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몰아치는 '해치', 정일우가 있어 몰입된다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신세대 사극’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기존의 사극의 틀에 젊은 감각을 더했다. 그 단적인 증거는 이 사극이 가진 남다른 속도감이다. 끊임없이 사건들을 몰아치는 <해치>는 우리가 흔히 미드를 통해 보던 그런 몰입감을 선사한다. 과거 <이산>과 <동이> 등을 통해 이병훈 감독과 사극의 묘미를 맛보던 김이영 작가는 이제 미드적인 장르의 틀을 가져와 자기만의 색깔을 세우고 있다. <해치>는 그 성취가 보이는 작품이다.

<동이>를 통해 숙종에서 영조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이미 체득하고 있고, 거기서 영조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가를 잘 알고 있는 김이영 작가는 이번 <해치>를 통해서는 그 영조가 연잉군 이금(정일우)으로 방황하던 시절부터 스스로를 왕좌에까지 올리는 그 입지전적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동이로 불린 숙빈 최씨의 아들이 바로 영조다.

연잉군이 흥미로운 소재가 되는 건, 천민 출신 무수리의 소생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그 처지 속에서 임금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그 성장담 때문이다. 여기에 <해치>는 당대의 파당정치로 인해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노론에 의해 농단되는 정치현실 속에서 아무런 당파조차 없는 연잉군이 어떻게 빈손으로 이 파란의 세파를 뛰어넘었으며 결국에는 왕권을 틀어쥐고 민생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더 흥미로운 스토리로 더해졌다.

당대의 사헌부를 상징하는 ‘해치’가 제목으로 세워진 건, 아무 것도 없던 연잉군이 그나마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노론 세력의 비리를 그냥은 두고 볼 수 없는 ‘정의 실현’이나 ‘진실 추구’ 같은 가치들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뜻을 갖게 된 박문수(권율)나 여지(고아라) 그리고 달문(박훈)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그를 따르게 된다. 과거비리로 늘 낙방의 고배를 마셨던 박문수가 그 비리를 캐면서 잡게 된 노론의 약점이 그들을 분열하게 만들고, 그 틈을 비집고 연잉군이 세제(왕좌를 이을 아우)가 되는 과정은 그래서 이 아무 것도 없는 인물이 가진 ‘비전’의 힘을 보여준다.

중요한 건 <해치>가 역사적 인물이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의 새로움과 세련됨이다. <해치>는 정치사극에서 늘 중시되던 ‘명분’보다는 저마다의 욕망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는다. 즉 연잉군은 왕좌에 대한 뜻이 전혀 없다가, 자신이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함으로써 소중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는 각성한다. 경종(한승현)은 노론의 수장 민진헌(이경영) 앞에서 말을 더듬을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 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분열된 노론의 이이겸(김종수) 같은 인물이 자신이 살기 위해 연잉군을 세제로 삼으라고 경종에게 주청을 올리면서, 노론과 소론 그리고 경종으로부터 모두 배척당할 위기에 놓인 연잉군이 이를 기회로 바꾸는 모습은 저마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어 흥미진진해진다. 당파가 없는 연잉군이 역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경종을 독대하며 자신에게는 오히려 당파가 없기 때문에 결코 노론의 개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설득시킨다.

그리고 내금위장을 연잉군에게 보내는데, 이것은 어쩌면 경종이 연잉군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진짜 역적이라면 도주했을 테지만 연잉군은 기꺼이 내금위장을 맞음으로써 그가 경종에 충성한다는 걸 보여준다. 반면 연잉군을 세제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민진헌이 경종에게 반발하자, 경종은 오히려 더 자신의 선택을 믿게 된다. 결국 노론과 연잉군이 결탁한 게 아니라는 게 밝혀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디테일한 인물들의 욕망들을 세우고, 이들이 부딪치며 내는 다양한 양상들을 빠른 속도감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해치>는 남다른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튀어나갈지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건 여러 인물들의 욕망들이 잘 살아있어서다. 알다시피 복잡하게 권력과 이해로 얽힌 관계란 한 사람의 변화만으로도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복잡한 양상을 굳건히 하나로 모아 끌고 가는 인물이 바로 연잉군이다. 연잉군과 그를 위시한 박문수, 여지, 달문 같은 인물들은 그래서 복잡한 상황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준다. 시청자들이 결코 쉽지 않은 이 사극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이유다.

결국 그 중심축을 쥐고 있는 연잉군을 연기하는 배우 정일우를 칭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폭풍전개 되는 상황의 반전 속에서 확실히 흔들림 없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간간히 긴장을 풀어주는 여유까지 자연스럽다. 물론 발성이 아직 명쾌하지 않다는 지적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건 그가 보여주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나드는 진지한 연기다. 흥미진진한 입지전적인 영조의 행적을 따라가는 이야기 <해치>에서 정일우가 마땅히 박수 받아야 될 이유다.(사진:SBS)

'눈이 부시게'가 말하는 등가교환과 아름다운 에러

놀라운 드라마다. 한참 깔깔대며 웃는 코미디였다가 어느 순간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경험하고,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는 그 순간순간 나왔던 대사들의 의미들을 곱씹으며 우리네 삶을 반추하게 된다. 우리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며 툭툭 던져놓는 이야기들은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삶의 진면목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것이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우리를 인도하는 그 먹먹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실체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 뭔가를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뭔가를 희생해야 된다고. 이 세상은 이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 김혜자(김혜자)가 오빠의 1인 방송에서 한 이 이야기는 이 드라마의 타임리프가 어째서 여타의 타임리프 장르들과는 다른가를 잘 말해준다.

여타의 타임리프 장르들이 시간을 오가는 것에 특별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던 반면, <눈이 부시게>는 그만큼 급노화하게 된다는 ‘대가’를 설정했다. 아빠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고 또 되돌렸던 20대의 혜자는 그래서 그 대가로서 70대의 할머니가 됐다. 한 순간에 청춘의 시간들을 모두 날려버린 참혹한 상황. 혜자는 그 가혹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죽음까지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럭저럭 그 삶을 받아들이며 혜자가 깨닫게 된 건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아빠를 살리겠다는 그 생각 하나로 시계를 돌리고 또 돌렸던 그 선택이 너무나 철부지 같은 선택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세상의 덧셈 뺄셈은 내 생각과 달랐다. 아빠의 죽음과 내 젊음, 꿈, 사랑이 등가라고 생각했던 나는 슈퍼에서 100원짜리 동전 하나로 비싼 과자 선물세트를 사겠다고 떼쓰는 철부지 아이였던 거다. 나는 안다. 내가 시계를 돌려 다시 젊어진다면 그래서 뺄셈으로 세상의 무언가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나는 그걸 견딜 수 없다는 걸.’

혜자가 생각하듯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그만한 희생이 따르게 된다는 것. 유한한 삶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수한 선택들을 하며 살게 되지만, 거기에는 또한 모두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하나의 덧셈이 있다면 또 하나의 뺄셈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준하(남주혁)는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폭력적인 남편을 떠나 도망친 엄마가 그렇고, 자신을 돌봐주신 할머니를 끝까지 찾아와 돈을 뜯어가곤 했던 ‘없는 편이 나은 아빠’가 그렇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주어진 비참한 삶이다. 결국 마지막 끈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삶의 의미 따위를 잃어버린다. 기자가 되려는 꿈같은 걸 지워버리고 효도원에서 적당히 사기 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준하의 삶은 극단화되어 있는 청춘의 단상이지만, 어쩌면 현재 우리네 사회 속에서 숨막혀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닮았다. 무언가 열심히 살려하지만 태생적으로 모든 게 결정되어버리는 그 거대한 장벽 앞에서 꿈을 선택할 수 없는 청춘들. 그래서 혜자의 오빠 김영수(손호준)처럼 현실을 들여다보기보다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삶.

그 앞에서 혜자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얘기하며, 갑자기 늙어버려 직업을 가질 필요도 그다지 없는 자신의 삶과 현실에 허덕이는 청춘들의 삶을 바꿀 의사가 있냐고 묻는다. 청춘이 갖는 더 많은 선택 가능성을 가진 그 시간의 가치와 의미를 되묻는 것.

준하는 문득 20대의 혜자(한지민)가 했던 오로라 이야기를 떠올린다. “내 생각엔 오로라는 에러야. 에러 에러라구 작동오류. 내가 옛날에 어디선가 읽어봤는데, 오로라는 원래 지구 밖에 있는 자기장인데 어쩌다 보니 북극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거야. 그 말인즉슨, 오로라는 조물주가 의도한대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에러다 이거지.”

혜자의 그 말에 준하는 오로라가 “나 같은 거네”라고 답한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의 청춘들이 갖는 생각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을 게다. 마치 이 사회의 에러처럼 되어버린 처지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혜자는 그 에러의 아름다움을 얘기한다. “근데 너무 아름다운거야. 그 에러가. 에러인데도, 에러도 아름다울 수 있어. 눈물 나게. 나는 오로라를 막 만나는 순간에 딱 울 것 같아. 아 오로라다. 너무 사랑스러울 것 같아.” 잘못된 선택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청춘의 지점. 그래서 심지어 갑자기 할머니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거기서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건 굉장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김혜자(김혜자, 한지민)는 말해주고 있다.(사진:JTBC)

‘왕이 된 남자’의 성공비결, 파격을 끌어안은 연출과 연기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가 종영했다. 결론은 해피엔딩. 왕이 된 광대 하선(여진구)을 위협하던 진평군(이무생)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규(김상경)의 칼에 맞고 대비(장영남)에게 버려져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신치수(권해효)는 하선의 칼에 죽었으며, 대비 역시 하선에 의해 폐모된 후 사약을 받았다. 하선은 기성군(윤박)에게 선위하고 궁을 떠났고, 대비의 원수를 갚으려는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그를 지킨 장무영(윤종석)의 희생으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중전 소운(이세영)과 꿈같은 재회를 한 하선은 함께 손을 잡고 갈대밭을 걸어 나갔다. 

하선이 모든 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본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엔딩이었지만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왕이 된 남자>라는 사극이 가진 파격이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파격은 이 드라마가 가진 장점이자 취약점이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건 이 취약점을 드라마의 연출과 연기가 장점으로 바꿔놓았다는 것. 

<왕이 된 남자>가 파격인 건, 원작인 영화 <광해>와 너무나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작 영화 <광해>는 제목부터 실존 임금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에 있어 지켜야할 역사적 사실의 선 같은 게 존재했다. 그래서 다소 안전한 선택 안에서 영화적 재미를 만들었던 것. 하지만 드라마 <왕이 된 남자>는 달랐다. 실존 임금의 이름을 떼어내고 역사와 거리를 두면서 드라마는 원작과는 다른 파격의 길을 걸었다. 

그 첫 번째 파격은 실제 왕을 죽이는 신하의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광대를 진짜 왕으로 옹립시키고, 자신이 꿈꾸던 정치를 펴려는 이규의 욕망은 어찌 보면 ‘왕위 찬탈’과 ‘국정 농단’의 하나로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주인공인 하선이나 이규의 이런 파격적인 선택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연출과 연기가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파격은 여진구의 폭군과 선한 광대를 넘나드는 연기와 김상경의 잔혹한 선택 뒤에 존재하는 백성을 위한 마음을 이해시키는 연기를 통해, 또 김희원 PD 특유의 유려한 연출을 통해 시청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 파격은 하선이 광대라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치수나 대비 앞에서 당당히 대적해가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선은 조금씩 광대놀음에서 진짜 왕이 되어가는 면모를 보여줬고, 그래서 중전 소운의 마음도 또 이규의 마음도 얻었다. 이런 파격적인 변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 것 역시 연기와 연출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파격은 엔딩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모든 일들이 정리되고 선위한 후 궁을 떠나는 하선의 이야기가 그렇다. 그것 역시 지금껏 그 어떤 사극에서도 보기 힘든 파격이었지만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여졌다. 물론 너무 많은 파격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는 마지막회의 안간힘은 다소 급하게 돌아간 느낌을 줬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마무리를 해냈다는 건 나름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파격은 자칫 잘못하면 사극이 가진 유려한 틀을 깨버리는 취약점이 될 위험성이 있었다. 파격적 사건들이 마구 전개되다 보면 마치 막장 같은 뉘앙스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 된 남자>의 파격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을 실제처럼 몰입감 높게 연기해준 연기자들이 있었고, 이를 튀지 않고 우아하게 그려낸 연출이 있었다. 따라서 파격은 취약점이 아니라 극성을 높여주는 강점으로 바뀌었다. 

이헌(여진구)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하선에게 “제대로 놀지 못하겠느냐?”하고 일갈하던 장면을 떠올려보면, 이 드라마는 확실히 한 판 제대로 논 듯한 인상을 준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 같았고, 그래서 진짜였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 정도로 잘 논 한 판. 이건 어쩌면 이제 사극 같은 ‘역사’를 갖고 ‘노는’ 드라마들이 취해야할 선택이 아닐까 싶다. 파격이라도 어떻게 잘 노느냐에 따라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끌 수 있으니.(사진:tvN)

‘트랩’의 묵직한 질문, 당신은 사냥감의 삶을 살아가는가

“너넨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아니? 남조선은 하나의 커다란 사냥터고, 너는 그냥 사육되는 사냥감에 불과하다.” OCN 드라마 <트랩>에서 한 조선족 출신 청부살인자는 자신을 붙잡아둔 형사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외부인’인 그의 시선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보이더라는 것. 그리고 이건 아마도 이 드라마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려는 한국이라는 지옥도의 풍경일 게다. 


<트랩>은 그 제목처럼 덫에 대한 이야기고 사냥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에는 사냥꾼이 있고 사냥감이 있으며 미끼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이며 미끼는 또 누구인가. 처음 드라마는 그 사냥감이 바로 국민앵커로까지 불리는 유명 언론인이자 이제는 정치를 하려는 강우현(이서진)인 것처럼 보여준다. 어느 날 산장에 가족이 함께 갔다가 알 수 없는 사냥꾼들에게 ‘토끼몰이’를 당했다는 것. 아이는 사체로 발견되고 아내는 실종되었으며 강우현 또한 온 몸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구조된다. 

하지만 이건 일종의 트릭이었다. 그 사건은 강우현의 진술 내용을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는 강우현이라는 인물의 말대로 그가 피해자라는 걸 믿게 만들어놓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그것이 모두 그의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을 소름끼치는 반전으로 드러내준다. 강우현은 사이코패스였고, 대한민국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아내 신연수(서영희)마저 이용하다 결국 죽였으며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아이까지 죽이며 자작극을 벌였던 것.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권력자들이 대한민국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커다란 사냥터로 만들고 보통 사람들을 사육시키며 필요에 따라 사냥감이 되는 걸 그저 버티며 살아가게 만드는 그런 인물들이다. 강우현은 피해자가 아니라 바로 그들 같은 사냥꾼의 삶을 선택한 사이코패스다. 놀라운 건 이 인물은 저 친일파의 자손을 위시해 공고한 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조폭과 정치인과 경제인 의사 그리고 법조인들보다 더 영악하다는 점이다. 

권력의 카르텔의 얼굴마담 격으로 세워졌던 기업인 홍원태(오륭)를 왜 강우현으로 교체해야만 하느냐는 친일파 3세(이시훈)의 질문에 카르텔의 머리격인 김의원(변희봉)은 그가 이미 그 자격을 충분히 증명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한 개인이 단 한 건의 사건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덫으로 몰아넣었죠. 정의, 신뢰, 동정, 연민이란 우리가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아주 교묘한 미끼로 말이죠. 그만한 사냥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강우현은 정치 행보를 본격화하며 나선 TV토론에서 정의를 묻는 질문에 자신이 사지로 몰아넣은 프로파일러 윤서영의 절규어린 이야기를 그대로 이용하며 그 뱀의 혀로 대중들을 설득시킨다. “그렇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힘들어야 되는 거냐구요 왜?” 항상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힘들게 살아가야 되는 현실을 개탄했던 윤서영의 그런 질문을 교묘하게 강우현이 대중들을 격동시키는 소재로 이용하는 것. 그는 말한다.

“제 정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작전정당이냐구요? 작전 필요하면 하겠습니다. 언론인 출신이 사실과 진실을 호도한다구요? 네 저 언론인 출신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인입니다. 전 앞으로도 제 일에 모든 감정을 쏟아서 할 예정입니다. 국민들의 분노, 좌절, 슬픔, 고통 제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싸우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것. 이게 제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리고 그의 TV 토론을 보던 친일파 재벌은 “새 시대 백년반도의 왕이 나왔구나!”하고 강우현의 언변을 경탄한다. 

<트랩>의 엔딩은 속 시원한 사이다가 아니다. 물론 고동국(성동일) 형사가 저 권력의 사냥꾼들과 강우현을 대결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권력자들을 제거하며 강우현은 ‘트랩’이라는 탄저균에 중독시켜 해독제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복수를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이 드라마를 통해 봐온 커다란 사냥터가 된 우리네 사회의 진면목이 주는 씁쓸함과 끔찍함을 지워내지는 못해주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중대한 질문 하나를 화두처럼 갖게 됐다. 과연 나는 누군가의 사냥감이 아닌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도처에 숨어 있는 권력의 사냥꾼들이 헌팅그라운드를 조성하고 그 안에서 미끼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늘 힘들지만 문제의 근원을 찾기 보다는 그냥 원래 사는 게 그렇다며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누군가 던져주는 거짓 희망이라는 미끼에 휘둘리는 건 아닌가. 

제 혀를 잘라 뱀의 혀로 만들어 놓고 끔찍하게 웃는 강우현이라는 인물의 거짓말은 그래서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평범한 서민들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많아서 그 답을 일일이 찾을 시간이 없다고. 먹고 자고 그저 버티면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믿으면서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다고.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버티고 견디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어쩌면 저들은 거짓희망을 얘기하면서 평범한 서민들은 늘 그렇게 사냥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트랩>의 강우현의 실체가 더더욱 소름끼치게 다가온 건 그래서다.(사진:O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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