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MBC 스페셜’의 다큐멘터리

‘MBC 스페셜’의 ‘목숨 걸고 편식하다' 편은 꽤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습관적으로 말하는 “건강을 위해 골고루 먹으라”는 그 상식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약을 끊게 하는 대신 식이요법을 시키고, 대장암으로 시한부인생 판정을 받았지만 식습관을 고쳐 삶을 되찾고,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서 반드시 먹어줘야 하는 면역억제제를 끊고 대신 금욕적인 삶과 먹거리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 강도로만 보면 어느 르뽀보다도 고발 프로그램보다도 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과영양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편식하라’는 말은 과영양 시대의 역설을 담고 있다.

하지만 ‘MBC 스페셜’은 이 소재를 르뽀나 고발 프로그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 집중하는 것으로 모든 메시지에 대한 강변을 대신한다. 대신 이야기는 마치 ‘인간극장’이나 ‘휴먼 다큐 사랑’처럼 일상 속의 특별함 정도를 말해주는 것 같은 편안함과 친근함을 갖게 된다. 이처럼 강변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다큐의 진짜 미덕인지도 모른다. ‘MBC 스페셜’의 다큐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중심에 늘 사람을 놓기 때문이며, 또 메시지를 스스로 강변하기보다는 다큐 속의 인물들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만드는 것 때문이다.

‘MBC 스페셜’의 연중 기획이랄 수 있는 ‘휴먼 다큐 사랑’은 바로 이런 점이 폭발력을 가지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면서도 적절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는 인물에 대한 집중과 거리두기가 꽤 잘 균형을 잡고 있다. 실제 메시지는 따라서 늘 뒤편에 서 있게 마련이지만(예를 들면 워킹맘을 다루면서도 그걸 전면에 세우지는 않았던 ‘풀빵엄마’처럼)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그 메시지야말로 진정한 공감에 이르게 하는 묘책이 되기도 한다.

‘MBC 스페셜’이 다루어왔던 일련의 셀러브리티(celebrity) 다큐 또한 연예인이나 스포츠맨 같은 유명인사들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함을 포착함으로써 호평을 받아왔다. 김명민 편이 그렇고 박지성 편이 그러했다. ‘최민수, 죄민수 그리고 소문’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울한 근거 없는 소문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린 최민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하면서도, 동시에 소문에 대한 사회심리학적인 객관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MBC 스페셜’은 특별한 보통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늘 보여왔다. ‘곰배령사람들’에서는 도시에서 살다가 곰배령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들의 특별한 삶을 포착함으로써 거꾸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 같은 것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 해녀’는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해녀들의 삶과 애환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두 측면의 메시지를 모두 담아냈다.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그 인물이 처한 환경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 기법은 종종 환경 다큐멘터리로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인물 대신 북극곰을 카메라의 중심에 놓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문제를 드러낸 ‘북극의 눈물’이 그 대표작이 될 것이다. ‘북극의 눈물’은 이로써 시리도록 아름다운 북극의 자연을 보여주면서도 감동적으로 환경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새로운 환경 다큐멘터리의 한 지점을 그려냈다.

‘MBC 스페셜’은 7월3일 밤 ‘노견만세’라는 제목으로 죽기 전까지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은퇴견들과 그들과 삶의 한 부분을 함께 해온 사람들 간의 눈물겨운 마지막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것은 역시 지금까지 인간-자연(동물)에 집중해온 ‘MBC 스페셜’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휴먼다큐 사랑’의 동물 버전처럼 여겨지는 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은 지금까지 ‘MBC 스페셜’이 걸어온 그 길이, 강변하지 않으면서도 늘 우리에게 어떤 감동으로서 메시지를 전해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시티홀', 연기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내다

준비된 연기자가 좋은 캐릭터를 만난다는 것은 '시티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티홀'은 정치 풍자가 담겨진 코미디에 멜로가 섞여 있는 드라마다. 따라서 정치적인 면을 보일 때는 가벼운 듯 하면서도 진지함을 유지해야 하고, 본격적인 멜로에 들어가면 행복감과 절망감을 오가는 웃음과 눈물 연기를 해내야 한다. 연기자로서 '시티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차승원이나 김선아처럼 준비된 연기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밋밋한 캐릭터보다는 이처럼 복합적인 면을 소화해내야 하는 연기가 그들에게는 도전이면서도 또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시티홀'은 그들에게 바로 그 무대를 마련해주었고,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캐릭터라는 옷을 입고 마음껏 춤을 추었다. 그 결과 이 드라마를 통해 차승원은 재발견되었고, 김선아는 삼순이의 옷을 벗어버리고 신미래라는 새로운 옷을 입음으로써 건재함을 과시했다.

차승원이 연기해낸 '시티홀'의 조국이라는 캐릭터는 겉으로만 봐서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판타지남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에서 '내조의 여왕'의 태봉씨(윤상현)를 잇는 인물로 조국을 거론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국이 이들의 계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준표나 태봉씨는 드라마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전지전능한 캐릭터지만, 조국은 그렇지 않다. 그의 앞에는 늘 난관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는 사랑하는 여인 신미래를 보호하면서 그 난관을 넘어서야 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조국이 이들 판타지남들보다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의 계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조국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고, 신미래라는 여성을 만남으로 해서 그 힘을 낮은 자들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즉 조국이라는 캐릭터는 그저 멜로의 판타지뿐만 아니라 서민들을 꿈꾸게 하는 판타지까지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특유의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게다가 그 카리스마는 코믹함을 가미하면서 강마에가 가졌던 괴팍하면서도 친근한 인상을 덧붙인다.

차승원은 사실 코미디와 정극 양쪽을 오간 경력의 소유자다. 코믹의 웃음은 그의 장기이고, 정극의 우수와 슬픔은 그의 특기다. 그런 면에서 '시티홀'의 조국은 이 양면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차승원은 지금껏 상대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던 카리스마를 조국을 통해 얻었다. 정치 소재가 갖는 강인한 리더십의 면모를 조국을 통해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김선아가 연기한 신미래는 처음 삼순이 캐릭터에서 시작했다. 10급공무원으로서 밴댕이 아가씨 대회가 나가고 거기서 조국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김선아의 연기는 여전히 삼순이에 머물러 있었다. 캐릭터가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미래가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행보를 하게 되고 시장 선거에 나가게 되면서부터 김선아는 조금씩 삼순이의 아우라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신미래는 돈키호테적인 신념을 가진 순수 정치초심자로서의 강인한 모습과 함께, 사랑 앞에서는 가녀린 한 여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신미래 역시 조국처럼 코믹을 바탕에 깔고 있는 캐릭터. 그러니 이 인물의 스펙트럼은 저 삼순이가 갖는 단순함에 비할 바 없이 넓다 할 수 있다. 김선아는 신미래라는 캐릭터를 통해 굳이 삼순이를 넘어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미래를 통해 삼순이의 캐릭터를 가지면서도 다양한 폭의 새로운 면모들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티홀'이 재발견한 연기자는 차승원과 김선아에 머물지 않는다. '온에어'에서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등장해 강인한 인상을 주었던 이형철은 이 드라마를 통해 유하고 귀여운 면모를 갖게 됐으며, 지적인 이미지의 추상미는 이 드라마를 통해 귀여운 악녀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이밖에도 주목할 만한 연기자는 강인한 정치인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최일화, 신미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정부미를 연기한 정수영, 그리고 국장삼총사들인 류성현, 신정근, 임대일이 될 것이다. 특히 지국장으로 분했던 신정근은 코믹 연기 속에서도 독특한 개성적인 힘을 갖고 있는 연기자로 주목된다.

좋은 드라마는 좋은 연기자들을 발견해낸다. 그만큼 캐릭터가 좋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티홀'은 좋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믹을 바탕에 깔고 정치와 멜로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하나의 드라마를 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티홀'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마음껏 준비된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에게도, 또 그 연기가 뿜어내는 행복과 슬픔을 공감한 시청자들에게도 '시티홀'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영상시대의 다큐는 아무리 사소해도 역사가 된다

우리네 TV에는 현재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집중도가 너무 높다. 반면 다큐멘터리는 그 영상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뒤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TV의 비중으로 보자면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TV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드라마와 예능이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재미와 오락을 선사한다면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은 매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다큐멘터리가 주목되지 못했던 건, TV의 오락적 기능에 우리가 편향되어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도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고 그 성과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다큐에 대한 달라진 인식
변화의 한 축은 대작 다큐멘터리들의 잇따른 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EBS에서 제작한 '한반도의 공룡', MBC의 '북극의 눈물', KBS의 '누들로드'는 모두 명품다큐라 불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중 특히 '북극의 눈물'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도 수출됐고, 극장판으로도 제작되어 환경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러한 특집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다큐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이 반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MBC스페셜'은 꾸준히 1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고, KBS '다큐3일' 역시 참신한 포맷으로 주말 밤 10%대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충분히 대중적인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워낭소리'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과거 '비상'이라는 축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4만여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그만큼 극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리얼 스토리인 다큐멘터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리얼리티와 진정성에 대한 요구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것은 또한 대중들의 영상에 대한 리얼리티와 진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흔히들 TV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리얼 토크쇼다 하면서 너나없이 리얼리티를 부르짖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과거처럼 짜여진 틀 안에서의 영상이 대중들에게 소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TV는 이미 일찍부터 리얼리티 영상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를 주창하고 나선 '무한도전'이나 그 영향으로 등장한 여행 버라이어티 '1박2일'은 모두 이 TV의 리얼리티 경향에 영향받은 프로그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박2일'은 사실상 다큐멘터리를 추구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길에서 만나는 우연적인 사건들을 웃음의 코드로 엮어내는 방식은 다큐멘터리가 갖게 되는 진정성의 울림을 전해주기도 한다. 또한 '라디오 스타'나 '무릎팍 도사' 같은 일련의 리얼 토크쇼를 표방한 프로그램들 역시 다큐적 영상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토크쇼는 예정된 질문과 답변이 아니라 의외의 질문에 걸려드는 답변에서 리얼리티를 뽑아낸다. 심지어 TV의 리얼리티 경향은 드라마에서도 나타난다.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그것이다. 과거에는 대충 찍어냈던 의학드라마의 수술 장면을 지금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드라마의 리얼리티 경향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티에 대한 요구는 그러한 전문성까지 드라마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무엇이 대중들을 리얼리티에 집착하게 했나
대중들이 과거와 달리 이렇게 리얼리티에 집착하는 이유는 영상의 대중화 때문이다. 과거의 영상이란 그 제작기술을 갖고 있는 특정 전문인들의 것이었다. 그만큼 기술도 복잡했고, 기술을 안다고 하더라도 방송장비가 어마어마한 고가였다. 다 찍는다 해도 편집이 또 장난이 아니었고, 그렇게 영상을 찍어냈다고 해도 그걸 방영할 플랫폼을 갖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전문가들에게만 부여되었던 특권이 영상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들에게 대부분 넘어간 상황.

우리는 누구나 조그마한 HD급 캠코더로 영상을 찍어서 프로그램으로 편집하고 인터넷에 게재할 수 있다. 이 사용자가 제작자의 역할을 함께 하게 되는 상황은 영상이 가진 신비적인 부분을 벗겨 내버리고 그 진면목을 드러나게 한다. 이제 모든 게 빤히 다 보이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방송이 과거와 같은 영상을 대본에 맞춰 찍어낸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리얼리티에 대한 집착은 방송이 살아남기 위한 한 몸부림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영상에 대한 리얼리티 요구가 지금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전부터 등장한 것이라면, 왜 그 동안 그 핵심이랄 수 있는 다큐멘터리는 영상의 중심에 자리하지 못했고, 이제야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대중들의 시선이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던 탓에 다큐멘터리의 변화가 그만큼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늘 그 고매한 위치에 진중한 무게를 갖고 누가 뭐라든, 하긴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긴 하지만, 같은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하면 뭔가 대작이거나 가르치려는 듯한 뉘앙스, 그런 것들이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도 여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에 대중들의 눈길이 닿기 시작하면서 그 변화는 좀 더 빨라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에 부는 변화의 바람, 그 가능성
'인간극장' 같은 경우, 소소한 일반인들의 일상들을 잡아내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끌어냈는데,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이제 과거처럼 어깨에 힘을 잔뜩 주는 바로 그 거품을 걷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영상을 체험한 대중들에게 너무나 진지한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대착오적으로도 느껴지게 마련이다. 최근 호평을 받았던 '휴먼다큐 사랑'의 경우, 바로 그 낮은 시선으로 바라본 보통 사람의 위대함을 끌어냈기에 대중적으로도 성공했고, 사회적인 반향도 컸다.

한편 다큐멘터리의 접근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다큐 3일' 같은 프로그램은 통상적으로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수개월의 제작기간이 걸린다는 단점을 새로운 프로그램 형식으로 차용해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단 3일 간의 취재영상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은 어쩌면 수개월 동안 취재해 찍은 영상이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적인 진실을 담아내기도 하니까. 게다가 최근에는 '30분 다큐'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해 일일 다큐멘터리 시대를 열었다. 사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는 PD들에게 큰 부담이다. 하지만 30분이라는 시간은 무언가 소소한 모든 것들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포획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의 다큐멘터리는 대중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시선을 한참 낮추고 있다고 보여지고, 이것은 향후 다큐멘터리가 TV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실로 영상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방송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상의 다큐멘터리들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큐 3일'과 'MBC스페셜'이 찍은 생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상은 연일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되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자시대의 역사란 글이 그 매체가 되는 것이지만, 이미 영상시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역사란 영상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실과 덕만, 그녀들이 사람을 얻는 법

"사람을 얻는 자가 세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까? 보십시오. 전부 제 사람들입니다." 진흥왕(이순재)이 죽자 미실(고현정)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것은 '선덕여왕'이 말하는 정치의 세계다. 따라서 이 사극의 궁극적인 미션은 정치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주어진 미션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승리, 즉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을 얻어야 한다. 양극점에 서있는 미실과 덕만(이요원)은 자신들만의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선덕여왕'의 두 인물이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주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덕만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카리스마는 모성에 가깝다. 그녀는 자신 역시 두려움에 떨면서도 공포에 질려 있는 동료를 포기하지 않는다. 두려움 때문에 적에게 자신을 노출시킨 죄로 참수를 당하게 된 시열(문지윤)을 덕만은 끝까지 지켜낸다.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부상병을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알천랑(이승효) 앞에 그녀는 '공포'가 아닌 '희망'을 달라고 말한다.

이것은 덕만이 가진 카리스마의 단면이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계 속에서 약자를 포기하는 카리스마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그녀는 대신 약자들도 하나로 뭉치면 강자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카리스마의 결과는 현실로 드러난다. 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 속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려는 알천랑 앞에 그녀는 '원진'을 외치고 가까스로 살아남고, 미션 수행 과정에서 동료가 동료를 죽이는 선택을 막아내고는 결국 함께 살아남는다. 이 과정 속에서 약자들은 물론이고 강자들마저(알천랑이나 김유신(엄태웅)같은) 그녀를 따르게 된다.

한편 미실이 추구하는 카리스마는 더욱 정치적이다. 그녀는 적과 아군의 구분을 넘어서 이기는 자, 천운을 가진 자를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카리스마를 보인다. 사지로 내몰렸던 김서현(정성모)이 살아 돌아오고 점점 입지를 다져나가자 그녀는 그마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게다가 지금껏 충성해왔던 설원랑(전노민) 앞에서 공공연히 이를 밝힘으로써 '충성경쟁'에 불을 붙인다. 그녀의 진정한 힘은 설원랑이 말한 것처럼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을 취하는 정치적 카리스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실과 덕만, 이 두 여성이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현재 여성의 사회진출이 가져온 리더십의 변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제 물리적인 힘으로 제 발밑에 사람들을 무릎 꿇리는 남성적 카리스마의 시대는 저물었다. 미실이 보여주는 정치적 카리스마는 그 목적이 어떻든 포용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한때 적이었던 자까지 모두 자신의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쉬운 것이 아니다. 한편 약자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이끌어주는 덕만이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모성적인 색채를 띈다.

이 두 카리스마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들에게 이끌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실에 끌리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욕망(권력에의)이 자리하는 반면, 덕만에 이끌리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희망이 자리한다. 근본적으로 욕망이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인 반면, 희망은 삶의 기쁨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되는 것이란 점에서 이 두 카리스마는 차이를 보인다. 미실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반면, 덕만에게서 삶의 냄새가 강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이 두 여성을 통해 여성적 카리스마라고 불릴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적 리더십에 대해 말하는 사극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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