있다가 자신에게 밀려난 절망감에 자동차로 뛰어든 베스(위노나 라이더)에 대한 죄책감과, 친구처럼 다가와 “즐기면서 살라”는 릴리(밀라 쿠니스)에 대한 경쟁심리와 두려움은 그녀를 끝없이 괴롭힌다.

백조로서 우아한 척 살아가는 그 세계에 머물렀다면 느끼지 않았을 고통을 그녀는 솔로이스트가 되면서 갖게 된다. 즉 흑조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간 통제해 왔던 자신의 본능을 열어젖혀야 하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본능의 분출은 그것을 통제하려는 자신과 그 주변의 상황들(특히 인물들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공격성으로 복잡하게 얽힌 심리)과의 일대 전쟁을 의미한다. 영화는 니나가 흑조가 되기 위해 겪는 예술가적 투쟁의 과정을 일일이 보여줌으로써 그 내면을 시각화한다.

엄마의 통제를 부정하고, 숨겼던 성적 본능을 분출하며, 베스에 대한 죄책감과 릴리에 대한 경쟁심리를 이겨내는 과정은 그래서 피와 살점이 튀는 끔찍한 장면들로 그려지지만, 그것이 고스란히 한 예술가가 자기 성장을 통해 예술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어떤 감동에 도달하게 만든다. 특히 몸을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발레라는 예술형식의 속성상 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몸의 고통스런 장면들은 끔찍하다기보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머릿속이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등짝을 파고 나오는 날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피부를 뚫는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백조가 흑조가 되는 이 성장과정을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 속에서의 니나의 발레리나로서의 성장과정과,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니나라는 캐릭터의 성장과정, 그리고 이를 연기한 연기자 나탈리 포트만의 성장과정을 중첩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과정을 하나로 묶어낸 영화 역시 예술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의 탄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가를 보여준다. ‘블랙스완’은 멀리서 바라보면 우아한 백조처럼 보이지만 아주 가까이서 보면 피와 눈물이 철철 넘치는 흑조들의 고군분투를 소름에서 전율로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원작만큼 좋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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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합니다'

이미 강풀 원작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본 관객이라면 아마도 첫 장면에서부터 어떤 깊은 울림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김만석(이순재)이 할머니 송씨(윤소정)를 골목길 언덕빼기에서 작은 사고(?)로 처음 만나고, 거의 습관이 된 듯 죽어 들어가는 소리로 "괜찮다"고 말하는 송씨에게 다짜고짜 만석이 "큰 소리로 말해!"하고 소리칠 때부터 마음은 뭉클해진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런 영화다. 원작이 있어 이미 스토리를 다 알고 있어도(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 그리고 이게 가능한 건, 거기 원작을 뛰어넘는 관록의 배우, 이순재가 있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육두문자를 풀풀 쏟아내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늘 따뜻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만석이란 캐릭터를 그만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배우도 없을 것이다. 야동 앞에서는 소년처럼 귀엽다가(야동순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앞에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가 늘그막에 만난 사랑 앞에 수줍게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연기가 보는 이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한참을 웃다가 어느 순간에는 먹먹해지게 만드는 마력은 현빈 못지않다. 도대체 그 검버섯에 주름지고 바짝 마른 얼굴에서 순식간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감정 연기 앞에서는 도무지 눈물을 참아낼 재간이 없어진다.

물론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달리 이순재 원 톱을 세웠지만, 그를 둘러싼 나머지 세 배우, 즉 윤소정, 송재호, 김수미의 연기 호흡을 빼놓고 얘기할 순 없다. 젊어서 부모를 떠나 상경해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까지 잃고는 그 죄 때문에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심지어 이름조차 없어 송씨라 불리는 할머니. 윤소정은 그 할머니의 사정을 만석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그 늘 "괜찮다"를 달고 산 듯한 얼굴로 표현한다. 반듯한 신사에 푸근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송재호의 그 웃음 뒤의 깊은 침묵은 또 어떻고. 물론 누구나 꺼려할만한 치매연기로 보는 이를 웃기기도 하고 애잔하게도 만드는 김수미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관록의 연기자들이 든든히 버텨주자, 강풀 원작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 원작이 갖고 있던 감동 그 이상을 전해준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글도 모르고, 이름도 없는 데다가 심지어 행복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송씨가 송이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사랑을 하게 되고 친구를 사귀게 되고 글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결국 행복도 갖게 되어 한참을 잊고 있었던 소녀 같은 웃음을 웃을 때, 관객들도 똑같은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식들이 다 떠나고 서로 둘만 남아 한 밥을 먹고 한 이불에서 잠을 자면서, "우린 부부다. 한때는 가족이었는데"라고 장군봉(송재호)이 읖조리는 말이 우리의 원죄의식을 건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모든 걸 자식들에게 주었지만 소외되어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욕쟁이 할아버지 만석이 젊은이들에게 욕을 해대는 장면이 오히려 든든하게 여겨진 것도 그래서였을 게다. 강풀이 그려낸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렇게 우리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어르신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끌어낸다. "나이 들어 죽었다고 다 호상이냐"는 호통처럼, 나이 들었다고 감정까지 없는 사람 취급하는 세상의 시선에 눈물과 감동으로써 깊은 질책을 해댄다.

지금껏 강풀 원작의 영화들이 흥행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던 건, 그 원작 스토리가 갖는 힘이 워낙 강한데다, 그 스토리들이 작가에 의해 웹툰에 최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영화는 강풀의 웹툰 원작의 부담감을 이겨내고 있다. 물론 그 힘의 중심에는 이순재를 비롯한 관록의 배우들의 연기가 자리해 있다.

설 가족영화, 어른들의 눈높이, 아이들의 눈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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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영화들

본격적인 설 명절이 시작되면서 영화관은 벌써부터 북새통이다. 특히 이번 명절에는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볼만한 가족영화들이 대거 포진해 있어 주목을 끈다. 1천만 관객 파워를 갖고 있는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와 이준익 감독의 '평양성', 김명민의 코믹 명연기로 주목을 끄는 '조선명탐정', 잭 블랙의 코믹 연기와 걸리버라는 소재로 주목을 끄는 '걸리버 여행기', 또 기존의 공주이미지에서 탈피한 모습으로 돌아온 월트디즈니의 애니메니션 '라푼젤'이 그 작품들이다.

먼저 가족영화에 걸맞게 이 다섯 작품은 각각의 장르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인으로 코믹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조선명탐정'은 코믹 연기에도 명품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김명민이 역시 코믹의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는 오달수와 콤비를 맞춰 말 그대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한다. 정조 시절의 아마도 정약용을 모델로 한 추리이야기 속에 당대의 사회적 문제들, 예를 들어 신분의 문제, 종교의 문제, 빈부의 문제 같은 것들을 코믹하게 녹여냈다.

아이와 함께 모처럼 극장을 찾은 어른들이라면 이 다양한 장르적 재미와 팩션이 던져주는 역사적인 의미, 게다가 추리가 주는 즐거움까지 다양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면 이 웃음의 코드 속에 녹아들어 있는 다양한 함의들을 즐기기는 조금 무리일 수 있다. 게다가 후반부에 급한 속도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반전에 반전은 다소 복잡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민과 오달수의 코믹한 연기에 몰두하며 보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기존 사극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평양성'은 기존 사극에 익숙한 어른들 입장에서는 다소 가벼운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삼국과 당나라와의 심리전은 그리 쉽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 빵빵 터지게 만드는 이문식, 류승룡, 윤제문, 정진영의 연기가 압권이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허용한다면 이 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평양성'은 어떤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는 실화를 소재로 한 스포츠 영화라는 장르에 충실한 작품이다. 코믹한 설정들이 전면에 깔려 있지만, 중반 이후를 지나면서는 말 그대로 눈물 폭풍을 만드는 휴먼드라마다. 청각장애인 야구단과 사고뭉치에 이제 퇴물이 된 한때 야구스타와의 소통이 절절한 감동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강우석 감독의 전작 '이끼'에서 보여주었던 정재영과 유선은 이 작품에서는 완전히 다른 훈훈함을 전해준다. 어른과 아이 모두 편안한 작품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실상 장애인의 현실은 그다지 많이 보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상업영화로서의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걸리버 여행기'는 거인과 난장이를 오가며 일상을 벗어난 판타지의 세계를 다룬 원작 스토리가 가진 장점을 영리하게 풀어내, 어른과 아이의 눈높이를 맞춘 작품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 거인이 되는 잭 블랙의 상황 자체가 주는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고, 어른들 입장에서는 소심하게 버텨내고 살아온 잭 블랙의 일상 탈출에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어른과 아이들에게 모두 충분한 재미를 주지만, 비판적인 관객이라면 그 지나친 미국 문화 우월의식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라푼젤'은 기존 라푼젤 스토리가 갖는 공주 이야기의 컨셉트를 확 뒤집음으로써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공주는 '엽기적인 그녀'이고 왕자는 좀도둑에 가깝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현재적인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특히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어른들이라면 아이와 손잡고 들어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흔히들 가족영화라고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면 각자 반응은 상이하게 나오기 마련이다. 가족영화는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본다는 점에서 이 두 시각차를 어떻게 줄여나가는가가 관건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올해 설 가족영화들은 비교적 이 시각차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연휴 동안 온 가족이 함께 취향에 맞는 영화 한 편 챙겨보는 건 어떨까.

'라스트 갓파더', 옛 영구가 그리운 이유

'슬랩스틱'은 말 그대로 '막대기 같은 것으로 철썩 때리는' 형태로 웃기는 코미디다. 이렇게 액면 그대로 이 문구를 해석하면 마치 이 코미디는 맥락도 없고 의미도 없이 자빠지고 두드려 맞는 가학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런 식의 관점을 끌어들여 군부독재 시절에 '슬랩스틱'은 저질 코미디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을 보면서 그 누가 저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참 보다보면 그 깊은 통찰에 심지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건 '슬랩스틱'의 웃음이 그저 아동기적인 유희가 아니라, 그 밑바탕에 어떤 페이소스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은 '모던타임즈'를 통해 산업화되어가는 사회를 통찰했고, '독재자'를 통해 비이성적인 독재의 면면을 통렬한 웃음으로 꼬집었다. 길을 떠나는 채플린의 뒷모습이 어딘지 쓸쓸하고 깊은 인생의 맛을 느끼게 되는 건 그런 진지함 때문이다.

심형래가 '변방의 북소리'나 '동물의 왕국'에서 어딘지 덜 떨어진 영구라는 캐릭터로 때리고 맞고 쓰러지길 반복할 때, 언뜻 찰리 채플린의 면면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저 잘났다고 떠들어댈 때, 이 영구라는 바보는 한참 덜 떨어졌지만 그런 잘난 이들의 뒤통수를 쳐대며 대중들의 마음 한 구석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의 슬랩스틱에는 이른바 서열을 뒤집는 스토리가 깔려있었다. 여럿이 등장하지만 멀쩡한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늘 당하는 입장에 선 영구는 후반부에 가서는 그 바보스러움으로 그 멀쩡한 캐릭터들을 오히려 곤경에 빠뜨린다. 심형래를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그가 한국적 정서 속에 담겨진 서민정신을 영구라는 캐릭터를 통해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라스트 갓파더'라는 마피아 세계로 대변되는 미국 사회 속으로 들어간 영구는 어떤 맥락으로 대중들의 마음 한 구석을 채워주고 있을까. 마피아의 아들이 영구였다는 설정은 흥미롭지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영구가 그 이질적인 미국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부분을 꼬집어내느냐는 것이다. 아쉽게도 '라스트 갓파더'에는 바로 이 통찰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색하게 대부의 품에 안기고, 그 후부터는 적응 안 되는 마피아 세계에서 방망이로 조직원의 머리를 때리고, 진공청소기로 신체를 빨아들이는 식으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여러 인터뷰에서 심형래가 밝힌 대로 '라스트 갓파더'는 대단히 보편적인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대결이 아닌 화해 같은 이야기들은 너무나 쉬워서 심지어 단순하게까지 보인다. 여기에 할리우드 정서를 감안한 장면들과 스토리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대부'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그리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식의 멜로... 게다가 "이젠 터프해지겠어"하며 동네로 나와 롱스커트의 밑단을 잘라 미니스커트 산업의 원조가 되는 식의 이야기는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라스트 갓파더'는 '보편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런 '세계화 전략'에 대한 과도한 의식은 영구 특유의 특수성에 기반한 서민정신을 희석시킨다. 영구의 행동들은 분명 웃음을 주지만 그 뒤에 어떤 페이소스를 남기지 못한다. 심형래는 인터뷰를 통해 찰리 채플린이나 미스터빈 같은 세계적인 캐릭터를 거론했다. 그런 캐릭터를 꿈꾼다는 것이다. 그래서 캐릭터가 가진 특수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누구나 보면 고개를 끄덕일 보편성에 더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은 캐릭터 자체를 훼손시킨다. 보편성은 특수성(지역성)을 지워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 그것이 다르게 보여도 누구나 갖는 특징이라는 걸 끄집어낼 때 생겨나는 것이다. 채플린은 대단히 미국적인 바탕(이를테면 대공황 같은)에서 만들어진 캐릭터지만 지금까지도 우리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 특수성이 진지하고 리얼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보편성까지 획득하는 것이다. 미스터빈은 영국인들 특유의 위선을 꼬집어냄으로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허위의식이라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라스트 갓파더'가 아쉬운 건, 웃음은 주지만 그 여운이 없다는 점이다. 보편성에 몰두하다 보니 지역적 특수성이 갖는 구체적인 삶의 페이소스가 묻어나질 않는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심형래가 가진 어찌 보면 단순한 '세계화 전략' 때문으로 보인다. 도전정신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방법이 제대로 된 것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디워'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작품 자체의 얼개가 느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의 한국적 정서가 녹아들었어야 할 이무기에서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 시장을 두드리기 위해 세계인들에게 맞추는 전략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있다. 소셜 네트워크로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그래서 어떤 현지 진출도 없이 지구 반대편 하얀 피부에 금발의 머리를 한 이국인들이 소녀시대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지금, 보편성은 오히려 그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찾아진다. 글로벌이 아닌 글로컬(글로벌+로컬)의 시대가 아닌가. 극장문을 나서며 옛 영구가 오히려 그리웠던 이유는 아마도 '라스트 갓파더'의 영구에는 없는 그 지역적인 정서에서 비롯된 통렬함이 부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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