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외풍에 버틸 수 있는 길

'1박2일'(사진출처:KBS)

여배우 특집에 이은 명품조연 남자 배우 특집까지 두 차례에 걸친 빅 이벤트는 지금까지 못보던 '1박2일'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역시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1박2일'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아날로그 여행'을 콘셉트로 간 관매도에서의 '1박2일'은 그 가능성을 다시금 되새겨주었다.

지금껏 '1박2일'을 견인했던 것은 특별 게스트들이었을까. 물론 시청자 투어나 외국인 근로자, 혹은 박찬호 같은 명사나 여배우들과 명품조연들의 출연은 이 프로그램의 특별메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1박2일'이 제 맛을 냈던 것은 그들만의 소박한 여행과 그 속에서의 작은 발견들, 그리고 거기서 벌어진 흥미로운 게임들이 잘 어우러졌을 때였다.

특히 '1박2일'이 섬에 강하다(?)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어딘지 도시에서 소외된 섬에 들어가 그 고립을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은 '1박2일' 특유의 건전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은 그 곳을 카메라가 비추고, 그 위에서 멤버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것. 이것이 '1박2일'이 대리경험해주는 주말여행의 미덕인 셈이다.

찬찬히 섬을 걸어서 둘러보며 거기 자라난 작은 풀과 돌에 일일이 관심을 던지는 장면들이 푸근하게 다가오고, 소나무 숲길을 걷는 그들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설레게 하며, 저녁 밥상에 올라온 깻잎 하나에도 군침이 돌게 하는 힘. 그 힘은 특별 게스트들의 출연으로 얻어내기 힘든 것이다. 아무래도 게스트가 들어오게 되면 여행은 게스트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다. 그들의 삶과 발견 못했던 특별한 모습들을 카메라가 촘촘히 포착하다보면 정작, 여행지의 설렘을 담아내기 어려워진다.

물론 그것도 또 하나의 여행일 것이다. 하지만 '1박2일'은 결국 전국 각지에 숨겨진 여행지가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소재인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출연자들이 여행지에서 너무 돌출되지 않고, 오히려 그 여행지에 푹 파묻힐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가보지 못했던 곳을 대신 가게 해주고, 거기서 낯설지만 친근한 우리네 이웃들을 만나게 해줄 때, '1박2일' 특유의 구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런 기본적으로 여행지에 충실한 흐름 위에 적절한 자극으로서의 복불복이 얹어지면 의미 있는 밥에 재미있는 반찬이 올려지는 격이 된다.

물론 숙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꽤 오랫동안 방영되어 오면서 시청자들은 이제 대충 이 여행 버라이어티의 패턴을 읽게 되었다. 오프닝하고 떠나면서 게임하고 도착해서 여행지를 둘러보다가 또 복불복 게임하고 자고 아침 미션을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고정된 패턴. 여행도 비슷한 패턴으로 자주 하면 지루해질 수 있다. 이럴 경우 해야 될 것은 여행지 자체의 매력을 부각시키거나(같은 패턴이라도 지루함을 없앨 수 있다), 아니면 일련의 비슷해진 여행 패턴을 기획을 통해 흔들어놓음으로써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의외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선택적인 게 아니라 동시에 이뤄질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 '1박2일'은 '나는 가수다' 같은 신상 예능 프로그램에 의해 어떤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틀을 벗어나 외부 게스트들이 들어오는 그런 식의 변화는 자칫 '1박2일' 본연의 매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화려함에 화려함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박함을 찾는 일이며, 여행 이외의 것을 통한 자극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의 매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일이다. 지금 예능의 세계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풍이 불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같이 변화에 휩쓸리기보다는 오히려 '1박2일'만의 단단함을 더욱 굳건히 지키는 일이다.


장근석 신드롬, 신 한류 드라마의 조건

'미남이시네요'(사진출처:SBS)

일본에서 불고 있는 장근석 신드롬은 여러모로 배용준 신드롬을 닮았다. '겨울연가'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배용준으로 대변되는 1세대 한류의 시작이었다. 장근석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미남이시네요'나 '매리는 외박중'은 화제는 낳았지만 시청률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 심지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이미 일본의 언론은 장근석으로 세대 교체된 한류를 얘기하고 있을 정도다.

'겨울연가'는 돌발적인 사건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후 가능성을 발견한 우리네 드라마가 10여 년 동안 한류를 겨냥해왔던 것은 분명하다. 한 때는 퓨전사극이 그 뒤를 이었고, 심지어 블록버스터 드라마까지 제작되었다. 해외를 의식하면서 미드 같은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도 다수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과연 그런 이른바 한류를 겨냥한 드라마들은 성공을 거뒀을까. 물론 몇몇은 큰 성공을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류를 염두에 두었다고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남이시네요'나 '매리는 외박중'의 장근석이 과거 '겨울연가'로 갑자기 등장한 배용준처럼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조준하고 있는 한류 드라마라는 것이 어쩌면 엉뚱한 방향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지도 모른다. 또 국내에서의 성공이 해외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고 때론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 성공이라는 기준으로서의 시청률 산정이 사실은 그다지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국내에서 제 아무리 시청률 40%를 넘긴 가족드라마라고 해서 해외에 신드롬을 일으키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어떤 부분에서 벌어지는 왜곡이 이런 국내와 해외의 온도차를 만드는 것일까. 먼저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K팝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외의 콘텐츠들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것을 잘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K팝은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박진영이 미국 진출을 선언하면서 미국시장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철저한 '미국화'여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K팝의 성공은 외국인들의 눈과 귀에 맞출 일이 아니라, 그들의 눈과 귀가 K팝에 번쩍 뜨이게 하는 것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한류 한류 하지만 우리 드라마가 미드를 흉내 내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그렇게 블록버스터들은 우리가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미드를 따라가기 어렵다. 반면, 우리 정서나 문화가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는 로맨틱 코미디류나 멜로는 그런 점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가진다. 여기에는 일본을 포함해 미국, 유럽 같은 서양에는 발견하기 어려운 우리 만의 끈끈한 정서가 숨겨져 있다. 이 사랑과는 또 다른 가족적이며 정(情)적인 감성은 같은 멜로를 그려도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신드롬을 만들었던 것에는 바로 전후세대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는 그 따뜻함(배용준의 미소로 대변되는)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미남이시네요'와 '메리는 외박중'으로 일본에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것은 장근석의 그 아기 같은 미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미소에 '미남이시네요'나 '메리는 외박중'이 다루고 있는 K팝적인 소재들이 어떤 상승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류 드라마의 양상 역시 마찬가지다. '시크릿 가든'이나 '커피 프린스 1호점' 같은 작품들이 파란 눈에 금발의 아주머니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쿨한 사회일수록 더더욱 그리워지고 희구하게 되는 그 정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하루의 피곤한 일상에서 집으로 돌아와 어딘지 위안 받고 싶은 마음으로 TV를 켜면 온통 쏟아져 나오는 게 '캅 콘텐츠(cop contents)' 같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왜 거기 우리네 로맨틱 코미디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 그 이유를 쉬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거꾸로 우리나라에서의 드라마판을 되돌아봐야 한다. 과연 최근 쏟아져 나오는 우리네 드라마들은 우리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시청률에 목맨 드라마들은 이른바 되는 코드들을 적당히 엮어서 비슷비슷한 드라마들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고, 어떤 드라마는 한류를 겨냥한답시고 엄청난 제작비만 끌어 모아 말 그대로 돈 잔치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제 TV로만 산정되는 시청률은 세대적인 고려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이미 콘텐츠는 TV는 물론이고 인터넷이나 IPTV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소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의 시청률은 중장년층의 시청률이나 거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이 시청률 잣대가 광고비와 연계해서 제작을 압박한다면 나올 수 있는 콘텐츠는 불을 보듯 뻔한 것들이 아닐까.

이미 시대는 글로벌해졌고, 콘텐츠는 넘쳐난다. 우리는 여기 앉아서 미국의 콘텐츠든 일본의 콘텐츠든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굳이 그들을 따라 하거나 혹은 우리 안에만 매몰돼서는 이 글로벌한 시대의 콘텐츠로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곡된 시장의 흐름을 바로잡는 일은 그래서 한류가 주목될 때마다 국가가 나서서 어떠한 지원책을 내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기적의 오디션’, 단순히 연기자를 뽑는 오디션이 아니다

'기적의 오디션'(사진출처:SBS)

대중들에게 연기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기자를 뽑는 오디션은 낯설 수도 있다. 이 점은 음악을 소재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비해 연기를 소재로 하는 '기적의 오디션'이 가진 약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연기가 갖고 있는 일면만을 보는데서 오는 오해다. 연기라는 것이 그저 대사 외워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경험 그 자체이고 그것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 담겨서 배역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연기가 가진 흥미로움이 음악보다 낮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적의 오디션’은 연기가 가진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씨의 꿈을 캐스팅하겠습니다.” ‘기적의 오디션’은 왜 당락에 있어서 ‘합격’, ‘탈락’이라는 용어 대신 ‘꿈’이란 좀 더 거창한(?) 단어를 쓰는 걸까. 어찌 보면 과장된 용어처럼 여겨지지만 이 말은 그러나 거기 오디션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멀쩡하게 괜찮은 직장을 다니는 허성태씨가 어쩌면 현실적으로 더 어려울 수 있는 연기에 도전하고, 불우한 삶을 살아온 어현영씨가 그 내면적인 고통을 연기로 뿜어내려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그 ‘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기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은 ‘연기’가 가진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기적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연기라는 꿈을 갖게 되고 무대를 향해 한 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결핍을 깨닫는 순간이고, 그것을 연기라는 어찌 보면 ‘자기 치유’의 과정일 수 있는 꿈을 통해 변화시키려는 도전인 셈이다. 즉 연기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을 통한 경험이거나, 혹은 경험하지 못했기에 억압되어 있던 갈증의 발산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변화하는 기적의 순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두 번째 기적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속에 쌓여진 어떤 것이 연기를 통해 드러나고,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곽경택 감독이 어현영씨의 연기를 보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찡한 감정이 올라왔다”고 말하는 그 순간, 후보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터진다. 이 똑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공감의 순간은 그 자체로 기적이면서, 서로를 변화하게 하는 기적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기적은 이렇게 첫 발을 디딘 용감한 도전자들이 차츰 성장해 저마다의 결핍을 채우면서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늘 드라마와 영화 같은 영상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로 연기란 너무나 익숙해서 그 특별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 누군가가 진심에서 우러난 연기를 하고, 그걸 바라보는 누군가가 그 진심을 알아채고 공명하는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의 연기라는 소재는 그래서 단순히 기술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공명할 수 있는 연기는 온전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니까. ‘기적의 오디션’은 바로 그 기적 같은 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사랑타령을 넘어서 세상과의 대결을 유쾌하게 그려내다

'최고의 사랑'(사진출처:MBC)

"독고진이 구애정을 정말 열심히 사랑했다는 게 욕먹고 오해받을 일이 되지 않도록 제발 지켜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른바 독고진(차승원) 동영상에는 감동적이지만 씁쓸한 반전이 담겨져 있다. 대중과 언론들이 기대했던 것은 뭔가 음성적인 동영상이었겠지만, 그 속에는 죽을 것을 대비해 남겨놓은 독고진의 뜨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장면은 '최고의 사랑'이라는 로맨틱 코미디가 그려낸 세계의 특별함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최고의 사랑'은 기존 신데렐라 스토리를 연예계로 가져왔다. 국민배우 독고진과 비호감 연예인 구애정(공효진) 사이는 저 왕자와 신데렐라만큼의 거리가 놓여져 있다. "살아서도 고백하고 죽어서도 고백하고 독고진씨는 나를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예요?" 왕자 독고진이 신데렐라 구애정에게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백하는 이야기. 이만큼 익숙하고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가 있을까.

하지만 이 전형적인 스토리가 극단적인 호감, 비호감으로 나눠지는 연예계로 들어오면서 이 달달한 스토리는 사회성을 띄게 된다. 즉 전통적인 멜로 구도에서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방해자(시어머니 같은)가 끼어들기 마련. 하지만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과 구애정 사이에 끼어 있는 건 대중들이다. 즉 그들이 사랑에 이르는 과정보다 더 어려운 건 그들의 사랑이 대중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멜로 구도가 갖는 사적인 사랑을 그 연예인이라는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공적인 간섭을 받는 불편한 상황이 들어가 있다.

독고진이 말끝마다 자신을 '특별한 독고진'이라고 수식하는 데는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지만, 그 특별함 때문에 사적인 사랑이 불편해지는 것. 그래서 이 로맨틱 코미디의 남녀가 먼저 '극복'해야 했던 것은 공적인 사랑에 익숙해진 그들이 사적인 사랑에 눈뜨는 과정 그 자체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이유에서 또 자신은 비호감으로 낙인찍혔다는 이유에서 보통의 사랑을 하지 못하는 지친 이 두 영혼은 차츰 서로의 '충전'이 되어주며 사랑을 이뤄간다.

이 사이에 완벽남 윤필주(윤계상)가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당연히 선택할 이 완벽남이 TV의 짝짓기 프로그램에 나와서 프로그램 의도와 달리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장면은 사적인 선택과 공적인(?) 선택의 충돌처럼 여겨진다. 윤필주는 사적인 진심을 드러내지만 공적인 위치에 있는 구애정은 그것을 실제로는(방송으로만 받아들인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즉 국민배우든 비호감이든 연예인이라는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사이에 위치해 있는 이들의 사랑은 (이중적인 의미로) 특별하다. 그래서 공적인 신분을 벗어나 사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또한 공적으로도 인정받는 이 사랑은 '최고의 사랑'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우리는 과연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과 구애정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현실의 연예인이라는 존재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거의 '개그콘서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발랄하고 경쾌하기 그지없는 이 로맨틱 코미디는 그래서 그 달달한 사랑과 유쾌한 유머 밑에 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웃으며 바라봤던 일반 대중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과 글이 어떻게 한 사람을 힘겹게 만드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다시 되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최고의 사랑', 이 사랑이 특별했던 것은 오글거리는 사랑타령만이 아니라 그 바깥에 놓여진 세상과의 대결을 머리가 아닌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을 통해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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