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시청률 경쟁, 컨텐츠 질 떨어뜨린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대한 비교 기사들이 여기저기 뉴스로 올라온다. 그 대표주자는 ‘무한도전’과 ‘1박2일’. ‘무한도전’에 대한 기사가 뜨면 마치 반박이라도 하듯이 댓글이 달리기 일쑤인데, 눈여겨볼 점은 그 댓글 중에는 ‘1박2일’을 언급하는 대목들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이 두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반증이지만 지나친 경쟁구도를 볼 때 꼭 그래야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무한도전’과 ‘1박2일’, 시청률 비교는 넌센스
‘무한도전’과 ‘1박2일’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저 단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청률 비교는 넌센스다. 물론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떻게 소재와 포맷, 그리고 캐릭터 구성이 다르게 연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비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무한도전’을 좋아한다고 ‘1박2일’을 비난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입장을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 하루는 ‘무한도전’을 즐기고 다음날에는 ‘1박2일’을 즐기면 안 되는 것일까.

이것은 물론 지나친 시청률 경쟁의 결과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이 경쟁구도를 갖는 것은 ‘무한도전’이 가진 ‘예능의 지존’이라는 별칭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 전체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다는 것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시청률 비교라는 것은 동시간대에 경쟁하는 비슷한 프로그램들 사이에서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9시대에 하는 뉴스 프로그램이나, 10시대에 하는 방송3사의 드라마, 혹은 일일드라마의 시청률 같은 것이 비교대상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끼여든 프로그램(예를 들면 국가대항 축구경기 같은)으로 타방송사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시청률이란 상대 평가된 수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대도 다른 이러한 프로그램의 단순비교는 현재 방송사간의 치열해진 시청률 경쟁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라인업’의 하차가 말해주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시청률 경쟁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일견 경쟁이란 좋은 컨텐츠의 전제조건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실제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경쟁구도 속에서 프로그램들은 저마다의 독자성을 가지고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된다 싶은 형식이나 소재에 쏠리는 경향이 있다. ‘무한도전’의 독주에 도전장을 내밀고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형식으로 등장한 ‘라인업’의 하차는 많은 걸 말해준다.

시청률 경쟁의 측면에서 보면 ‘무한도전’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1박2일’이 아니고 ‘라인업’이다. ‘1박2일’은 승승장구하고 ‘라인업’은 하차한 이유는 그 다른 방영시간대와 창조적 재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1박2일’은 ‘무한도전’과는 방영시간대도 달랐고, 형식에 있어서도 여행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여 창조적으로 재해석해낸 데 반해, ‘라인업’은 그러한 전략들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라인업’의 하차는 지나친 경쟁구도 속에서 차별화 전략을 쓰지 않고 미투 전략을 쓴 결과가 가져온 시행착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프로그램 사이에서 유난히 베끼기 논란이 많은 것도, 바로 이 시청률 경쟁으로 인해 생겨난 비슷비슷한 형식을 구사하는 프로그램들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다. 즉 비슷한 형식 속에서 그 형식이 요구하는 소재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겹칠 수밖에 없게 된다. 국내의 프로그램이 해외의 프로그램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때론 시청률 경쟁의 압박감에 몰려 실제로 표절을 감행하게 되기도 한다.

‘무한도전’과 ‘1박2일’, 경쟁대상 아니다
이러한 쏠림 현상은 단지 예능 프로그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비슷한 소재들이 된다 싶으면 거의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시청률 경쟁이 낳은 또 다른 폐해다. 주말드라마들이 온통 아줌마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한 가족드라마이면서 신데렐라 이야기로 가득하며, 한 때는 고구려 사극으로, 다음에는 퓨전사극으로 몰렸다가, 최근에는 방송을 소재로 한 전문직 드라마에 쏠리는 현상도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되는 것만 된다’는 식의 시청률 공식이 생겨나고 있다. 예능은 어떤 식으로든 리얼리티쇼를 가미해야만 하며, 드라마는 사극이나 전문직, 혹은 가족드라마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여타의 시도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며, 프로그램들은 소재나 형식면에서 획일화되고, 결국 시청자들은 그만큼 다양한 볼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은 서로 경쟁하는 대상이 아니다. ‘무한도전’은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재미와 감동을 주며, ‘1박2일’은 답답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마음이 설레기 마련인 여행이라는 단어에 끌린다.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이 두 프로그램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내길 기대한다. 다행스럽게도 토요일 일요일로 나뉘어 편성되어 있는 이 두 프로그램으로 인해 주말이 내내 즐겁지 않은가.

‘일지매’라는 테크노 영웅의 탄생, 그 의미

원작의 ‘일지매’는 천으로 된 복면을 썼다. 하지만 2008년 찾아온 ‘일지매’는 금속과 가죽 느낌의 재질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다. 갑옷도 화려해졌고 무기도 다채로워졌다. 제작사측은 이 갑옷을 만드는 데만 500만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사극의 의복으로서는 파격적일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찮은 이 갑옷에 ‘일지매’는 왜 그만한 돈을 투여했을까.

‘일지매’, 새로운 테크노 영웅의 탄생
이것은 다분히 현 세대들의 기호를 반영한 결과다. 갑옷은 게임에 익숙한 현 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아이템에 해당한다. 이 아이템을 입고 작렬하는 음악과 함께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화려한 가면의 영웅은, 이 시대의 청춘들의 감성이 반영되어 있는 테크노 영웅이다. 그리고 이 지금까지의 사극에서와는 전혀 다른 영웅은 이미 빨간 색안경을 끼고 산발한 머리를 한 ‘쾌도 홍길동’이 등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존재다.

‘쾌도 홍길동’은 이미 사극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의상은 물론이고, 영상연출에 있어서도 도발적인 시도를 했다. 밸리 댄스를 추는 기녀들, 자가용으로 묘사되는 가마, 골프를 치는 상류층 양반이 그 속에서는 존재한다. 즉 과거라는 시점을 갖고 있지만 그 속에 현대가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믹 퓨전 사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화의 기법에 영향을 받은 바가 더 크다.

이처럼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진 것은 이 사극들이 역사적 사실, 즉 사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같은 사극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허구이다. 따라서 허구를 변용하는 것은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리지 않을뿐더러, 사실상 무한대로 상상력을 확장시키게 해준다. 그 안에서는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일개 도적이 왕의 권위를 앞지를 수도 있다.

역사가 되려 했던 ‘장길산’, 역사에서 탈주하는 ‘일지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인 표현은 이 시대 청춘들이 가질만한 기성문법에 대한 반항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역사라는 권위를 뒤집어쓴 정통사극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고, 기득권 세력들만을 위한 역사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쾌도 홍길동’과 ‘일지매’의 영웅들이 모두 도적이라는 사실은 음미해볼 문제다. 도적은 하나의 풍자이면서, 민초들 혹은 소외된 자들의 대응논리이기 때문이다. 즉 진짜 도적(탐관오리, 부패한 신료들 혹은 왕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은 따로 있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 도적들을 터는 도적, 즉 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표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선택한 허구들은 그 체제 반항적이라는 면에서 청춘들이 가진 감성들과 맞닥뜨린다. 역사란 본래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며, 따라서 약자들은 허구 속에서라도 그 갇혔던 울분을 터뜨리면서 저들만의 역사를 세우는 모반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홍명희와 황석영의 원작 소설을 각각 드라마화한 과거의 ‘임꺽정’이나 ‘장길산’도(이들도 모두 도적이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사극들은 최근의 사극들과는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민중의 역사를 새로이 쓰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이라면,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그런 거창한 의지가 없다. 오히려 역사 자체에서 자유로워지려 한다. 따라서 그 영웅의 양상들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전자가 민중의 영웅을 그리려 했다면 후자는 대중의 영웅을 그린다. 이 새로운 영웅들이 대중의 문화적 코드를 사극 속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마음껏 향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사극, ‘일지매’
사극을 하나의 진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민중의 영웅을 그린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다면, 역사와 허구, 그리고 왕과 민초의 중간쯤에 서 있던 ‘대장금’같은 퓨전사극은 이 양쪽 사이에 낀 모던한 사극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온갖 것들이 해체되고 재결합되어 나타나는 최근에 등장한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실로 포스트모던하다. 여기에는 시공을 뛰어넘은 문화적 충돌이 곳곳에서 무리 없이 그려진다.

점점 젊어지는 사극 속에는 이 시대 청춘들의 성향들이 녹아있다. 그들은 이념보다는 문화에, 사실이 가진 권위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굳어져버린 형식보다는 파괴되더라도 새로운 형식에 더 열광한다. 이들이 이처럼 도발적인 형식으로 기득권을 부정하고 저들만의 영웅을 그리려 한데는, IMF에서부터 현재의 88만원 세대까지 자신들은 원치도 않았고 잘못한 것도 없지만 끊임없이 제기된 불합리한 도전들에서 비롯된 바가 클 것이다. ‘일지매’의 현대와 퓨전된 화려해지고 견고해진 갑옷은 역사에서 벗어나 저들만의 역사를 마음껏 그리고픈 이 땅의 청춘들의 꿈들이 더 간절해졌다는 반증은 아닐까.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올드보이’, ‘괴물’을 잇는 ‘추격자’의 영웅

‘추격자’에 대한 칸의 반응이 심상찮다. 도대체 ‘아이언맨’처럼 몸에 잔뜩 무기들을 장착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영웅도 아니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채찍 하나와 명석한 두뇌, 그리고 놀라운 순발력으로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내는 영웅도 아닌, 그저 보도방 여자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이 중호(김윤석)라는 소시민적인 영웅의 어떤 점이 세계의 이목을 매혹시켰을까.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가 내세우는 영웅은 역시 서민이다. 그것도 평범 이하거나 때론 비열하기까지 한 서민. 이 평범한 서민들은 어느 날 비범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점점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다가 갑작스런 납치 감금으로 15년 동안의 감금을 당하며, ‘괴물’의 강두(송강호)는 순식간에 한강에 출몰한 이상한 괴물에게 금지옥엽 딸을 납치 당한다. ‘추격자’의 중호 역시 평범한 보도방 사장에서 괴물 같은 살인마에게 납치된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추격자가 된다.

즉 이들 우리네 서민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대개가 납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이 (납치로 인해) 사라질 때, 이 서민들은 그 소중한 평범함을 찾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대수에게는 세월 속에 지워진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이며, 강두에게는 딸이고, 중호에게는 미진이다. 그 소중함이 가족이나(유사가족을 포함) 자기 자신 같은 일상의 가치를 조명할 때, 이 서민적 영웅은 휴머니티를 좇는 영웅이 된다. 거창한 것이 아닌 최소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할 만한 일을 하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종종 이 영웅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한 적을 찾아다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지만 결국 진짜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괴물’과 ‘추격자’의 강두네 가족과 중호는 눈에 보이는 괴물이나 살인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괴물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공권력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사회적인 메시지는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만이 가진 특징이다.

그리고 이 서민적인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상반되게 미션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적은 잡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그렇게 뛰게 만들었던 소중함을 잃고 만다는 점에서 실패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자신의 과오를 알아채고는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고, ‘괴물’의 강두나 ‘추격자’의 중호는 결국 괴물 혹은 살인마에게서 납치된 그녀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바로 이 실패의 지점은 이 영웅들의 행보에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리얼리티를 구축해내는 힘이 된다.

이 결과가 아닌 과정을 주목하게 만드는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갖게된다. 영화는 끊임없는 추격의 과정을 그리는데 목표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바로 그 추격의 이유, 즉 휴머니티가 이들 영웅의 특징이 된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담론으로 허황된 영웅상을 정치적 논리와 섞어 세계에 배포하는 헐리우드식의 영웅을 유치하다거나 식상하다고 느꼈던 관객이라면 이 지극히 가족적이며 자성적인(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반영웅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에 쏟아지는 일련의 세계적인 관심은 이제 새로운 영웅상의 탄생을 예고하는 징후들이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다큐의 시대, 진짜 다큐의 맛 ‘휴먼다큐 사랑’

재작년부터 TV에 시청자들이 요청한 것은 리얼리티였다. 이미 짜여진 틀 속에서의 프로그램에 식상해진 시청자들은 좀더 의외성이 돋보이는 예측불허의 영상을 요구해왔다. 이것은 그간 본격 다큐멘터리가 가진 리얼리티의 요소를 모든 TV프로그램 속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드라마 분야에서는 정해진 룰 속에서 맴돌던 트렌디를 버리고 좀더 디테일한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등장했고, 예능 역시 무정형의 리얼리티쇼가 대세가 되었다. 케이블은 연일 자극적인 다큐의 틀을 끌어온 자칭 페이크 다큐 프로그램들로 넘쳐났고, 한편으로는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도 시도되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큐멘터리의 요소가 스며들었다는 의미에서 지금을 ‘다큐의 시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들 안에서 다큐멘터리는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끌어온 것은 ‘실제상황’이라는 조금은 자극적으로 해석된 요소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고발이나 폭로, 혹은 폭탄선언, 막말 같은 다큐의 외면적 자극만이 존재했지, 내면이 가진 진정성이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 짜고 맵고 단 자극적인 맛의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입맛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왜 매년 ‘휴먼다큐 사랑’이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얻고 있는지를 뒤집어 말해준다. 그것은 이 진짜 다큐멘터리에는 진정성이라는 다큐의 진짜 재료의 맛 이외에는 그 어떤 조미료의 맛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휴먼다큐 사랑’이 포착하는 것은 ‘평범함의 가치’다. 그리고 그 가치는 바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피어난다. ‘휴먼다큐 사랑’의 주인공들이 거의 몸이 불편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한 것은 바로 이 ‘평범함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병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장애 없이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를 키운다는 것 같은 일상의 평범함은, 그들에게는 그 자체로 비범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잔치를 함께 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이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봉씨에게는 비범한 일이 되며,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눈 먼 아내와 점점 눈이 멀어가는 남편에게는 비범한 일이 된다. 극한의 병 앞에서는 밥 한 끼 먹는 일, 아니 그 고통을 바라보는 일조차 힘겨운 일이 된다.

하지만 평범함조차 비범한 일이 되어버리는 갑작스런 상황 속에서도 놀라운 것은 가족의 사랑이 가진 힘이다. 죽음을 앞둔 상황이지만 소봉씨에게 그 힘겨운 투병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딸 소윤이라는 존재이며, 저 자신 또한 암이지만 그 암을 마치 감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황정희씨의 힘은 똑같이 투병생활을 하게 된 성윤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눈 먼 아내와 자신마저 눈이 멀어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경호씨와 영미씨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힘은 다름 아닌 이제 두 살 된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휴먼다큐 사랑’은 이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사랑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원천적인 힘이라는 걸 담담하게 전한다. 세상은 점점 살풍경이 되어가고 있고 그 속에서 점점 메말라 가는 사람들은 삶의 목표를 자꾸만 욕망으로 덧씌운다. TV가 반영해 보여주는 것들은 그 욕망들이 점점 강한 자극으로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다큐의 리얼리티적 요소를 통한 자극으로만 점철되어오던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어떤 순간적인 진정성을 목도했을 때, 때아닌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휴먼다큐 사랑’은 모두가 더 큰 욕망으로만 달려가는 이 세태에 좀더 간단하고 평범한 진리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그 진리란 사람은 서로 기대고 등을 대줄 때 본질에 가까워지고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