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의 눈이 되려는 카메라의 눈

MBC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의 한 장면. 서우진(손예진) 기자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그들을 대상으로 짝퉁 명품을 팔아온 일당들을 잠입취재 한다. 이것은 ‘스포트라이트’의 ‘탐사저널’이라는 코너로 뉴스 심층 취재의 한 방식인 ‘탐사보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탐사보도란 사실보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사건 그 이면을 파헤치는 적극적인 언론보도방식을 말한다. 탐사보도가 주창하는 것은 사실은 진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명제다. 그 진실을 캐기 위해 기자들은 현장으로 직접 다가가며 그 과정을 잡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몰래카메라다.

대중들의 눈이 된 TV
우리에게 이러한 탐사보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추적60분’이나 ‘PD수첩’, ‘그것이 알고싶다’같은 코너들은 늘 사실로 포장된 것들을 파헤쳐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사회적 이슈로 끄집어올리는 역할을 해왔다. 정치인의 문제나, 권력 비리 같은 거대담론들이 탐사보도의 도마 위에 올려져 부끄러운 속살을 보인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 탐사보도는 이러한 거대담론에 주로 붙박여 있던 시선을 생활 저변으로 넓히고 있다.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관련 보도와 그 파장으로 알 수 있듯이 이제 정치적, 사회적 사안은 국회에서 벌어지는 ‘저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우리 생활이 되었다. 카메라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눈이 되어준다거나(‘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이나 ‘불만제로’), 인권에 있어서 사회적 폭력에 집중됐던 카메라가 가족 내 폭력에 눈을 돌리는(‘긴급출동 SOS’) 것은 이제 카메라의 시선이 좀더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거대담론에서부터 생활까지 전방위에 걸친 ‘고발하는 TV’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그만큼 신뢰성이 사라진 사회를 말해주는 동시에, 그만큼 대중들의 눈을 장악한 TV의 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심심찮게 이러한 ‘고발하는 TV’의 영상 속에서 사건에 연루된 관할 공무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이제 법망보다 카메라의 신뢰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인, 심지어는 대통령의 말보다 TV가 해주는 말을 더 신뢰한다. 이렇게 된 데는 불신의 사회와 그것을 파헤쳐 고발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온 TV의 유리한 입지가 만나서 생긴 결과이다. 이 때 그 영상을 잡아낸 몰래카메라는 대중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눈이 된다.

대중들의 욕망이 투영된 눈
하지만 이 TV의 공공성을 대변하는 듯한 탐사보도 형식의 ‘고발하는 TV’가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면을 들추어낸다’는 이 말은 진실을 찾는다는 지적 호기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한 감추어진 것, 혹은 금기된 어떤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이것은 영상과 만나면서 더 폭발력을 갖는다. 종종 탐사보도에 대해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상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최근처럼 이제 카메라가 거대담론이 아닌 생활을 비추게 되었을 때, 영상에 노출되는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영상들이 자극으로만 흐르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공익성이다. 공익성이 없이 ‘고발하는 TV’의 형식만을 취해 자극적인 엿보기 영상을 끄집어낸 대표적인 것이 케이블TV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페이크 다큐나 유사 다큐 프로그램들이다. 여기서 탐사보도의 시선을 따르는 카메라는 마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런 스튜디오를 활용한다) 사실은 엿보기라는 드라마의 자극적인 코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차용된 것뿐이다.

이것은 시사연예 프로그램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있는 ‘리얼스토리 묘’같은 프로그램이 고수하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과 동일하다. 이러한 프로그램들 속에서 카메라는 사실 이면의 진실을 파헤친다기보다는,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하는 은밀한 욕구의 대리자가 된다. 카메라를 두고만 봤을 때, 몰래카메라는 진실을 포착해내기 위한 훌륭한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과 은밀한 볼거리를 잡아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몰래카메라의 두 얼굴이자 ‘고발하는 TV’의 두 얼굴이다.

TV 전반에서 보이는 고발의 흔적들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고발하는 TV’의 영향은 탐사보도 프로그램만이 아닌 TV 전반에 걸쳐져 있다. 이것은 TV라는 영상매체가 프로그램을 막론하고 새로운 카메라의 등장이나 그 기법들에 거의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의 등장 이후부터 차츰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TV에 노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야심만만’이나 ‘상상플러스’ 같은 연예인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토크쇼 형식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리얼리티쇼가 봇물이 터진 것도 마찬가지다.

취재형식으로 초청된 게스트를 궁지에 몰아넣는 ‘무릎팍 도사’가 가능했던 것은, 연예계에 대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알고 싶은 대중의 욕구들이 이른바 ‘고발하는 예능’과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런 면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명랑히어로’는 ‘고발하는 예능’이 연예인 사생활 폭로 위주에서 시사문제 같은 공익적인 포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도 TV의 힘을 느낄 수가 있는데,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서 ‘100분 토론’이 100분 이상의 시간을 써가며 토론했던 이야기만큼, ‘명랑히어로’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시원스럽게 쏟아낸 말에 대한 반향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드라마마저 이런 기법들을 활용하고 있다. 종영한 ‘온에어’는 드라마 제작 과정에 벌어지는 연예계의 뒷얘기들을 폭로하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전략을 썼다. ‘온에어’ 자체는 환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갖고 있을 뿐이지만, 바로 이 ‘드라마가 드라마를 고발한다’는 이 부분에서 리얼리티라는 착시현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현재 방영중인 ‘스포트라이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포트라이트’가 고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탐사보도를 하는 방송기자들 자체다. 진실을 파헤치지만 그 진실은 정치적인 판단(드라마 상에서는 회장의 호화저택에 대한 진실과 방송기자의 성추행 문제를 서로 무마하기 위해 보도를 하지 않는다)에 의해 저지 당한다는 걸 드라마는 보여준다.

TV는 태생적으로 ‘보여준다’는 기능을 하고 있기에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양면성, 즉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거나 혹은 감춰진 시각적 욕망을 들추어내는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 이것이 점점 더 TV가 대중의 눈이 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시청자의 예리한 눈과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이유다. 카메라의 전략은 점점 현란해질 것이고 그만큼 영상이 전하는 정보에 대한 해독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의 눈은 더 밝아져야 한다.

왕을 사적인 존재로 다루는 이점과 한계

‘이산’은 정조라는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한 인간에 더 주목한 사극이다. 어린 시절, “이름을 불러다오”하고 이산이 요청하고, 거기에 대해 어색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성송연이 “산아”하고 답하는 장면은 이 사극의 입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러한 왕이라는 공적 존재에서 이산이라는 사적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이산’은 조선시대라는 위계질서 속에서도 수평적 관계 같은 현대적 맥락을 가져갈 수 있었다.

왕이 되기 전까지 사적인 존재로서의 이산의 행적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장점이 된다. 실제로 끊임없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이서진)의 몸부림과 그런 이산을 돕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은 이 사극이 주는 재미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도화서의 다모로 일하는 성송연(한지민)이 그림을 통해 이산을 돕는 설정 같은 것들은 이 사극만이 줄 수 있는 묘미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사극에 힘을 준 인물은 이산의 할아버지인 영조(이순재)와 홍국영(한상진)이다. 영조는 이산을 시험에도 빠뜨리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도 한다. 또한 노론 세력들의 위협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영조의 역할만으로는 이산을 보호해줄 수 없는 입장이 되자, 급부상하는 인물이 홍국영이다. 이 착하기만 한 이산을 돕기 위해 기꺼이 진흙탕 속에 뒹굴 수 있는 홍국영은 현실적인 인물로서 주목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영조가 죽고 이산이 정조라는 왕이 되었을 때부터 불거진다. 아무리 사극이 조명하는 것이 이산이라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왕은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존재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즉 이제 정치를 해야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데, 정치란 사적인 행적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만일 정조의 정치 자체를 이렇게 사적인 얘기로 풀어낸다면 자칫 조선시대 한 성군의 치적을 정치적 개혁과 타협의 성과가 아닌 끝없는 음모론과 밀실정치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즉 사적인 약점들을 캐내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만 강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산’은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개인을 다루겠다고 할 때부터 ‘이산’은 정치드라마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미묘한 입장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들이 나타나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는 복잡한 상황들은 저 ‘대왕 세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정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열광을 하겠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정치라는 단어 자체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이산’이 정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다루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예를 들면 금난전권 폐지 같은)에 더 중점을 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에 대한 시청자들의 혐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이 등장하는 박제가, 이덕무 같은 실학파 인물들이 사극의 중심으로 오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이산’이라는 사극에서 이산이 정조가 되었기에 반드시 해야할 정치적 책무들을 복잡한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인물들의 면면으로 쉽게 해결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 등장한 정약용(송창의)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라기보다는 오히려 발명가나 과학자의 면모로서 더 부각된다.

왕이 되었으나 사적인 얘기에 천착함으로써 ‘이산’이 사극 후반에 집중한 것은 홍국영과 성송연이다. 홍국영의 개인적인 야심을 부각시켰고, 그것이 정조와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에 더 집중했으며, 성송연의 의빈으로의 성장과정과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또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사극의 대부분이 할애되었다. 정조의 왕으로서의 정치적 업적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나 막연히 규장각 인물들이 하고 있거나 열심히 일하는 정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처리되었다.

‘이산’이 후반부에 와서 초반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산이라는 인물에만 집중하려 했다면 정조로 즉위되는 그 순간까지만을 사극으로 다루었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정조가 되는 그 순간부터는 이야기를 좀 다른 패턴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더라도 새로운 실학파 인물들과의 관계를 더 주목하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업적이 드러나게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극의 연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아쉬움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은 이러한 결과로 ‘이산’에서 더 주목된 인물들은 정조보다는 영조, 홍국영, 성송연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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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뿔났다’, 진화하는 엄마들

김수현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는 물론 김한자(김혜자)가 주인공이지만, 뿔난 엄마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며느리 괴롭히는 전형적인 시어머니처럼 보이지만 한편에서 보면 나름 귀엽기도 한 이상한 엄마, 고은아(장미희)가 있는 반면, 오히려 자식의 허물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입장을 공감하고 긍정해주는 좋은 시어머니, 이종원(류진)의 엄마도 있다.

전형적이지만 무언가 다른, 뿔난 엄마
김한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엄마이자 시어머니다. 평범한 집에서 평범한 며느리로 엄마로 아내로 살아왔다. 이제 자식들을 결혼시켜야 하는 입장에 선 엄마들이란 사실 뭐 하나 제 맘에 쏙 드는 게 없기 마련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며느리와 손주를 동시에 안겨다준 당혹스런 아들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상대와 결혼한 막내딸, 그리고 이혼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딸린 상대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맏딸을 가진 김한자의 상황은 보통 엄마들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전형적인 상황 속에 있는 뿔난 엄마가 과거의 엄마, 혹은 시어머니와 다르게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일단 김한자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변화가 그 첫 번째가 될 것이다. 과거라면 아무리 뿔이 나도 혼자 삭이고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가족들은 모두 이 뿔난 엄마 주변에서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그 뿔을 삭일 궁리를 해준다. 늘 제일 먼저 며느리를 살펴주는 시아버지와, 아내를 웃기기 위해 파자마 바람에 춤까지 춰주는 남편과, 친구보다 더 살갑게 대해주는 시누이는 뿔난 엄마 주변을 방패처럼 둘러싸고 있다.

게다가 이 엄마는 계속 해서 독백을 한다. 그 독백 속에는 기존 엄마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는 알 수 없었던 엄마의 속내가 담겨있다. 이로써 이 드라마는 세상 엄마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시청자들은 그 마음을 경청하는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엄마라는 입장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드라마를 실제 상황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바로 이런 구도와 설정의 엄마는 그것이 공감을 얻는 지금의 세태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뿔난 엄마의 독백과 그걸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는 실상,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의 엄마들 그 속의 뿔을 끄집어내 토로하게 하고, 가족들이 그것을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가를 정답처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움과 측은함이 교차하는, 이상한 엄마
뿔난 엄마가 뿔이 나는 이유는 첫째 자식들이 자기 맘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행동을 자신이 꺾지 못하고 용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응어리의 바탕에는 자식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영미(이유리)의 시어머니 고은아도 뿔난 엄마이긴 마찬가지다. 자신의 말이라면 절대로 복종하던 아들이 격에도 맞지 않는 영미와 결혼하기 위해 단식까지 하니 뿔이 나도 보통 뿔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도 역시 엄마는 엄마인 바, 결국 자식에게 두 손을 들고 만다. 바로 이 대목이 고은아를 나쁜 엄마로 보기 어려운 지점이다(사실 세상에 나쁜 엄마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조금 이상한 엄마다. 그렇게 결혼까지 시킨 마당에 그녀는 자신의 생활과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며느리 앞에서 “그건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거나, “무식하다”는 직설적인 표현은 실은 상대방에게 진짜 예의 없는 일이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악의가 없다. 그저 자기 입장에서 위한답시고 하는 일이다. 그녀는 며느리의 문화적인 소양을 높이고 격을 높이고자 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강변한다.

이 이상한 엄마를 완전히 욕하기도 뭐한 것은 바로 그녀의 완전히 굳어져버린 캐릭터 때문이다. 입만 열면 나오는 품위와 지성 같은 단어들은 실제로 그녀의 높은 품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의 허위의식을 드러내주는데, 어찌 보면 그것이 딱하게 보일 때가 더 많다. 그녀는 접시를 사 모으는 것이 문화라 생각하지만, 사실 문화란 접시보다는 거기에 무엇이 담기는가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도라기보다는 생활에서 굳어진 것이다. 그것을 잘못이라 말할 수는 있지만, 한 여자의 인생 전체를 허위라 말하기는 어딘지 고은아라는 캐릭터가 측은해 보인다. 바로 이 미움과 측은함이 교차하는 부분, 거기에 이상한 엄마가 서 있다.

입보다는 귀가 큰, 좋은 엄마
맏딸 영수(신은경)의 선택(아이 딸린 이혼남과의 결혼 결정)에 뿔난 엄마, 김한자는 조금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의 막내딸이 결혼할 때, 기우는 자신의 집안 처지 때문에 사위의 시어머니인 고은아에게 충분히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자기 딸 걱정에 상대편인 종원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뿔난 엄마는 그 뿔을 드디어 밖으로 끄집어내 종원을 공격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엄마의 모성본능이다. 아예 부모 자식간의 의를 끊자고까지 말하는 그녀는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엄마들 간에는 그 엄마라는 이름으로 서로 통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뿔난 엄마가 종원의 엄마를 만나고 나서 마음의 뿔이 얼음 녹듯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시어머니 캐릭터로서의 착한 엄마 종원모의, 주장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진정으로 공감해주는 진실된 태도가 한 몫을 하게 된다. 종원모는 입보다는 귀가 큰 엄마다. 그녀는 심지어 행패를 부리는 전 며느리 소라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진정으로 이해한다며 심지어 자기 자식을 “나쁜 놈”이라고 얘기할 정도이다. 이 자기 자식보다 남의 자식을 더 귀히 여기는 시어머니는 이 시대의 며느리들과 모든 엄마들이 희구하는 착한 엄마가 아닐까.

‘엄마가 뿔났다’의 뿔난 엄마, 착한 엄마, 이상한 엄마는 각자 자신의 캐릭터가 뚜렷하며 그 캐릭터들은 자식들간의 결혼 속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의 서로 부딪쳤던 이유가 바로 엄마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성격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며 계층도 다르지만, 그들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서로 소통한다. 과거 한 여자에게 엄마라는 이름과 시어머니라는 이름이 각각 존재하던 시대에 딸과 며느리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이던 엄마들은 이제 그것이 결국 하나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시어머니들, 아니 엄마들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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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영웅들

1982년 극장가는 두 명의 할리우드 액션스타들로 들썩거렸다. 그 한 명은 후에 아이콘이 될 모자를 쓰고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헝겊으로 질끈 동여맨 채, 손에는 달랑 대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로 ‘레이더스’의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와 ‘람보’의 존 람보(실베스타 스텔론)다. 그들의 무기가 말해주듯이 이들은 말 그대로 몸과 몸이 부딪치는 정통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 이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디아나 존스와 람보는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라스트 블러드’라는 부제를 각각 달고 다시 극장가에 걸려졌다. 최근 돌아온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이미 ‘다이하드 4.0’으로 건재함을 과시한 존 매클레인(부르스 윌리스) 역시 26년의 세월 동안 절대로 죽지 않는(die hard!) 면모를 보여주었고, 1977년에 탄생한 최고령의 록키 발보아(실베스타 스텔론)는 최근 동명의 영화 속에서 여전히 매운 주먹을 과시했다.

007 시리즈에서 그 주연배우가 계속해서 바뀌었던 걸 생각해보면, 영화와 함께 똑같이 나이를 먹어왔고, 그 나이 그대로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이들은 특별한 존재들이다. 즉 캐릭터와 배우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배우로는 대체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또한 배우들에게 있어서도 이 캐릭터들은 배우인생 전체의 이미지를 형성한 바가 크다. 바로 이 점, 배우와 캐릭터가 시너지를 이루고 있는 지점이 무려 30여년 간이나 같은 배우로 시리즈가 지속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조건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그것이 의미가 없다면 영화는 공염불이다. 혹자들은 이들의 귀환이 이 액션 히어로들의 탄생을 보았던 3,4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일 뿐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액션 자체의 향수가 맞을 것이다. 최근 들어 액션은 디지털과 만나면서 ‘테크노’라는 수식어를 갖고 화려한 CG를 앞세워 너무나 깔끔해지는 경향이 있다. 디지털이 이제 고민하는 것은 선명하고 깔끔한 화질이 아니라, 조금 거칠고 흔들리더라도 리얼한 영상이다. 디지털이 거꾸로 아날로그를 꿈꾼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자신의 입지를 세운다. ‘다이하드 4.0’에서 디지털 테러에 대항할 수 있는 이들은 컴퓨터 전문가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컴퓨터 자체를 부숴 버리는 아날로그 히어로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이것이 존 매클레인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지점이다. ‘록키 발보아’에서 록키는 급변하고 변질되어 가는 세태를 권투라는 스포츠를 통해 개탄하며 옛 가치로의 복귀를 주창하는 영웅으로서 기능하며, ‘람보4’에서 존 람보는 자신의 아날로그적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미얀마라는 정글을 선택한다.

또한 최근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4’는 시대를 과거로 되돌려 시리즈 본연의 재미요소들을 고스란히 복원해낸다. 이 시리즈의 재미는 냉전시대의 국가 간의 유물 찾기 경쟁에서 비롯되는데, 그 냉전의 당사국이 독일 나치에서 소련으로 바꿔놓음으로서 그 대결구도를 유지한다. 인디아나 존스가 이미 고인이 된 헨리 존스(숀 코넬리)의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세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액션은 과거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노익장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캐릭터 자체가 그다지 힘에 의존한다기보다는 지성과 유머감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귀환한 영웅들이 보여주는 옛날 액션은 이른바 작금의 테크노 액션이 보여주지 못하는 진중함과 리얼함을 담보하면서 지금의 세대들까지 열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마치 어디서든 손쉽게 영상을 접하는 시대에, 과거의 영사필름을 볼 때 느끼는 실감 같은 것이다. 세월의 무게에 조금은 힘겨워 하고 조금은 둔하지만 그래도 이 아날로그 영웅들의 귀환이 반가운 것은, 이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마저 손쉽게 그래픽으로 처리되는 세상에서 오히려 땅에 발을 붙박고 뛰어다니는 진짜 사람이 그리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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