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드라마와 겉멋에 빠진 드라마, 그 명암

작품의 질적인 부분은 일단 차치하자. 시청률과 시청자들의 평가만을 놓고 볼 때, 작품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은 질적인 부분보다는 시청자와 작품 간의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두 드라마가 이 소통에 있어서 상반된 길을 걷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세대를 넘어서 거의 모든 대중들의 공감을 통해 시청률 40%를 넘어선 ‘찬란한 유산’과, 세련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인물설정으로 이제 시청률 5%대로 추락한 ‘트리플’이 그것이다.

드라마를 대중들과 소통하는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봤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드라마가 구사하는 화법이다. 그런 면에서 ‘찬란한 유산’의 화법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다. 이것이 지나치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심지어 세련된 느낌마저 상쇄되기 때문이다. 모든 걸 세세히 설명해주는 화법은 겉으로 보기에 폼이 나지 않게 마련이지만, ‘찬란한 유산’은 그런 겉멋에 연연하지 않는다. ‘찬란한 유산’은 고은성(한효주)이 어떻게 바닥까지 떨어지고 그 바닥에서 장숙자(반효정) 여사를 만나고 다시 어떻게 조금씩 상승하는가를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주제가 간결하고도 명료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권선징악을 말하고 있고, 따라서 시청자들은 이미 초반부터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를 다 파악하고 있다. 이런 경우 드라마는 철저히 시청자들과의 공감을 목표로 흘러간다. 고은성은 좀 더 잘 되어야 되고, 백성희(김미숙)는 파멸해야 하며, 고은성을 도왔던 인물들은 그만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고은성을 통해 선우환(이승기)과 그 가족들은 좀 더 성장해야 한다. 드라마는 바로 이 시청자들의 바람을 하나씩 이루어주는 과정이 된다. 즉 소통은 이미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트리플’은 정반대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내기가 어렵게 설정되어 있다. 오빠-동생 사이에서 싹트는 사랑(신활과 이하루)이나,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것(장현태와 최수인), 결혼을 외면하고 바라는 사랑(조해윤과 강상희)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 겪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 ‘트리플’은 시작부터 바로 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들이 만들어내는 벽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트리플’의 주제가 바로, 이런 상식 밖의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숨 쉬고 사랑하고 아파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런 어려운 주제의식은 작가와 PD의 대단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리플’은 그 도전적인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통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빗나간 사랑의 풍경을 예쁜 그림으로만 보여주려고 했다. 소통은 겉모습으로 덮어지는 것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관계 속에서 서로 고민하는 모습들이 비춰질 때, 시청자들은 비로소 ‘그래 저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트리플’의 주인공들은 이런 고민이나 표현을 지질한 어떤 것으로 여기는 이른바 쿨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고민은 차치하고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모든 건 다 지나가고 해결될 것이라고. 이 주제의식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네 시청자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만은 분명하다.

‘찬란한 유산’이 바로 그 소통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드라마로서 보다 효과적으로 공감을 가져갈 수 있었다면, ‘트리플’은 소통의 벽에 부딪칠 수 있는 상황을 뛰어넘어야 하는 드라마로 어떤 공감을 얻어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작품을 대하는 PD나 작가가 가진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에 대한 쌍방향의 소통이 늘 순간순간 일어나는 요즘, 늘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읽는 마음은 제작자들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한때의 성공이 가져온 지나친 자신감은 때론 독이 되며, 반대로 오랜 기간 묵혀졌던 힘겨운 시간들은 때론 약이 된다. ‘트리플’의 참패와 ‘찬란한 유산’의 성공은 바로 그 갈림길에서 생겨난 것이다.

감초 연기의 대가 이문식, '선덕여왕'이 재발견한 감초, 류담

"니들 위장이란 거 해봤어? 안 해봤으면 말을 말어." '개그콘서트' 달인 코너의 대사가 아니다. '선덕여왕'에서 웃음을 책임지고 있는 죽방(이문식)과 고도(류담)가 나누는 대화 중 하나다. 덕만(이요원)이 미실에게 접근하기 위해 용화향도들까지 속인 것에 대해 마치 죽방이 그것이 위장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고도 역할의 류담이 하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아휴 지겨워. 맨날 말을 말래." 이것은 '개그콘서트' 달인의 패러디다. 달인 김병만이 늘 하는 말, "안 해봤으면 말을 말라"는 그 말을 '선덕여왕'의 죽방고도가 나누는 웃음의 코드로 끌어들인 것이다.

'선덕여왕'의 죽방고도 콤비만 떼놓고 보면 진짜 '개그콘서트'의 달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죽방이라는 캐릭터는 늘 "자기는 다 알고 있었다"거나,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선덕여왕'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류담이 맡은 역할이다. '개그콘서트'에서 류담은 달인의 머리를 툭 치며 "나가!"하고 면박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선덕여왕'에서 류담은 거꾸로 죽방에게 늘 얻어맞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죽방고도 콤비는 긴장감 넘치는 사극 속에 늘 존재하는 감초 역할이다. 어리숙한 도둑이라는 캐릭터는 사극 이외에도 드라마 속에 늘 빛나는 감초 역할을 해왔다. 누군가의 물건을 훔쳤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어리숙함은 늘 드라마에 웃음과 함께 극의 긴장감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캐릭터다. 죽방고도가 훔쳐온 연적 에피소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연적으로 해구신을 산 그들로 인해 향도들은 일제히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주인공 덕만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반면 그 해구신을 숨기기 위해 고도의 입에 그걸 밀어 넣으면서도 아까운 듯 다 먹지는 말라는 죽방은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도둑이란 캐릭터는 더 큰 도둑(이를테면 나라를 훔친) 앞에서는 용인되기 마련. 그것도 그 큰 도둑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문식은 이미 정평이 난 감초연기의 달인이다. 그의 감초연기가 여타의 배우들과 다른 점은 그 웃음 속에 서민적인 눈물까지도 묻어난다는 점이다. '일지매'에서 생니까지 뽑아가며 연기투혼을 한 이문식은 뜨거운 부정을 보여줌으로써 웃음은 물론이고 감동까지도 선사했다. '선덕여왕'에서 이문식은 좀 더 웃음의 코드에 접근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덕만이 기댈 수도 있는 형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문식의 감초 연기야 이미 정평이 났지만, 류담의 연기는 재발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그콘서트' 달인에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중심에 선 김병만의 개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그가 맡은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에서의 그의 감초 연기는 보통 개그맨들이 드라마로 진출할 때 넘기가 좀체 어려운 까메오 역할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류담이 연기하는 고도는 그만큼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녹아있다는 말이다.

그간 보지 못했던 그의 다양한 표정 연기는 이문식과 콤비를 이루면서 더욱 빛이 난다. 억울한 얼굴과 놀라서 동그랗게 뜬 눈, 가끔씩 보이는 바보 같은 웃음은 '달인'에서는 보지 못했던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류담에게서 발견하게 한다. 거구의 몸 역시 '달인'에서는 주목되지 못했지만, '선덕여왕'에서는 이문식과 대비되면서 이른바 훌쭉이와 뚱뚱이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사극처럼 진지하고 긴장감이 넘치는 드라마 속에서 자칫 감초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은 간과되기 쉽다. 하지만 감초는 그저 드라마에 부가되는 웃음이라는 양념만은 아니다. 논리적인 접근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한 부분에서 감초라는 캐릭터는 사건을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는 자체로 극을 움직이는 하나의 틀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달인, 죽방고도가 돋보이는 것은 이 두 가지 역할, 즉 웃음을 주는 역할과 극을 움직이는 역할을 모두 잘 소화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계, 위험지대에서 가능성의 지대로

이승기가 처음 '1박2일'에 출연했을 때, 그는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겨울 얼음장 같은 물로 머리를 감고, 야생의 생활(?) 속에서도 피부관리를 하는 그의 모습은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안간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라면 아이돌 가수가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비의 베일에 가려 있어야할 아이돌 가수가 맨 얼굴에 눈곱이 낀 채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시대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이승기가 들어왔을 때, 이미 한때(?) 아이돌가수였던 은지원은 은초딩으로 캐릭터를 잡고 있었다. 이승기는 그렇게 예능에 적응해나갔고, 2년여가 지난 지금 드라마에서도 주목받으면서 가수, 예능, 드라마까지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이승기 개인의 성공에 그치는 것일까. 이승기의 성공 과정은 현재 달라진 스타들의 롤모델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달라진 롤모델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 스타가 과거라면 도무지 용납되지 않을 상반된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갖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된다는 점이다. 한 편에서는 정극에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을 울리는 이승기는, 다른 한 편에서는 버라이어티쇼에 등장해 소녀 같은 가발을 쓰고 정각이 될 때마다 거리에서 시각을 외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웃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신비주의의 시대가 가고 친숙한 이미지가 대세가 된 현재, 다채로운 이미지는 그 자체가 진정성이 된다. 한 사람에게서 한 가지 이미지만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식이 된다. 하지만 여러 이미지를 보여줄 때,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속에 있는 다양한 모습들은 리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된다. '1박2일'에서 멜로의 중심에 선 이승기를 벌칙수행을 통해 예능의 중심으로 세우는 것은 오히려 이승기에게는 득이 되는 일이다. 과거 상반된 이미지의 겹치기가 용납되지 않던 시대와 달라졌다는 것을 이승기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승기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승기가 '찬란한 유산'에서 선우환 역을 잘 소화해내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배우로서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초반부에 이승기는 여러 모로 어색한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뒤집은 것은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 차츰 나아지는 연기를 보면서 이승기는 성장하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1박2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승기는 예능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로 초반부 이물질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차츰 형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세워나갔다. 특별한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드러나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승기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허당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열심히'와 '어색한'의 사이에 서 있는 캐릭터다.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이란 걸 이승기는 예능에서는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기를 통해 달라진 현재의 스타들의 롤모델을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팬층이 특정 세대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기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팬층이 넓다. '1박2일'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누나들 사이에서의 이승기'였지만, '1박2일' 출연 후에는 '형들 사이에서의 이승기'가 되었고, '찬란한 유산'에 출연하고는 '부모들 사이의 이승기'까지 되었다. 그는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팬층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승기가 본성처럼 갖고 있는 고급스런 이미지 위에 다양한 이미지들(허당으로서의 이미지나, 까칠한 이미지 같은)을 겹치는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이승기가 현재 스타들의 아이콘이 된 데는 이처럼 경계의 지대에 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계는 분야의 경계이기도 하고, 이미지의 경계이기도 하며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이기도 하다. 과거라면 위험지대가 되었을 경계가 가능성으로 바뀌었다는 것,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스타가 바로 이승기다.

'찬란한 유산', 핏줄의식에 대한 애증을 넘어서

'찬란한 유산'이 40% 시청률을 넘었다. 이런 드라마를 우리는 국민드라마라고 부른다. 도대체 무엇이 '찬란한 유산'을 국민드라마로 만들었을까.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극중 주인공인 고은성(한효주)이라는 캐릭터다. 고은성이라는 캐릭터가 국민들을 때론 울리고 때론 기쁘게 했던 것은 그녀가 가진 두 가지 측면, 즉 그녀의 추락과 상승 때문이다. 그녀가 추락할 때 우리는 그녀를 한없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상승할 때 그 승리의 기쁨을 함께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추락과 상승에 한 가지 모티브가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핏줄의식이다. 고은성을 추락시키는 것은 백성희(김미숙)의 친딸인 승미(문채원)에 대한 엇나간 모성애 때문이다. 자기 핏줄을 챙기기 위해 자식이지만 남의 핏줄을 내치는 비정한 모성애는 물론 극화된 것이지만, 우리네 스토리텔링 전통 속에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비뚤어진 욕망이다. 우리네 옛이야기 속에 무수히 다른 판본으로 등장하는 잔인한 계모의 이야기는 우리의 남다른 핏줄의식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한편 고은성이 그 핏줄의식으로 인해 떨어진 나락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것은 핏줄을 넘어서는 그녀의 사랑(이것은 거의 인류애에 가깝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바닥에서 봉변을 당한 할머니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데려와 극진히 보살펴주는 일은 혈연과 같은 핏줄의식의 배반이다. 핏줄의식으로 버려졌지만 바로 그 핏줄의식을 넘어서 자식 이상으로 인정받는 고은성의 성장담은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녀는 자신이 핏줄의식으로 인해 버려진 경험을 함으로써 비로소 그 핏줄의식을 버리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자기 핏줄만 챙기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존재들인가. 강렬한 핏줄의식 속에는 강렬한 죄의식 또한 자리한다. 고은성을 바라보며 핏줄의식의 사회가 내동댕이친 그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부채감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자기 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장숙자 여사(반효정), 그녀를 사랑하면서 변화하게 되는 선우환(이승기), 그녀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용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박준세(배수빈)는 모두 우리의 부채감을 대신해주는 분신들이다.

따라서 드라마는 바로 그 핏줄의식의 욕망을 넘어선 자리에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장숙자 여사는 친 자식이 아닌 고은성을 유산의 상속녀로 지목함으로써, 박준세는 아버지가 아닌 사회의 정의를 선택함으로써 그 핏줄의식의 욕망을 넘어선다. 물론 선우환의 사랑 역시 이것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유산(핏줄로 물려받게 될)을 빼앗아갈 지도 모르는 고은성을 그는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를 넘나드는 핏줄의식의 배반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진 혈연의 문제가 어느 특정 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숙자 여사는 잘못된 자식들을 일깨웠고, 박준세는 잘못된 아버지를 일깨운다.

'찬란한 유산'은 고은성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우리가 마음 속에라도 가지고 있었던 핏줄의식의 욕망들이 가진 죄의식을 일깨워 눈물로 정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찬란한 유산'이 40%가 넘는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고은성은 우리가 그토록 핏줄의식을 외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잊은 것처럼 저 편에 묻어두었던 타인에 대한 죄의식을 바라보게 만드는 캐릭터다. 우리가 그녀들에게 한 짓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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