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팬을 따라가니 사회가 보이네

그녀들은 왜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이돌에 열광할까. 'MBC스페셜'이 던지는 질문은 최근 들어 새로운 팬덤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일명 이모 팬들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나 이민호, 김현중 같은 어린 친구들에 열광하고, 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거의 외듯이 보며, 팬 사인회나 콘서트장에 어김없이 찾아가는 것을 주변에서는 주책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일. 하지만 'MBC스페셜'이 포착하려 한 것은 단지 그 기이한 아줌마들에 대한 호기심어린 시선만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모 팬들의 인터뷰를 따라가면서 이들이 그렇게 스타에 열광하는 이유를 들여다 보다 보면 차츰 이 사회의 모습이 다시 그려지고, 그 사회 속에서 스타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도 다시 포착된다. 무엇보다도 이 사회 속에서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것이 갖는 무게감이 다큐멘터리를 자못 진지하게 만든다. 이것은 'MBC스페셜'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다큐의 방식이다. 사회의 현상을 다루되, 그 속에 있는 인간에 집중하는 방식.

이모 팬들은 저마다 "왜 이렇게 좋은 걸 이제야 알게 됐나"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반응 속에 숨겨진 것은 그동안 삶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그저 그 삶을 버텨내기만 해왔지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후회다. 점점 자기 자신에 집중하기보다는 누구의 엄마이자 누구의 며느리이자 누구의 아내로 자리하다 보니 차츰 자신에 소홀해진 것에 대한 한탄이다. 그러니 이모 팬들이 가진 젊은 그들에 대한 열광은 그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게 된다.

엄마도 아니고 며느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닌 한 여성으로서 자신을 위치지울 수 있다는 것은 스타라는 존재가 가진 힘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될 수 없어도 어떤 위안을 주고 변화의 계기가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지나간 청춘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팬으로서 스타에 열광하는 그 순간 현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모 팬들이 저마다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보다 밝아진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라는 존재를 분석하면서 '스타신화는 신앙과 오락 사이에 양자가 혼합되어 있는 지대에 위치'한다고 했다. 과학이 신을 몰아낸 현대사회에서 그 신의 위치를 대리해주는 건 다름 아닌 스타라는 것이다. 과거 종교의 시대에는 힘겨운 현실에 위안을 주고 희망을 던져주는 기능을 한 것이 종교였지만, 이제 그 시대는 저물었다. 이모 팬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들,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갖고, 변화를 겪고, 심지어 누군가를 위한 봉사의 손길까지 내미는 그 모습들이 어떤 면에서는 종교를 대체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MBC스페셜"이 보여준 이모 팬이라는 현상은 그 이면에 남겨진 우리 사회의 아줌마들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사회의 버팀목이랄 수 있는 그녀들의 침묵을 다시 듣게 해준다. 이것은 힘겨운 삶 속에서 어떤 위안과 희망을 얻는 그네들의 활동을 그저 주책으로 치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물론 신적인 존재로서의 스타 이면에 또 하나의 얼굴로 상품으로서의 스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작은 위안이 갖는 생각보다 큰 변화를 생각해본다면 이모 팬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MBC스페셜'은 자칫 이론적으로 접근했을 때 놓치기 쉬운 이런 감성적인 의미들을 인간에 집중함으로써 잘 포착해주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 '차우'와 '해운대'

무덤을 파서 사체의 머리를 먹어치우고, 어디선가 나타나 사람을 훅 채어 게걸스럽게 뜯어먹으며, 심지어는 인가에까지 내려와 무차별로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식인 멧돼지는 말 그대로 괴물이다. 그 괴물을 잡으러 숲 속 산장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비장해질 수밖에 없다. 긴박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 듯, 캠코더로 찍힌 듯한 영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순간, 캠코더를 든 사람이 말한다. "감정이 안 살잖아요. 다시 갈게요." 그러자 그 비장했던 사람들이 과장되게 연기를 한다.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온다. 공포에서 순식간에 풀려진 긴장이 만들어내는 웃음이다.

괴수영화를 표방한 '차우'에서 이런 웃음은 흔하다. 살인사건이라 판단되어 시골로 수사를 온 신형사(박혁권)는 엉뚱하게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행동은 장르 영화 속에서의 형사가 가진 긴장감을 해체시키면서 웃음을 몰고 온다. 포수 선후배 사이인 백만배(윤제문)와 천일만(장항선)이 심각하게 젊은 시절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설전을 벌이다가, 화를 내며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간 백만배가 다시 돌아와 놓고 간 총을 가져가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팽팽한 긴장감은 이처럼 어리숙한 행동 하나로 해체되고 순식간에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공포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거꾸로 기대한 만큼의 해체를 통한 웃음을 얻는다. 물론 긴박감 넘치는 멧돼지의 돌진과 그것을 피하려 달리고 달리는 인물들이 벌이는 사투는 장르 영화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과정을 지나가면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코미디로 버무려놓은 것이 다를 뿐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 기대감과 배반감이 동시에 어우러져 기분 나쁘지 않은 유쾌함을 주는 이 영화의 장르 변용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그 배반감이 너무 커 실망할 수 있겠지만 장르의 클리쉐가 파괴되는 순간을 즐기기만 한다면 의외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와 웃음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운대' 역시 재난영화라는 공식적인 장르에 걸맞지 않게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 '차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재난영화가 가진 재난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들어가는 드라마를 '해운대'는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다소 과장된 코미디로 채운다. '죽음 앞에 선 인간들'이라는 재난영화의 진지함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시종일관 터져 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 폭탄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 웃음은 의외의 수확을 얻은 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과정들을 촘촘한 웃음의 코드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수한 부산 사투리의 사람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일상들 위로 쓰나미가 밀어닥칠 때, 블록버스터로서의 면모는 비로소 드러난다. 해운대를 삼켜버리는 쓰나미를 연출한 CG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다이내믹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볼거리를 장악하는 힘은 영화 전반부 내내 쓰나미처럼 몰아친 웃음폭탄 속에 숨겨진 인물들 간의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들이 후반부를 덮치는 쓰나미 위에 겹쳐지면서 웃음은 고스란히 눈물로 전화된다.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볼거리의 재미를 부가시키는 것이다.

올 여름 우리식의 블록버스터로 지목되는 '차우'와 '해운대'가 모두 웃음을 주 무기로 갖추고 장르를 변용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되는 점인 동시에, 우리식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방향모색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공적인지는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볼거리의 롤러코스터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는 달리, 이 영화들은 시종일관 웃기고 울리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연출하는 것으로 색다른 재미를 구축한 것만은 분명하다.

대중의 기대와 작품 사이, 소통의 실패가 가져온 결과

결혼과 연애 사이, 오빠와 연인 사이, 우정과 사랑 사이. 이처럼 중간에 서 있는 것은 그만큼 오인 받을 소지가 많다. 결혼과 연애 사이에 서 있는 것은 문란한 방탕으로 보이기 쉽고, 오빠와 연인 사이에 서 있는 것은 근친상간을 연상케 하며, 우정과 사랑 사이에 서 있는 것은 불륜으로 보이기 쉽다. 특히 우리처럼 이쪽 아니면 저쪽이어야 하는 것이 마치 당위처럼 강요되는 사회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양쪽으로부터 공격받는. 그러니 '트리플'은 한 가지도 오인 받고 비난받기 쉬운 어려운 난이도의 소재들을 무려 세 가지나 동시에 돌아야 하는 드라마다.

'트리플'이 가진 화법의 문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지 알 수 없는 초반부의 스토리만을 놓고 보면 이 드라마는 실제로 논란거리들이 가득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 낯선 지대에 서 있는 남녀들의 관계가 그렇다. 조해윤(이선균)과 아무렇지도 않게 하룻밤을 지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친구로 돌아가려는 강상희(김희)와, 자꾸만 오빠가 좋아진다는 이하루(민효린), 또 친구의 부인이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된 장현태(윤계상)는 드라마를 불편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들은 그 골치 아픈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캐릭터들이 아니다. 그들은 일단 먼저 행동하는 이른바 쿨한 인물들이다. 장현태는 마음을 빼앗긴 최수인(이하나)에게 조금씩 다가가기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집 담장을 뛰어넘는다. 집 마당에 농구대를 떡하니 세워두고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그녀 앞에 불쑥불쑥 자신을 드러낸다. 이 행동은 아무런 고민 없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장현태는 늘 밝은 얼굴을 하고 있고 행동은 거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행동은 후에 장현태의 고백으로 밝혀지는 것이지만, 아무 고민 없이 결행된 것들이 아니다. 장현태는 마음을 정리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최수인의 집으로 가기까지 여러 번 그 동네 주변을 뱅뱅 돌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는 것을 밝힌다. 이것은 조해윤과 강상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쿨한 인물들은 좀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부터 보여준다. 하룻밤을 지내고도 "친구로 지내자"고 말했던 강상희에게 조해윤이 "넌 그게 쉬운 여자잖아"하고 심한 말을 하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도 고민을 했었던 것을 밝힌다.

이것은 '트리플'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화법이다. 이하루(민효린)는 신활(이정재)과의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오빠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어버린다. 강상희와 신활이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질투를 느끼는 것으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갑작스런 행동이 먼저 보여지고,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쿨하게 그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이 드라마의 화법은 여러모로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 이유가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결혼과 연애 사이, 오빠와 연인 사이, 우정과 사랑 사이에 선 이들이 그저 방탕하고 불륜적인 모습으로만 비춰지기 때문이다.

'트리플'의 실패, 작품이 아니라 소통이다
이러한 오인되기 쉬운 감추려는 화법 속에서 이윤정 PD 특유의 감각적이고 팬시한 연출은 심지어 이런 기저에 깔린 관계를 포장하기 위한 것으로 오인된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오해다.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엇갈린 관계의 중간에 서 있는 인물들을 통해, 사회가 얘기하는 규범의 틀과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파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일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빠(친오빠가 아닌 관계로서의 오빠)인 줄 알면서도, 친구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또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최수인의 어머니가 죽음에 임박해서 딸의 불륜이 될 수도 있는 장현태가 보내주는 사진들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관계의 틀을 벗어난 순수한 사랑의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런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와 시청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사이의 차이는 이 드라마의 화법이 시청자와의 소통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윤정PD와 이정아 작가라는 콤비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의 달콤 쌉싸름한 커피향 같은 판타지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트리플'은 그 엇갈린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무게로 판타지를 한없이 무너뜨린다. '커피 프린스 1호점'처럼 청춘들의 순정만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려했지만 '트리플'은 그 관계의 무게로 인해 순정만화의 기대치를 배반하고 만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조해윤이 보이는 것은 그가 그나마 이 기대치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주변인물들의 관계들을 보면서 투덜대곤 한다. 강상희에게도 솔직하게 숨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장현태가 최수인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듯 말할 때도 "그만해라. 이젠 지겹다"고 말한다. 조해윤과 강상희가 동거를 한다고 밝혔을 때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신활이 "우리 중에 가장 재밌게 사는 놈은 너"라고 말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자기고백인 셈이다. 이처럼 뒤늦게나마 이 화법들이 엇나가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느끼고 있지만 그 돌파구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트리플'은 이 복잡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관계들을 안고 멋지게 삼단 점프를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소재적으로 오인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시도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전하려는 메시지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삼단 점프를 하면서 정작 그걸 보고 환호해줄 관객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서 발생한다. '트리플'이 끊임없이 비난을 받는 것은 작품이 조악해서가 아니라, 그 작품을 대중들의 기대와 맞춰가며 나가려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 권하는 사회에 대한 도발, '결못남'

'결혼 못하는 남자'는 언뜻 보기에는 이 결혼적령기를 지나 혼자 살아가는 남자, 조재희(지진희)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다들 하는 것을 '못하고' 있는 이상한 성격의 남자, 조재희의 행동에 주변사람들은 "재수 없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 먹는 저녁에 정성껏 스테이크를 굽고 와인까지 챙겨먹는 모습은 자신의 고독감을 속이려는 행동으로 보인다. 심지어 고깃집에 혼자 앉아 고기 맛을 음미하며 먹는 모습은 측은하게까지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결혼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측은한 생각과는 달리, 보면 볼수록 마음 한 편으로 이 남자가 꽤 매력이 있고, 또 심지어 이 남자의 생활이 부럽기까지 한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 첫 번째는 이 남자가 관계의 피곤에서 해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혼자인 대신, 그 혼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한다. 축제가 벌어질 때, 군중들 속에 자신도 끼고 싶다는 막연한 욕구는 종종 그 군중들이 가져오는 피곤함에 의해 배반당할 때가 많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은유다. 조재희가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저 혼자만이 아는 뷰포인트에서 와인이 세팅된 테이블에 앉아 오페라망원경을 손에 들고 그걸 감상하는 것이 궁상맞아 보이다가도 부럽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관계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삶은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그려낸다. 드라마는 과장되게 마니아적인 삶으로 그것을 그려내지만 어떤 음악을 들을 때는 볼륨을 어느 정도에 맞춰 들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즐거움에 철두철미하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거나 혹은 포기해버린 그 즐거움을 그는 지독할 정도로 챙긴다. 파도에 자갈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때의 그 즐거움은 사실 이런 삶의 태도에서 비로소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결혼 못하는 남자'는 지상과제로서의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혼자 사는 삶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일면들을 목도하게 해준다. '결혼적령기'라는 말이 가진 사회적 압박감, 즉 '결혼은 몇 세 이전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그 압력은 혼자로서의 삶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결혼이 사회구성원의 생산과 관련된 것이기에, 이것은 사회의 생존을 건 압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결혼은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의 삶의 모든 것들을 규정해버린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싫어도 사회적 관계들을 유지해야 하고, 그 속에서 개인적인 삶은 잠자리에 들기 전 소파에 앉아 잠깐 TV를 쳐다보는 것 정도로 뒷전에 세워두어야 한다.

'결혼 못하는 남자'는 이러한 결혼을 중심으로 상식이 되어버린 삶에 대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혼자 사는 조재희가 처음에는 이상하고 심지어 안쓰럽게까지 보이다가 차츰 그 삶이 부럽고 또 그가 매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이 사회에 대한 도발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또한 결혼이 궁극의 목표가 되는 여타의 멜로드라마들에 대한 도발이기도 하다. 멜로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지극히 상투적인 '결혼 못해 안달난 남녀들'보다 이 드라마의 "결혼? 그걸 왜 해?"하고 묻는 이 남자가 더 매력적인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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