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양극화를 잘 드러내는 대사, "네까짓 게"

"네가 뭔데. 네까짓 게 뭔데 내 자존심을 건드려!" 이 대사는 '나는 전설이다'에서 차지욱(김승수)이 그 아내 전설희(김정은)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사는 화를 못 참아 돌발적으로 나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아내를 이런 식으로 부르곤 한다. 이 상류층 집안사람들도 전설희를 늘 이런 식으로 대한다. 뭐 하나 가진 것 없고 그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전설희가 언감생심 이 좋은 집안에 시집왔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식이다. 전설희의 시어머니는 입에 '네까짓 게'를 달고 산다. 결국 이혼을 결심한 전설희는 그런 시어머니에게 말한다. "결혼 내내 어머니께 수도 없이 들었던 네까짓 거라는 말 더 이상 듣기 싫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이보다 서민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대사를 찾기가 어려운 것인지, 다른 드라마에서도 '네까짓 게'는 종종 등장한다. '자이언트'에서 황정식(김정현)의 엄마로 나오는 오남숙(문희경)은 가끔 배다른 자식 정연(박진희)에게 '네까짓 게'라는 표현을 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할 말 안할 말이 있기 마련이지만, 자신의 못난 자식을 후계자로 세우려는 야심은 심지어 정연이 죽기를 바라게 만든다.

'제빵왕 김탁구'에서 서인숙(전인화) 역시 이 말의 애용자다. 그녀는 남편 구일중(전광렬)이 데려온 김탁구에게 이 말을 쓰며 폄하하더니, 이젠 자신의 아들 마준(주원)이 사랑하게 된 신유경(유진)에게 "네까짓 게 감히" 어딜 넘보냐며 그녀를 밀어낸다. 이미 종영한 '나쁜 남자'에서도 '네까짓 게 감히'는 등장한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이 드라마 속 비극을 양태한 희대의 악역이었던 신여사(김혜옥)의 전매특허다. 문재인(한가인)은 어렵게 자신이 구해온 유리가면을 깬 것에 대해 홍태성(김재욱)을 나무라다가 신여사에게 뺨을 맞는다. "네까짓 게 감히 뭔데 선을 넘어와!"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일련의 드라마에서 모든 악역들이 "네까짓 게"를 외치는 것에는 어떤 공통점이 추출된다. 첫째 그 대사를 하는 인물들은 모두 우리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부를 손에 쥐고 있는 초상류층들이다. 둘째, 그 "네까짓 게"를 듣는 대상은 이 초상류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혹은 그 이하인) 서민들(서민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셋째, 이 "네까짓 게"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은 신분상승을 꿈꾼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하는 이들을 실력으로 넘어서려 안간힘을 쓴다.

이 공통점들은 작금의 우리 사회가 가진 점점 심화되어가는 양극화와 그것에 대한 서민들의 양반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초상류층의 안하무인격의 행실을 재수 없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력으로 그 문턱을 넘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이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왜 성장드라마가 그토록 인기가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장(신분상승)에 대한 강한 욕망은, 그 성장의 욕망이 사실은 거의 태생적으로 정해져 여의치 않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니까.

"네까짓 게 감히!"라는 드라마 속 대사를 들으며 왠지 가슴 한 켠이 울컥했다면 그것은 이 드라마들이 이 사회가 가진 욕구불만의 옆구리를 제대로 짚은 것이다. 물론 이건 드라마 속의 한 대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대사가 환기시키는 어떤 울분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거기서 물질로 사람이 평가되고, 또 그 물질조차 태생적으로 규정되는 갑갑한 현실과, 아무렇지도 않게 습관적으로 모욕을 주는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스토리의 풍부함이 다른 '자이언트'와 '동이'

'자이언트'의 급상승, '동이'의 추락. 무엇이 이 희비쌍곡선을 만들었을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스토리의 풍부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자이언트'는 25회 한 회가 다룬 스토리만 보더라도 실로 긴박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강모(이범수)는 제임스 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숨긴 채 본격적으로 건설 사업에 뛰어든다. 사채업자인 백파(임혁)를 찾아가 고효율 시멘트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며 투자를 제안하고, 지방으로 내려가 실험 끝에 흙을 단단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한편 강모가 정식(김정현)과 조민우(주상욱)에 의해 죽게 됐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꿈꾸는 정연(박진희)은 만보건설의 후계자를 뽑는 임시주총에서 주주들을 설득해 결국 후계자로 뽑힌다. 보궐선거를 앞둔 조필연(정보석)은 성모(박상민)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의심하지만 성모는 임기웅변으로 위기를 넘긴다.

'자이언트'의 25회 한 회 스토리는 이처럼 무려 세 가지의 굵직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굵직한 에피소드 사이사이에는 강모 남매들의 끈끈한 가족애도 들어가 있고, 정연과 정연의 친모인 경옥(김서형) 사이에 놓여있는 모성애도 있다. 게다가 새롭게 시작된 조민우와 이미주(황정음)의 멜로 라인도 흥미진진하다. 어느 하나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들의 성찬은 '자이언트'라는 음식에 복잡 미묘한 맛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흩어지지 않고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재빠르게 흘러가는 묘미는 이 드라마에 다이내믹함을 더한다.

그렇다면 '동이'의 이야기는 어떨까. '동이' 41회가 다룬 내용은 실로 앙상하다. 그 내용은 검계가 동이(한효주)를 살해하려 하지만 실패하는 에피소드와 동이가 찾던 수신호의 비밀이 밝혀지는 에피소드. 동이의 어릴 적 동무인 검계의 수장 게둬라(여현수)와 동이가 해후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 두 에피소드 간에 연결고리가 별로 없이 갑작스럽게 동이가 수신호의 비밀을 풀어낸다는 점은 지금 '동이'의 이야기가 어떤 큰 흐름의 맥락을 잘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스토리가 풍부하지 못하다보니 이야기의 진행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검계의 동이 살해기도와 게둬라와 동이의 만남이 회고조로 드라마의 한 회 분량의 거의 반을 채우고 그 와중에 숙종과 동이의 늘상 같은 반복되는 로맨스, 그리고 한 번씩 들어가기 마련인 주식(이희도)과 영달(이광수)의 코미디가 들어가고, 다음 회와의 연결고리로서 수신호의 비밀 에피소드가 제시된다. 드라마의 도입부분이 전편과의 이어짐이고 후반부가 다음 편과의 연결고리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동이'의 에피소드는 지나치게 단순한 편이다.

그렇다면 '자이언트'와 '동이'가 가진 이야기의 풍부함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캐릭터다. '자이언트'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쏟아놓는 반면, '동이'에서 이야기를 내놓는 캐릭터는 거의 동이에 국한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동이라는 한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를 꿰어놓는 작업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에피소드가 동이로만 귀결되는 것은 이야기를 단조롭게 만든다. 만일 '동이'에서 동이의 주변인물들, 예를 들면 서용기(정진영)나 인형왕후(박하선), 차천수(배수빈) 같은 캐릭터가 동이에만 몰두하지 않고 좀 더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냈다면 이야기는 좀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결국 이 두 작품을 가른 것은 캐릭터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의 풍부함이 가진 차이다.

차가운 액션, 뜨거운 감성, 스릴러적 쾌감까지

우리 시대의 아저씨들은 어떤 존재일까. 영화 '아저씨'라는 영화가 그 제목을 '아저씨'라 이름 붙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아무리 쓰레기 속을 뒹굴어도 여전히 멋있는 원빈이 연기하는 차태식이라는 인물은 영화 제목이 '아저씨'가 아니라면 전혀 다른 감성으로 다가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저씨'라는 특정 세대를 지칭하자 영화는 이 세대가 작금의 현실에 갖고 있는 감성들을 끌어들인다. '아저씨'는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하고 조폭 두목이 물었을 때, "옆집 아저씨"라고 차태식(원빈)이 말하는 장면에서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아저씨'는 전직 특수요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세상을 등진 채 전당포를 꾸려나가는 차태식이 옆집 소녀 소미(김새론)가 납치되면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지극히 공식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다. 아저씨와 소녀 사이에 끈끈한 감정의 고리가 연결된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레옹'을 연상시킨다고 하지만, '아저씨'에서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레옹'의 마치 연인 같은 느낌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 식의 감성이 들어가 있다. 마치 삼촌 같고 아버지 같은 가족애적인 감성. 아저씨 차태식이 사라진 소미를 찾기 위해 개미굴 같은 조폭들의 세계를 뒤지고 다니는 장면들에는, 연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무기력한 아저씨들(아버지들)의 트라우마가 판타지로 피어난다.

차태식이라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잔인한 조폭 일당 정도는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아저씨'라는 존재는 고개 숙인 이 시대 아저씨들의 억눌린 감성을 폭발시킨다. 물론 이 억눌린 감성은 단지 폭력적인 사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주는 위축감,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심지어 가족 내에서도 권위를 잃어가는 아저씨들의 감성을 포함한다. 차태식이 내뻗는 주먹과 휘두르는 칼끝은 여지없이 이 억압된 사회를 갈갈이 찢어놓을 만큼 위력적이다. 어두운 전당포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이 아저씨가 소미라는 소녀와의 끈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고, 그 세상의 폭력을 향해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고 심지어 총을 쏘아대는 그 과장된 일련의 상황들을 관객이 어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건 그 감정적 지지 때문이다.

영화 '아저씨'가 그려내는 세상의 풍경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이 마치 하드고어 영화를 연상시키는 시퀀스들이 말하는 것은 극도로 물질만능주의가 되어버린 사회다. 납치와 장기매매라는 극단적인 설정들은 그 대상이 단지 어른들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세계가 가진 막장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제 돈이 된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짓도 하는 사회라는 것이 이 세계가 그려내는 풍경의 진짜 무서운 얼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스릴러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절대악과 대비되는 강력한 아저씨 차태식을 세움으로써 그걸 파괴시켜나가는 쾌감을 선사한다. 동정심조차 사치처럼 여겨지는 그 인면수심의 어른들 앞에서 잔혹하게까지 느껴지는 차태식의 액션은 실로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내가 창피하죠? 그래도 괜찮아요. 아저씨까지 미워하면 좋아하는 사람 한 개도 없어." 소미의 이 대사는 관객으로 앉은 아저씨들의 마음 한 구석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한 마디는 이 이웃집 아저씨가 소미라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옥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끄트머리에서 구원받는 것은 정작 소녀가 아니라 아저씨다. "모른 척 해서 미안하다"며 "한 번만 안아 달라"는 아저씨를 꼭 껴안는 소녀는 결국 아저씨를 구원시킨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마더' 이후 확고한 연기자로의 변신을 성공시키고 있는 원빈의 연기는 이정범 감독의 연출로 더할 나위 없이 '아저씨'라는 영화 속 차태식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만들어내고, 소미라는 소녀를 연기한 김새론은 많은 관객들에게 저마다의 감정이입되는 대상을 만들어낼 정도로 이 차가운 액션에 뜨거운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살 떨리는 폭력의 심상을 그려 넣은 김희원의 연기는 스릴러적인 쾌감을 덧붙인다. 차가운 액션, 뜨거운 감성, 스릴러적인 쾌감이 교차하는 '아저씨'.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건 이 시대가 가진 아저씨 감성이다.

해체될수록 강해지는 인과관계에 대한 욕망

'인셉션'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마도 에셔의 그림들 혹은 영화 속에도 나오는 '펜로즈의 계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에셔의 그림들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갖게되는 느낌들, 즉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가 불분명해지는 그 경계가 주는 순간적인 당혹감과 해방감을 이 영화는 잘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펜로즈의 계단'이 상승과 하강이라는 흐름을 무화시켜버렸듯이, '인셉션'이라는 영화는 꿈과 현실이라는 경계를 해체시킨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이나 진행되는 방식이 굉장히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누군가의 꿈 속으로 들어가 그 머릿 속에 숨겨진 사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과거의 어떤 사건 때문에 현상수배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부호이자 영향력이 있는 사이토(와타나베 켄)가 나타나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피셔(킬리언 머피)의 머릿속에 생각을 심어준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 그래서 코브는 팀을 짜서 피셔의 꿈 속으로 들어가는데 무의식에 의해 쉽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꿈 속의 꿈으로 몇 단계를 더 들어간다.

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꿈이 가능하게 하는 그 비논리성은 어떤 해방감을 주면서도 보는 이를 혼동에 빠뜨린다. 게다가 단순히 꿈 하나로 침투해 들어가는 게 아니라, 꿈 속의 꿈을 무려 다섯 단계나 들어가기 때문에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첫 번째 단계인 현실에서 두 번째 단계인 꿈으로 들어가 밴을 타고 총격전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다시 세 번째 단계의 꿈 속 배경인 호텔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도 또 다시 네 번째 단계의 꿈인 눈 속의 요새로 들어가고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인 림보(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들어가는 이 일련의 과정은 그 액션과 일련의 놀라운 장면들의 연속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마치 저 '펜로즈의 계단'을 눈으로 좇는 것처럼 혼동을 준다.

한참 꿈의 꿈 속으로 계속 파고들어가다 보면 도대체 어느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현실과 꿈을 혼동하게 될 즈음, 그것의 진위를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장치는 토템이다. 팽이처럼 생긴 코브의 토템은 그것을 돌렸을 때 만일 꿈이라면 영원히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꿈이라는 자유자재의 상상력의 공간 속을 활보하면서도 이 영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혹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면 어떡하지?'하는 그 두려움 속에서 인물들은 임무를 수행해나가고 저마다 현실로 빠져나오기 위한 안간힘을 쓴다. 이른바 '킥(꿈 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장치)'의 시간에 몰두하게 되는 것. 킥은 아리아드네(영화 속 꿈의 설계자의 이름이 아리아드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의 실타래처럼 이 꿈의 미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욕망은 영화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 역시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꿈인지가 명확했으면 하는 욕망으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 영화는 꿈이 가진 공간의 힘으로 인과관계들을 마구 뒤섞어놓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걸 바라보는 관객의 앞뒤 전후 사정을 엮어놓으려는 욕망은 더욱 커진다. 전단계의 꿈에서 보았던 작은 오브제는 다음 꿈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거기에 대해 영화가 아무런 부연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정교한 논리적 장치로 해체된 만큼의 인과관계를 관객들이 스스로 연결하려는 욕망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명확해졌다고 생각되는 인과관계, 꿈과 현실은 다시 오리무중 상태로 바뀐다. 꿈과 현실을 알려줄 토템 팽이가 그 진위를 알려주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태로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관객들은 끊임없이 이 놀란 감독이 구축해놓은 '펜로즈의 계단'을 순환해서 뱅뱅 돌며 꿈과 현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셉션'이라는 영화만이 가진 관객을 끌어들이는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매력이 된다. 마치 'A특공대'나 '매트릭스'를 보는 것 같은 장르적 재미가 그 재미의 근간을 만들어내면서도, 그 위에 꿈과 현실을 혼동시킴으로서 만들어낸 복잡한 인과관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결과에 맞는 원인을 찾아다니게 만든다. 그만큼 우리 생각이 가진 인과관계의 욕망이 크다는 이야기다. 논리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그림이 등장했을 때, 그 당혹스러움을 우리는 나름의 인과관계의 고리로 묶는다. 호텔 장면에서 무중력 상태로 액션을 벌이는 비논리적인 장면을 보면서 '아 그래 저건 전 단계의 꿈에서 지금 밴이 다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상태이기 때문이야'하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어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찌 인과관계로 엮여져 있을까.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누군가는 갑자기 도로 한 가운데서 벌어진 자동차 사고를 목격했을 수도 있다. 그 충격적인 사건과 영화를 보는 일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그저 벌어진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두 각각의 사건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것은 수많은 컷들과 신으로 사실은 툭툭 끊어져 있는 필름들이 하나로 편집되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영화라는 장치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원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놀란 감독은 바로 이 점 영화가 가진 작동원리를 영화적인 문법을 가지고 뒤집는 시도를 한 것이다. 마치 에셔가 그린 '펜로즈의 계단'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시도의 완성자는 놀란이 아니고 관객이다. 관객은 이 혼동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영화가 논리로서 오히려 해체해놓은 환상적인 장면들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영화를 보러온 자로서 익숙한 인과관계 엮기의 노력을 통해 오히려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위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누군가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인셉션'이라는 내적 논리의 세계는, 그걸 바라본 관객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영화(사실은 복잡해 보이는)에 이토록 많은 관객이 든 것은 바로 이런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작동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놀라운 장면에 당혹스러워하고, 그 당혹스러움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인과관계를 스스로 만들어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만일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자신이 들어왔던 그 극장의 분위기가 어딘지 낯설게 여겨졌다면 그것은 바로 이 에셔의 그림처럼 뱅뱅 도는 ‘인셉션’이라는 영화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장황한 이 글 역시 그 의도대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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