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혹한이 되레 즐거운 ‘12의 저력

 

본래부터 혹한기와 혹서기에 강했던 <12>이다. 혹한기에는 더 추운 칼바람 앞에서 물 한 바가지만 갖고도 예능이 되었고, 혹서기에는 에어컨 없는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웃음을 주기도 했었다. 유례없는 폭염. 연일 폭염주의보가 발령되고 있는 지금, <12>의 선택은 그래서 오히려 열대야를 즐기는 것이었다.

 

'1박2일(사진출처:KBS)'

새벽같이 모이던 <12>이 대낮에 그것도 KBS 옥상에서 모인 건 폭염의 뜨거움을 그대로 전하기 위함이다. 잠깐의 오프닝만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차태현의 얼굴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무더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옥상에 쳐진 텐트에 들어가게 된다면 말 그대로 지옥일 것이다. 그러니 때 아닌 낮잠자리 복불복으로 시작하는 <12> 출연자들이 목숨 걸고(?) 복불복에 임하는 자세가 만들어진 것.

 

대신 복불복에서 이기면 시원한 냉방이 되어있는 스튜디오에서 꿀 같은 낮잠을 잘 수 있다. 스케줄에 바빠 늘 잠이 부족한 연예인들에게 이만한 호사가 있을 수 있을까. 일하는 와중에서 낮잠이라니. 그건 아마도 직장인들의 로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폭염에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게 시에스타다.

 

낮잠을 걸고 벌어진 복불복은 아이돌과의 대결. 팥빙수와 수박 그리고 비빔국수 빨리 먹기 대결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기면 20초 간 뮤직비디오를 틀어주겠다는 공약은 아이돌들이 망가지도록 열심히 복불복 게임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피니트와 비스트 그리고 에이핑크와의 유쾌하고 시원한 대결은 보는 이들에게 잠시 동안 더위를 잊게 만드는 웃음 폭탄을 선사했다.

 

물론 <12>이 작정하고 출연자들을 낮잠 재우려 한 것은 잠 못 드는 밤, 열대야 속으로 뛰어들기 위함이다. 끈적끈적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열대야. 그래서 잠을 억지로 청하다 보면 뒤척이다 피곤한 아침을 맞이하기 일쑤인 요즘, 차라리 그 밤을 즐기러 나선다는 것. 혹한기에 얼음 계곡 속으로 뛰어들어 오히려 그 추위를 이겨보려는 것처럼, 열대야 속 열정 넘치는 도시의 활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다는 것이다.

 

흔히들 뜨거운 여름, ‘피서를 가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떠난 피서가 너무 많은 인파와 뜨거운 햇살 속에서 오히려 더 뜨거운 짜증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이들에게 <12>이 보여준 폭염에 대처하는 역발상은 잠시나마 웃음과 위안을 준다.

 

멀리 가야만 피서인가. 많은 도시인들이 피서를 떠나 오히려 텅 빈 서울의 야경이 더 호젓한 여름밤을 보내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밤에 잠 못 든다면 낮에 자도 된다. 그 잠 못 드는 밤 차라리 서울의 야경을 즐길 수도 있다. 여행을 소재로 해온 <12>이 마치 늘 어디로 떠나기만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을 과감히 내려놓는 순간 의외의 재미들이 생겨났다.

 

개콘-아름다운 구속’, 막장과 범죄물 클리셰 버무리기

 

이 코너를 만든 개그맨들은 천재가 아닐까. <개그콘서트> ‘아름다운 구속은 평범한 경찰서의 형사와 범인의 취조현장을 다루면서 막장드라마의 패턴화된 멜로공식을 절묘하게 이어 붙인다. 형사와 범인은 마치 연인관계처럼 설정되고, 그들의 취조는 사랑처럼 그려진다. 그래서 서태훈 형사가 범인 김하늘(김대성)을 잊지 못하고 취조하고 싶어 하지만 이 취조는 안타깝게도(?) 늘 엇갈린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저 자수하러 왔습니다. 얼른 취조해주세요.” 저 스스로 취조 받으러 온 김하늘에게 서형사가 너 만나고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하고 외치는 장면이나, 김회경 형사가 김하늘에게 현장에서 나온 이 벽돌이 뭐냐고 묻자 마치 김하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안다는 듯이 중고 샀는데 사기 당했다고 말해주는 서형사의 진술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에서 자주 봐왔던 클리셰들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클리셰들의 패러디가 시작된다. 서태훈 형사가 취조해야 하는 류근지가 마치 멜로드라마를 보면 단골처럼 등장하는 재벌집 딸의 대사를 날리는 것. “서형사님 고작 이런 잡범 때문에 날 이렇게 무시하는 거에요? 정말 너무하시네요!” 그러자 마침 등장한 서장인 송준근이 시어머니 같은 대사를 김하늘과 서형사에게 던진다. “뭐야. 또 너니? 서형사. 너 류근지 얘 잡으면 진급 탄탄대로야 알아 몰라?”

 

펑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재벌집 딸과 결혼시키려는 시어머니의 반대. 막장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를 그대로 패러디로 가져온 아름다운 구속은 그 이야기가 경찰서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맥락을 담아낸다. 빈부 격차의 이야기는 멜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즉 범죄자들에게도 이른바 범털과 개털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어디서 천한 잡범 주제에 감히 우리 서형사한테 취조를 받으려 들어? 넌 내가 안 된다고 했지?”

 

멜로드라마의 클리셰와 경찰서 취조현장의 클리셰가 패러디로 겹쳐지면서 기묘한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패러디의 웃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유사한 구조가 던져주는 풍자적인 웃음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구속이 그저 막장드라마를 패러디하는 대사의 재미에만 머물지 않고 어떤 통렬한 비판의식의 속 시원함을 동시에 던져주는 이유다.

 

멜로드라마에서 그토록 많이 나오는 빈부 격차의 집안이야기는 아름다운 구속에서는 조직의 이야기로 바뀐다. “이게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답이야 너희 조직에선 그렇게 가르치니?” 송준근 서장이 그렇게 말하자, 김하늘은 저를 욕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저희 조직은 욕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대꾸한다. 그리고 막장드라마의 공식 중 하나인 얼굴에 물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김하늘이 마치 멜로드라마에서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서장님하고 부르자 송준근이 누가 니 서장이야?” 하고 발끈 하는 것.

 

막장드라마에 역시 단골로 나오는 긴박한 음악이 흐르면서 뒷목 잡고 쓰러지는 서장이 물러난 후, 역시 식상할 정도로 많이 봐온 사랑을 포기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엔딩에 들어간다. 일부러 김하늘을 놓아준 김회경이 빨리 가서 잡아요라며 서형사에게 거수경례를 올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구속이 취조현장을 통해 패러디하는 건 막장드라마와 늘상 비슷한 패턴만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의 클리셰들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법 정의에 있어서도 빈부격차로 나뉘는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도 들어가 있다. 게다가 이 개그에는 남남커플의 게이코드 또한 들어있다. 최근의 패러디들 중에서 이토록 다양한 의미망을 가진 개그 코너가 있었을까 싶다. 이 코너를 볼 때마다 코너를 만든 이들이 천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마리텔> 새 인물들의 활약, 그래도 느껴지는 백종원 빈 자리

 

백종원이 잠정적으로 하차한 후 <마이 리틀 텔레비전>1위 자리를 거머쥔 인물은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이었다. 그는 추억이 방울방울 돋는 어린이 방송에서 익숙했던 종이접기로 2030의 취향을 저격했다. 과거 김영만과 함께 방송을 하기도 했던 신세경의 출연과 뚝딱이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대를 살았던 세대들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같은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사진출처:MBC)'

하지만 신세경이 전반전에서 빠져나가고 김영만과 뚝딱이의 만담으로 이어진 후반전 종이접기 방송은 결국 이은결의 마술방송에 1위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영만과의 추억이 즐겁기는 하지만 콘텐츠적으로만 보면 종이접기라는 아이템은 지속적인 재미를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눈앞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마술의 세계와 그것을 웃음 코드로 전화시키는 이은결 특유의 재치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이미 백종원이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때에도 이은결의 마술방송은 거의 유일한 대항마가 될 거라고 판단될 정도로 흥미로웠다. 백종원의 기미작가에 대적하는 초딩작가가 이은결의 마술방송을 통해 등장했고, 이은결 특유의 끼와 연기력은 각종 패러디를 선보이며 이 방송만의 재미요소들을 덧붙였다. 어찌 보면 백종원의 하차 후 이은결의 1위 탈환은 어느 정도 예상되는 그림이었다.

 

백종원의 빈 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인물들도 속속 등장했다. 에이핑크 김남주는 의외로 털털한 모습을 보여주며 노래와 춤으로 시선을 잡아끌더니 후반전에 들어서 화술수업 게스트로 출연한 김현아 교수와 함께 그 어떤 개그프로그램보다 더 웃긴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발성 연습을 위해 옆으로 덤블링을 하며 시낭송을 하고, 입으로 독침을 쏘고 피하는 연기를 하면서 김남주와 모르모트 PD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연기와 발성을 위해 몸을 풀어주는 것은 분명 화술수업에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니 교실에서 만일 그 수업을 한다면 자못 진지한 장면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웃음의 무대 위에서 권위 따위는 내려놓은 듯한 깨는동작을 보여주는 당사자가 교수라는 사실은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저 박사 받은 교수예요라고 진지하게 얘기할 때마다 웃음은 더 터질 수밖에 없었다.

 

<복면가왕>의 가면을 만든 인물로 유명한 황재근은 앞치마를 리폼한 옷을 만들어 기미작가에게 입히는 것으로 의외의 웃음을 만들었다. 너무 꽉 끼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는 기미작가가 변명하듯 백종원의 음식을 많이 먹어서 살이 쪘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 방송의 백미가 되었다. 여성스런 말투로 내뱉는 의외의 독설은 황재근의 반전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백종원의 독주체제가 깨지고 새로운 인물들이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와 재미들이 훨씬 많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백종원의 공백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 현실은 시청률의 추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하차한 후 <마이 리틀 텔레비전> 시청률은 7.2%로 떨어졌고 그 시청률은 다시 6.0%까지 떨어졌다. 다양한 재미들이 많아졌지만 백종원처럼 묵직한 한 방이 부재하다는 얘기다.

 

일단 보면 빵빵 터질 수밖에 없는 웃음의 강도와 밀도를 보여주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대감을 갖고 채널을 고정시키게 해줄 수 있는 백종원 같은 인물을 찾아내는 일은 인터넷 방송이 아닌 지상파 프로그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이 프로그램의 숙제가 되고 있다



게스트로 보이는 <삼시세끼>의 초지일관

 

tvN <삼시세끼>의 가장 큰 특징은 정착형 예능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곳을 계속 찾아가는 여행과는 달리, 한 곳에 정착해 그 곳의 변화과정에 집중한다. 늘 새로움을 줘야 하는 일반적인 예능으로서는 그리 유리한 설정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무료할 정도로 단조로워 보이는 풍경이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싶은도시인들의 로망을 건드렸다. 그저 하루 세끼 챙겨먹는 일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인 시간들.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도시인들에게 그런 무료함은 어느새 판타지가 되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그래도 예능 프로그램인지라 <삼시세끼>가 아무 것도 안할 수는 없다. 그래서 카메라는 옥순봉 세끼집 주변에 자라는 꽃을 벌의 시점으로 찍어 보여주기도 하고, 작물들이 자라나는 장면들을 생명의 신비처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경이로운 장면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반복적인 예능 프로그램의 패턴을 벗어나게 해주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삼시세끼>는 게스트라는 변수를 활용한다. 새로운 손님을 초대함으로써 그들과의 새로운 이야기를 꾸려가는 것.

 

최근 <삼시세끼>의 게스트 활용법을 보면 쿡방 전성시대를 총망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집밥 백선생>에서 요리를 배워온 손호준,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15분 요리 대결을 벌이는 홍석천이 찾아온 데 이어 드라마 <파스타>로 버럭 셰프 캐릭터를 지금까지도 갖고 있는 이선균이 다음 게스트라고 한다.

 

그런데 쿡방의 주역들을 게스트로 출연시키면서도 거기에 <삼시세끼>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명민함이 돋보인다. <집밥 백선생>의 백종원이 아니라 손호준을 게스트로 출연시키고, <냉장고를 부탁해>의 전문 셰프들이 아니라 연예인 요리사인 홍석천을, 그리고 <파스타>의 실제 모델이었던 샘킴이 아니라 그 드라마 주인공인 이선균을 출연시킨다는 건 특별한 선택이다. <삼시세끼>는 전문 셰프들을 출연시키지 않을까.

 

아마도 그것은 <삼시세끼>가 요리사들의 화려한 요리를 선보이는 쿡방과는 다른 결을 가진 예능이라는 걸 지키기 위함이 아닐까. <삼시세끼>는 요리사들의 예능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요리를 해먹는 것이 포인트다. 그러니 백종원보다는 요리 무식자에 가까운 손호준이 낫고, 요리만이 아니라 특유의 흥을 가진 홍석천이 훨씬 낫다. 물론 이선균은 요리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의 버럭 캐릭터가 더욱 기대되는 대목이다.

 

손호준은 <집밥 백선생>에서 배워온 강된장으로 이서진과 옥택연, 그리고 김광규의 찬사를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삼시세끼> 내용 중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손호준이 김광규를 애잔하게 바라보는 그 관계가 훨씬 더 주목되었다. 홍석천이 출연한 방송분도 마찬가지다. 그가 선보인 태국식 요리들만큼 흥미를 준 것은 딱딱하게 타버린 빵에 실망감을 드러내는 제빵왕 서지니의 변명이었다.

 

쿡방이 대세지만 <삼시세끼>는 그렇다고 전문 요리사들을 데려와 화려한 요리 쇼를 선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한 끼에 더욱 골몰하는 모습이다. 손호준이나 홍석천, 이선균이 모두 요리와는 관련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출연이 화려한 쿡방을 예고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래서 평범하고 보통인 한 끼를 고수한다는 점은 <삼시세끼>가 가진 일관된 프로그램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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