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인간은 어째서 인간인가

 

<히말라야>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없는 영화다. 물론 중간에 극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극화된 부분이 있지만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엄홍길 대장의 휴먼원정대를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한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영화가 그려내는 극적인 이야기의 감동을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는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에 더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해주는 면이 있다.

 


사진출처:영화<히말라야>

산에 왜 오르는가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답한 에베레스트 첫 등반자인 영국의 조지 리 맬러리의 유명한 말은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농담처럼 회자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산에 왜 오르는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왜 함께 내려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엄홍길 대장이 실제로 했던 휴먼원정대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거기서 내려오지 못하고 누워있는 우리네 동료들과 함께 무사히 내려오는 것이 목적이다.

 

이 영화 속에서 정복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엄홍길(황정민) 대장이 극도로 싫어하는 표현이다. 마치 명언을 하는 자신을 과시하듯 농담처럼 표현하지만 그에게 등산은 실제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내준다면 머물다 내려오는 것뿐이다. 아마도 엄홍길 대장이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미터급 16좌 완등이라는 기록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그럼 내려와야지 거기서 살 순 없는 일 아닙니꺼.” 엄홍길 대장과 함께 4번이나 정상에 올랐던 동료 박무택(정우)은 농담처럼 그런 말을 남겼지만 결국 8000미터 고지에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버린다. 그를 구하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올랐던 동료 박정복(김인권) 역시 돌아오지 못한다. 아마도 엄홍길 대장의 마음속에는 그 8000미터 고지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을 것이다. 그 곳에 누워 있을 동료들이 못내 가슴에 남았을 것이다.

 

정상의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건 휴먼원정대의 이야기가 건드리고 있는 건 동료애다. 16좌 등정 같은 대기록이 도전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다룬다면, 휴먼원정대는 함께 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다루고 있다. 그것이 어떤 생존이거나 혹은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온전히 인간이 왜 인간인가에 대한 자기 증명 같은 일이 된다.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이것이 특히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팍팍함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점점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잠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고 어찌 보면 동료들이라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는 것. 엄홍길 대장과 대원들이 8000미터 고지에 누워 있는 동료를 끝내 찾아내고 온몸에 부상을 입어가면서까지 함께 산에서 내려오려고 하는 그 몸부림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한 라디오 MC는 엄홍길 대장에게 산에 대해 묻는다. 엄홍길 대장은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대신 단 한 가지 보이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극한의 상황에 서 있으면 현실에서는 여러 가면을 쓰고 있어 몰랐던 진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고. 엄홍길 대장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기보다는 함께 하는 이들을 끝까지 챙길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다 할 수 있을까. 엄홍길 대장이 히말라야의 정상에서 했던 질문은 어쩌면 요즘처럼 혹독한 현실 앞에 서 있는 관객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내부자들>, 더러워 보기 싫다면서도 기꺼이 보는 까닭

 

영화 <내부자들>6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서 600만 관객 돌파란 기록은 놀라운 일이다. 이 흐름이라면 <아저씨(617)>, <킹스맨(612)>의 기록도 갈아치울 기세다.

 


사진출처: 영화 <내부자들>

<내부자들>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된 것은 이 영화의 폭력성과 선정성이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저 조폭들이 치고 박는 수준의 폭력성이 아니라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장면도 버젓이 나오고, 그저 베드신이 아니라 난잡하다 못해 더럽게까지 느껴지는 섹스 파티가 등장한다. 그러니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를 달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그래서 두 가지 반응을 보낸다. 너무 더러워 생각하기도 싫다는 반응이 그 첫 번째다. 폭력성이야 차치하고라도 나이 지긋한 재벌 총수와 언론인, 정치인, 법조인이 홀딱 벗고 나와 나체의 여성들의 시중을 받으며 파티를 벌이는 장면은 정말 볼썽사납다. 성기로 맥주잔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을 때려 폭탄주를 제조하는 장면은 여성 관객들이 본다면 대단한 혐오감을 줄만한 장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600만 관객을 돌파한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이 영화의 두 번째 반응, 즉 폭로의 통쾌함에서 나온다. 이 영화는 거의 끝나기 직전까지도 너무도 단단해 결코 깨지지 않을 재계와 언론, 정계, 법조계의 카르텔을 보여준다. 그 카르텔은 물리적인 힘이면 힘, 정치력이면 정치력, 여론을 쥐고 흔드는 언론 권력, 그리고 불법조차 덮어버리는 사법의 부당한 권력까지 보는 이들이 절망적일 정도로 공고하다.

 

그래서 관객은 그 카르텔이 무너지는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보게 마련이지만 사실 그 결과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기 힘든 그 판타지적 결말이 아니라 그들의 더러움 자체를 폭로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내부자들>인 것은 그 권력의 내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도대체 그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신문지상이나 뉴스를 통해 나오는 재벌총수나 언론인, 정치인, 검사의 모습은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그 모습이 진짜인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자들>은 비리에 연루된 그들의 진면목에 천착한다. 그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폭로한다.

 

그래서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권력자들은 마치 괴물처럼 그려진다.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하고 심지어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벌이는 파티는 마치 악마들의 파티처럼 보인다. 물론 그 내부는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것이지만 <내부자들>은 영화의 권리로서 그 내부를 들여다본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그 봉인된 내부가 외부에 폭로되는 그 자체에 어떤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혹 청소년 관람불가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애초에 과한 폭력과 선정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의미 자체도 퇴색되는 영화다. 그 폭력과 선정성이 내부의 더러움으로 그려지고 그 더러움이 외부에 폭로되는 순간. 그 때가 <내부자들>이 폭발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육룡'의 질문, 백성이냐 가족이냐

 

백성인가 아니면 가족인가. SBS <육룡이 나르샤>가 이성계(천호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해 던진 질문이다. 회군을 결정하자 최영(전국환) 장군은 이성계의 식솔들을 인질로 잡고 만일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올 시 만월대 위에 그들의 목을 내걸 것이라고 위협한다. 5만의 군사들을 구하자니 가족의 생명이 위태롭고, 그렇다고 가족을 구하자니 5만의 군사들이 눈에 밟힌다. 이성계의 선택은 결국 군사들, 아니 영문도 모르고 죽을 전쟁에 차출된 백성들이었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백성이냐 가족이냐는 질문은 고스란히 지금 현재로 되돌려진다.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들은 과연 국민들을 위한 선택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가족적인 당파와 세력을 위한 선택만을 하고 있을까. 물론 정당정치가 그러한 당의 방향성을 어느 정도는 만들어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정치인들은 당 이전에 국민이 우선이 아닌가. 국민의 어려움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한다면 과연 지금처럼 그들끼리의 정쟁에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일까.

 

<육룡이 나르샤>는 지난 회에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요동정벌이라는 무모한 결정에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며,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위정자에게 과연 그 자격이 있는가를 질문한다.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과연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홍인방(전노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처했을 때 그는 정도전(김명민)에게 인간의 욕망은 결국 권력욕으로 향하게 되어 있어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을 피력한다. 그는 누구나 가슴 속에 벌레 한 마리씩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인물. 즉 개혁을 부르짖던 인물도 권좌에 오르게 되면 권력욕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에 대한 질문이다. 개혁에 있어서 사람은 바뀌어도 권력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정도전은 홍인방에게 자신이 하려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나라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논리를 무너뜨린다. 즉 고려를 되살리기 위한 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야기는 시스템 자체를 바꾸겠다는 뜻이다. 그는 왕이 바뀌어도 신하들이 서로 견제하여 권력이 쏠리는 것을 막는 시스템을 고안해낸다.

 

<육룡이 나르샤>를 보다 보면 마치 <100분토론>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사극이 선과 악의 대결로서 단순히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입장과 생각의 차이에 의해 대결하는 인물들을 그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적이라고 해도 길태미(박혁권)나 홍인방 그리고 이인겸(최종원)이 저마다의 논리를 갖고 있는 건 그래서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대결할 때 그 모습은 마치 토론을 벌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가능한 건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독특한 대본 작업 방식 때문이다. 이들은 대본 작업에서 각자 캐릭터들이 가진 입장을 정해놓고 실제 토론을 벌인다고 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한석규)과 정기준(윤제문)이 한글 유포를 갖고 나누는 대결이 토론 방식으로 전개됐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육룡이 나르샤>는 그래서 매회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말 선초에 벌어진 위화도 회군이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이지만 그 안에 현재적 질문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물론 그 질문에 답은 어느 정도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답을 실행하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백성인가 가족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역사든 사극이든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렇게 실행하기 어려운 갈등 상황에서 어떤 결정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의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들이 의미 있는 건 그것이 현재에도 같은 울림의 질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박찬호에 이은 추신수, <12>만 나오면 펄펄 나는 메이저리거

 

KBS 주말예능 <12>은 메이저리거들과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과거 박찬호가 <12>에 출연했을 때 주었던 의외의 예능감과 진지함에 시청자들이 느꼈던 그 감흥을 이제 차세대 메이저리거인 추신수가 이어받았다. 그는 <12> 특유의 놀라운 야생 적응력을 보여주며 웃음을 주는가 하면 삶의 경험이 묻어나는 진솔한 이야기로 어떤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했다.

 


'1박2일(사진출처:KBS)'

마침 맏형이었던 김주혁이 하차한 시점이라 새 멤버를 뽑는다는 설정으로 출연한 추신수는 전현무 아니냐는 얘기를 세 번이나 듣고는 발끈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다. 마치 새 선수를 입단시키는 듯한 상황을 설정하고, 일종의 입단테스트를 기성 출연자들에게 시켰지만 차태현이 말한 대로 그 상황 자체가 웃길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꼭 출연시키고픈 인물이 추신수라는 스포츠스타가 아닌가.

 

압박면접에서 오히려 압박을 당하는 건 기성 출연자들이었다. 김준호는 짐짓 자신이 형이라며 반말을 하겠다고 하고는 뒤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존칭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출연자들은 압박면접이 아닌 추신수의 팬임을 인증하는 모습을 통해 역전된 상황의 웃음을 뽑아냈다. 특히 올 초에 겪었던 슬럼프에 대한 질문에 그는 삶의 경험이 묻어나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사람은 없다. 시험지 답이 있는 게 아니다. 그때 당시는 뭘 해도 안됐다. 제가 느낀 거는 안 될 때 매듭을 굳이 풀려고 하지 말고 그냥 묶인 대로 놔두자. 그걸 인정하면 어느 순간에 (매듭이) 풀리더라.” 슬럼프에 대한 집착은 더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는 것. 오히려 그 슬럼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메이저리거들의 무엇이 이토록 <12>과 잘 어우러지게 하는 걸까. 메이저리거로서 살아온 이들이 갖기 마련인 승부욕은 <12>의 치기어린 대결구도와 만나게 될 때 빛을 발하곤 한다. 과거 박찬호가 출연했을 때 강호동과 묘한 긴장감을 이루던 그 장면들을 떠올려 보라. 두 사람은 이 대겨루도를 통해 결국 한 겨울 계곡 얼음을 깨고 입수하는 모습을 연출해보여주기도 했다.

 

경주에 도착해 이동차량을 놓고 벌이는 복불복 게임에서 추신수 역시 스포츠선수다운 승부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준호의 머리 위에 캔을 올려놓고 공으로 맞추는 미션에서 여러 차례 실패한 그는 얼굴에 잔뜩 낙서를 하는 대가로 결국은 미션에 성공하는 승부근성을 보여줬다.

 

메이저리거라는 위치는 우리에게 심정적인 지지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과거 박찬호은 IMF 시절의 어려운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희망이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선전하는 모습은 그래서 마치 우리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을 위로해주는 면이 있었다. 추신수 역시 올 초에 있었던 슬럼프를 극복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지점은 왜 메이저리거들이 <12>에 나왔을 때 더 환영받는가를 잘 말해준다. <12>이라는 서민적 예능 속에서 메이저리거들이 보여주는 서민적인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복불복게임을 통해 추신수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승부욕을 보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입단테스트? 고정해도 될 법한 <12> 특유의 훈훈함이 추신수에게서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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