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완벽 빙의된 김태리, 그 성장서사에 시청자도 빠져든다

정년이

우리 소리가 이토록 힙했던가.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는 먼저 채공선이 부르는 ‘남원산성’으로 눈과 귀를 매료시킨다. 눈 내리는 어둑한 밤, 유려한 한옥집의 풍광 위로 낭낭하게 울려 퍼지는 ‘남원산성’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이상하게 애절하게 만든다. “소리를 하면은 속이 뻥 뚫리는 거 같아 갖고 좋던디요.” 소리꾼이 되고 싶다는 공선에게 명창 임진(강지은)이 화려함 때문이냐고 묻자 공선이 하는 그 말은 소리가 가진 진짜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한 마디로 꺼내놓는다. “이 가슴에 뭐가 탁 맥힌 것맨치 답답하고 외롭고 할 때마다 소리를 하다 봉께는 그리 되었구만이라.” 

 

때는 1931년 일제강점기다. 춥디 추운 겨울 눈 내리는 한데서 달달 떨며 문 열어주길 기다리는 공선네 부녀처럼 서민들의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가슴 한 가운데 꽉 막힌 무언가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살 수밖에 없던 시절, 소리는 그 막힌 걸 뚫어주고 풀어주는 힘이 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1956년 목포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먼저 들려오는 건 “어기야 디야 어기야 어야 디야-” 하는 노동요를 부르며 뻘밭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다. 전쟁이 끝나고 피폐해진 삶에 그 때라고 가슴 한 가운데를 꽉 막아세우는 답답한 현실이 없었을까. 

 

시장 통에서 잡은 생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가는 정년이네 가족은 번번히 자릿세를 내라며 행패를 부리는 무리들 때문에 힘겨워 한다. 그렇게 현실에 짓밟혀 꿈이라는 건 가져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살아가면서 정년이의 가슴에도 무겁디 무거운 돌덩이가 생겼던 모양이다. 엄마가 그토록 반대하는 소리를 자꾸만 하고 싶고, 그래서 시장통에서 ‘남원산성’을 부른 게 그의 삶에 변곡점을 만들어줬다. 그 소리를 듣고 단박에 천재성을 타고 났다는 걸 간파한 매란국극의 스타 문옥경(정은채)이 그에게 자신이 하는 국극 ‘자명고’의 티켓을 주며 보러 오라고 한 것이다. 그 국극을 보고 난 후 정년이는 드디어 꿈을 갖게 된다. 자신도 문옥경 같은 국극의 스타가 되겠다고. ‘정년이’는 바로 이 청춘이 꿈을 향해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다. 

 

워낙 인기 웹툰으로 잘 알려진 ‘정년이’는 드라마로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그게 가능할까 싶은 몇 가지 난점들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 첫 번째는 웹툰의 생명력 넘치는 정년이라는 캐릭터를 과연 누가 싱크로율을 맞춰 연기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고, 두 번째는 국극이라는 소재의 특성상 소리를 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시청자들이 설득될 수 있을만큼의 수준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또한 원작이 가진 퀴어적 색깔을 좀더 보편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가능할까 싶은 면도 난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막 방영을 시작한 ‘정년이’를 보니 이런 난점들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단박에 알게 된다. 그건 마치 저 첫 장면에 등장하는 명창 임진이 공선의 소리를 듣고 그 진심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은(혹은 문옥경이 정년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대본과 연출 위에서 완벽하게 정년이라는 캐릭터에 빙의된 김태리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얹어져 시청자들을 곧바로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원작이 가진 퀴어적 요소들을 드라마는 직접적인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기보다는 드라마 전체의 서사 안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방식을 선택했다. 즉 문옥경과 윤정년의 관계는 마치 새내기를 이끌어주는 선배 같은 관계로 그려지지만 어딘지 그 이상의 애정이 묻어나고, 또 정년에게 애정을 주는 문옥경을 바라보는 서혜랑(김윤혜)의 시선에는 동료 이상의 질투 같은 게 느껴진다. 남성 주인공이 없다는 사실만 봐도, 이 작품이 가진 온전한 여성서사의 색깔을 이해하게 된다. 굳이 퀴어적 요소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아도 여성들 간의 우정과 애정 혹은 애증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우리네 소리가 가진 멋과 아름다움을 유려한 연출과 극적인 대본 그리고 실감나는 연기를 통해 꺼내놨다는 점이다. 국악에 별 관심이 없던 이들도 아마 ‘정년이’를 보게 되면 판소리 심청가에 한 대목인 ‘추월만정’ 같은 곡을 다시금 찾아보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국극이나 국악이라고 하면 어딘가 고리타분하지 않을까 싶었던 분들조차 매료시키는 연출, 대본, 연기의 삼박자가 아닐 수 없다. 

 

또 매란국극에 들어가 수련을 받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K팝 아이돌들이 거치는 연습생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오디션 과정을 거쳐 뽑히고, 그리고 나서 연구생이라는 이름으로 소리부터 춤, 연기를 배우고 무대에 서는(데뷔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담겨 있어서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정년이가 그를 시기하는 동료들과 경쟁해가며 그려낼 쌍방 성장서사는 그래서 현재의 K팝 한류의 기원이 꽤 오래 전부터 태동해왔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찬받아 마땅한 건 김태리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웹툰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김태리의 연기는 정년이 그 자체처럼 보일 정도로 동작 하나 대사 하나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웹툰으로 보며 저랬을 것 같다는 그 모습을 김태리는 연기를 통해 공감하게 꺼내 보여주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과 ‘스물다섯 스물하나’, ‘악귀’를 거치며 청춘의 초상 같은 그만의 아우라를 계속 그려냈던 김태리는 이번에도 ‘정년이’를 통해 인생캐릭터를 또 한 번 경신할 모양이다. 정년이라는 인물이 그려낼 꿈을 향한 성장서사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사진:tvN)

728x90

‘조립식 가족’, 색다른 가족드라마와 청춘로맨스의 기막힌 결합

조립식 가족

여기 홀로 딸 윤주원(정채연)을 살뜰하게 키우는 아빠 윤정재(최원영)가 있다. 칼국수집을 운영하며 매일 같이 정성스레 국물을 내 국수를 팔 듯이, 엄마 없는 어린 딸이 아무런 구김살 없이 자라도록 정성을 다한다. 그런데 이 주원의 새 가족으로 김산하(황인엽)와 그의 아버지 김대욱(최무성) 그리고 한번 선을 본 인연인 강서현(백은혜)의 아들 강해준(배현성)이 들어온다. 윤씨와 김씨 그리고 강씨로 성이 다르지만 이들은 가족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엄마는 없고 아빠만 둘인 ‘조립식 가족’의 탄생이다. 

 

JTBC 수요드라마 ‘조립식 가족’은 제목처럼 이색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핏줄은 아니지만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정재라는 아빠가 보여주는 따뜻함이 이 ‘조립식 가족’의 탄생의 기반이다. 윗층으로 이사온 산하네 가족은 어린 동생을 잃은 후 조각나 버렸다. 그 아픔을 못견뎌한 엄마 정희(김혜은)는 딸의 죽음에 대해 심지어 산하 탓을 하며 아들마저 버리고 떠나버렸다. 정재는 그 산하를 아들처럼 보듬으며 키웠고 산하의 아버지 김대욱과도 마치 부부(?) 같은 기묘한 관계를 만들었다. 

 

해준의 엄마 강서현은 돈을 벌어오겠다며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이모네 집에서 기거하던 해준을 정재는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어린 해준이 “감사합니다 아저씨 지는 아저씨가 아빠하면 좋겠어요.”라고 하자, 정재는 아이를 받아들인다. “그래. 그럼 여기 있을 동안은 아빠 해.” 그렇게 정재의 둥지 안으로 주원과 산하, 해준 그리고 대욱이 들어와 이색적인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국내에도 이미 팬층이 있는 중국드라마 ‘이가인지명’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이 이색적인 가족의 구성 자체가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가슴 설레는 가족드라마와 청춘로맨스의 결합을 예고한다. 즉 정재를 중심으로 꾸려진 이 단란한 조립식 가족은 이제 앞으로 등장할 혈연을 매개로 가족이라 주장하며 나타날 이들과의 갈등을 예고한다. 벌써부터 해준 앞에 자신이 네 아빠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곧 산하의 엄마 정희 또한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그러니 피는 안섞였어도 더할 나위 없는 이 가족에 벌어질 풍파가 어찌 작을까. 

 

하지만 ‘조립식 가족’이 보여줄 갈등의 양상은 출생의 비밀 코드처럼 친부모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질 파국으로 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이들은 함께 늘 밝은 모습으로 웃으며 지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되거나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모습들이 숨겨져 있다. 그러니 이들의 선택은 싸워 이기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마음들이 되지 않을까. ‘조립식 가족’이 보여줄 가족드라마의 색다른 감동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한편 ‘조립식 가족’은 가족으로써 오빠 동생하고 있지만 사실은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라는 점에서 주원을 두고 벌어질 해준과 산하의 청춘로맨스를 기대하게 한다. 특히 자신들은 성이 다른 남남이라고 선을 긋는 산하에게서는 주원에 대한 오랜 마음이 느껴진다. 여동생과 오빠라는 관계가 아닌 청춘남녀의 관계로 넘어가는 그 드라마틱한 변화의 순간들이 만들어낼 설렘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까. 

 

풋풋한 청춘들의 이야기와 묵직한 가족의 서사를 균형있게 배치한 연기의 앙상블도 이 드라마의 빼놓을 수 없는 관전포인트다. ‘안나라수마나라’, ‘왜 오수재인가’에서 주목됐던 황인엽과 ‘우리들의 블루스’, ‘기적의 형제’, ‘경성크리처2’로 급성장하고 있는 배현성 그리고 ‘연모’, ‘금수저’ 등의 작품으로 상큼한 연기를 선사해온 정채연이 청춘들의 풋풋한 로맨스를 그려낸다면, 최원영, 최무성, 김혜은, 백은혜, 민지아 등의 중견배우들이 잡아주는 묵직한 가족서사가 다른 한편에서 울림을 준다. 

 

무엇보다 ‘조립식 가족’은 요즘처럼 가족 해체의 시대에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서류상 가족이 뭐가 중요해요? 서로 가족이라 생각하면 가족이지. 그걸 뭐 꼭 그 종이쪼가리로인정 받아야 되요? 이게 다 같은 쌀 먹고 만든 살이고 뼈거든요?” 그렇다. 더 이상 혈연이 가족을 증명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보다는 함께 살아낸 시간들과 경험들이 진짜 가족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조립식 가족’은 이 달라진 시대의 대안적 가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진:JTBC)

728x90

나의 해리에게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정체성을 번갈아 나타내는 정신질환. 이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로 흔히 ‘다중인격 장애’라고도 부른다. 한 사람 안에 두 명의 다른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건 신기한 일이지만, 왜 그런 장애를 겪게 됐는가를 들여다보면 그저 신기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대부분은 충격적인 스트레스나 고통스러운 경험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그 ‘해리’는 바로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그것을 뜻한다. 이 드라마 속 주인공인 주은호(신혜선)는 이 장애를 통해 주혜리라는 새로운 인격이 발현된다. 

 

잠을 경계로 주은호는 PPS 아나운서지만 주혜리는 미디어N 주차관리소의 아르바이트일을 한다. 자고 나면 주은호가 되지만 또 자고 일어나면 주혜리가 되는 삶. 주은호가 이 장애를 겪게 된 건 자신을 유달라 따랐던 동생이 실종되는 사건 때문이다. 사망도 아니고 실종됐다는 사실은 남은 이들의 삶을 바짝바짝 말라들게 만든다. 주은호는 자신을 동경하던 동생이 아나운서가 됐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방송국 주차장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꿈이라고 적은 일기를 보고는 주차관리소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동생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주은호로 하여금 동생의 삶을 이어가려는 열망을 만들어 내고 결국 주혜리의 정체성 또한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의 해리에게’는 왜 해리성 정체성 장애 같은 소재를 가져온 것일까. 물론 이 작품은 이렇게 두 개의 인격체로 나뉜 주은호와 주혜리가 각각 사랑에 빠지게 되는 로맨스의 재미를 담고 있다. 주은호는 8년 간 사귀었다 헤어진 같은 회사 아나운서 정현오(이진욱)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게 되고, 주혜리는 주차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강주연(강훈)과 사랑에 빠진다. 이러니 정체성 간의 대결구도가 생겨난다. 강주연과 사랑에 빠진 주혜리는 행복을 느끼며 그 정체성에 머물고 싶어하지만, 주은호는 정현오와 관계를 이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건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을 지워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의 해리에게’가 이러한 색다른 멜로 구도를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소재를 통해 가져오고 있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로맨스에만 머물러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결국 상처 입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주은호가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의 등장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건들을 통해 그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금 자신 그대로 현재를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그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은 사실상 동생을 흉내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주은호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창출해낸 존재다. 그래서 주혜리가 하는 행동이나 말들은 주은호와는 상반되어 있는데, 그건 사실상 주혜리가 주은호에게 하는 위로에 가깝다.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거거든요.... 그럼요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따뜻하다는 건 좋은 거예요. 왜냐아면 그건 살아있는 거니까.” 주혜리가 누군가를 만나 건네는 말들은 그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를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주은호에게 주혜리는 삶이 너무나 좋은 것이라고 애써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 같은 이 말들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며 차라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로서 살아있고, 그래서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 하는 그 순간이 주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주혜리(주은호 깊숙이 자리한 내면의 목소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두 사람의 인격을 넘나들며 이를 통해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기적 같은 드라마지만, 이 작품을 진짜 기적으로 만드는 건 신혜선의 연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오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연기가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특히 주혜리 역할은 엉뚱하면서도 의외의 감동을 주는 이런 면모들을 신혜선이 아니면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싶다.(글:일간스포츠, 사진:ENA)

728x90

‘나의 해리에게’, 사랑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로맨스라니

나의 해리에게

“선생님. 사랑을 하니 모든 게 반짝반짝거린다고요.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주혜리(신혜선)는 정신과 의사에게 그렇게 말한다. 주혜리, 아니 주은호(신혜선)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중이다. 본래는 PPS 아나운서지만 또 다른 인격으로 생겨난 주혜리는 미디어N 주차관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난 미디어N 아나운서 강주연(강훈)과 사랑에 빠진다. 

 

주혜리는 그렇게 강주연을 사랑하게 되지만, 잠을 자고 일어나면 되돌아오는 주은호는 8년 동안 만나왔던 같은 회사 에이스 아나운서 정현오(이진욱)와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정현오가 주은호에게 일을 챙겨주는 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끊어진 듯 끊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현오는 주은호에게 네가 “창피하다”며 헤어진 후에도 왜 너 같은 사람을 사귀었냐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핑계 삼아 자꾸 주은호를 도와주려 한다. 

 

“네가 좀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거든?” 이렇게 말하는 정현오는 사실 헤어진 후에도 주은호가 신경쓰인다는 걸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주은호는 그 말에 상처받는다. “근데 내가 좀 별로면 안되나? 아니 그렇잖아. 내가 좀 별로고 괜찮지 않은 게 뭐.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주은호가 발끈하는 건 사실 그 스스로도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애써 안하던 현장 리포트를 나가서라도 VCR 분량을 독점하고 싶어하고 그렇게라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주은호의 그런 선택은 다른 아나운서들의 반발을 불러온다. 아나운서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나의 해리에게’는 그래서 로맨스 드라마의 틀로만 보면 해리성 경계성 장애를 가진 주은호가 주은호로서 정현오와 주혜리가 됐을 때 강주연과 엮이게 되는 기막힌 멜로의 구도를 그려낸다. 정체성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겨운 일이지만, 각각의 정체성이 사랑을 하게 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행복감을 느끼고 그래서 그 정체성을 잃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혜리가 강주연이 점점 좋아지는 상황에, 주은호 역시 정현오의 진심을 알게 되는 사건을 겪는다. 생방송 중 실종된 언니를 찾는 동생의 사연을 보다가 사라진 동생을 떠올리며 충격에 빠져 방송사고가 날 뻔한 주은호를 정현오가 챙겨주게 되면서다. 

 

이처럼 ‘나의 해리에게’는 주혜리로 정체성이 분리된 주은호가 정현오와 강주연과 각각 사랑에 빠지면서 겪게 되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병명에서 드러나듯이 어째서 이런 장애를 이 인물이 갖게 됐는가가 더 중요하다. 주은호가 그 장애를 갖게 된 건 늘 자신처럼 되고 싶어하고 따랐던 동생이 실종되어서다. 실종된 지 오래되어 사망한 것처럼 처리되어 있지만 실종자 가족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주은호는 그 상처가 깊어지며 동생 주혜리의 삶과 꿈을 이어주고 싶어지고 그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로 나타난다. 그렇게라도 동생을 붙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겪은 건 주은호만이 아니다. 그가 주혜리가 되어 만나게 된 강주연 역시 아버지 같던 형이 교통사고를 겪고 식물인간이 됐다. 강주연의 어머니는 그가 육군사관학교 임관식에 형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 원망한다. 결국 강주연은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형의 꿈이었던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마치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무감해진다. 그 무감한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주혜리가 뛰어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해리에게’는 사라진(어쩌면 죽은) 이들 때문에 상처 입고 그들을 끝내 보내지 못하는 남은 자들의 상처를 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은호는 동생 주혜리를 보내지 못해 해리성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고, 강주연은 형을 보내지 못해 자신의 삶이 아닌 형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두 인물의 삶에 뛰어들어 그걸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는 바로 주혜리다.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주혜리는 단순하게 삶을 직시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집착해 사라진 것들을 놓지 못한 채 힘겨워하는 주은호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병상에 있는 강주연의 어머니가 강주연을 형과 혼돈하자 주혜리는 그 손을 덥석 잡아주며 대뜸 “밥을 잘 드셔야 한다”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 아가씨처럼 예뻐지냐고 강주연의 어머니가 묻자 주혜리는 놀랍게도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니요. 살아있을 수 있죠.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거든요 아줌마.... 그럼요.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 감사해주세요. 아줌마가 살아있다는 것과 주현씨가 살아있다는 것에.” 그러면서 주현이가 잘해주냐고 묻자 그가 아줌마 손처럼 따뜻하다며 “따뜻하다는 건 좋은 것”이라고 한다. 그건 살아있다는 거니까. 과거와 죽음의 그림자를 놓지 못하고 사는 이들에게 현재와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이 장면은, 마침 쓰러질 뻔했던 주은호의 손을 잡아 준 정현오의 에피소드와 교차 편집된다. 손을 잡는다는 것. 그건 현재의 온기를 느낀다는 것이고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걸 이 손을 잡는 시퀀스들의 교차가 보여준다. 

 

대본이 기막힌 작품이지만, 주은호와 주혜리를 넘나들어야 하는 1인2역 연기가 밑바탕되지 않으면 감흥을 주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표현하는 ‘연기차력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신혜선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에 이진욱, 강훈의 단단한 연기가 받쳐주고 조혜주, 강상준, 김나미, 오경화 같은 배우들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복잡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감정선이 느껴지는 미장센으로 풀어낸 연출의 공도 칭찬할만하다. 사랑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오랜만에 보는 기막힌 힐링 로맨스다. (사진:ENA)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