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금력 미화하는 <상속자들>, 뭐가 문제일까

 

때로는 드라마 작가에게 능력이 오히려 독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상속자들>이 그렇다. 드라마만을 놓고 보면 <상속자들>은 재벌2세와 가난한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다. 지금껏 김은숙 작가가 계속 해왔던 이야기의 반복이고 또 가장 잘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속자들(사진출처:SBS)'

“나 너 좋아하냐?” 같은 김은숙 작가 특유의 대사 톤도 여전하고, 밀고 당기며 때론 아프고 때론 달달하게 이어지는 멜로 역시 꽤 강한 극성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민호, 박신혜, 김우빈, 강민혁 같은 아이돌 스타들의 존재감은 어찌 보면 늘 봐왔던 김은숙 표 멜로의 역할 놀이에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어찌 보면 이들이 있어 드라마가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구석들, 이를 테면 지나친 우연의 반복이나 제국고등학교 같은 과장된 설정들이 그나마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속자들>은 전형적인 이야기에 비현실적인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꽤 재미가 있다. 마치 아이돌 팬시 상품 같은 느낌이랄까. 김탄(이민호)이 캘리포니아에서 서핑을 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풀빌라에서 사는 모습은 그가 아무리 유학이 아닌 ‘유배’라고 말해도 보통사람들에게는 판타지의 하나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김탄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제국고등학교는 ‘사탄들의 학교’라고 일컬어지지만, 가진 자들의 재수 없음의 이면에는 고등학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으리으리한 환경과 커리큘럼에 대한 막연한 동경 역시 깔아놓고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그 막연한 동경 속에 자꾸만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행동들마저 도취시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최영도(김우빈)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그가 단지 가난하고 클래스가 다르다는 이유로 준영(조윤우)이 같은 아이를 구타하고 왕따시키며 고소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장면은 사실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시선은 왕따 당하는 준영이의 입장보다는 왕따시키는 최영도의 입장에 가 있다. 물론 현재는 달라졌지만 김탄 역시 과거에는 최영도와 다름없는 캐릭터였다. 이 드라마는 이 부유한 친구들이 소위 고통이라고 부르며 그것 때문에 폭력과 금력을 쓰는 것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이미 제목에서 드러나 있다. <상속자들>에 붙어있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텨라’라는 제목에는 이들 태어날 때부터 왕관을 쓰게 되어 있는 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고통’이라는 것을 이 드라마가 다루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상속자들>의 김탄이나 최영도처럼 ‘왕관을 쓰려는 자’의 고통이란 대부분 아버지의 여성 편력과 그로 인해 콩가루 집안이 된 가족사에서 비롯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왕관을 쓰려는 자’들의 고통을 다루는 일이 과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 왕관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현실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아마도 이들 ‘왕관을 쓰려는 자’들은 드라마가 슬쩍 보여주는 것처럼 거의 상류층 1%에 해당할 것이다. 상류층 1%의 고통을 얘기하는 드라마는 어쩌면 그 자체로 나머지 99%를 그저 배경으로 치부하면서 이 1%의 세계가 가진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은상(박신혜)은 바로 그 99%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의 메이드룸에서 살고 있다는 공간 설정 자체가 이 인물이 처한 현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차은상이라는 인물이 이 부유한 저택에서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키는 심부름을 해야 하고 명령에는 오로지 예스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드라마는 그녀에게 김탄과 최영도가 조금씩 빠져드는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이 왜 그녀에게 이토록 목매게 되는지는 잘 설명이 되어있지 않다.

 

그 이유를 드라마는 클리쉐로 넘겨버린다. 우연적인 만남의 반복과 왠지 모를 끌림이라는 상투적인 방식이다. 김탄은 갑자기 차은상에게 “나 너 좋아하냐?”고 묻고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최영도 역시 마찬가지다. 정략결혼으로 이복동생이 될 지도 모를 유라헬(김지원)을 열 받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 차은상에게 갑자기 관심을 갖는 식이다. 즉 이 모든 멜로의 키는 가진 자들이 쥐고 있다. 그들은 사랑할 여유조차 없는 현실에 처한 차은상에게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혹자들은 결국은 신데렐라 판타지를 다루는 로맨틱 코미디에 대해 너무 심각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벌가의 신데렐라 판타지를 즐기기에는 이미 현실이 너무 많은 재벌가들의 문제를 드러내주었다. 사모님의 수상한 외출이나 특목고 에서 벌어진 사배자 전형의 편법 운용 같은 사례는 심지어 대중들의 공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최근 재벌가를 다루는 드라마들이 과거와 달라진 점은 아마도 이러한 대중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추적자>가 권력이 가진 힘과 싸우는 한 서민을 통해 정의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황금의 제국>은 그 재벌가가 가진 태생적인 비극을 다루었다. 하다못해 <결혼의 여신> 같은 드라마도 재벌가 판타지를 오히려 깨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던가.

 

김은숙 작가처럼 멜로를 잘 쓰는 작가도 없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잘 쓰는 것이 작가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자칫 능력은 오히려 잘못 사용되어지면 파괴적인 힘이 될 위험성이 있기 마련이다. <상속자들>에서 폭력과 금력이 이른바 그들의 고통이라는 근거로 미화되는 것은 그래서 제 아무리 판타지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텨라’라고 말하지만 지금의 힘겨운 현실에서 왕관을 쓰려는 자의 고통이란 엄살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 개념이 잘 보이지 않는 <상속자들>. 재미만 있다고 모든 게 다 용서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배우를 배우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배우를 배우로 만드는 것은 도대체 뭘까. <배우는 배우다>는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고 어찌 보면 너무나 모호한 이 질문을 도발적으로 던지는 영화다. 배우의 존재 근거를 질문하는 영화에 이준이라는 아이돌 스타를 세웠다는 것이 그 도발의 증거다. 왜 하필 이준이었을까.

 

사진출처: 영화 '배우는 배우다'

물론 이준은 <닌자 어쌔신> 같은 영화를 통해 액션 연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준의 연기에서 장점으로 보이는 것은 단순히 말로 전달하는 장면에서조차 그것을 액션처럼 몸으로 보여주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은 몸의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연기에 있어서 그가 가진 굉장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렇게 연기에 대한 타고난 자산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준은 연기자로서는 여전히 초보에 가깝다. 배우라고 부르기보다는 아이돌 스타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그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바로 이 부분에 이 영화가 가진 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배우나 연기 같은 조금은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거나 혹은 우리네 일상일 수 있다는 것.

 

<배우는 배우다>에서 이준이 연기하는 오영이라는 인물은 연기의 기술은 잘 모르지만 몰입이 뛰어난 친구다. 그래서 서툴게도 연극을 하면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만 너무 지나치게 빠져들어 극을 망치기 일쑤다. 즉 연극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연기한다는 점이다. 물론 작품을 망치는 위험성이 있지만 연기자로서 이보다 중요한 덕목은 없을게다. 최고의 연기란 연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런 오영이란 인물에게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매니저가 달라붙으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영화의 단역 캐릭터를 조역까지 바꿔놓아 말 그대로 일약 스타를 만들어버리자 오영은 진정한 연기가 아니라 마치 스타를 연기하는 인물처럼 바뀌어버린다. 그토록 자신을 밟았던 여배우를 마치 정복하고 복수하듯 정사를 치른 후 그래서 그가 무심코 내뱉는 말은 이렇다. “여배우라고 별거 아니잖아.”

 

정점에 올라 스타가 되자 그는 작품의 캐릭터에 몰두하기보다는 스타가 된 자신에 더 몰입한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바라보는 연기라는 세계가 단지 스크린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시점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페르소나’라고도 흔히 표현되는 이 가면은 그래서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너무 가면을 오래 쓰다보면 자신의 맨얼굴을 잊게 된다는 점이다.

 

오영은 스타라는 가면을 쓰면서 배우라는 자신의 본래 얼굴을 잊어버린다.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스스로 컷을 외치는 건 그가 전혀 배역에 몰입되어 있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결국 그는 그렇게 추락한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맨얼굴을 찾아낸다. 중요한 것은 이 일련의 성공과 추락의 과정을 통해서 그가 배우라는 직업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는 점이다. 어디서 어떤 역할을 하든 ‘배우는 배우다’라고 편안히 말할 수 있다는 것. 마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두 시퀀스가 있다. 그 하나는 오영이 어느 날 우연히 룸싸롱에서 알게 된 조폭 같은 깡다구(마동석)에게 이끌려 억지로 형 동생하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스타를 연기하며 살아가던 오영은 갑자기 조폭 영화(이를테면 <영화는 영화다> 같은)의 한 인물을 연기하게 된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굴욕적인 일을 당하면서 그가 하는 행동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연기를 하게 되는 우리네 삶을 잘 보여준다.

 

또 한 시퀀스는 마치 오영에게 구원처럼 등장하는 여자 서영희와 길거리에서 만나 즉석에서 벌이는 연기 장면이다. 이 장면은 마치 남녀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그 애증의 갈등을 그저 평범하게 일상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와 그녀가 함께 연극에서 했던 연기를 재연하는 것이다. 즉 연기와 일상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이 장면에서는 도대체 어떤 게 연기이고 어떤 게 실제인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연기적인 행동들이 대부분 이럴 것이다.

 

<배우는 배우다>는 이처럼 연기가 연기자들의 것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고 있는 일상적인 것이란 걸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연기자와 일반인을 가르는 것은 오영이 경험했던 것처럼 실제 연기생활을 통해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그래서 어디서 연기해도 ‘배우는 배우다’라고 얘기할 줄 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경험한 이준은 어떨까. 그는 과연 이 영화를 통해 ‘배우는 배우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연기자의 세계로 들어왔을까.

 

영화를 통해서 보면 분명 이준은 신연식 감독이 그려낸 이 치밀한 연기의 세계 속에서 진짜 연기자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투박한 면이 보여도 그는 분명 꽤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전라 정사 신을 찍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누구나 영화를 보고 나오면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 “이준, 역시 배우는 배우네.” 이것만큼 배우에게 좋은 찬사가 있을까.

이미지 권력의 시대, 문제는 없나

 

최근 JTBC에서 방영되고 있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풍경들이 등장한다. 드잡이에 날치기 통과 같은 볼썽사나운 장면들을 통해 늘 봐왔듯이,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댈 것 같은 여야 정치인들이 함께 모여앉아 게임을 하고 토크도 하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단박에 이해가 될 수밖에 없다. 늘 적과 아군으로만 나누어진 모습을 보였던 여야 정치인들이 함께 한 바탕 놀아보는 프로그램인 것.

 

'적과의 동침(사진출처:JTBC)'

이것은 과거 같으면 도저히 보기 힘든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방송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가져가는 것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시의 프로그램들은 뉴스나 교양, 다큐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들어와 있는 것. 도대체 무엇이 이런 파격적인 변화를 만든 것일까. 가장 큰 것은 지금 현재가 이미지가 갖는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이른바 ‘이미지 권력의 시대’라는 점이다. 좋은 이미지를 가지면 뭐든 얻을 수 있는 시대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누구보다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이미지가 하나의 권력이 된다는 것은 거꾸로 연예인이 정치인만큼의 힘을 발휘하는 이른바 폴리테이너나 소셜테이터가 급증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 때 연예인들은 이른바 딴따라라고 비하되곤 했지만 지금은 청소년들이 되고 싶은 꿈 1순위가 될 정도로 그 위상이 커졌다. 그것은 이미지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들의 이미지의 힘은 이제 SNS 상에서 한 줄을 적는 것으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지가 권력이 되는 과정에는 많은 부작용이 생겨난다. 이미지는 실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가 좋다고 해서 그 내용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접하는 대중들로서는 내용까지 좋은 것으로 오인되고는 한다. 즉 정치인이 예능을 잘한다고 해서 정치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여진 서민적인 이미지는 그 정치인의 행보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지의 힘이 실체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2007년 대선 과정에 등장했던 광고를 통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후보 광고를 떠올려 보라. 욕쟁이 할머니의 국밥집이 등장했지만 사실 그 욕쟁이 할머니는 연기자로 밝혀졌다. 즉 일련의 광고이미지는 하나의 연기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물론 광고가 전하는 메시지는 진심이었다고 강변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이 그 광고가 보여준 것처럼 친서민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연예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방송을 통해 좋은 이미지로 많은 수익을 내면서도 실제로 좋은 일을 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연예인들 역시 적지 않다. 흔히 많이 접하게 되는 무수한 논란과 사건사고들을 생각해보라. 이것이 엄청나게 큰 파장과 논란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이미지로 봐왔던 모습과 전혀 다른 어떤 실체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굉장한 힘을 주지만 그것이 모두 실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통해 어떤 힘을 갖게 되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유재석 같은 모범적인 연예인은 단적인 사례다. 그는 어떤 점에서는 좋은 이미지 때문에 더 사회에 책임감 있고 좋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는 상승효과를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연예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은 하나의 권력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어떻게 얻어지고 또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미지 권력은 실제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더 유리하다. 이를테면 한때 ‘땡전뉴스’라고 불리던 뉴스보도들은 권력을 이미지화하면서 다시 그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사용된 이미지 권력이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뉴스가 뉴스 같지 않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 행태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얻어진 권력이 과연 서민들을 위한 정치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정치인들(이거나 혹은 정치인이었던 이들)의 예능 출연 러시는 그래서 그 취지인 ‘그들도 우리와 같다’는 식의 공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미지 권력의 시대라는 점을 두고 보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이제 공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적인 이미지까지 하나의 힘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니까. 문제는 이 사적이고 공적인 이미지가 실체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 대중들이 갖게 되는 허탈감과 실망감이다. 그러니 예능 좀 한다고, 또 예능감이 있다고 그것이 실체라 쉬 마음 주지 말자. 그것이 실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더 큰 상처만 줄 테니.

김태원, 이젠 말보다 음악에 집중해야할 때

 

최근 부활의 김태원은 예능중단을 선언했다. 그간 <남자의 자격>에서 국민할매로, <위대한 탄생>에서는 국민멘토로까지 불렸던 그였다. 그는 <나 혼자 산다> 같은 관찰예능에서도 발군의 예능감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가끔 참여한 토크쇼들에서도 그는 큰 웃음을 주는 한 마디 한 마디와 함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촌철살인의 말들로 단연 돋보이는 게스트였다. 토크쇼, 리얼 버라이어티쇼, 오디션 프로그램, 관찰예능까지. 실로 김태원은 최근 몇 년 동안 예능이 발견해낸 대단한 가능성 중의 하나가 분명했다.

 

'위대한 탄생(사진출처:MBC)'

그런데 그가 돌연 예능중단을 선언했다. 이유는 당연하지만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서란다. 새로운 앨범 작업에 오롯이 몰두하겠다는 것이다. <나 혼자 산다>에서 하차했을 때 딸 서현 양이 같이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댔지만, 사실 그에게는 음악적인 이유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예능은 그에게 현실적인 것들을 제공해주었지만 그는 결국 아티스트다. 음악이 아닌 예능으로 이름을 떨치고 돈을 버는 것이 성에 찰 리가 없다.

 

물론 아티스트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본분인 아티스트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다. 최근까지의 그의 행보를 보면 그러나 부활의 김태원보다는 예능인 김태원으로서의 존재감이 거의 압도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예능인으로서 활동하면서 냈던 노래들은 특유의 록 발라드가 갖고 있는 감성적인 멜로디가 여전히 돋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너무 비슷비슷한 멜로디의 동어반복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항간에는 이제 몇 소절의 멜로디만 들으면 그 곡이 김태원의 곡이라는 걸 알아챌 정도라는 얘기도 나온다. 자신만의 풍이 있다는 것은 물론 나쁜 것은 아니지만, 김태원의 최신 곡들을 부활의 초창기 앨범들과 비교해보면 그 날카로운 면들이 많이 무뎌진 느낌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노래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전히 괜찮지만 과거 우리가 부활에서 기타치며 노래까지 하던 김태원의 아우라와 기대감에는 못 미친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태원이 아닌가.

 

여러모로 예능을 하며 음악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그나마 김태원을 버티게 해준 건 <남자의 자격>을 하며 앞에서 이끌어주었던 이경규라는 존재 덕분이었지만 프로그램이 종영하면서 이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었다. 무엇보다 예능 이미지로 자꾸만 굳어지면서 흐려지는 록커로서의 이미지는 부담이었을 게다. 국민 할매라는 친근한 캐릭터는 물론 좋지만 기타를 들기조차 힘들 것 같은 그 이미지는 음악에는 결코 좋을 수 없다.

 

최근 김태원은 모 라디오 방송에 나와 과거 “부활에서 보컬을 마음대로 교체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또 이 방송에서는 뒷담화를 하던 이승철에게 변진섭이 일침을 가해 머쓱해했다는 이야기도 내놨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나름 쿨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얘기한 것이다. 과거 김태원이 <놀러와>나 <라디오스타>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이러한 과거 회고담을 꺼냈을 때만 해도 대중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은 사뭇 달라졌다. 공감도 있지만 비난에 가까운 악플도 적지 않게 보인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것은 김태원이 그간 많은 예능 프로그램을 출연하면서 너무 많은 말들을 해왔기 때문이다. 예능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무에 잘못됐냐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김태원이라는 아티스트의 색깔을 없애는 쪽으로 작용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중들에게 김태원은 어느 순간 음악은 잘 들리지 않고 말만 무성해진 그런 존재로 이미지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예능 중단을 선언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면 이제 말이 아니라 음악에 매진할 일이다. 지금은 대선배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며 젊은 세대들까지 음악으로 소통하는 시대다. 조용필의 ‘바운스’가 그렇고, 여전히 매력적인 목소리로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고 있는 신승훈의 신보가 그렇다. 부활이 진정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예능이 아닌 음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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