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리에게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정체성을 번갈아 나타내는 정신질환. 이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로 흔히 ‘다중인격 장애’라고도 부른다. 한 사람 안에 두 명의 다른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건 신기한 일이지만, 왜 그런 장애를 겪게 됐는가를 들여다보면 그저 신기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대부분은 충격적인 스트레스나 고통스러운 경험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그 ‘해리’는 바로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그것을 뜻한다. 이 드라마 속 주인공인 주은호(신혜선)는 이 장애를 통해 주혜리라는 새로운 인격이 발현된다. 

 

잠을 경계로 주은호는 PPS 아나운서지만 주혜리는 미디어N 주차관리소의 아르바이트일을 한다. 자고 나면 주은호가 되지만 또 자고 일어나면 주혜리가 되는 삶. 주은호가 이 장애를 겪게 된 건 자신을 유달라 따랐던 동생이 실종되는 사건 때문이다. 사망도 아니고 실종됐다는 사실은 남은 이들의 삶을 바짝바짝 말라들게 만든다. 주은호는 자신을 동경하던 동생이 아나운서가 됐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방송국 주차장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꿈이라고 적은 일기를 보고는 주차관리소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동생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주은호로 하여금 동생의 삶을 이어가려는 열망을 만들어 내고 결국 주혜리의 정체성 또한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의 해리에게’는 왜 해리성 정체성 장애 같은 소재를 가져온 것일까. 물론 이 작품은 이렇게 두 개의 인격체로 나뉜 주은호와 주혜리가 각각 사랑에 빠지게 되는 로맨스의 재미를 담고 있다. 주은호는 8년 간 사귀었다 헤어진 같은 회사 아나운서 정현오(이진욱)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게 되고, 주혜리는 주차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강주연(강훈)과 사랑에 빠진다. 이러니 정체성 간의 대결구도가 생겨난다. 강주연과 사랑에 빠진 주혜리는 행복을 느끼며 그 정체성에 머물고 싶어하지만, 주은호는 정현오와 관계를 이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건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을 지워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의 해리에게’가 이러한 색다른 멜로 구도를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소재를 통해 가져오고 있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로맨스에만 머물러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결국 상처 입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주은호가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의 등장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건들을 통해 그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금 자신 그대로 현재를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그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은 사실상 동생을 흉내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주은호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창출해낸 존재다. 그래서 주혜리가 하는 행동이나 말들은 주은호와는 상반되어 있는데, 그건 사실상 주혜리가 주은호에게 하는 위로에 가깝다.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거거든요.... 그럼요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따뜻하다는 건 좋은 거예요. 왜냐아면 그건 살아있는 거니까.” 주혜리가 누군가를 만나 건네는 말들은 그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를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주은호에게 주혜리는 삶이 너무나 좋은 것이라고 애써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 같은 이 말들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며 차라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로서 살아있고, 그래서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 하는 그 순간이 주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주혜리(주은호 깊숙이 자리한 내면의 목소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두 사람의 인격을 넘나들며 이를 통해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기적 같은 드라마지만, 이 작품을 진짜 기적으로 만드는 건 신혜선의 연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오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연기가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특히 주혜리 역할은 엉뚱하면서도 의외의 감동을 주는 이런 면모들을 신혜선이 아니면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싶다.(글:일간스포츠, 사진:ENA)

‘나의 해리에게’, 사랑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로맨스라니

나의 해리에게

“선생님. 사랑을 하니 모든 게 반짝반짝거린다고요.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주혜리(신혜선)는 정신과 의사에게 그렇게 말한다. 주혜리, 아니 주은호(신혜선)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중이다. 본래는 PPS 아나운서지만 또 다른 인격으로 생겨난 주혜리는 미디어N 주차관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난 미디어N 아나운서 강주연(강훈)과 사랑에 빠진다. 

 

주혜리는 그렇게 강주연을 사랑하게 되지만, 잠을 자고 일어나면 되돌아오는 주은호는 8년 동안 만나왔던 같은 회사 에이스 아나운서 정현오(이진욱)와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정현오가 주은호에게 일을 챙겨주는 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끊어진 듯 끊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현오는 주은호에게 네가 “창피하다”며 헤어진 후에도 왜 너 같은 사람을 사귀었냐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핑계 삼아 자꾸 주은호를 도와주려 한다. 

 

“네가 좀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거든?” 이렇게 말하는 정현오는 사실 헤어진 후에도 주은호가 신경쓰인다는 걸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주은호는 그 말에 상처받는다. “근데 내가 좀 별로면 안되나? 아니 그렇잖아. 내가 좀 별로고 괜찮지 않은 게 뭐.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주은호가 발끈하는 건 사실 그 스스로도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애써 안하던 현장 리포트를 나가서라도 VCR 분량을 독점하고 싶어하고 그렇게라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주은호의 그런 선택은 다른 아나운서들의 반발을 불러온다. 아나운서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나의 해리에게’는 그래서 로맨스 드라마의 틀로만 보면 해리성 경계성 장애를 가진 주은호가 주은호로서 정현오와 주혜리가 됐을 때 강주연과 엮이게 되는 기막힌 멜로의 구도를 그려낸다. 정체성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겨운 일이지만, 각각의 정체성이 사랑을 하게 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행복감을 느끼고 그래서 그 정체성을 잃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혜리가 강주연이 점점 좋아지는 상황에, 주은호 역시 정현오의 진심을 알게 되는 사건을 겪는다. 생방송 중 실종된 언니를 찾는 동생의 사연을 보다가 사라진 동생을 떠올리며 충격에 빠져 방송사고가 날 뻔한 주은호를 정현오가 챙겨주게 되면서다. 

 

이처럼 ‘나의 해리에게’는 주혜리로 정체성이 분리된 주은호가 정현오와 강주연과 각각 사랑에 빠지면서 겪게 되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병명에서 드러나듯이 어째서 이런 장애를 이 인물이 갖게 됐는가가 더 중요하다. 주은호가 그 장애를 갖게 된 건 늘 자신처럼 되고 싶어하고 따랐던 동생이 실종되어서다. 실종된 지 오래되어 사망한 것처럼 처리되어 있지만 실종자 가족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주은호는 그 상처가 깊어지며 동생 주혜리의 삶과 꿈을 이어주고 싶어지고 그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로 나타난다. 그렇게라도 동생을 붙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겪은 건 주은호만이 아니다. 그가 주혜리가 되어 만나게 된 강주연 역시 아버지 같던 형이 교통사고를 겪고 식물인간이 됐다. 강주연의 어머니는 그가 육군사관학교 임관식에 형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 원망한다. 결국 강주연은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형의 꿈이었던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마치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무감해진다. 그 무감한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주혜리가 뛰어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해리에게’는 사라진(어쩌면 죽은) 이들 때문에 상처 입고 그들을 끝내 보내지 못하는 남은 자들의 상처를 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은호는 동생 주혜리를 보내지 못해 해리성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고, 강주연은 형을 보내지 못해 자신의 삶이 아닌 형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두 인물의 삶에 뛰어들어 그걸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는 바로 주혜리다.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주혜리는 단순하게 삶을 직시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집착해 사라진 것들을 놓지 못한 채 힘겨워하는 주은호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병상에 있는 강주연의 어머니가 강주연을 형과 혼돈하자 주혜리는 그 손을 덥석 잡아주며 대뜸 “밥을 잘 드셔야 한다”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 아가씨처럼 예뻐지냐고 강주연의 어머니가 묻자 주혜리는 놀랍게도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니요. 살아있을 수 있죠.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거든요 아줌마.... 그럼요.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 감사해주세요. 아줌마가 살아있다는 것과 주현씨가 살아있다는 것에.” 그러면서 주현이가 잘해주냐고 묻자 그가 아줌마 손처럼 따뜻하다며 “따뜻하다는 건 좋은 것”이라고 한다. 그건 살아있다는 거니까. 과거와 죽음의 그림자를 놓지 못하고 사는 이들에게 현재와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이 장면은, 마침 쓰러질 뻔했던 주은호의 손을 잡아 준 정현오의 에피소드와 교차 편집된다. 손을 잡는다는 것. 그건 현재의 온기를 느낀다는 것이고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걸 이 손을 잡는 시퀀스들의 교차가 보여준다. 

 

대본이 기막힌 작품이지만, 주은호와 주혜리를 넘나들어야 하는 1인2역 연기가 밑바탕되지 않으면 감흥을 주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표현하는 ‘연기차력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신혜선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에 이진욱, 강훈의 단단한 연기가 받쳐주고 조혜주, 강상준, 김나미, 오경화 같은 배우들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복잡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감정선이 느껴지는 미장센으로 풀어낸 연출의 공도 칭찬할만하다. 사랑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오랜만에 보는 기막힌 힐링 로맨스다. (사진:ENA)

역시 서숙향 작가라 다르다... KBS주말극에 쏠린 관심

다리미 패밀리

“누가 지갑 잃어버렸다고 신고가 들어오면 그 지갑 찾았다고 금방 파출소로 가져고 들어오는 동네가 이 동네야.” KBS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다리미 패밀리’는 순찰을 돌며 이 동네의 청렴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찰들의 목소리로 문을 연다. 동네 이름이 청렴이고, 이제 이 주말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다림(금새록)이네 가족이 운영하는 세탁소 이름도 ‘청렴세탁소’다. 좀도둑 한 번 안들었다는 동네. 그 세탁소를 해온 다림의 할머니, 할아버지인 안길례(김영옥), 이만득(박인환)은 실제로 건조기에서 돈이 나오자 챙기기보다는 챙겨주려 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청렴은 계속 될 수 있을까. 다림이네 가족은 다림의 아버지가 1차 사시 패스를 수석으로 한 후 연거푸 떨어지면서 가세가 기울어진다. 무려 10차 재수를 하며 희망고문을 하던 다림의 아버지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하고, 다림의 엄마 고봉희(박지영)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에 노시부모들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다. 다림은 퇴행성 희귀 망막염에 걸려 어릴 때 2.0이던 시력이 0.02가 됐고 점점 주변 시야가 좁아지다 실명할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다림이 살아오면서 느낀 가장 큰 고통은 ‘희망고문’이었다. 아버지의 희망고문이 만들었던 가족들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심지어 실명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겠습니다”라며 “엄마한테는 말씀하지 말아달라”고 의사선생님에게 말하는 인물이다. 그는 심지어 대학시절 좋아해 하룻밤을 보낸 서강주(김정현)에게조차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면 그에게 기대하게 되고 기다리게 될 거라며. 

 

하지만 그렇게 포기가 더 쉽다고 해도, 실명을 벗어날 수 있는 효과 있는 주사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희망을 갖지 않을 수가 있을까. 주사를 맞은 이들이 모두 시력을 되찾았다는 의사의 말에 반색하지만 그 주사비용이 한쪽에 4억씩 무려 8억이라는 말에 다림은 또다시 희망고문에 빠진다. 안 하던 로또를 사서 긁고 또 긁으며 실낱 같은 희망을 걸어보지만 그게 될 턱이 없다. 포기했다 생각했던 희망이 만든 고문 속에 또 다시 빠져든 것이다. 

 

‘다리미 패밀리’에서 다림이네 가족의 짧은 서사는 의미심장하다. 그건 우리가 살아온 삶의 변화를 대변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좀도둑 한 번 안들 정도로 청렴하고 지킬 건 지키던 동네는 세월이 흘러 변해간다. 다림이네 가족이 그러한 것처럼, 아들의 성공에 희망을 걸기도 하며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왔던 우리네 서민들의 삶은 어찌 된 일인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런데도 청렴하게만 살 수 있어? 드라마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물론 ‘다리미 패밀리’는 이러한 불행의 연속을 무겁게 그리지는 않는다. 발랄하고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코미디로 담아낸다. 그간 ‘파스타’부터 ‘질투의 화신’ 같은 로맨스와 코미디를 그려온 서숙향 작가의 공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문제의식을 잊지 않는 작품의 전개가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이게 KBS 주말드라마일까 싶은 첫 회의 색다른 풍경이다. 

 

사실 그간 방영됐던 KBS 주말드라마들의 첫 시작을 생각해보라. 거의 문법에 가깝게 극적 사건들이 빵빵 터지고 출생의 비밀의 밑거름을 깔아 놓는 식의 클리셰들도 꽉꽉 채워져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번엔 좀 다르겠지’ 하다가도 ‘또 시작됐군’ 하면서 기대감을 서서히 접게 되는 ‘희망고문’을 반복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면서 KBS 주말드라마는 시청률조차 뚝 떨어지는 추락을 겪었다. 

 

‘다리미 패밀리’는 바로 그런 상황에 절치부심한 KBS가 내놓은 새로운 결과물이다. 먼저 서숙향 작가가 주말극에 처음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관심을 쏠리게 만든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코미디적 상황 그리고 달달하고 시크한 멜로까지 줄줄이 풀어내는 작가가 아니던가. 그가 시도하는 주말극이니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첫 회가 슬슬 풀어낸 작품의 문제의식은 역시 서숙향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가장 좋은 건 과도하게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강박이 별로 없고, 하려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빌드업하려는 작가의 뚝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완성도를 위해서 주로 50부작으로 기획되던 주말극이 이번에 36부작을 내세웠다는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괜스레 고무줄처럼 질질 끌려 늘리기보다는 그만큼 밀도있게 작품을 풀어나갈 수 있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완성도가 아니면 이제 시선도 주지 않는 현 시청자들의 달라진 눈높이에 조응하는 선택이다. 

 

희망고문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리미 패밀리’의 다림이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이 던지는 질문이고, 열심히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우리네 서민들이 다시금 던져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또한 그간 난맥상이었던 KBS 주말드라마를 그래도 관심있게 봐온 시청자들의 질문이 될 것이다. 과연 ‘다리미 패밀리’는 그동안 구겨져온 KBS 주말드라마의 주름과 무너진 자존심을 깨끗하게 다려줄 수 있을까. 모쪼록 그 질문의 답이 희망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사진:KBS)

‘손해 보기 싫어서’, 결혼도 사랑도 이익 따지는 시대의 멜로

손해보기 싫어서

이 인물은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손해영(신민아). 어려서부터 축구하는 남자들이 운동장의 대부분을 쓰고 피구하는 여자들이 그 일부만 쓰는 게 손해라고 선생님께 따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손해 보고는 못사는 문제적 인물. tvN 월화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는 예사롭지 않은 제목처럼 범상치 않은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 멜로의 남자 주인공인 김지욱(김영대)은 손해영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걸 못견뎌 하고, 나아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의인이지만, 때론 융통성 있게 넘어가야 잘 살 수 있는 사회생활에서는 어딘가 손해보는 인물이다. 면접장에서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면접관에게 대놓고 그걸 문제삼는 인물이니. 

 

‘손해 보기 싫어서’는 이처럼 상반된 두 캐릭터를 남녀 주인공으로 세워 도저히 연결될 수 없을 것 같은 로맨스를 그리겠다 선언한다. 그 발단은 손해영이다. 누군가의 결혼식에 쓴 축의금이 너무 아까운 참에 초고속 승진이 걸린 사내공모에 미혼 여성을 뽑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결혼을 하기로 작정한다. 물론 식만 올리는 가짜 결혼식을. 

 

대뜸 손해영은 자신의 단골 편의점에서 만년 알바를 하고 있는 김지욱에게 이 결혼 알바(?)를 제안한다. 말도 안되는 제안에 단칼에 거부하지만, 손해영이 중고마켓에 올린 신랑 구인(?)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바람둥이가 관심을 보이자 김지욱은 이를 그냥 무시하고 넘기지 못한다. 자신이 그 결혼 알바를 하겠다고 나선다. 이로써 두 사람은 가짜 결혼식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의외의 로맨스를 겪기 시작한다. 

 

‘손해 보기 싫어서’가 도발적인 건, 이제 결혼이 필수냐 선택이냐는 차원을 넘어서 이득이냐 아니면 손해냐를 따지는 시대의 이야기를 꺼내놨다는 점이다. 그건 거꾸로 이야기하면 결혼만이 아니라 매사에 모든 걸 이익의 관점으로 결정하는 세태에 대한 이야기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기 싫고 오로지 이익을 위해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시대. 그런데 그건 과연 괜찮고 행복한 일일까. 

 

그런 점에서 김지욱이라는 캐릭터는 이 이익의 시대와는 걸맞지 않는 캐릭터로 사회에서도 도태된 인물이다. 잘 모르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인’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만큼 타인을 돕는 일보다는 내 이익만을 보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 김지욱은 그런 시대 바깥에서 들어온 외계인 같은 존재다. 보통의 멜로 드라마가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 나아가 외모면 외모까지 모든 걸 다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다면 김지욱은 그 정반대에 서 있다. 

 

늘 백마 탄 왕자님만 로맨스에서 봐왔던 시청자들이라면 이 덥수룩한 머리로 일부러 외모를 감춘 채, 편의점 만년 알바를 하며, 남 돕는 일에나 신경쓰는 이 인물이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게다. 하지만 이건 이 인물의 진가가 저 외형적인 조건들과는 다른데 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이다. 기꺼이 타인을 위해 손해보는 삶을 사는 남자 주인공이 주는 판타지라니. 

 

알고 보면 손해영이 그토록 손해 보는 삶을 싫어하게 된 건 어려서 천사처럼 베풀던 엄마로부터 겪게 된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보육원 봉사를 하던 엄마가 가정위탁을 하며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데려와 키웠다. 손해영은 자신이 엄마에게 받을 사랑을 저들에게 빼앗겼다 생각했고 그래서 손해 보는 일에 극도로 예민해졌고 그런 엄마와도 소원해졌다. 

 

따라서 손해영이 김지욱과의 가짜 결혼식을 통해 그의 진가를 알아가는 이 로맨스는 동시에 손해영이 천사 같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 이타적인 마음이 그저 이익만 생각하는 삶보다 얼마나 가치있는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랄까. 결혼도 그렇지만 사랑 역시 손익의 관점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손익계산으로 시작하지만 차츰 진짜 사랑이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는 걸 알아가는 로맨스가 흥미로워진다. 결혼도 사랑도 이익 따지는 시대와 도전하는 멜로를 보는 재미랄까.(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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