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파트너’의 냉정한 변호사로 돌아온 장나라

굿파트너

지금이야 아이돌 가수들이 연기를 하고 이른바 ‘연기돌’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일이 흔해졌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연기자들은 연기를 하고 가수들은 노래를 하는 식으로 ‘영역의 구분’은 확실했고, 따라서 연기자와 가수가 되려는 이들은 거기에 맞는 과정들을 거쳤다. 배우가 신인 연기자로서 단역부터 시작해 자기 영역을 넓혀간다면, 가수 역시 데뷔를 위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영역의 경계를 단번에 해체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장나라다. 

 

본래 장나라는 SM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보아와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던 아이돌 지망생이었다. 걸그룹 데뷔를 하려 했지만 당시 SM의 자금난 때문에 자회사격인 퓨어엔터테인먼트를 통해 2001년 첫앨범을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하지만 장나라의 인생을 바꾼 건 우연한 계기로 캐스팅되어 연기를 하게 된 시트콤 ‘뉴논스톱’이었다. 장나라 특유의 귀여운 이미지가 시트콤 속 캐릭터와 맞아 떨어지면서 장나라는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다. 양동근과의 러브라인이 국민적 인기를 끌었는데, 그 연기 호흡은 시트콤 역사상 최고 시청률인 39.3%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트콤의 인기는 장나라의 가수로서의 입지 또한 수직상승시켰다. 갑자기 등장한 장나라의 앨범이 당시 최정상에 있던 성시경 같은 가수들과 경쟁해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2001년 연말 가요시상식에서 여자 신인상을 휩쓴 이 인물은 2002년 드라마 ‘명랑소녀성공기’로 무려 44.6%의 시청률을 내며 배우로서도 정상을 찍었고, 2집 앨범도 ‘Sweet Dream’, ‘이마도 사랑이겠죠’ 같은 곡들이 모두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로서는 낯선 일이었던 가수와 배우를 넘나드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길을 순식간에 개척해냈던 장본인이라는 것. 실제로 장나라가 열어 놓은 이 멀티 엔터테이너의 길은 훗날 무수한 연기돌들이 꿈꾸고 따라오게 된 길이 됐다. 

 

이처럼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멀티 엔터테이너로서의 확고한 입지를 구가했던 장나라는 2004년 중국에 진출하면서 일찍이 한류스타로서의 영역 또한 개척한다. 장나라가 주연으로 출연한 코미디 사극 ‘띠아오만 공주’는 당시 첫 방영에서 8.5%(보통 1%만 내도 성공이라고 한다)의 압도적인 시청률로 중국 전역에 장나라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 역시 ‘명랑소녀성공기’처럼 장나라 특유의 귀여운 이미지가 잘 어필되는 캐릭터로 주목받았는데, 지금껏 중국 내에서 그가 최정상의 한류배우로 기억되는 이유다. 장나라는 중국에서조차 배우와 함께 가수로서도 활동했는데 2005년에는 중국 가수들과 경쟁해 대륙최고 인기가수상을 받기도 했다. 즉 지금은 K콘텐츠의 인기로 아티스트들의 해외 진출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공고했던 국가의 장벽을 깨고 한류스타로서의 확고한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2003년부터 2011년까지의 중국 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부분 작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2011년 ‘동안미녀’, 2014년 ‘운명처럼 널 사랑해’ 같은 작품으로 조금씩 국내 활동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장나라는 2017년 ‘고백부부’로 뜨거운 대중들의 반응을 얻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서 20대 대학생의 나이로 넘어가는 타임리프 연기를 특유의 동안과 더불어 풍부한 감정연기로 소화해내면서다. 이를 기점으로 장나라는 훨씬 다채로운 연기 영역에 도전했다. ‘황후의 품격’ 같은 파격적인 설정의 작품에도 안정감을 부여했고, ‘VIP’에서는 VIP 전담팀에서 그들의 불륜까지 덮어주는 일을 하는 나정선이라는 인물이 남편의 불륜을 마주하며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연기했다. 또 ‘패밀리’에서는 블랙요원이지만 가족들에게는 그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는 강유라라는 인물을 코미디와 액션이 오가는 연기로 소화해냈다. 즉 이 과정은 과거 귀여운 이미지로 그에 걸맞는 캐릭터를 통해 인기를 구가했던 장나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또 성숙해가는 배우의 길을 열어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그가 출연하고 있는 ‘굿파트너’는 그의 연기자로서의 성숙이 어떤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차은경 변호사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냉정한 커리어우먼 그 자체다. 유명한 이혼전문변호사로 의뢰인들이 배우자들의 외도 때문에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조차 결코 흔들림 없이 현실적인 최대치의 이득을 의뢰인에게 얻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자신의 역할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런데 일에 있어서 이토록 똑부러지는 인물에게 남편의 외도라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혼전문변호사답게 내색하지 않은 채 증거를 모으고 있던 차은경 변호사는 그럼에도 이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갈등하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 그러다 급기야 눈앞에서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게 된 후 이혼을 결심하는데 자신의 이혼소송에 있어서는 냉정함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굿파트너’는 이러한 배신한 남편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더불어, 이혼전문변호사로서의 현실적인 냉정함을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차은경 변호사를 통해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통쾌한 한판승을 보여주는 복수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복잡한 이 인물의 감정으로부터 작품의 힘이 생겨나고 있는 것. 

 

장나라는 한동안 본인 스스로도 “지겹다”고 말할 정도로 ‘동안’의 아이콘으로 소비된 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백부부’ 같은 경우 3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넘나드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워낙 동안이라 30대 후반 연기에 있어 나이를 들게 보이려는 노력을 했던 에피소드가 회자될 정도였다. 지금도 4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동안이지만, 장나라가 원하는 건 그런 젊은 외모에 대한 칭찬 따위가 아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가 “동안이라는 수식어는 기자님들이 저를 보면 떠오르는 게 딱히 없어서 붙여주신 것 같다”며 “이번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수식어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던 대목에서 지금 장나라가 원하는 건 보다 성숙한 연기자로서의 성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최고의 위치에 일찍부터 올랐고 다양한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들을 개척해놓은 장본인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확장하고 성숙시키려는 노력. 지금까지 여전한 최고의 배우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장나라가, 어떤 경계와 한계 앞에 늘 서게 되는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인사이트가 아닐 까 싶다.(글:국방일보, 사진:SBS)

‘서진이네2’로 돌아온 이서진의 곰탕 같은 매력

서진이네2

“곰탕집 하나 할까봐요.” 10년 전 정선에서 처음 tvN 예능 ‘삼시세끼’가 문을 열었을 때 자급자족을 해먹으라는 제작진의 요구에 이서진은 커다란 솥단지에 소꼬리와 뼈를 넣어 오래도록 끓여낸 곰탕을 만들었다. 손님으로 찾아와 그 맛을 본 신구, 백일섭 할배들이 유명한 곰탕집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놓자 이서진은 특유의 보조개로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10년 후 현실이 됐다. ‘서진이네2’로 아이슬란드에서 열게 된 한식점 ‘서진뚝배기’의 메인 요리가 바로 이서진이 끓여내는 꼬리곰탕이 됐기 때문이다. 나라 이름만 들어도 한기가 느껴지는 아이슬란드와 뜨끈한 우리의 정이 느껴지는 꼬리곰탕의 만남. 그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을 거쳐 진국으로 우러난 이서진이라는 인물이 서 있다. 배우지만 나영석 PD와 만나 예능에서도 일가를 이룬 오래도록 끓여 굳이 뭘 넣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을 내는 곰탕 같은 매력의 소유자가 바로 그다. 

 

나와는 오랜 인연이 있는 나영석 PD가 처음 ‘삼시세끼’를 찍고 막 돌아왔을 때 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대뜸 “이번에는 진짜 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제목을 ‘삼시세끼’라 짓고 정말 하루 세 끼 챙겨먹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미션도 없는 예능을 시도했는데, 진짜로 출연자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란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와는 정반대로 ‘삼시세끼’는 대박을 냈다. 그건 당시 이미 미션 같은 인위적 설정에 물린 시청자들이 더 리얼한 걸 요구하기 시작했던 변화와 맞물린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의 소유자 이서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영석 PD는 이서진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방송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진짜로 다 해요.”

 

이런 모습은 ‘서진이네2’의 출연자들이 처음 아이슬란드에 내려 차를 타고 서진뚝배기를 향해 가는 길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서진과는 상반되게 대놓고 방송 분량을 만들겠다고 나서며 흐린 날씨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와 멋있다 진짜”라고 일부러 말하는 최우식에게 단박에 “거짓말 하지 마”라고 웃으며 선을 긋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의 이런 진솔한 모습은 일찍이 ‘1박2일’ 시절부터 나영석 PD의 눈에 들어왔고, ‘꽃보다 할배’의 짐꾼을 거치면서 요리왕을 꿈꾸던 것이 ‘삼시세끼’로 또 이어졌다. 그리고 ‘윤식당’과 ‘윤스테이’를 거쳐 ‘서진이네’로 성장했다. 나영석 PD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이 과정을 보면 마치 이서진이라는 인물의 자수성가 성장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그저 할배들 밥을 챙기다가 해외와 국내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식당 경영을 해보더니 드디어 해외에 자기 한식당을 열게 된 사장이랄까. 

 

‘서진이네2’에서도 오랜 시간을 거쳐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은 이서진의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면모들이 돋보인다. 매일 메인셰프를 정해 운영하겠다는 새로운 방침에 따라 누구를 첫 날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던 이서진은 최우식을 스타트로 세우면서 그 이유로 분명 첫날은 손님이 별로 없을 거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내세웠다. 나영석 PD가 “버리는 카드냐”고 묻자 이서진은 웃음기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아니 버리는 게 아니라 그래서 얘가 데뷔하기 좋은 기회라는 거지.” 그 말에 붙은 ‘따뜻한 속마음도 차갑게 표현하라’는 자막은 이서진이 가진 솔직하면서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잘 드러낸다. 어찌 보면 간지러운(?) 말이나 상황들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은 이 인물은 요리를 하다가 최우식이 살짝 엄지손가락을 데이자 무심한 척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다가도, 상처부위를 들여다 보고는 자신도 과거에 그런 일을 겪었다며 네 상처는 별거 아니라고 ‘자기 식’의 위로를 덧붙인다. 

 

이러한 ‘겉차속따’의 면모는 이서진이 변화하는 예능 환경 속에서 도드라지는 인물로 성장하게 된 중요한 이유다. 과거 연예인들은 방송에서 정반대로 ‘겉따속차’의 모습을 보이는 걸 일종의 이미지 관리로 해왔던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는 차갑지만 인간적인 면모들을 방송에 나올 때만 강조하는 것이 연예인들의 관리된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서진은 그 틀을 깨고 나와 있는 그대로의 툴툴거리고 때론 투덜대는 자신의 면모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꽃보다 할배’에서 어르신들을 챙기는 짐꾼 역할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하지만, 나영석 PD와 앉아 뒷풀이로 술을 마시거나 할 때는 한없이 푸념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여준 것.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된 면모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힘들어 투덜대는 것일 뿐, 어르신들에 대한 배려는 진심이라는 걸 드러냈다. 즉 인간은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점점 리얼함을 요구하게 된 방송 환경 속에서 이서진이 주목된 이유다. 

 

물론 이서진의 본업은 배우다. 그래서 최근에도 ‘조폭인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에 김득팔이라는 조폭으로 특별출연해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고,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에서는 메쏘드엔터 총괄이사인 마태오 역할을 또 ‘내과 박원장’에서는 대머리 내과의사 박원장 역할로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트랩’이나 ‘타임즈’ 같은 작품에서 진지한 역할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워낙 예능 이미지가 강해지다보니 조금은 희화화된 캐릭터로 소비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그 유명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다모’의 주인공이었고 ‘연인’에서 김정은과 호흡을 맞춘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기도 했다. 즉 현재의 흐름대로 예능에서 얻은 이미지로 배역 또한 소비되고 있지만 언제든 또다른 변신이 가능한 배우라는 점이다. 

 

중요한 건 물 흐르듯 변화하는 상황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나오는 다양한 감정들을 이서진은 대중들에게 그대로 납득시켜주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투덜대도 그 밑에 깔린 따뜻함이 느껴지고, 따뜻한 목소리에도 장난기를 숨기는 그런 다양한 감정의 공존이 그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며 누군가의 감정을 일면으로만 파악하긴 어렵고 그것이 결국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끓이고 끓여야 비로소 진국의 맛이 우러나는 곰탕처럼.(글:국방일보, 사진:tvN)

‘하이재킹’으로 또다시 극한의 상황 연기 선보이는 하정우

하이재킹

이번에도 또 극한의 상황이다. 그런데 이 배우 극한 상황에만 들어가면 펄펄 난다. 하정우 이야기다. 지난 21일 개봉한 영화 ‘하이재킹’에서 하정우는 여객기 조종사 태인 역할을 맡았다. 제목에서부터 무슨 이야기일지 짐작이 가는 이 영화에서 조종사 역할인 하정우는 하이재킹을 시도해 북으로 넘어가려는 테러범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민항기 조종사 태인(하정우)이라는 인물을 맡았다. 폭탄이 터져 바닥이 뚫려버린 비행기를 무사히 조종해내야 하고, 테러범의 위협을 받는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순간적인 선택들을 해야 하며, 나아가 테러범과 협상을 시도하기도 해야 한다. 비행기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이고, 또 하정우로서는 극 중 거의 조종석에 앉아서 하는 연기를 펼치는 것이지만 어찌 보면 단조로울 수 있는 그 장면들이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너무나 평온한 상황에서부터 시작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위급한 상황들을 맞이할 때마다 하정우의 변화하는 얼굴이 관객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극한 상황에서 펼쳐내는 연기는 이제 하정우에게는 익숙할 정도가 됐다. 그간 다양한 영화에서 납치부터 고립, 테러 등등 극한의 상황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로 배우로서 시선을 끌었고, ‘추격자’의 섬뜻한 사이코패스 역할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국가대표’로 스키점프하는 주인공처럼 비상했던 하정우지만, 그의 연기 인생에서 확연한 변곡점을 찍은 작품은 2013년 상영된 ‘더 테러 라이브’였다. 이 작품이 독특했던 건, 테러범이 앵커인 윤영화(하정우)에게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그 자리를 벗어나거나 하면 인이어 헤드폰에 장착된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위협을 하는 설정을 담고 있어서다. 결국 이 테러라는 위협 속에서 하정우는 내내 스튜디오에 앉아서 하는 연기를 선보일 수밖에 없게 됐다. 모니터를 통해 보여지는 바깥 상황들과, 테러범과의 대화와 협상 등을 하면서 변화하는 상황들을 관객들은 하정우의 얼굴을 통해 실감하게 된다. 어찌 보면 영화 내내 하정우의 얼굴만 보다 나오는 상황일 수 있는 영화지만, 놀랍게도 그의 연기는 지루할 틈을 보여주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감정들을 얼굴표정의 변화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끝까지 몰입시킨다. 

 

이후 2016년 상영된 ‘터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를 몰고 터널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매몰되어 갇히게 된 정수(하정우)가 보여주는 사투를 담은 영화였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재난영화의 공식처럼 등장하는 절망적 현실에 대한 이야기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터널에 갇힌 사람이 하는 행동에서나 또 갇힌 생존자를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119대원들의 이야기에서도 그저 절실함과 간절함만이 아닌 훈훈한 웃음과 유머를 넣었다. 이것은 자동차 영업사원 정수라는 인물을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자로 작품이 그려내고 있어서다.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고 때로는 유머감각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폐쇄 공포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답답한 공간에 고립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 인물을 통해 숨통을 틜 수 있게 된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두 시간 가까이 얼굴만 쳐다봐도 쫄깃한 긴장감과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던 하정우의 연기는 여기서도 단연 돋보인다.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의 긴장과 더불어 이를 풀어주는 낙천적인 모습을 왔다갔다 하는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2018년 선보인 ‘PMC: 더 벙커’에서도 하정우는 CIA의 의뢰를 받아 군사분계선 지하 30미터 비밀벙커에서 북측 고위급 인사를 망명시키는 미션을 수행하는 글로벌 군사기업(PMC)의 팀장 에이헵 역할을 맡았다. 벙커에 갇힌 채 시시각각 변해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에이햅이 처한 상황도 바뀌게 되는데 영화는 이 인물을 초근접으로 따라다니며 그 위기일발의 상황들을 담아낸다. 이 영화가 특이했던 건, 마치 미로 속에서 에이햅의 시점으로 벌어지는 1인칭 슈팅게임을 보는 것 같은 연출이다. 역시 폐쇄된 공간에 갇힌 상황 속에서 그 단조로움을 깨주는 하정우의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다. 또 작년 상영된 ‘비공식작전’ 역시 밀실 같은 폐쇄된 공간은 아니지만 1986년 레바논 베이루트라는 특정 지역에 갇혀버린 외교관 민준(하정우)의 위기탈출을 그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시 비슷한 결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니 하정우를 ‘재난 전문 배우’라고 하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물론 하정우를 ‘재난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 하나로 묶어두는 건, 그가 그간 해온 필모들을 들여다보면 합당한 일이 아니다. 그는 ‘추격자’의 연쇄살인범, ‘비스티 보이즈’의 비열한 호스트, ‘황해’의 조선족, ‘의뢰인’의 변호사, ‘범죄와의 전쟁’의 조폭은 물론이고, ‘베를린’의 비밀요원과 ‘허삼관’의 아버지 등등 무수히 많은 다양한 역할들을 연기했다. 그 중에서 ‘재난 전문 배우’라고 지칭하는 건 그래서 아마도 이 연기가 한정된 공간에서 다양한 감정들을 끄집어내야 하는 난점을 가진 것으로 그걸 해낸 하정우의 연기력에 대한 상찬이 담긴 의미일 게다. 

 

그런데 이번 ‘하이재킹’의 경우는 그가 해온 일련의 재난영화들 속의 연기와는 또 다른 면들이 드러난다. 그건 아무래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허구의 ‘재난영화’와는 사뭇 다른 진정성을 요구했기 때문일 게다. 이 작품은 1971년에 실제 벌어졌던 대한항공 납북 미수사건을 소재로 했다. 끝까지 테러범과 맞서 싸우다 터지는 폭탄을 온몸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승객과 승무원들을 모두 살린 의인 전명세 조종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과장없이 의인에 대한 예우를 담아 진지한 연기를 펼쳤다.

 

하정우가 특히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인물의 연기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이른바 ‘위험사회’가 주는 불안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고 때론 타인을 위한 희생까지 감수하는 선택을 하는 이들에 대한 공감이 그가 연기해낸 인물들을 통해 느껴졌을 테니 말이다. (글:국방일보, 사진:영화'하이재킹')

‘My name is 가브리엘’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간 박보검

My name is 가브리엘

누구나 낯선 세계에 첫 발을 딛던 순간들을 기억할 게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느껴지는 두 가지 감정.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순간들을 말이다. 특히 처음 보는 타인들과 마주할 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긴장의 경계를 넘어서 대화를 통해 조금씩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될 때, 그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뀌기도 한다. 아마도 JTBC ‘My name is 가브리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박보검이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My name is 가브리엘’은 한 마디로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박보검이 살아볼 타인의 삶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루리라는 인물의 삶이다. 나라도 도시도 낯선 그 곳에 뚝 떨어진 박보검은 루리가 사는 집을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가고, 루리의 방에 있는 물건들이나 해야할 일을 적어놓은 체크리스트 같은 걸 통해 그가 누구인가를 유추한다. 그리고 체크리스트에 있던 약속된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루리가 더블린에서 꽤 큰 규모의 합창단 단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또한 그가 이끄는 합창단으로 며칠 후 길거리에서 벌이는 합창 버스킹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합창단 지휘라는 걸, 말도 낯선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해야 하는 상황, 만일 그런 일을 내가 해야만 한다면 나는 어땠을까. 머리가 하얘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불가능해보이는 미션 앞에 선 박보검을 안심시키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루리의 친구들이다. 20대에서 40대까지 있는 그 친구들은 하나 같이 프로그램 콘셉트에 맞춰 박보검을 오랜 친구인 루리처럼 대한다. 친구들 이름조차 몰라,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를 유머로 꺼내놓으며 애써 이름을 묻고 기억하려하는 박보검에게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나씩 하고 또 루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였는가를 알려준다. 낯선 상황의 당혹감에 머리를 쥐어뜯던 박보검은 차츰 편안해지며 그 상황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이들 친구들과 함께 수십 명의 합창단원을 만나러가고 거기서 바로 이뤄진 연습 과정은 박보검으로서는 또다른 멘붕의 연속이다. 하지만 자신이 과거 군 시절에서 군악대를 하며 익혔던 경험들을 꺼내와 단원들의 합창에 대해 나름의 코멘트와 아이디어를 주고, 거기에 단원들이 “너무나 좋은 코멘트”라는 리액션을 해주면서 그 긴장은 풀려나간다. 그리고 박보검이 솔로파트를 부르고 단원들이 백코러스로 화음을 넣어주는 ‘Falling Slowly’를 부르다 결국 울컥해 눈물을 보인다. 박보검은 그 감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잘하고 있고 잘 해낼 수 있다고 저를 다독이는 것만 같았어요.”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보여준 이 감동적인 장면들은, 먼저 이 배우가 가진 특별한 몇 가지를 끄집어낸다. 그 첫 번째는 낯선 상황에서 낯선 이들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늘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프로그램 콘셉트가 그래서 그런 점도 있었겠지만,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도망치고 싶었을 그 상황에서도 그는 루리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합창단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처음에는 망설이고 어려워했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고 해내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설혹 틀린다 하더라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어쩌면 박보검이라는 배우가 지금껏 다양한 역할들 속으로 들어가며 가졌던 자세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011년부터 영화, 드라마에 다양한 조역, 단역을 거친 박보검이 드디어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2015년 방영됐던 ‘응답하라 1988’로 바둑기사 최택 역할을 연기하면서다.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다,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던 박보검은 그 후 ‘구르미 그린 달빛’, ‘남자친구’를 거쳐 ‘청춘기록’으로 확실한 ‘청춘의 초상’으로 떠올랐다. 웃는 얼굴에도 우수가 가득한 눈빛을 가진 이 배우는 밝은 청춘들에 깃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표상하는 듯한 연기로 호평받았다. 또한 영화 ‘서복’과 ‘원더랜드’를 통해서는 심지어 로봇이나 AI 역할에서도 특유의 감수성이 빛나는 눈빛으로 한층 깊어진 연기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박보검을 여러 작품에서 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감수성’이다. 이 인물은 아주 작고 소박한 일에도 금방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감수성의 폭발을 보여준다. 최근 상영된 ‘원더랜드’에서 오랜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다 깨어난 태주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박보검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가능했을 희비극이 교차하는 눈빛을 통해 연기해내기도 했다. 물론 다른 역할에 몰입해야 하는 배우들이라면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보검이 보여주는 감수성은 특유의 세상에 대한 열린 자세와 적극성까지 더해져 더 깊이있게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있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루리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 힘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루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친구와 동료들을 통해 보다 깊이 이해하려 했고, 어느 순간 루리가 합창단을 이끌며 느꼈을 그 감정들을 자신도 공유하게 됐던 거였다. 박보검의 이 사례는 우리가 낯선 상황에 들어갔을 때 그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꿔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건 타인은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미루어 알아차리는 특유의 감수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동시에 타인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애쓰는 모습에 합창단 단원들이 하나같이 보여주는 ‘환대’하는 모습은 그것이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에 대한 인지상정이라는 걸 드러낸다. 그러니 낯선 상황을 만났을 때, 미리 두려워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타인도 느끼고 있을 똑같은 낯섦을 공감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일 때 그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뀔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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