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의 마지막 로맨스',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란?

중년의 나이에 '마지막 기회'라고 한다면 무엇이 떠오를까. 혹자는 회사생활을 떠올릴 것이다. 사오정에 오륙도인 세상 아닌가.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에서 본래 피아노 작곡가였지만 광고음악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비(더스틴 호프만)가 그렇다. 그는 달라지고 있는 작곡 환경과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들에게 밀려 회사생활의 거의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이것은 회사생활만이 아니다. 이혼한 아내는 꽤 능력 있는 남편과 재혼했고, 자신의 친딸은 새 아빠의 손을 잡고 결혼식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과 소원해졌다. 딸의 결혼식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는 하비에게 사장은 이번 프로젝트가 그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통보한다.

본인은 열심히 살아왔지만 일에서도 가족에게도 점차 밀려나 있는 하비는 점점 절망의 끝에 몰리게 된다. 자신의 딸의 결혼식이면서도 철저히 이방인 취급을 받는 하비는 결국 회사로부터 해고통보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그 끝자락에서 하비는 '새로운 기회'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하비 앞에 나타난 여인 케이트(엠마 톰슨)이다. 누군가에게는 설렘의 공간이 될 공항에서 설문조사원으로 일하며 노처녀로 나이 들어버린 그녀는 철저히 들러리의 삶을 살아온다. 뭐 하나 기대할 것 없고, 또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아픔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그 평범한 삶의 껍질을 깨고 나가지 못한다.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비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하비와 케이트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을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그려낸다. 초반부 하비와 케이트의 삶이 병치되며 엇갈려 나가다가, 공항의 한 바에서 절망의 한 자락씩을 쥐고 마주앉게 되고, 또 나란히 걸어가다가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해주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이 과정은 단 며칠 간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중년 멜로가 청춘들의 그것처럼 불꽃이 튀고 격정적일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의 대사 하나하나 인물들의 행동과 연기 하나하나는 지독히도 공감이 갈 정도로 섬세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톰슨이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내면 연기가 그저 얼굴만 쳐다봐도 느껴질 정도로 그 심리상태를 제대로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딸에게 결혼식장에 새 아빠와 들어가겠다고 통보를 받는 더스틴 호프만의 무심한 듯한 얼굴 속에는 깊은 고통을 견뎌내는 인고와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는 케이트에게 하비가 처음 말을 걸 때, 그 농담 속에 누군가와 지독히도 대화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끼게 할 정도로 깊어졌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잡은 작은 희망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그 안간힘은 중년들이라면 절절히 공감할만한 대목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와서 '마지막 기회'는 그래서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일에 있어서의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마지막 기회', 즉 케이트와의 사랑을 의미하게 되는 것. 'Last Chance Harvey'라는 이 작품의 원제는 바로 이 중년에 맞닥뜨린 두 가지 종류의 기회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주인공이 되어본 적 없고 들러리로서만 살아온 케이트가 저 멀리 도망칠 때, 붙잡기 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기다리는 하비의 모습은 그 어떤 격정적인 청춘멜로의 클라이맥스 이상의 감동을 준다. 중년들이라면 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사랑의 의미를 아마도 깊이 공감할 것이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이 가을 중년들의 스산해진 몸와 마음을 한껏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영화다.

'심야의 FM'은 어떻게 수애의 껍질을 깼나

연기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연기력? 외모?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꼽는다. 신뢰성 있는 목소리는 연기와 외모에 어떤 아우라를 갖게 해준다. 수애는 그런 배우다. 그녀의 착 가라앉은 안정된 목소리는 믿음을 주며 심지어 대단히 분위기 있는 여성의 아우라를 덧씌워준다. 그런 목소리로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면 웬만한 사내들은 그걸로 넉다운이다. 수애는 목소리를 타고난 여배우다.

그런 그녀는 왜 자신의 소리를 부정하는 영화를 찍었을까. '심야의 FM'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를 장르로 삼고 있지만 소리로 시작해 소리로 끝나는 소리에 관한 영화다. 수애는 '심야의 FM'을 두 시간 동안 진행하는 DJ다. 이렇게 분위기 있는 목소리가 고요한 심야에 울려 퍼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수애의 신뢰가 가는 목소리는 앵커였다가 DJ가 된 선영이라는 캐릭터의 이력을 단박에 수긍하게 해준다. 게다가 그녀는 방송 멘트의 영역을 넘어서더라도 할 말은 하는 여자다.

문제는 바로 이 마성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빠져버려 현실감각조차 잃어버린 한동수라는 연쇄살인범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지나치게 현실로서 추종하며 그저 말일 뿐인 진술들을 실행으로까지 옮기는 연쇄살인범. 한동수를 라디오라는 미디어에 열광하는 대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미디어, 특히 라디오가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히틀러가 대중들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 강력한 힘을 일찍이 보여주었던 라디오. 라디오로 대변되는 미디어의 힘.

하지만 연쇄살인범이 선영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그녀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신뢰감 가는 목소리는 차츰 떨리고 흔들리고 결국에는 방송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욕설까지 튀어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선영은 자신이 그동안 그토록 떠들어왔던 수많은 말들이 의심스러워진다. 이미 발화되는 순간 기억 속에서조차 지워버린 자신의 그 말들이 듣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힘으로 작용해왔다는 것. 그녀의 신뢰감 있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댔을까.

이렇게 수많은 말을 쏟아내며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우며 살아온 그녀가 이제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연쇄살인범의 말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겨야 된다는 것은 상황의 역전이다. 수 년 간 쏟아낸 말들의 보복을 두 시간 동안 압축해서 받아내며 그녀가 구해야할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말을 하지 못하는 딸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분명히 해준다. 우리가 던지는 수많은 말들, 때론 감미로운 목소리로 때론 강압적임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움직인 그 말은 과연 얼마나 진심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진정한 소통에 이르렀을까. 라디오 같은 미디어는 과연 그 말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는 다시 수애라는 목소리를 타고 난 여배우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늘 단아하고 분위기 있는 그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확실한 신뢰감을 주었지만, 그것이 과연 그녀가 가진 전부일까. 혹시 그녀의 더 많은 모습들은 목소리로 덮여져 보여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수애는 이 영화 속 선영이 겪은 껍질을 깨는 고통을 연기하면서 자신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목된 그 목소리를 깨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앰블런스를 타고 가면서 그녀가 "저기요 라디오 좀 꺼주세요"라고 말할 때, 혹시 그것은 더 이상 늘 단아함과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규정되던 자신의 이미지를 꺼달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오늘이 여러분과의 마지막 밤이네요"라고 말할 때도.

"영웅은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한 대목이면서 이 영화 속에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 대사는 그래서 수애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심야의 FM', 그 두 시간은 온전히 수애가 연기자로서 한 껍질을 벗어내는 시간이 되었다.

외국인 근로자와 청년 실업은 어떻게 만났나

육상효 감독의 영화는 어딘지 사람 냄새가 난다. 첫 단편작이었던 '슬픈 열대'가 그랬고, 시나리오로 청룡영화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에서 상을 받았던 '장미빛 인생'이 그렇다. 그는 사회의 그늘 속에 가려진 낮은 존재들을 프레임 속에 넣어 그들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방가 방가'가 비추는 그늘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옥 같은 취업전쟁 속에 스펙 없이 내던져진 고개 숙인 청춘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진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영화는 마치 '폭소클럽'에서 "사장님 나빠요"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흉내냈던 블랑카(정철규)처럼 외국인 특유의 말투가 주는 웃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인 김인권이 얼굴을 들이민다. "저는 부탄 사람입니다"하고 꺼내는 그의 말은 그 '내추럴 본 동남아 삘'이 나는 김인권의 얼굴 때문에 빵 터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스펙 없이, 그럴 듯한 외모 없이 취업이란 언감생심인 우리 사회의 차가운 현실이다.

취업이 안돼 부탄 사람으로 위장해 외국인 노동자로 취업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나는 부탄사람입니다'라는 말에는 먼저 웃음이 묻어나지만, 한국인이 한국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게 된 그 현실은 눈물 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이 낮은 자들의 생고생담을 리얼하게 보여주면서 풍자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부탄 사람으로 위장한 방가(김인권)는 취업한 의자 공장에서 심지어 외국인 노동자의 구박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면서 이 청년 실업자와 외국인 노동자는 그 낮은 위치에서 맞이하는 똑같은 사회의 냉대를 공감하게 된다.

인간 취급 받지 못하는 건, 취업을 못하는 청년 실업자들이나, 또 취업을 했다고 해도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온갖 착취를 당하면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비정규직이나 다르지 않다. 영화는 이처럼 가장 낮은 지대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의 문제를 바라본다. 하지만 놀라운 건 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들에 의해 영화가 지나치게 심각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육상효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김인권이라는 배우가 가진 발군의 코믹 연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을 터트리게 하고, 또 가슴 한 구석을 따뜻하게 만든다. 영화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방가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욕 강의'를 하는 장면은 이 낮은 자들의 심정을 담아내면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욕 먹기를 밥 먹듯 하며 살아왔으리라 짐작되는(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욕에 익숙하다) 그들이 거꾸로 욕을 배워 욕하던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통쾌함. '강아지 계열 17번'에 해당하는 욕은 어쩌면 이 힘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하지만 강력한 저항처럼 여겨진다.

물론 영화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현실에 침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전망을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하려는 주제의식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즉 실컷 웃은 뒤에 남는 진한 가슴 저림은 이 영화의 전망이 하나의 현실이었으면 하는(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 깊은 바람에서 나오는 것이다.

김인권이라는 배우는 어쩌면 이 영화 속 방가가 느꼈던 그 감정을 영화판에서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꽃미남이 아니면 주연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늘 주변에서 머물렀던 그가, 영화 속에서 "나는 한국사람 입니다. 한국에서 일하고 한국에서 돈 벌고 한국에서 밥 먹고 살아가는 나는 한국사람 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한국사람'이라는 지칭이 마치 '배우'로도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주변인들, 즉 외국인 근로자나 스펙 없는 청년 실업자 그리고 김인권처럼 만년 감초로 불리던 배우가 주연이 되는 영화. '방가 방가'가 유쾌한 건 그 전복이 주는 통쾌함 때문이다.

'무적자', 영웅은 있지만 본색은 없다

'무적자'라는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당할 적이 없는 자’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국적이 없는 자’란 뜻이다. 80년대 홍콩 느와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본색’은, 2010년 우리나라로 오는 과정에서 그 시대적 간극과 국가적인 정서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이런 변화를 모색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국적이 없는 자’란 의미의 ‘무적자’는 탈북자로서 국내에 들어와 무기밀매를 하며 살아가는 김혁(주진모)과 영춘(송승헌) 그리고 김혁의 동생 김철(김강우)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써 ‘영웅본색’이라는 느와르는 남북문제 같은 우리식의 의미가 덧씌워지게 된다.

혹자들은 이것이 흥미롭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 탈북자가 갖는 의미가 ‘영웅본색’이라는 스토리 속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이다. 이 영화가 다루어야 할 것은 형제애나 우정이 뒤섞인 액션 느와르이지 탈북자들의 애환이 아니다. 따라서 탈북자 설정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김혁과 영춘이 부산에서 무기물매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거가 탈북자들이 갖는 무국적자 같은 위치라면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존재해야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부연 설명이 없다. 그저 탈북자라면 어딘지 절망적이고 호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바탕에 깔아놓고 있을 뿐이다.

김혁의 동생, 김철이 경찰이 돼서 한 조직폭력배를 심문하는 장면은 그래서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너 사람 죽여본 적 있어? 너 사람 고기 먹어본 적 있어?”하고 물으며 물론 과장이 섞인 것이겠지만 북한에서 사람 고기를 먹게 된 사연을 얘기할 때, 그 얘기에 부들부들 떠는 폭력배는 어딘지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영웅본색’이라는 느와르 장르가 사실은 실제 현실이라기보다는 과장된 이야기나 판타지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무적자’는 여기에 갑자기 현실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것은 ‘영웅본색’에서 쌍권총이나 기관총을 마구 쏘아대고 아무리 적이 많아도 죽지 않는 소마(주윤발) 같은 인물이 하나의 장르적 재미로서 용인됐던 것과는 상반된 결과다.

‘무적자’에 등장하는 총과 유탄 발사기, 기관총이 생뚱맞아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는 홍콩이라는 떨어진 공간만큼, 또 느와르 장르라는 과장이 용인되는 공간만큼 ‘영웅본색’의 비현실적인 장면들을 받아들였지만, ‘무적자’는 그렇지 못하다. ‘무적자’에는 탈북자라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거기에 들어가 있고, 또 그것도 부산이라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친숙한 현실공간이 들어있다.

우리네 액션에 대해 세계가 주목한 것은 그것이 장르적 재미를 주면서도 꽤 현실적인 연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주먹을 주고받거나 폼 잡고 총을 쏴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막싸움 같은 액션들은 그 장면에 실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무적자’가 가진 액션은 그렇지 못하다. 홍콩 느와르의 향수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그 총기 액션과 우리네 정서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적자’가 홍콩 느와르의 향수를 자극할만한 통쾌한 액션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또 그렇다고 우리식의 정서들(예를 들면 탈북자 문제 같은)에 천착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느와르를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드라마로 그릴 것인지, 어정쩡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느와르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서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기 쉽다. ‘무적자’가 결과적으로 국적 없는 작품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이 시대와 국가를 넘어선 혼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