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신구세대를 가로지르다

그저 지나쳤으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런 시골마을. 이제 개발의 손길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지만 도시인의 마음으로 보면 심지어 살고 싶을 정도로 한적한 그런 풍경. 그 풍경은 과연 아름답기만 한 걸까. 거기 덤불 아래, 세워진 집 아래에는 뭔가 숨겨진 시대의 생채기가 남아있지 않을까. '이끼'는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영화다. 어느 날 그 동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젊은 청년은 이곳으로 들어와 그 덤불을 들춰보고는 거기 무언가 이상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이상함은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다. 이장 천용덕(정재영)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마을 사람들이나, 마치 파놉티콘을 연상시키는 이장의 집에 의해 감시되는 마을. 의절한 채 살아왔던 아버지의 부음으로 시골동네를 찾은 유해국(박해일)은 이질적인 존재로서 단박에 그 분위기를 감지해낸다. 아버지가 혹시 살해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 속에서 마을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몰랐던 동네의 숨겨진 비밀들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드러나면서 해국은 점점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윤태호의 웹툰을 영화화한 '이끼'는 상영 전부터 이미 화제가 된 작품. 웹툰이 게재될 때 이미 18건의 영화화 제의가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화 될 때 기대만큼 우려도 많은 작품이었다. 영화화된 웹툰이 거의 성공을 거둔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50만 관객을 돌파한 '이끼'는 이제 웹툰의 첫 번째 성공사례로 꼽힐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어떤 점이 '이끼'의 성공을 이끈 것일까. 그 해답은 신구세대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이야기 구조에 있다.

이 영화의 대결구도는 천용덕으로 대변되는 개발시대의 잔재와 유해국으로 대변되는 신세대적 감성의 부딪침으로 그려진다. 즉 유해국의 아버지인 유목형은 월남전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인물이고, 천용덕은 이 폭력의 시대에 폭력으로 무장하곤 돈과 권력을 탐하는 형사였으며,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개발시대의 욕망 한 자락을 쥐고 죄를 지은 인물들이었다. 즉 현 시대의 젊은이인 유해국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죽음을 통한) 이 이상한 마을로 들어와 천용덕이 세워놓은 왕국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장르는 스릴러지만 그 아래에는 현재의 풍요 속에 감춰진 시대적 아픔을 들춰낸다는 점에서 사회극의 요소를 갖고 있다.

웹툰이 그 매체적 성격상 젊은 세대를 주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웹상에서의 폭발적인 인기가 영화로 이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끼'는 신구 세대의 문제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웹툰이면서도 그 타깃의 폭이 넓다. 영화로서 성공하려면 좀 더 넓은 타깃을 가져야 한다. 특히 중장년층의 호응은 절대적이다. '이끼'는 바로 그 점을 만족시켜주는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공간으로서의 도시와 농촌이, 존재로서의 인간과 신이 교차하는 이 작품 속에는 70년대 개발시대의 정서에서부터 2010년도 현재의 정서까지가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이고, 어느 한 시골동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 전체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웹툰에서 금세 튀어나온 듯한 싱크로율 100%의 박해일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정재영의 연기대결도 볼만하다. 무엇보다 유해진이라는 배우는 이 자칫 끝없는 긴장으로 피곤해질 관객들에게 간간이 시원한 소나기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2시간 40분이라는 런닝타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가 구축해놓은 팽팽한 스토리와 백전노장 강우석 감독의 좀더 대중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영화적 해석은 이 긴 시간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화에 속도감을 제공한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톡톡 튀는 신세대 작가와 여전히 저력을 갖고 있는 기성세대 강우석 감독의 만남이기도 하다.

영화는 위치타 공항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마치 가이드를 따라가듯 톰 크루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공항 내 안내방송은 이 롤러코스터에 이제 막 톰 크루즈의 안내를 받아 탑승한 관객들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빌겠습니다"하고 말한다. 그리고 안전한 일상 속에 살아왔던 우리들을 때론 아찔하고 때론 로맨틱한 두 시간 짜리 여행 속으로 데려간다.

우리를 대신할 영화 속 인물은 캐머런 디아즈. 그녀는 '나잇 앤 데이'라는 영화적 판타지의 세계와 현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감정이입된 관객들은 그녀가 느끼는 대로 위험해보이면서도 어딘지 매력으로 넘치는 톰 크루즈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 즐거운 여행을 깨뜨릴 수 있는 지독한 상황 속에 들어가면 친절하게도 톰 크루즈는 그녀에게 잠이 오는 약을 먹인다. 그러니 위험한 상황은 지워지고 대신 눈을 뜨면 꿈꾸던 곳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톰 크루즈는 이 여행의 가이드이자, 친절한 기사(Knight)다. 관객을 공주처럼 대하는.

'나잇 앤 데이'는 액션물과 로맨틱 코미디를 절묘하게 엮어놓았다. 그것은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와 각종 로맨틱 코미디에서 발군의 푼수끼를 보여주었던 캐머런 디아즈의 조합 그대로다. 영화는 스파이 남편의 모험 속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간 아내의 이야기를 담았던 '트루 라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과도한 액션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깨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 영화는 톰 크루즈라는 농담 잘 하고 여성에 대한 배려가 출중한 데다 잘 생기기까지 한 인물을 투여해 상황을 늘 말랑말랑하게 바꿔놓는다. 여성들이 진짜 좋아할만한 '로맨틱 액션'. 위험해보여도 안전함을 보장하는 짜릿한 일상탈출 롤러코스터가 '나잇 앤 데이'다.

놀이공원에 즐비한 롤러코스터들이 우리에게 말하듯, 이 영화는 '안전한 삶'이 가진 무료함을 '죽음'이라고까지 말한다. 톰 크루즈가 캐머런 디아즈에게 정보조직이 당신을 찾아갈 것이고 '안전'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건 "당신을 죽이겠다"는 말이니 도망치라고 하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의 안전함을 벗어나 위험하지만 짜릿한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이 어디 쉬운 일인가. 캐머런 디아즈는 모험과 안전 사이에서 갈등한다. 대부분의 우리가 그렇듯이 '지금'이 아닌 '언젠가'로 꿈을 미루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라는 말은 톰 크루즈의 말대로 '위험한 말'이다.

영화는 이 '언젠가'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를(어쩌면 우리를) '지금'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녀는 톰 크루즈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가이드와 함께 알프스로 외딴 섬으로 오스트리아로 스페인으로 날아간다. 마치 비행기에서 푹 자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자고 나면 그 꿈꾸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다. 이처럼 '나잇 앤 데이'는 우리들이 원하고 꿈꾸는 세계를 두 시간 짜리 롤러코스터로 압축해 놓는다. 부담 없고, 신나고, 로맨틱한, 일상에 지쳐 잊고 있던 그 짜릿함에 열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롤러코스터도 이 정도면 꽤 타볼만한 가치가 있다 느끼게 하는 영화, 바로 '나잇 앤 데이'다.

탑의 눈빛으로 기억되는 영화, '포화 속으로'

'포화 속으로'의 전쟁 스펙터클은 한 편의 액션영화를 보는 것처럼 숨 가쁘고 정신없을 정도로 현란하며 심지어 때론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화려한 영상의 박진감 속에 빠져들 정도다. 하지만 그 스펙터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답답해진다. 많은 이들이 영화 개봉 전부터 불거져 나왔던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던 문제나, 특정 집단의 자본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로 인해 이 영화가 반공영화일 거라는 우려를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반공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반공영화가 아닌 이유는 당연하다. 상업영화이기 때문이다. 70년대도 아니고 2010년도에 반공영화는 대중들이 공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품성이 없다. 그래서 주인공 장범(탑)이, 죽어가며 '오마이'를 외치는 어린 북한병사를 처음으로 확인사살하고는 '그들 역시 괴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조금은 생뚱맞아 보인다. 반공을 주창하던 시기는 전후의 일이지, 전쟁이 막 벌어지던 당대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장면은 상업영화로서 반공 냄새를 없애려는 안간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반공영화가 아니라는 것이 반전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초반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전투장면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며 포항에 학도병을 놔두고 가버리는 강석대 대위(김승우).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 같은 인민군 776부대를 이끄는 박무랑(차승원). 이들은 어느 편이라기보다는 모두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던져진 그저 싸워야 하고 이겨야 살아남는 비슷비슷한 존재들처럼 그려진다. 한바탕 전투의 소란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장범의 넋 나간 얼굴과, 새로 온 학도병들을 장범의 손에 맡긴 채 떠나가며 강석대 대위가 "너희들은 군인인가 아닌가"를 묻는 초반부의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가 마치 반전영화인 것 같은 인상을 던져준다.

하지만 국군이 떠나가고 포항에 남은 학도병들은 이상하게도 이 덧없는 어른들의 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자가발전시키며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진다. 영화 후반부에 장범이 "우리는 군인인가 아닌가"를 선창하듯 질문하고, 다른 학도병들이 "군인이다!"라고 선언하는 장면부터, 거의 초인처럼 총을 쏴대는 장범과 갑조(권상우) 앞뒤로 마치 게임처럼 우수수 쓰러져버리는 북한 병사들의 모습은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논조는 이렇게 바뀐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조국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결국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전쟁은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

이 쉽게 드러나는 영화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장범을 연기하는 탑의 눈빛이다.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의 두려움과 순수함과 강인함, 그리고 슬픔이 교차하는 그 눈빛은 많은 걸 얘기해준다. 영화를 보다가 혹시 눈물이 났다면 그것은 영화가 꾸며놓은 화려한 영상 때문도 아니고, 조악하지만 꾸역꾸역 집어넣은 모성애적인 관점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는 탑의 슬픈 눈빛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탑의 눈빛은 이 영화와 이 영화가 방영되는 2010년도의 우리네 청년들의 눈빛을 닮았다. 마치 왜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나갔다가 죽음을 맞이한 학도병들처럼, 여전히 이런 국가의 메시지 속에 던져진 채 그 싸움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상에 여전히 편입되기를 강요받아야 하는 청년들의 슬픔.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뒤늦게 돌아온 강석대 대위가 장범을 안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어른들의 전쟁 속에 무참히 동원된 학도병에 대한 미안함, 혹은 그래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어른들의 시각에 대한 미안함. 탑의 슬픈 눈빛이 아픈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때문이다.

'방자전', 김대우식 유쾌하고 음란한 도발

'방자전'의 상상력은 음란하다. 아니 어쩌면 이건 전작 '음란서생'에서 이미 싹을 보였던 김대우 감독의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춘향전'을 뒤집는 이 이야기에서 춘향이는 더 이상 정절을 지킨 열녀가 아니고, 이몽룡은 사랑의 맹세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다. 변학도는 탐관오리의 표상이 아닌 다만 성적 취향이 변태적인 인물일 뿐이며, 물론 방자도 그저 몽룡과 춘향이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던 그 방자가 아니다.

성욕이나 성공 같은 욕망에 솔직하고 그것을 서로 이해할 정도로 쿨한 그들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현대인에 더 가깝다. 우리가 '방자전'의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사극이라는 과거의 지대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현대어법은 미풍양속이란 이름 위에 존속하는 권위의 엉덩이를 쿡쿡 찌른다. 그러니 어찌 보면 '방자전'의 음란함은 지배계층의 눈에는 꽤나 위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리 고전 중의 고전이고, 몇 년 마다 계속 반복되어 리메이크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21세기에 같은 정절의 이야기로서 '춘향전'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고 시선은 사극이 역사를 버릴 정도로 낮아졌다. 게다가 '춘향전'은 역사도 아닌 그저 허구적인 작품일 뿐이다. 따라서 '춘향전'에 내포된 기존 체제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을 '방자전'에서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니 '방자전'의 이야기는 철저히 현대적일 수밖에 없다. 몽룡이 춘향의 마음을 달뜨게 하기 위해 구사했다고 주장하는 '차게 굴기'는 '짐짓 일부러 쿨하게 구는' 현재의 연애법이고, 춘향이 몽룡의 마음을 동하게 하기 위해 보냈다는 '은꼴편(은근히 꼴리는 편지)'은 '은꼴사(은근히 꼴리는 사진)' 같은 현대적 은어의 패러디다.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현대어법이어서인지 그 사고방식 또한 현대적이다. '방자전'에는 물론 몽룡과 방자 같은 계급이 존재하지만, 그 둘이 춘향을 사이에 두고 경쟁을 벌이는 시퀀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계급이 주는 무게감은 미미하다. 어찌 보면 부모 잘 만난 몽룡과 그렇지 못한 방자를 보는 것만 같다.

'춘향전'이라는 미담의 탄생 뒤에 숨겨진 적나라한 현실을 고발하는 '방자전'은 방자의 시각을 집어넣어 '춘향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김대우식의 도발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훼손했다는 우려 섞인 비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방자전'을 고전과 비견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방자전'은 더 이상 옛이야기가 아니라 작금의 세태를 드러내는 현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 사랑마저도 미담으로 조작하는 현실, 신분상승을 위해 기꺼이 순정을 포기하는 현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순정. 그래서 차분히 바라보면 그것 또한 하나의 현대적인 미담으로 보여지는 시선. '방자전'의 음란함은 그 과감한 노출수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음란함 그 자체보다는 그 엄밀한 신분구조 속에서도 음란한 상상을 하는 그 도발이 음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음란함이 통쾌함을 주는 것은 속물근성 가득한 현대적 인물들이 고전을 빌어 뒤틀어지는 풍자가 현대인들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주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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