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1994>, 왜 촌스러움을 전면에 세웠을까

 

기성 드라마와 비교해보면 <응답하라 1994>는 세련된 드라마는 아니다. 첫 회를 삼천포(김성균)의 상경기 하나로 오롯이 채워 넣은 것은 기존 드라마 문법으로 보면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체로 멜로드라마의 첫 회란 남녀 주인공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4>는 꽤 많은 시간을 삼천포의 상경기에 할애했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드라마에 시트콤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아마도 이런 선택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능을 해봤던 경험 때문일 게다. 드라마? 꼭 그 문법을 따라갈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응답하라 1994>는 그래서 예능이 그러한 것처럼 때론 조금은 과장된 시트콤적인 상황을 통해 캐릭터와 웃음을 만들어내면서 필요하면 내레이션으로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인물의 심리를 대놓고 드러내기도 한다.

 

성나정(고아라)과 쓰레기(정우)의 멜로 라인도 그 과정을 보여주기보다는 이미 관계가 설정된 상황을 오누이처럼 살짝 가리는 것으로 처리했다. 2회에서 갑자기 쓰레기가 아픈 성나정의 옆자리에 함께 눕는 장면과 함께 이 둘이 오누이가 아니라 오래 만나다보니 오누이 같은 친근함을 가진 특이한 관계라는 것이 설명되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해가는 과정도 드라마적인 스토리 전개보다는 시트콤에 가깝다. MT를 가서 술 마시기 게임을 하는 성나정이 오매불망 쓰레기의 삐삐만을 기다리는 장면이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산책 나온 성나정에게 무심한 듯 살짝 애정을 표현하는 쓰레기의 모습은 이야기의 전개라기보다는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시트콤적이다.

 

이것은 칠봉이(유연석)가 어머니의 두 번째 결혼식을 찾아가려다 운전이 미숙한 성동일이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아다니다 늦게 되어, 결국 삐삐 음성으로 마음을 전하는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응답하라 1994>의 스토리는 어떤 일관된 흐름이나 전개를 갖기 보다는, 그 때 그 때의 상황과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그 안에 캐릭터 하나 하나를 소개하고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조금은 단순해 보이고 심지어는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이 전개는 그러나 이 드라마가 가진 소재나 메시지를 떠올려보면 의외로 괜찮은 그림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 드라마가 전면에 내세운 건 ‘촌스러움’에 대한 것이 아닌가.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하숙집(그 하숙집도 지방에서 갓 올라온 집안이 꾸린 것이다)에서 같이 생활하며 낯선 서울 살이를 체험하는 이야기.

 

이것은 왜 첫 회에 삼천포의 상경기에 그토록 시간을 할애했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94년으로의 초대. 삼천포라는 인물은 그 시절의 조금은 구식의 풍경과 정서들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해준 인물인 셈이다. 그런데 왜 굳이 1994년을 다루면서 촌놈들의 서울 체험을 주된 소재로 삼았을까. 이것은 자칫 지금 세대에게 낯설 수 있는 1994년의 공기를 ‘촌놈’이라는 공통된 시선을 통해 보다 자연스럽고 또 재미있게 전하기 위함이다.

 

지금 세대에게 1994년이 낯선 모험의 지대인 것처럼 촌놈들에게는 당시나 지금이나 서울이 모험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양상국이 ‘네가지’나 <인간의 조건>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이 촌놈의 시선은 또한 서울이 익숙한 이들에게도 서울을 낯선 모험의 공간으로 바꿔주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기 표현한 ‘촌놈’이라는 조금은 비하적인 표현은 이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정감가고 아날로그적이며 세련됨이 밀어낸 따뜻한 정조를 드러내는 긍정적인 의미인 셈이다. 양상국처럼.

 

삐삐라는 지금은 너무나 투박하고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물건은 그래서 오히려 스마트폰 하나면 즉각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는 지금 시대에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관계의 아련함 같은 것을 전해준다. 누군가의 삐삐가 오기를 밤새도록 기다리는 경험이라던가, 직접 통화하지 못하고 메시지를 녹음해 마음을 전하는 방식은 마치 손 글씨로 한 자 한 자 마음을 적어나가던 편지처럼 애틋해지는 구석이 있다.

 

<응답하라 1994>는 분명 촌스러운 드라마다. 하지만 이 촌스러움은 오히려 이 드라마가 지금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단지 과거를 회고하거나 추억하는 향수 드라마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가 잃어버린 아날로그적 정조를 ‘촌놈’의 시선으로 끌어내는 것. 이만큼 현재에 괜찮은 의미를 던져주는 주제의식이 있을까. 이것이 이 드라마의 촌스러움에 기꺼이 빠져드는 이유다.

기황후? 차라리 노국공주를 다루는 편이...

 

국적만 고려인이면 무조건 사극의 주인공이 되도 문제가 없는 걸까. <기황후>에 쏟아지고 있는 논란을 들여다보면 역사왜곡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사극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달라진 지 오래다. 역사라기보다는 극이라는 데 더 방점이 찍히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 역사적 사실 혹은 아예 없는 사료에 상상력을 덧붙이는 일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게 되었다.

 

'기황후(사진출처:MBC)'

그런데 <기황후>는 시작도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휘말렸다. 고려에서 태어나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간 후 원나라 황제 혜종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사료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에 오르게 했고, 원나라에 고려의 풍습을 전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황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여성을 과연 고려인으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긴다.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은 그저 개인적인 성취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고려의 공물을 늘리고, 오빠인 기철이 권력을 쥐게 하면서 고려를 농단한 사례가 있으며, 결정적으로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책으로 기철을 죽이자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던 사실이 있다. 과연 이런 인물을 고려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저 태생이 고려라고 해서 전혀 고려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않은 그녀를 우리네 사극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것은 실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즉 <기황후>에 쏟아지고 있는 논란은 역사왜곡의 문제도 문제지만 왜 그녀 같은 인물을 지금 사극의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더욱 비롯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이완용 같은 친일에 앞장 선 인물을 조선을 개화한 인물처럼 묘사해 사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글로벌 어쩌고 하는 그럴 듯한 포장을 씌운다고 해서 이런 사극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왜곡 논란을 떠나서 현재의 사극에 더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현 시점에서 내세워지고 또 각색되어도 될 만한가 하는 정당성이다. 제작진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기황후가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글로벌 여성’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역사의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고려 땅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황후의 행적은 거의 원나라 사람에 가깝다. 그런 인물을 왜 굳이 우리네 사극의 주인공으로 세워야할까. 중국 드라마라면 모를까.

 

기황후를 다루느니 차라리 비슷한 시기에 고려로 오게 되었던 노국공주를 다루는 편이 나을 듯싶다. 원나라의 공주이지만 공민왕과 혼인한 후 그의 영원한 연인이자 정치적인 동반자 역할을 하며 공민왕이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던 인물이다. 국적은 원나라지만 고려인의 입장에 서서 고려인들을 위해 살았다는 점 때문에 우리네 사극에서는 여러 차례 노국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신의>가 그렇고, <신돈>이 그렇다.

 

사극이 역사를 벗어버리고 상상력의 옷을 입었다고는 하나 적어도 지켜야할 선은 있는 법이다. 기왕에 <기황후>라고 역사적 인물을 제목으로 삼았을 때는 그녀가 우리네 역사에서 사극으로 다뤄질만한 인물인가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먼저 기황후를 그저 태생이 여기라고 우리네 역사적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만일 기황후가 태생만 고려일 뿐 사실상 원나라 사람으로서의 행적을 보였다면 왜 그걸 우리나라에서 사극으로 만들어야 할까. 역사왜곡보다 더 큰 문제는 역사의식의 부재다.

분노, 연민, 죄의식까지 <비밀> 지성 연기 놀라워

 

역시 좋은 드라마는 좋은 캐릭터를 통해 좋은 연기자를 재발견하게 한다. <비밀>에서 유독 주목받는 연기자는 황정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행 속에서 미칠 듯이 오열하는 황정음의 눈물 연기는 분명 <비밀>이 재발견한 그녀의 가능성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황정음만큼 놀라운 연기는 지성에게서도 발견된다.

 

'비밀(사진출처:KBS)'

이것은 지성이 연기하는 조민혁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놀라운 복합심리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좀체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내면을 보여준다. 처음에 그 감정은 분노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뺑소니 사고로 죽게 한 이가 강유정(황정음)이라고 알게 된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로 하여금 그녀를 심판하게 해 감옥에 보낸다.

 

하지만 감옥에 보낸 것으로 조민혁의 분노는 멈추지 않는다. 가석방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강유정은 아이를 잃게 된다. 출소한 후에도 조민혁은 스토커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괴롭히는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처절한 복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연민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분노가 조금씩 연민이 되는 이유는 강유정이 하는 일련의 행동들, 이를테면 피해자 어머니를 매번 찾아가 끝까지 사죄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파렴치한이 아니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는 모습에서 길바닥에 사고자를 버리고 도망가는 뺑소니범과는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는 것. 대신 그는 강유정의 옛 남자친구인 안도훈(배수빈)을 점점 의심하게 된다. 그녀가 진범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복수심과 얽혀 묘한 연민이란 감정의 형태로 생겨난다.

 

그러나 결국 뺑소니 사건의 진범이 안도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조민혁은 그에게 분노하면서 동시에 강유정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녀가 저지른 일도 아닌 일로 자신이 그녀를 비극의 끝단으로 밀어부친 것에 대한 죄책감. 조민혁의 죄책감은 그래서 그녀에 대한 극단의 사랑으로 바뀌어나간다.

 

“네가 신경 쓰여서 미치겠어! 그러니까 내 옆에 붙어있어!” 이 대사 한 줄은 실로 조민혁이 갖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거기에는 어디로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깔려 있고 그녀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무고한 그녀를 망가뜨렸다는 자신의 죄책감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가 결국 그녀에게 배우는 마지막 감정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게 뭐지?”하고 그가 그녀에게 물었던 것. 그녀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든 걸 끌어안는 진정한 사랑을 그는 알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복잡한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연기로 표현해냈을까. 지성이 연기한 조민혁의 초반 모습과 지금 현재의 모습은 거의 180도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 분노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지금은 그 살인자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극단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점이다. 지성이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의 결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연기자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비밀>에는 유독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자주 보인다. 배수빈이 미친 듯이 웃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장면에서 실로 악마적인 느낌마저 주었다면, 차도에까지 뛰어들며 비밀을 지키려하는 강유정을 보며 웃으며 눈물 흘리는 지성에게서는 답답함과 연민, 분노, 사랑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묻어난다. 이것은 아마도 이 작품의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작가는 인간이 한없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갸녀린 존재라 여기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캐릭터가 있다고 해도 그걸 소화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황정음은 물론이고 지성, 그리고 배수빈과 이다희까지 이 작품에서 열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이 작품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작품에 좋은 캐릭터 그리고 좋은 연기다.

<미래>가 청춘들에게 던지는 작지 않은 질문

 

현재의 미래(윤은혜)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가 이길 것인가. <미래의 선택>이라는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관점은 사뭇 새롭다. 기존 로맨틱 코미디들이 주로 주인공이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 드라마는 그것이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운명적으로 결정된 대로 이뤄진 것인지를 관전 포인트로 다룬다.

 

'미래의 선택(사진출처:KBS)'

그래서 <미래의 선택>이라는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현재의 주인공인 미래(윤은혜)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의미와 말 그대로 ‘미래의 선택’ 즉 이미 결정된 운명에 수긍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전자가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는 능동적인 입장을 말해준다면 후자는 운명론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을 말해준다.

 

어찌 보면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는 현재를 바꿔 미래 또한 바꾸려는 능동적 입장처럼 보이지만 이 판타지적인 설정에는 이미 운명론이 개입되어 있다. 즉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이를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미래에서 온 미래가 바꾸려는 선택이 남편감이라는 점은 그 운명론적인 입장을 잘 말해준다. 그녀는 한 여자의 앞날이란 어떤 남편을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재의 미래(윤은혜)는 생각이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서른두 살이 먹도록 꿈같은 건 접어둔 채 콜센터 직원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낸 그녀의 절박함이 들어있다. 늦은 나이지만 그녀는 방송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어한다. 나이도 많고 학벌도 변변찮은데다 집안도 그저 그런 그녀의 스펙과 그녀가 맞닥뜨린 현실은 작금의 취업난을 겪는 청춘들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한다.

 

나이 먹고 앵커자리에서 좌천되어 아침방송 진행자가 된 김신(이동건)과 이 방송국을 소유한 이미란 회장의 손자이지만 이 아침방송의 막내 VJ로 일하는 박세주(정용화)라는 캐릭터 역시 이 운명론과 미래 개척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김신은 과거에 얽매여 있어 여전히 자신이 앵커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방송을 위해 물벼락을 맞을 각오도 되어 있는 현실 개척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박세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재벌2세라는 위치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방송 말단직을 하며 현실을 알려고 한다.

 

이들이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은 그들의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단순한 멜로에 머물지 않는다.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는 운명론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현재의 미래(윤은혜)는 비로소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가는 삶 대신 보다 나은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삶을 선택한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김신에게 미래는 현실을 알려준다. 아침방송의 진행자면 거기에 맞게 망가질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신은 그 말에 수긍하고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인다. 박세주는 팍팍한 방송 생활에 지친 미래를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한편, 그녀를 통해 재벌가의 2세로 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치열한 샐러리맨들의 삶을 이해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관계는 멜로로 엮여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낸다.

 

잘 나가는 리포터인 서유경(한채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떻게든 방송 하나라도 더 하기 위해 PD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인물. 하지만 그녀에게 박세주가 “당신은 이미 방송을 할 때 멋진 프로다”라고 말해주자 그녀는 괜스레 눈물을 흘린다. 윗선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던 그에게 박세주가 어떤 변화의 동인을 제공한 셈이다.

 

물론 <미래의 선택>은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가까워지는 과정은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의 정서를 충분히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이 드라마는 어딘지 허허로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게다. 사실 요즘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치열해진 현실 속에서 멜로니 결혼이니 하는 얘기는 때로는 사치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미래의 선택>이 괜찮은 드라마라는 건 바로 이 현실적인 문제를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속에 제대로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 이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태생적으로 이미 미래가 결정되는 사회가 주는 그 암담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미래의 운명을 보기 위해 점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결국 그 점집 문을 나서면서 다시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래가 어떻든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를 실컷 살아보는 건 어떤가. 즉 미래란 결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가 하나하나 쌓여 생기는 것이 아닐까. <미래의 선택>은 이 결코 작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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