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희생양을 찾았을까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스캔들. 이것은 마치 사이비 종교를 닮았다. 20세기 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때의 사건 말이다. 당시 그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됐다고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다. 뇌리에 각인되어버린 믿음이란 그렇게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일(고통이 따른다)이기에 그들은 또 다른 믿음을 스스로 만들기 마련이었다. 타진요 공판에서 법정이 증거와 사실정황을 들어 그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릴 때조차 몇몇은 끝까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타블로'(사진출처:MBC)

물론 사법적 판결은 이들의 유죄선고로 일단락됐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의 불씨가 모두 꺼진 것으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타진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이른바 왓비컴즈(whatbecomes)로 알려진 김모(58)씨가 여전히 아무런 제재 없이 활동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왓비컴즈가 일으킨 사건에 애꿎은 동조자들만 처벌되었다고 말한다. 사이비 종교로 치면 믿음에 속은 이들만 처벌되고 교주는 여전히 활동 중인 셈이다. 당사자인 왓비컴즈가 소재파악이 되지 않아 기소 중지되었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누가 처벌되고 사법적 판결이 어떻게 나왔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사건이 터졌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점이다. 타진요 스캔들의 핵심은 단지 몇몇 스토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면에 나선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사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휘둘린 사회도 일정 부분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왜 그들이 한 사람의 학력사실에 그토록 의혹을 제기했는가와 대다수 대중들이 그 의혹에 흔들렸던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타진요 스캔들은 몇 가지 심리학적인 실험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첫 번째는 솔로몬 애쉬가 했던 이른바 ‘동조현상’에 대한 실험이다. A와 같은 길이의 선을 찾는 문제에서 그 답이 명백히 B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C를 선택하자 따라서 C를 선택하는 행위. 이 실험 결과 무려 37%의 학생이 B가 답임을 알면서도 C를 선택했다고 한다. 집단의 압력에 의해 설사 답이 확실하다고 해도 다수 의견을 따라가는 심리. 집단과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면 소외되고 평판이 나빠질 것으로 두려워하는 심리가 동조현상이다.

 

타진요 카페를 통해 김모씨가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를 졸업했다는 타블로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의혹이 제기된 이후, 언론에 공개되면서 많은 대중들이 그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는 사건 이면에 숨겨진 대중정서가 작용했다. 우리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던 뿌리 깊은 학력과 스펙사회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그것이다. 이미 교육조차도 돈과 태생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서 학력이란 이른바 고위층들이 시스템을 저들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인 셈이다. 여기에 병역과 국적문제가 겹쳐지면 대중정서는 폭발하고 만다.

 

어찌 보면 이 사회적인 분노가 타블로라는 개인을 엉뚱한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단 사회정의 차원의 ‘믿음’이 되어버린 타블로의 학력문제는 사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부인되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의 사례다. ‘인지부조화’는 위에서 말한 사이비 종교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감정, 행동이 불일치하게 될 때 일종의 스트레스를 갖게 되는 상태로, 사람들은 그것을 없애기 위해 사고와 신념을 바꾸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고 한다. 물론 ‘인지부조화’는 때론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보호막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험한 폭력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타진요 스캔들에서 발견하게 되는 동조현상이나 인지부조화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동조현상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강박적으로 갖고 있는 개인의 자존감 부재나 혹은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지부조화는 이렇게 강박적으로 소속된 집단이 공격성을 띄게 되었을 때 사실과 상관없이 신념을 합리화해버리는 위험에 도달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크게는 황우석 사건에서부터 작게는 심형래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기저에는 이러한 집단적인 심리가 깔려 있다.

 

무엇보다 타진요 스캔들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광신의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광신이 한 개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사적인 이야기들이 공개적으로 끄집어내지고 때로는 날조되기도 하는 이 폭력은 동조현상과 인지부조화와 맞물리면서 더 큰 사회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심지어 가해자들조차 스스로 무엇을 가해했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재판 선고 마지막 변론에서 타진요 측 일부 피고인들이 한 이야기는 이 스캔들 밑에 깔려진 심리를 드러낸다. "학벌주의 사회에서 타블로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가 제시한 학위를 믿을 수 없었기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대한민국에서 언제부터인가 학력세탁이 성행하고 있다. 학력을 갖고 장난치는 무수한 사람들이 단죄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익이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우리가 대신하게 됐다." 전형적인 자기합리화의 발언들이다. 자신들은 무죄이고 나아가 애국자라는 얘기다.

 

물론 분노는 이해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이 스캔들에 가담하지 않은 일반 대중들 역시 학력사회가 주는 분노에는 모두 동조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적절하지 않은 방향으로 한 희생양을 강요하게 된 것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지점이다. 앞으로 제2의 타진요 스캔들이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불후2>, 음악으로 즐길 수 있는 최대치

 

어쩌면 이렇게 소박하고 단출할 수가 있을까. <불후의 명곡2(이하 불후2)> 현철편에서 소냐가 부른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얘기다. 아마도 이 편곡은 그간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에서 쏟아져 나온 곡들 중 가장 소박한 곡일 게다. 샘리의 기타가 유일한 반주였고 그 위에 소냐 역시 특별한 기교를 얹지 않은 곡이었으니. 하지만 이 가장 소박하고 단출한 곡은 결국 관객은 물론이고 가수들, 그리고 시청자들까지 감동하게 만들었다.

 

 

'불후의 명곡2'(사진출처:KBS)

그것은 진정성의 힘이었다. 현철이 부르던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아내 혹은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고정관념에 묶여있었다면 소냐는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전 ‘할머니를 위한 편지’라고 전제함으로써 이 곡에 소냐만의 진심을 담았다. 어머니가 일찍이 암으로 돌아가시고 해외 입양을 기다리던 중 손을 내밀어준 할머니. 그런데 친구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놀림을 당해 원망했던 할머니. 그리고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될 무렵 떠나신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담은 편곡은 이 노래를 소냐의 진심으로 해석하게 만들었다.

 

노래에 담긴 진심이 있으니 다른 것이 뭐가 필요할까. 소냐는 고음을 지르는 창법도 화려한 퍼포먼스도 필요 없었다. 그저 낮게 읊조리듯 가사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는 것만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기실의 가수들은 모두 소냐에게 공감했고 에일리는 눈물을 흘렸다. 관객들도 울었고 이 노래의 주인인 현철도 눈물을 흘렸다. 소냐의 무대는 그 어떤 자극도 목청대결도 아닌 진심 하나를 얹은 것이었지만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물론 이현과의 대결에서 소냐는 떨어졌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소냐가 준 감동은 승패와는 상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승패에 집착하는 오디션이라면 이런 무대가 가당키나 한 것이었을까. 이것은 <불후2>만이 가진 힘이자 가능성이다. 승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라진 무대이기 때문에 소냐는 그 무대를 ‘할머니를 위한 편지’로 만들 수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음악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 이런 부담은 사라지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열의가 가득한 무대는 <불후2>만의 경쟁력이다.

 

홍경민은 ‘사랑은 나비인가봐’를 갖고 동요 ‘나비야’에서부터 김흥국의 ‘호랑나비’까지 다양한 나비 노래를 마치 메들리처럼 이어 붙여 흥겨운 무대를 연출했고, 울랄라세션은 ‘사랑의 이름표’를 강렬한 갱스터 힙합으로 해석해 전혀 다른 느낌의 무대를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슈퍼주니어의 려욱은 신동, 은혁과 함께 화려한 퍼포먼스로 전혀 다른 ‘봉선화 연정’을 들려주었다. ‘내 마음 별과 같이’로 원곡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낸 인피니트의 성규나, 폭풍성량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청춘을 돌려다오’를 부른 이현, 또 특유의 카리스마로 부르는 에일리의 ‘싫다 싫어’는 또 어떻고.

 

이들은 오디션을 경쟁한다기보다는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무대의 한계치를 실험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보니 그 무대 하나하나가 음악이 줄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속삭이듯 부르지만 그 진심에 울게 되는 소냐의 무대나, 군무의 퍼포먼스가 한없이 즐거워지는 슈퍼주니어의 무대, 또 재치와 자신감으로 새로운 해석의 묘미를 전하는 홍경민의 무대 등등. 그들의 무대는 음악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성의 최대치를 끄집어낸 것들이었다. 아마도 현철이라는 이름과 그 트로트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조차 그 속에 담긴 가사들을 다시 음미하게 되는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재해석이 극대화된 즐거움, 이것은 <불후2>가 <나가수>의 짝퉁에서 청출어람이 된 이유다. <나가수>가 최고라는 음악적인 위치에 도취되어 있을 때, <불후2>는 스스로를 낮추고 음악이 대중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다양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가수>가 보여준 절정의 가창력 앞에 대중들은 고개를 숙였을지 모르지만, <불후2>의 즐거움 위에서 대중들은 함께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오디션이라는 경쟁시스템. 도대체 음악에서 경쟁이나 순위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이제 음악을 제대로 듣게 된 대중들은 경쟁 그 자체보다 음악이 주는 보다 많은 즐거움을 원한다. 청출어람 <불후2>는 그런 점에서 <나가수2>가 보여주는 한계와 문제점에 이제는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국형 재난영화, <연가시>의 경쟁력

 

영화 <괴물>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괴물보다 더 끔찍한 공권력의 문제였다. 어찌 보면 진짜 괴물은 재난에 대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리보전이나 이익에만 급급한 공권력이었다. 그래서 재난에 직면한 국민들을 지키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가족 같은 혈연 공동체에 의지하게 된다. 괴물에게 잡혀간 어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건 그 가족들뿐이다.

 

 

'연가시'(사진출처:(주)오죤필름)

재난영화가 국가기관이 아니라 가족에 집중하는 건 <괴물>만이 아니다. <해운대> 역시 쓰나미가 밀려오는 그 시간들 속에서 오로지 가족을 조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결국 이 재난영화에서는 쓰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가족애가 더 중요하다. 최근 우리네 영화에서 시도되고 있는 이른바 한국형 재난영화의 특징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가족’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 개봉한 <연가시>도 마찬가지다. 한때 곱등이와 연가시 이야기로 공포를 자아내게 했던 바로 그 기생충이 소재다. 본래는 동물의 몸에 기생하지만, 인간의 몸에 기생하게 된 변종 연가시가 전국으로 퍼져나감으로써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재난 상황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재난보다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공권력의 문제가 등장한다. <괴물>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연가시보다 재난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공권력에 의해 죽어나간다.

 

그래서 <연가시>를 비롯한 이른바 한국형 재난영화를 보다보면 그 안에 들어있는 몇 가지 장르의 결합을 느낄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공포다. 어디선가 나타난 괴생물체와 그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평온한 일상을 공포로 일그러뜨린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두 번째 발견되는 건 가족극이다. 그 공포 상황 속에 놓여진 가족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연가시>는 그 이야기 속에 힘겨운 가장의 스토리를 녹여서 이 부분이 더 극대화된다.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애정이 묻어나는 김명민의 목소리와 평범하지만 그런 가장을 끝까지 믿어주고 버텨내는 문정희의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는다.

 

하지만 이 공포의 살 떨림과 가족극의 눈물을 넘어서고 나면 세 번째로 발견되는 것이 사회극이다. 도대체 국민들을 보살펴줘야 할 국가가 하는 짓이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가족들끼리 서로 살기 위해 재난 앞에 맞서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도대체 왜 저들이 저렇게 사투를 벌어야 하는가. 이것이 한국형 재난영화가 주는 감정선이다. 우리는 떨다가 울다가 분노한다.

 

알다시피 우리네 사회는 재난과 사고에 둔감하다.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지하철 방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엄청난 무고한 인명이 죽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간다. 제대로 된 예방책이나 세워두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작년 물 폭탄을 맞은 서초동에 마치 둑이 터지듯 쏟아져내려온 산사태에 의해 벌어진 재난은 한 해가 지나 다시 장마철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복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러니 우리네 재난영화들이 다루는 것이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가 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괴물 그 자체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는 전언.

 

<연가시>가 <괴물>이나 <해운대>의 재난과 달라진 지점은 그 안에 경제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일 게다. 이 주식투자로 한 방에 삶이 꺾어져 버린 가장 재혁(김명민)은 영화 내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뛰어다닌다. 온 몸이 흙투성이 땀투성이에 새까만 재혁의 손바닥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우리를 뭉클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가장의 끝없는 동분서주가 우리네 서민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이 경제 불황의 그늘을 표징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떨다가 울다가 분노하게 만드는 우리네 재난영화의 특징은 서구의 재난영화들이 보여주는 스펙터클보다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각적인 충격이 아니라 감정적인 충격이다. 아마도 한국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이 한국형 재난영화의 특징은 그래서 독특한 지점을 획득한다.

 

바로 이점은 <스파이더맨>이나 <다크나이트> 같은 해외의 블록버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도 <연가시>가 가진 흥행 가능성을 점치게 만든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 한국형 재난영화가 어쩌면 그 어떤 블록버스터들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웃음과 만난 19금, 펄펄 나는 이유

 

19금의 세계는 어떻게 열리고 있을까. 솔직하고 과감해진 성담론, 거침없는 시사, 정치 풍자로 이른바 ‘뭘 좀 아는 어른들을 위한 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SNL 코리아> 성공의 이유를 19금 트렌드로 보는 이들이 많다. 양동근이 열어젖힌 19금의 세계는 신동엽에 이르러 폭발했다. 애초부터 섹드립(야한 애드립)의 대가로 알려진 그였지만 19금이라는 제 물을 만나자 신동엽은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SNL코리아2'(사진출처:tvN)

물론 19금이라는 지금껏 어딘지 마이너로 치부되던 세계가 메이저의 세계(신동엽은 지금 최고의 개그맨이다)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큰 편이다. 어른들의 세계를 다루는 프로그램에서조차 어떤 수위에 대한 금기 같은 것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해진 성담론을 다루는 <신사의 품격>이나 <로맨스가 필요해> 같은 드라마가 주목받는 것에는 분명 이 19금의 금기를 넘나드는 솔직 대담 스토리에 대한 어떤 통쾌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과연 이들 프로그램들은 19금이라는 문을 열었기 때문에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케이블 채널이 초창기에 대중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19금 프로그램을 거의 전면에 내세웠던 때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자극적인 페이크 다큐와 여성 출연자들의 노출을 극대화한 비키니 게임 같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19금 소재들은 실제로 케이블로서는 바라보기 힘든 시청률을 끌어오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이득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케이블 채널의 특성상 프로그램의 회전율(재방을 여러 번 할 수 있는)이 좋아야 하는데, 19금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 편성 시간대가 한밤 중으로 국한되는 한계가 생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케이블 채널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마이너한 B급, 심지어 저질의 이미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 케이블이 보여주고 있는 19금은 뭐가 다를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들 19금을 표방하는 프로그램이 또한 덧붙이고 있는 것이 코미디라는 점이다. 19금은 어딘지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코미디와 엮어지면 말이 달라진다. 훨씬 가벼워지고 밝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웃음’이라는 마법에 있다. 19금을 표방하면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자극적인 성적 장면을 끄집어내기보다는 성인들을 위한 공감대에 더 맞춰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19금 트렌드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TV가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매체라는 특성 때문에 TV의 주 소비층으로서 중장년층들이 포진하고 있지만, 정작 ‘뭘 좀 아는’ 어른들을 위한 공감대를 가져갈 수 있는 콘텐츠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다. 이다. 코미디가 최근 열고 있는 소재들을 보면 어른들을 위한 콘텐츠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을 느낄 수 있다.

 

<개그콘서트>가 ‘애정남’이나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직설적인 시사풍자 개그를 선보였을 때, <SNL코리아>도 ‘위크엔드 업데이트’에서 더 대담한 시사풍자를 시도했다. 정치인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시사문제를 꼬집는 장진은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확실한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아이들의 우스갯거리로 치부되던 개그에 현실이 투영되는 건 뭘 좀 아는 어른들을 위한 소재들이 점점 개발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코미디의 소재로서 열린 세계가 바로 19금 성담론이다.

 

시사풍자나 19금 성담론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소재들이 그간 상대적으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이른바 블루오션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웃음의 코드로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예능 프로그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사의 품격>이나 <로맨스가 필요해> 같은 드라마가 음습한(?) 인상을 주지 않고 오히려 솔직하고 공감 가는 콘텐츠로 자리한 것은 거기에 코미디라는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장르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한 성담론과 공감할 수 있는 웃음. 최근 열려진 19금 트렌드의 아이콘처럼 신동엽이 부상했다는 점은 이 트렌드가 가진 두 요소의 결합을 잘 설명해준다. 사실 <SNL코리아>에서 신동엽은 굳이 과한 노출이나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보다는, 은근한 그만의 섹드립으로 더 큰 호평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은 뭔 소리인지 잘 모르지만 어른들이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다. 그저 야한 것만이 아니라 어른들만의 공감대에 주목하고 있는 것. 그런 점에서 신동엽은 최근 19금 트렌드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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