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방영에 변칙편성까지 시청률에 경도된 ‘이산’

‘이산’은 소재로 보나 특유의 시각으로 보나 훌륭한 기획의 사극임이 분명하다. 조선조 22대 임금으로 파당정치를 뒤엎고 개혁을 단행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성군. 게다가 이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임금이다. 이런 되는 소재를 가지고 ‘이산’은 왕과 개인으로서의 정조를 모두 다루는 독특한 사극의 한 장을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기획의 창대함을 두고 볼 때, ‘이산’이 얻은 것은 그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초기 너무 과도한 의도를 세워놓은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작품은 뒤로한 채 시청률에 경도된 연장방영이나 변칙편성은 오히려 초반부 ‘이산’의 참신한 기획마저 색 바래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 ‘이산’은 보다 깔끔하게 끝내지 못하는 걸까.

창대한 기획에서 빗나간 초반부
‘이산’의 기획의도를 다시 들추어보면 그 창대한 기획의 면면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기획의도에는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가진 정조는 물론이고, 파당정치를 해소한 정치인으로서의 정조, 실물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정조, 다양한 실학파 인재들을 등용해 문화와 과학에 꽃을 피웠던 정조,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했던 정조까지를 다루려 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산’은 그저 왕조의 정치사만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정조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을 모두 한 편의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종영을 앞둔 ‘이산’이 다룬 것은 이 중 그 어느 하나도 만족시킬만한 결과를 보이지 못했다. 탕평책을 시행해나가는 정조의 에피소드도 구체적인 것이 거의 없었고, 실물경제를 살리기 위한 에피소드도 금난전권 철폐라는 발표로 그친 격이 되었다.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있던 성송연(한지민)의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 에피소드는 어찌된 일인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고, 또한 군제 정비나 병기 연구 과정 에피소드의 하나로서 ‘무예도보통지’ 같은 무예책자 역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이산이 정조가 되는 과정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이산이 비로소 정조가 된 것은 45회에서다. 애초 계획이었던 60회에서의 종영은 이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정조의 업적이나 애초 의도에 들어있던 정조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같은 것들은 아직 시작도 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정순왕후(김여진)를 위시한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암살시도(이것은 거의 마지막까지 다시 반복된다)와 영조(이순재)의 시험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의 모습을 과도하게 반복했기 때문이다.

연장방영, 그러나 정조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초반부 이산보다 더 주목된 것은 영조와 홍국영(한상진)이었다. 즉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로써 영조와 홍국영(때로는 성송연)이 부각되면서 오히려 드라마를 끌어가는 중심 힘이 위치이동을 한 것이다. 영조의 매병(치매) 설정이 그토록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것은 사실 정조를 다루기에도 벅찬 ‘이산’으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시청률이란 잣대로 보면 이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 극의 힘을 이끌고 가는 것이 영조였기 때문이다.

중반 이상을 지나오면서 정조가 아닌 영조에 집중된 ‘이산’에 있어서 MBC의 16부 연장방영 결정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니까. 연장 결정의 이유로서 MBC가 내세운 것도 “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책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서”와 “이산과 송연과의 멜로 라인 등 그 밖의 다루지 못한 부분으로 이산 시청자들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연장방영 속에서도 여전히 정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각된 것은 홍국영이다. 홍국영의 끝없는 욕망과 그 추락에 대한 에피소드가 지속되었고, 본래 기획의도에서는 도화서에서 나와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에도 들어가는 등 능동적인 캐릭터였던 성송연은 궁중 시집살이(?) 에피소드가 거듭되면서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홍국영의 죽음과 성송연의 장결병이란 불치병 에피소드로 채워지는 동안,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 인물들과 정약용(송창의)의 간간한 ‘보고’로 처리되었다.

시청률이 ‘이산’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산’은 성군으로서의 정조를(특히 정치인으로서의 면모)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여러 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산’이 선택한 것은 완성도보다는 시청률이었다. 완성도를 생각했다면 초반부 그렇게 질질 끌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어쩔 수 없이 연장방영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에 걸맞게 완성도를 보충해나갔어야 한다. 300회가 거듭되는 동안 이제나저제나 정조로서의 면모를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필자 같은 시청자들로서는 이 대책 없는 후반부의 허무함을 성송연의 죽음, 정조의 죽음 같은 감성적 충격 혹은 화성 원행 같은 스펙타클로 채워야 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최근 ‘이산’의 종영을 두고 벌어진 ‘오락가락 편성’은 그 마지막 끝나는 길까지 이 드라마가 시청률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유야 어쨌건 두 차례의 스페셜 프로그램과 한 주에 한 번씩 띄엄띄엄 편성된 ‘이산’의 종영은 확실히 정상적인 끝맺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끝맺음을 함으로써 시청률로 보면 ‘이산’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방송사에 최대의 이익을 남겨준 드라마가 되었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이산’은 바로 그 시청률을 위해 완성도를 포기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제 종영하는 마당에 ‘이산’의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끄집어내는 것은 이것이 자칫 성공하는 드라마의 한 전형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 들어 드라마들은 초반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편성 전쟁의 진짜 얼굴은 이것이다) 초반 시선잡기에 대부분의 힘을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초반의 힘이 끝까지 지속된다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의 과도한 힘주기는 대부분 중반 이후부터의 긴장감 저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다반사다. 용의 머리만큼 중요한 것이 용의 몸통이자 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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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드라마를 장악해 가는 가수들

한때 가수는 모든 연예인들이 선망하던 직업. 하지만 가요계는 음원의 디지털화라는 외부적인 악재에, 기획된 가수들의 범람이라는 내부적인 문제가 결합되면서 급격한 하락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가요 프로그램들이 시청률 저조로 하나 둘 사라지자 가수들은 설 자리마저 잃었다. 90년대 200만 장씩 팔렸던 앨범은 이제 10만 장을 넘으면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가수들은 위기였다.

드라마에서 활약하는 가수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가요계가 가진 이런 총체적인 위기는 가수들의 방향전환을 요구했다. 가수들이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창기 이 현상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노래는 안하고 안 되는 연기력으로 드라마에 출연하는 가수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즉각적인 연기력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예능 프로그램에서 노래보다는 말로 살아가는 가수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가수들의 예능 출연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기에 드라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역전되고 있다. 가수들이 드라마에서도 예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 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을 일으켰던 윤은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으로 드라마에 안착했고, 역시 늘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성유리 역시, ‘쾌도 홍길동’으로 그 논란에서 벗어났다. 한편 논란은커녕 연기 호평을 받는 가수들도 늘어났는데, 대표적인 연기자가 윤계상이다. 그는 ‘사랑에 미치다’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영화 ‘비스티 보이즈’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비는 ‘풀 하우스’로 주목받으면서 최근에는 헐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에도 출연할 정도로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인정받았다. 에릭 역시 ‘케세라세라’에서 호연을 보여준 후, 곧 방영될 ‘최강칠우’의 주연을 맡았다. 이러한 가수들의 드라마 출연은 점점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앞으로 방영될 MBC의 ‘일지매’로 낙점을 받은 이승기와, 현재 ‘너는 내 운명’에서 주연을 맡은 소녀시대의 윤아는 이제 가수들의 드라마 외출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능에서 전성기 맞은 가수들
한편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은 가수들의 프로그램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그들의 입지가 확고해졌다. 일찌감치 탁재훈과 신정환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고, 탁재훈은 개그맨들을 제치고 작년 KBS 연예대상까지 거머쥐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우리 결혼했어요’는 사실상 가수들의 가상결혼 프로그램이라 할 정도로 가수들로 장악되었다. 크라운제이와 알렉스, 서인영, 황보, 김현중 등이 그들이다. 여행버라이어티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1박2일’은 MC몽, 은지원, 이승기, 김C 등이 출연하면서 가수들의 예능 프로그램이 되었다.

가수들이 이처럼 드라마와 예능에 대거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가요계 불황이 만든 결과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가수들만이 가진 장점들이 드라마와 예능의 필요조건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드라마는 자칫 고정된 이미지의 연기자들보다 더 신선한 이미지를 갖춘 가수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예능은 가수들만이 가진 버라이어티적 요소, 즉 춤과 노래 같은 다양한 볼거리에 대한 호감이 있다.

가수들이 점점 드라마와 예능까지 속속 들어오게 되면서 그들의 본래 목적이었던 가수로서의 활동이 또한 탄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것은 특히 점차 가상시트콤화 되어가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네들의 노래가 마치 OST처럼 주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종 챠트에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곡들을 보면 대부분이 드라마나 예능에 쓰여진 곡들이 많다. 이것은 노래에 부가된 영상이 가진 힘이라 할 수 있는데, 가수들의 예능 출연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된 효과로 볼 수 있다.

가수들은 가요계의 총체적인 위기의 나락 속에서 한참을 고군분투하며 새로운 생존방식으로 현재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것이 긍정적인 현상인지 부정적인 현상인지는 아직까지 단언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점점 더 영상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요계의 당연한 변화일 수도 있고, 오히려 노래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영상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가수들은 끊임없이 현재의 위치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위기의식이 가진 긍정적인 힘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 ‘연애시대’를 꿈꾸다

불륜이나 신파 없이 금요일 밤의 드라마를 채울 수 있을까. 한 때 이 질문의 답은 ‘없다’였을 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금요일밤의 트렌드를 장악해버린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강력한 불륜 앞에 그 어느 방송사의 드라마도 대적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8시 뉴스를 방영하고 곧바로 9시부터 그것도 2회에 걸쳐 파격 편성된 SBS의 드라마들이 성인드라마(거의 불륜이 많은)를 연달아 기획해왔던 이유는, 그 금요일이란 시간대 때문이었다.

한 편에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 버티고 서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주5일 근무제로 공백이 된 안방극장의 젊은 시청층 대신 남게된 중장년층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트렌드는 이제 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 본격적인 변화의 기류는 새로 시작한 금요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부터 비롯된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이제 31살 도시 직장여성들의 솔직 담백한 연애담을 담고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제목에서 보이듯이 ‘도시’와 ‘연애’다. 이 제목만으로 언뜻 떠오르는 건 바로 최근에 영화화된 ‘섹스 앤 더 시티’라는 미국 드라마다. 여기에는 뉴욕이라는 도시와 거기서 생활하는 네 명의 여성들의 연애담이 등장한다. 대신 ‘달콤한 나의 도시’에는 세 명의 여성, 오은수(최강희)와 남유희(문정희), 하재인(진재영) 이렇게 세 명의 여성의 이야기들이 중첩된다.

중요한 것은 ‘도시’라는 키워드다. 그것은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시티’가 뉴욕의 문화적 트렌드를 기본 바탕에 깔고 가는 것처럼, ‘달콤한 나의 도시’도 서울로 대변되는 도시의 문화적 트렌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주로 도시적 공간, 즉 영화관이나 카페, 술집, 혹은 원룸형 집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도시적 감성들을 잡아낸다. 바로 이런 세련된 부분들이 같은 금요일 밤의 연애 드라마라고 해도 질척하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드라마가 되는 이유다.

‘달콤한 나의 도시’가 꿈꾸는 이런 도시적 연애의 감성은 한때 명품드라마로 주목받았던 ‘연애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가 ‘연애시대’에서처럼 프리미엄드라마를 주창하고, 정이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며, 도시와 여성과 연애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박흥식 영화감독이 연출을 하고 있다는 점은, 역시 영화인들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었던 드라마 ‘연애시대’의 연장선상에 이 드라마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첫 1,2회를 통해 판단되는 것은 금요드라마가 이제는 불륜 없이도 된다는 것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31살의 연애담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의 수위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진한 딥키스와 처음 만나 하룻밤을 지내는 이야기는 파격적이지만 그것이 무리 없이 읽히는 것은 저 ‘섹스 앤 더 시티’가 무기처럼 들고 나왔던 그 솔직대담함 때문이다. 솔직한 주인공들의 대담한 이야기는, 오히려 감춰지고 숨겨짐으로써 구질구질해지는 멜로 드라마의 틀을 벗어나게 해준다.

이렇게 금요 드라마의 중심부에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게 된 것은 그간의 금요일 밤 성인 드라마들이 어떤 한계를 보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불륜드라마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점차 화제에서 비껴나게 된 금요드라마는 잘 하면 불륜에서 연애로, 금요트렌드를 바꿀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를 통해 제 2의 ‘연애시대’를 꿈꾸게 되는 것은 가장 비판받았던 금요 드라마를 가장 찬사 받는 명품 드라마 시간대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 역발상에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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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들의 두 가지 얼굴

‘일지매’로 새로 돌아온 이준기가 선택한 것은 이번에도 ‘두 얼굴을 가진 존재’였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을 잃고 과거와 현재, 그 두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역할은 ‘개와 늑대의 시간’에 이어 ‘일지매’로 이어진다. 이준기가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에 서 있었다면, ‘일지매’에서는 겸이와 용이 사이에 서 있다. 이런 야누스의 얼굴은 베테랑 연기자들마저 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이준기에게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준기의 두 가지 얼굴
한 드라마 속에서의 배역뿐만이 아니라 이준기 개인이 연기자로서 걸어온 길 또한 변신의 연속이었다. ‘마이걸’에서 곱상한 외모와 털털한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이던 이준기는 ‘왕의 남자’를 통해 여성적인 이미지로 변신한다. 그 이미지로 이준기는 각종 CF를 통해서 그루밍족의 표상처럼 구획된다. 문제는 ‘왕의 남자’를 통해 일약 1천만 관객의 스타가 된 이준기가 그 굳어진 이미지를 어떻게 벗어버리느냐는 데 있었다. 하지만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해 이준기는 연기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것은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이는 것이었다.

‘일지매’의 일지매 캐릭터가 갖는 야누스적인 성격, 정체성의 문제 같은 것은 역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빼 닮았다. 하지만 ‘일지매’의 두 얼굴이 갖는 의미는 ‘개와 늑대의 시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정체성의 혼동을 통한 관계의 역전을 이수현이란 캐릭터의 끝없는 변화과정을 통해 포착하고 있다면, ‘일지매’의 두 얼굴은 혼동의 시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찾고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일지매의 두 가지 얼굴
첫 회에서 멋진 갑의를 걸치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일지매는 저 스스로 말하듯 ‘못할 게 없는 존재’다. 하지만 이 못할 게 없는 일지매가 어떤 기억의 자각 이전으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청년, 용이(이준기)가 서 있다. 충격적인 아버지의 살해장면을 목격한 겸이가 기억을 지우고 용이가 되었을 때 그 앞에 던져진 삶은 쇠돌(이문식)의 자식으로서의 천한 삶이다. 천하다는 이유로 양반자제들에게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용이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한다. 그저 “살려주십쇼”하고 애걸할 뿐이다.

하지만 용이가 기억을 되살려내고 천한 존재로 치부되었던 자신이 귀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일지매가 탄생한다. 하지만 이 일지매라는 존재는 단순히 겸이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일지매는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 듯이 저 저잣거리에서 자신 때문에 기꺼이 이빨 하나 정도는 빼주고 바보처럼 웃어주는 쇠돌 같은 민초들이 더 이상 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일지매 속에는 겸이와 용이 이 두 인물이 교차한다.

천함과 귀함 사이에서 이 두 인물이 한 몸 속에서 갈등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저 세상의 잘못된 선 가르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일지매가 하는 것은 그 선을 넘는 일이다. 그가 서는 자리는 양반과 서민들 사이에서, 도적과 의적 사이에 서서 자신처럼 갈라진 정체성을 가진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보고자 함이다.

이 시대 청춘들의 두 가지 얼굴
이 일지매의 이중적인 의식(귀한 존재지만 천덕꾸리기 취급을 받는)은 이 사극이 왜 지금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서자 의식을 일깨운다. 386이 80년대 민주화를 통해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 깊은 경제 불황의 나락 속에서 ‘88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역사에서도 빗겨나 있고 현실에서도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일지매의 ‘기억을 잃고 부유하는 용이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꿈꾸는 세상은 용이도 아니고 겸이도 아닌 일지매이다. 즉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미래라는 뜻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이준기라는 연기자가 일지매를 통해 만나는 자신의 얼굴이다.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에 강렬한 피를 끓게 하는 남성적 이미지를 공유한 이준기는, 이제 이미지를 넘어서 이 시대의 청춘들이 공유한 두 가지 의식, 즉 청춘으로서의 쾌활함과 그 쾌활함 이면에 현실로서의 어두움을 공유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연기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현실참여에 적극적인 이준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지매의 이중적인 캐릭터와, 이준기의 이중적인 이미지, 그리고 이 시대 청춘들이 갖는 이중적인 얼굴은 모두 닮았다. 그래서 일지매가 웃고 있거나, 배우이자 한 청년으로서의 이준기가 웃고 있거나, 혹은 이 시대 청춘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것은 바로 그 아래 숨겨진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저들만의 역사를 허구 속에서라도 그려내고픈 ‘일지매’라는 파격적인 사극이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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