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의 풍수사로 돌아온 연기 장인 최민식

파묘

“땅이야 땅. 우리 손주들이 밟고 살아가야 할 땅이라고!”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에서 김상덕(최민식)은 그렇게 말한다. 9백만 관객을 넘기고(20일 현재) 1천만 관객 돌파가 거의 기정사실이 된 이 영화는, 상덕의 이 말에 담긴 뉘앙스처럼 공포 가득한 오컬트 영화에서 무언가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영화로의 확장을 꾀했다. 

 

묘를 파낸다는 ‘파묘’의 의미는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집안에 생긴 우환의 원인으로 묫자리를 잘못 썼기 때문에 이를 파내서 이장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관객들 입장에서 보면 그저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묘를 파낸다는 그 상황이 주는 공포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사적인 차원에서 우환을 없애기 위한 파묘일 때 생기는 공포감이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 사적인 차원의 파묘는 보다 공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범의 형상을 한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혈자리에 쇠말뚝을 꽂았다는 음모론을 상상력으로 확장한 이 작품은 바로 파묘를 하려는 이들에게 그 쇠말뚝을 뽑아내는 미션을 부여한다. 

 

이들의 행위는 그래서 끊어졌던 민족 정기를 잇는 의미를 갖게 되고, 공포감과 맞서는 일 또한 우리 민족이 힘겨워도 마주하고 넘어서야 할 일제의 과거사 문제들이라는 은유를 담게 된다. ‘파묘’가 오컬트 장르라는 다소 마니아적 한계를 넘어 천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는 대중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작품에서 묫자리를 봐주고 잘못된 건 바로 잡아주는 풍수사 상덕은 사적인 동기로 시작했던 파묘를 공적인 동기로 넘어서게 해줌으로서, 사실상 두 개로 끊어져 있는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인물이다. 즉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에 담긴 것처럼, 범의 형상을 한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에 꽂힌 쇠말뚝을 뽑아내는 이야기에 걸맞게, 앞뒤 두 개의 이야기가 끊어져 있는 것을 대사 한 마디로 이어내는 인물이다. 

 

그건 풍수사라는 직업이 땅을 보고 다루는 전문영역을 갖고 있어서 가능해진 일이다. 전문적인 직업의 영역은 그래서 사적인 욕망이나 생계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경험들이 응축되어 무언가 뒤틀어진 것을 바로잡음으로서 모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공적인 역할이 되기도 한다. 상덕이 그러하듯이. 

 

이건 최민식이라는 배우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가 걸어온 연기 인생을 들여다 보면 배우라는 전문영역에 그가 얼마나 일생을 던져 노력해왔는가가 엿보인다. 그는 엇나간 학생들을 엄하게 꾸짓는 선생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고, 조폭들과 맞짱뜨는 검사였으며(넘버3), 바람난 아내 때문에 분노하는 남편이자(해피엔드),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시골남자(서울의 달)였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역할들 또한 그는 연기했는데, 남파 공작원(쉬리), 장승업(취화선), 수십 년을 갇혀 지내다 복수를 꿈꾸는 인물(올드보이), 연쇄살인마(악마를 보았다), 정재계 인사들과 연결된 비리로 점철된 브로커(범죄와의 전쟁), 심지어 이순신(명량) 역할까지 소화했다. 

 

그가 메소드 연기의 일인자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인물들을 진짜 그 인물이 되어 연기로 풀어냈는가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의 메소드 연기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래서 때때로 인터뷰를 통해 회자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악마를 보았다’에서 연쇄살인마 연기를 했을 때 있었던 일화다. 

 

영화 촬영 중 동네 피트니스 센터 엘리베이터에서 평소 친근하게 다가오곤 했던 한 아저씨가 반말로 “어디 최씨냐”고 물어봤을 때 저도 모르게 “근데 이 XX가 왜 반말을 하지?”하는 생각이 들어 엘리베이터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최민식이 어떤 연기를 할 때 얼마나 그 인물 깊숙이 들어가는가를 잘 말해주는 일화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살인자의 ‘살’자도 다신 안하고 싶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한다. 또 <명량>으로 이순신 장군의 역할을 할 때도 그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건 이 인물이 홀로 짊어졌을 무게가 고스란히 자신을 짓눌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메소드 연기는 최근 들어 배우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연기 방식이다. 진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해 실제 생활을 해보는 등 완전히 그 사람이 되어 연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은 이렇게 빠져서 하는 연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하는 생활연기법이 많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최민식의 라이벌로 불리는 송강호가 바로 그런 스타일의 연기를 한다. 역할을 연구하는 건 같지만, 완전히 그 인물이 되어 연기하는 것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절제된 연기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다르다. 이 차이에 대해서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민식이 ‘고전주의자’라면 송강호는 ‘자연주의자’라고. 어느 쪽이 옳거나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스타일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최민식에게 연기란 끝없이 새로운 인물의 세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걸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는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작업이 죽어야 끝나는 작업이에요. 사람을 연구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일인데 사람에 대해서 뭐 답이 있어요? 이 인생에 답이 있나요? 삶이 답이 있어요? 세상이 변하고 사고방식도 변하고 가치관도 달라지고 이게 졸업이 어디 있어요? 이걸 하나하나 알아나간다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이건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예요.” 

 

그런데 그 공부에 임하는 태도가 흥미롭다.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하기 위해 우리는 뭐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일단 뛰어들라고 말한다. “그냥 뛰어들어서 하면 돼요. 아니 이게 냄비 솥이 뜨거운지 알려면 만져봐야 뜨겁죠. 그러니까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만져보지도 않고 뭐 어떻게 알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 않나요? 내가 좋아하고 호기심이 있고 하고 싶다 그러면 한번 해봐야지 알지. 뭐... 방법이 없죠.”

 

‘파묘’의 상덕이 그러하듯이 땅 속에 뭐가 있는지는 일단 파 봐야 안다. 무엇이 나올지 두렵기도 하지만 파보지 않으면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땅을 파보듯이 최민식은 여러 역할들을 팠을 게다. 그리고 그 역할들이 동시대의 대중들에게 줬던 여러 감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하다. 무언가를 파다 보면 전문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건 때론 꽤 거창하고 의미있는 일들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걸, ‘파묘’의 상덕이 아니 그 역할을 연기하는 최민식이 우리 앞에 꺼내 보여주고 있다. (사진:영화 '파묘')

‘마스크걸’부터 ‘닭강정’까지, 이제 안재홍은 매작품 은퇴한다

닭강정

누구에게나 스스로 쌓아온 이미지는 소중하기 마련이다. 그건 그와 관계된 사람들이 그에게 일관되게 갖는 이미지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그 사람의 족쇄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를 그 고정된 이미지가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그 이미지를 깨는 색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건 하나의 도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안재홍이라는 배우는 독보적이다. 매번 ‘은퇴설’이 나올 정도의 파격적인 변신에 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는커녕 더더욱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그런 배우이기 때문이다. 

 

안재홍에게 ‘은퇴하는 거 아니냐’는 대중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작품은 작년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2023)’이다. 웹툰 자체가 워낙 파격적이었다. 특히 그 작품 속 주오남이라는 캐릭터는 외모콤플렉스를 가진데다 컴퓨터에 약 2만 개의 야동을 저장해 놓을 정도로 비뚤어진 성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마스크를 끼고 인터넷 방송을 하는 마스크걸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통해 안재홍 스스로도 밝혔듯이 “더럽고 음침한” 캐릭터를 완전히 그 인물 자체인 것처럼 연기한다는 건 부담되고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그가 기존에 해왔던 역할들이 대부분 순수하고 수줍음 많은 청년 캐릭터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그의 인생캐릭터로 불리는 ‘응답하라 1988(2015)’의 정봉이를 떠올려보라. 2대8 가르마를 한 채 덕선(혜리)의 친구 미옥(이민지)과 어색하지만 설레는 연애를 하던 정봉이의 모습을. 또 ‘쌈, 마이웨이(2017)’에서 백설희(송하윤)와 연인 사이로 등장했던 주만이의 모습은 어떤가. 흔들리는 마음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걸 후회한 후 노력 끝에 다시 사랑을 이루는 너무나 현실적인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멜로가 체질(2019)’에서 스타 드라마 감독 손범수로 등장해 드라마 작가 임진주(천우희)와 유쾌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밀고 당기는 케미를 선보였던 건? 

 

‘마스크걸’의 파격변신은 그래서 그간 이 수줍은 청년으로 각인되어 가던 안재홍이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기를 거부하려는 몸짓처럼 보였다. 그는 코로나19로 극장에 걸리지 못하고 결국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사냥의 시간(2020)’에서부터 삭발한 채 탈색한 헤어스타일을 한 반항기 가득한 모습으로 변신을 예고했다. 2023년에는 ‘마스크걸’의 주오남 역할과 더불어, 장항준 감독의 영화 ‘리바운드’로 실존 인물인 강양현 코치 역할을 연기했는데 실제 싱크로율을 맞추기 위해 몸무게를 10킬로 늘리기도 했다. 

 

‘마스크걸’의 은퇴설은 올해 방영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LTNS’에서 또 불거졌다. 이솜과 과감한 19금 연기에 도전한 안재홍은 극중 섹스리스 부부의 남편인 사무엘 역할을 진짜 부부 같은 모습으로 찰떡같이 연기해냈다. 당연히 부부 간의 내밀하고 대담한 대사들은 물론이고 행위들까지 연기해내야 하는 부담이 분명했을 테지만, 그의 리얼한 연기는 “내 얘기 같다”는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물론 솔직한 성담론이 담겨진 작품이지만, ‘LTNS’는 여기에 빈부의 차이와 성 문제와의 상관 관계 같은 사회적 코드들을 녹여낸 블랙코미디로 호평받았고, 거기에는 은퇴설이 또 나올 정도로 변신에 도전한 안재홍의 지분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이제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으로 돌아온다. ‘멜로가 체질’로 인연을 맺은 이병헌 감독이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코미디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어느 날 누군가에게 배달된 의문의 기계에 들어간 민아(김유정)가 닭강정으로 변하게 되고, 그걸 되돌리기 위해 아빠 선만(류승룡)과 그녀를 짝사랑하는 백중(안재홍)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다. 2019년 네이버 웹툰 ‘지상최대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웹툰 원작을 드라마화한 작품으로 너무 황당한 설정인지라 과연 드라마에도 어울릴 수 있을지 고개가 갸웃해지는 작품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극한직업’ 같은 독특한 세계를 특유의 코미디로 풀어내는 이병헌 감독이 대본과 메가폰을 잡았기에 오히려 기대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 됐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건 안재홍과 류승룡 같은 배우가 주는 아우라다. 특히 그간의 필모를 통해 예사롭지 않은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 안재홍에 대한 기대감이 적지 않다. 

 

안재홍은 여러 역할들을 통해 여러 이미지와 얼굴들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꿰어지는 하나의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건 바로 ‘덕후 기질’ 같은 모습이다.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도 모든 것에 마니아틱한 열정을 드러내는 인물로 심지어 전화번호부를 정독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고, ‘멜로가 체질’에서는 드라마 연출에 푹 빠져사는 스타감독을, ‘마스크걸’에서는 그런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들과는 상반되게 비정상적인 성에 빠져사는 샐러리맨을 보여줬으며, ‘LTNS’에서도 섹스리스 부부가 갖는 허탈함 속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이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줬다. 마찬가지로 ‘닭강정’에서 백중은 짝사랑해온 민아를 본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닭강정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는 인물이다. 

 

코미디는 그 웃음의 코드에 일단 어느 정도 적응하고 공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닭강정’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항간에는 벌써부터 잘 되면 명작이지만 안 되면 ‘괴작’이 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하나의 이미지에 멈춰서기보다는 심지어 은퇴설이 나오더라도 계속 새로운 도전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혀나가는 안재홍의 행보는 박수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무언가 새로운 가능성을 계속 열어보고 싶다면, 늘 은퇴하는 마음으로 기존의 편안했던 삶의 틀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안재홍은 연기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로기완’, 중년의 깊이와 무게감으로 돌아온 송중기

로기완

“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 있는 거가?”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에서 탈북 청년 로기완 역할을 연기한 송중기는 그런 대사를 던진다. 특유의 북한 억양이 들어있는 그 목소리에는 그가 느끼는 행복감과 더불어 그런 행복을 자신이 누려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 거기에는 지독한 슬픔 같은 게 묻어난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탈북자라는 사실 때문에 공안을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청년. 살기 위해 탈북한 이후 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뿌리내릴 작은 땅조차 없이 살아야했던 그는 거의 유일한 마음의 터전이나 다름 없던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어디서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낯선 땅 벨기에까지 날아와 난민 지위를 얻어보려 하지만, 탈북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곳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에게 마리(최성은)라는 또 하나의 ‘흔들리는 청춘’이 나타난다. 벨기에 국적 한국인 사격 선수였지만 어머니의 안락사를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사실 때문에 방황하며 함부로 자신의 삶을 내동댕이쳐온 그녀는, 자신은 상상조차할 수 없는 생존 상황에도 끝까지 버텨내며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로기완을 보며 마음이 움직인다. 

 

‘로기완’은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탈북 청년과 이국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미래가 불안한 청춘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서사도 들어있다. 로기완의 인상적인 대사에 들어 있듯이, 청춘들이 느끼는 만만찮은 현실은 그들에게 ‘행복해질 자격’을 묻는다. 그런데 행복에 왜 자격 따위가 필요할까. 행복은 그냥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탈북청년 로기완의 이 질문은 왜 모든 청춘들이 그저 행복할 수는 없는 세상인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기완은 끝내 마리를 먼저 떠나보내면서 말한다. “너 붙잡아 줄 단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래서 꼭 만나러 가겠다고. 그건 세상이 흔들어 놓은 청춘들 모두의 마음 그대로다. 

 

또한 이건 아마도 배우 송중기의 마음이기도 했을 터다. 이제 3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이 배우 역시 ‘성균관 스캔들(2010)’ 같은 그를 스타덤에 올린 초창기 작품을 하면서 언젠가는 흔들리지 않는 보다 단단한 연기를 해내겠다 다짐했을 테니 말이다. 연기자라기보다는 ‘꽃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던 당시의 송중기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장여자 캐릭터의 개연성’이라고까지 이야기됐던 미모의 소년이었다. 박민영이 연기했던 남장여자 캐릭터가 성균관에 출입한다는 설정이 바로 이 송중기라는 꽃미남(여성이라고 해도 될 법한)에 의해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성에 가까운 꽃미남 이미지로 소비되는 자신을 못견뎌했던 송중기는 그 후로 부단한 변신의 노력을 한다. 영화 ‘늑대소년(2012)’이 송중기에게는 가진 늑대의 야성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끄집어내는 도전이었다면, 드라마 ‘뿌리깊은나무(2011)’의 젊은 세종 역할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2012)’의 선과 악을 넘나드는 모습은 꽃미남 스타가 배우라는 이름에 걸맞는 필모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독특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여리디 여릴 것 같은 꽃미남의 외모를 갖고 있지만 앙다문 입술과 살짝 미간이 좁혀지면서 나오는 대사의 톤을 들어보면 강인한 내면이 느껴진다. 밝게 웃으면 착하디 착한 미소년의 모습이지만, 분노에 한껏 일그러진 얼굴은 순간 분노의 화신으로 그를 변신시킨다. 이러한 다면적인 이미지는 송중기를 그저 꽃미남에 머물지 않게 하면서도 동시에 배우라는 무게에만 침잠하지 않게 해주는 스타와 배우 사이의 균형을 만들어줬다.  

 

그 진가는 ‘태양의 후예(2016)’라는 작품으로 꽃을 피웠다. 테러리스트들과 맞서는 강인한 군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운 유시진이라는 캐릭터는 송중기의 이 균형잡힌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당시 군인이라는 직업을 이토록 판타지로 느껴지게 만들었던 건 다름아닌 송중기의 이미지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글로벌 스타로까지 떠올랐다고 해서 그가 젊은 날 꿈꿨던 그 단단한 사람이 된 건 아니었다. 그는 그 후에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지옥섬 군함도에 끌려간 조선인(군함도 2017), 선사시대의 영웅(아스달 연대기 2019), 우주 SF의 히어로(승리호 2021), 이태리에서 온 마피아 변호사(빈센조 2021)까지 여러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했다. 또 시간을 되돌려 인생리셋을 꿈꾸는 1인2역(재벌집 막내아들 2022)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그가 출연한 영화 ‘화란(2023)’과 ‘로기완’은, 꽃미남으로 등장해 그 껍질을 벗겨내려 흔들리면서도 무던 애를 쓰고 결국 스타덤에 올랐던 청춘의 나날을 지나 이제 30대 후반 중년기에 접어든 송중기의 출사표 같은 작품으로 다가온다. ‘화란’에서 아버지가 술독에 빠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죽음의 끝에서 자신을 구해준 조폭의 수족으로 살아가는 치건(송중기)이나, ‘로기완’에서 뿌리가 뽑혀져 그 어디에도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부유하는 로기완이나 모두 모든 걸 잃은 채 살아가는 밑바닥의 삶을 보여준다. 치건이 아버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이었다면, 로기완은 어머니 없는 세상 앞에 던져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연기하는 송중기는 ‘꽃미남’ 같은 수식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멍자국 핏자국의 상처들이 가득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건 마치 영화 ‘늑대소년’에서의 모습처럼 보인다. 다만 다른 건 ‘늑대소년’의 송중기가 미소년에서 야성 같은 새로운 이미지를 끄집어내려는 청춘의 도전이었다면, ‘화란’이나 ‘로기완’의 송중기는 보다 사회적 의미를 질문하기 시작하는 중년의 도전 같은 느낌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흔들리는 청춘을 연기하고 있지만 송중기의 연기는 중년의 무게감을 얻어가고 있다. 또한 그렇게 단단해져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건 어쩌면 청춘의 시기를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중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사진:넷플릭스)

‘킬러들의 쇼핑몰’, 냉혹함 속에서 더더욱 부각된 이동욱의 따듯함

킬러들의 쇼핑몰

‘이동욱은 어딘지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에 안으로는 뜨거운 열정 같은 걸 갖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면 한없이 냉정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그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때는 마치 그 얼음이 녹아들어 흘러내리는 물 같은 처연함을 느끼게 해준다.’ 과거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이동욱의 진가에 대해 내가 썼던 이같은 표현들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의 정진만이라는 캐릭터에서도 이동욱의 그 처연한 눈빛을 볼 수 있으니. 

 

“잘들어 정지안.” ‘킬러들의 쇼핑몰’은 이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건 이 액션스릴러가 갖고 있는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일단의 킬러들이 정지안(김혜준)의 집을 무차별 난사하고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그녀가 극복해나가는가가 전체 서사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생존상황이 시시각각 펼쳐지지만, 그 때마다 정지안은 삼촌 정진만이 평소에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과거로 돌아가 정진만이 어떻게 과거 용병 시절을 보냈고, 어쩌다 은퇴하게 됐으며, 킬러들의 무기를 거래하는 쇼핑몰을 운영하게 된 이야기와, 킬러들의 타깃이 되어 부모를 모두 잃게 된 정지안을 거둬 함께 지내게 됐던 이야기 등을 조금씩 소개한다. 그래서 드라마가 펼쳐내는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건 정지안이지만, 시청자들은 시청 내내 어딘가 정진만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정진만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아우라가 이 작품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앞서 언급한 이동욱의 냉정한 듯 따뜻한 ‘겉차속따’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처연한 분위기는 이 작품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한때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민간인들이 다치는 걸 막으려 했던 정진만이라는 인물은 겉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하지만 따뜻한 내면에 의해 안으로는 녹아흐르는 눈물이 가득 채워진 듯한 인물이다. 이런 이동욱의 이미지에 의해 잘 구축된 정진만이라는 캐릭터가 더더욱 부각되는 건, 그와는 대척점에 놓여 대결구도를 만드는 베일(조한선) 같은 돌처럼 냉혹한 킬러들과의 대비 때문이다. 저들과 달리 그는 피와 눈물을 흘리며 아파한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끈끈함은 이 인물이 결국은 갖게 되는 가장 큰 힘이 된다. 그로 인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파신(김민)이나 민혜(금해나) 같은 죽음도 불사하고 그를 돕는 진짜 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겉으론 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돈으로 묶여 그 목적이 사라지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베일 일당들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1999년 데뷔부터 현재까지 베스트극장이나 드라마시티 같은 단역부터 시트콤을 거쳐 멜로, 가족드라마, 사극, 장르물 등 무수한 작품들을 해왔지만, 이동욱의 존재감이 도드라진 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의 저승사자 역할처럼 어딘가 신비로우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런 인물들에서였다. ‘아이언맨’의 몸에 칼이 돋는 역할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미지를 드디어 꺼내놓은 이동욱은, ‘도깨비’의 저승사자로 제 몸에 딱맞는 옷을 입은 후, ‘구미호뎐’ 시리즈로 펄펄 날았다. 

 

이렇게 된 건 독특한 분위기를 갖는 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익숙한 역할을 반복적으로 하기를 거부하며 새로운 영역을 계속 넘보는 그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라이프’ 같은 작품에서는 소신이 확실한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역할을 했지만, ‘진심이 닿다’ 같은 로맨틱 코미디의 달달한 역할을 소화하더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살벌한 사이코 패스 역할을 연기하는 식이다. 심지어 ‘배드 앤 크레이지’라는 작품에서는 유능하지만 나쁜 놈과 정의롭지만 미친 놈의 양자를 오가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기도 했다.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품은 듯한 이미지나 익숙한 역할 대신 새로운 영역을 넘보는 연기에 대한 열정은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독특함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 그가 보여준 저승사자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으로 늘 봐왔던 검은 도포에 갓을 쓴 그런 인물이 아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댄디한 양복을 걸치고 나타난 이 새로운 저승사자는 그래서 설화 등에서 고정화된 캐릭터 이미지를 트렌디하게 해석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구미호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구미호라는 캐릭터는 역시 ‘전설의 고향’에서 주로 소개됐는데, 여성으로 그려지곤 했다. <구미호뎐>은 남성 구미호를 그려내면서 초능력을 쓰는 새로운 히어로의 모습으로 재해석됐다. 이동욱이어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게 됐던 뉴웨이브 남성 구미호라고나 할까.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런 작품들 속에서 ‘이동욱이 개연성’이라는 이야기들을 종종 하곤 한다. 독특한 스타일, 세계관, 톤 앤 매너를 가진 작품일수록 그의 연기가 설득력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유재석이 이끄는 유튜브 채널 ‘핑계고’에 자주 출연하면서 이동욱이 가진 어딘가 심드렁하지만 그러면서도 장난기와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면모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유재석과 함께 하는 모습에서 그는 차가운 듯 툴툴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만, 그것이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준다. 억지로 만들어내는 텐션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 묻어있어 그 점이 대중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는 것. ‘킬러들의 쇼핑몰’의 정진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이처럼 ‘겉차속따’의 인물을 지금의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거기에서는 위험요소들이 적처럼 도처에 깔린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냉정할만큼 단단하게 맞설 수 있으면서도, 같은 편끼리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히어로에 갈증을 느끼는 대중들의 판타지가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팀으로 꾸려지곤 하는 집단 속에서 구성원들이 원하는 리더십이기도 할 게다. 권력과 이익으로 얄팍하게 묶여진 베일이 이끄는 팀과는 전혀 다른, 피와 땀과 눈물로 묶여진 정진만이 이끄는 팀의 끈끈한 리더십이 그것이다.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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