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수' 논란, 문제는 스토리 부재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의 무대에 오른 적우에 대한 논란은 사실 그 이유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 논란은 무명가수가 '나가수'라는 무대에 올랐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부터 '나는 가수다'의 문호는 '실력 있는 가수'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들에게 언제나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정엽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실력 있는 가수'가 아니어서 일까. 이것도 이유로서 합당하지는 않다. 적우는 나름 자신의 색깔을 갖고 있는 가수다. 다만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실력은 다 발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첫 무대였던 '열애'가 괜찮게 실력을 발휘했다면, 두 번째 무대였던 '나 홀로 뜰 앞에서'는 총체적인 부실을 드러낸 무대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 가수의 실력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몇 번 더 그녀의 '나가수' 무대를 봐야 그 판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적우에 대한 논란은 강도가 너무나 강하다. 대중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적우가 가창력의 문제를 드러내자 갖가지 의혹을 쏟아냈다. 그 비난의 강도가 얼마나 강한가는 마치 그녀를 적극 추천한 것처럼 언론에 부풀려진 것으로 비판에 직면한 장기호 교수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나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단 두 번의 무대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논란은 지나칠 정도로 커져있다. 이것은 어쩌면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다만 적우라는 가수를 통해 터져버린 어떤 것.

그것은 어쩌면 현재의 '나가수'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처음과 거의 달라지지 않은 똑같은 형식의 반복, 순위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기보다는 생존의 무대를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식상함, 무엇보다 새로운 스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적우라는 가수를 통해 폭발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형식이 굳어져버리면 도드라지는 건 변수로 등장하는 출연자일 수밖에 없다. '나가수'가 어느 순간부터 캐스팅이 만사가 되어버리고 캐스팅 논란이 끊이질 않은 건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가수는 '나가수'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적우는 바로 그 위치에 있었고, 증폭된 불만의 포화를 맞을만한 많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캐스팅 전부터 불거져 나왔던 업소출연이 만들어낸 잘못된 이미지, 무명가수로서 베일에 가려진 과거사, 익숙하지 않은 방송, '나가수'라는 무대가 주는 중압감과 그 무대에 대한 부적응으로 생기는 실수 등등.

작은 빈틈은 관심의 집중이 된(그것도 '나가수'의 변하지 않은 형식에 불만이 있는 대중들의) 출연자를 두고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이미 많은 논란을 통해 경험했듯이, 대중들의 관심이 증폭된 콘텐츠는 그 자체로 스토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면 거꾸로 대중들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 걸 알고 있다. 루머의 탄생이다. '나가수'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대중들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수'에게 필요한 것은(적어도 캐스팅 논란이 계속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의 스토리다. 긴장하면서 방송사에 도착하는 가수들을 보여주고 중간 중간 긴장하는 모습을 인터뷰하고 경연 순서를 뽑고, 경연을 하고 무대를 내려가는 그 단순한 스토리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왜 거꾸로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처음부터 과정을 되짚는 스토리의 파격은 안되는가. 각각의 가수들이 일주일간 노래를 준비하며 겪는 이야기들은 왜 다채로워지지 못할까. 왜 가수와 매니저인 개그맨들 사이의 무대 바깥의 진솔한 대화가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못할까. 왜 공간은 꼭 스튜디오 안이어야만 할까. 청중평가단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왜 청중의 이야기는 없을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무대를 통해 보여주겠다면 왜 그 장르에 걸 맞는 새로운 스토리는 구성하지 못할까. 질러대는 창법이 유리하다면, 왜 발라드 특집(모두가 발라드를 부르는) 같은 건 하지 못하는가. 특정일에 어울리는 이벤트는 왜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라면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장르의 음악과 따뜻한 스토리로 얼마든지 이야기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나가수'가 오래도록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그 스토리를 무한정 끌어올 수 있는 열린 여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가수다'라는 제목처럼, 가수의 존재증명에 관한 스토리라면 그것이 병원에서 벌어지는 경연이든, 산사에서 벌어지는 경연이든, 혹은 각각의 가수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이든, 또는 청중에게 친절하게 노래 장르의 A to Z을 설명해주는 이야기든 뭐든 가능한 것이 아닌가. 물론 경연이 주는 힘은 이 프로그램의 핵심적인 것이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필요는 없다. 이제 '나가수'는 그 좁고 굳어져가는 형식의 틀에서 과감히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필요하고 소비적인 논란의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그 자리에 좀 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이야기들이 채워야 한다.


'SNL코리아', 코미디의 본령을 세우다

'SNL코리아'(사진출처:tvN)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이하 SNL코리아)'는 콩트 코미디를 하는 프로그램이지만, 개그맨보다는 배우들이 출연한다. 첫 회에는 김주혁이 그 다음 회에는 공형진이 출연했다. 3회에는 김인권이 출연할 예정이다. 물론 호스트가 배우로 한정된 프로그램은 아니다. 하지만 'SNL코리아'의 유성모PD에 의하면 당분간은 주로 배우들을 호스트로 세울 작정이라고 한다. 왜 코미디 프로그램에 개그맨이 아니라 배우일까.

여기에는 코미디에 대한 일종의 오해와 편견이 들어있다. 물론 최근 들어 이른바 리얼 예능들이 들어오면서 코미디를 연기로 보는 시선은 많이 사라졌다. 즉 이제는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황에 리얼하게 '반응'하는 것이 예능에서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리얼'이라는 단어가 주는 착시현상일 뿐이다. 본래부터 코미디는 하나의 연기 분야였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캐릭터쇼라고 할 때 그 캐릭터는 다름 아닌 연기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김희갑 같은 원로 코미디언들이 모두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했다는 사실은(또 그것이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코미디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말해준다. 그래서 연기보다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웃음을 주는 개그맨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붙이게 되었고 그 호칭이 마치 모든 예능인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오인되면서 코미디에서 연기의 영역이 점점 설 자리를 잃었던 것도 사실이다. 즉 한 마디로 말해 코미디언은 또 한 명의 배우라는 사실을 점점 잊게 된 것이다.

'SNL코리아'가 콩트 코미디를 지향하면서 굳이 호스트로 개그맨이 아니라 배우를 그 자리에 세우는 이유는 코미디의 본령인 연기가 그만큼 중요한 프로그램이라는 반증이다. 'SNL코리아'의 특징은 모든 게 라이브로 이뤄진다는 데 있고, 그 형식 역시 철저한 코미디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콩트 코미디에 있기 때문에 NG없는 연기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SNL코리아'만의 독특한 웃음의 코드가 생겨난다. 첫 번째 호스트로 참여한 김주혁은 관객을 웃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콩트 대본 속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하려 한 것이다. 바로 이 '연기를 통한 웃음'은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았던 웃음과는 달리, 코미디 장르의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봤던 웃음이다. 김주혁이 'SNL코리아'의 첫 회를 하고나서 만족감을 표시했던 건, 큰 웃음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콩트 상황에서의 연기를 통해 자신의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마음껏 보여줬다는 데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게 바로 '나는 가수다'다. 마치 토크쇼 같은데 나와서 자신의 영역인 노래가 아니라 재치 있는 입담이나 몸 개그로 억지웃음을 주어야 대중들의 시선을 받던 가수들에게 '나는 가수다'는 가수의 본령인 노래만으로 대중들의 주목을 끌 수 있게 해주었다. 배우들에게 억지웃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연기의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는 'SNL코리아'는 그런 면에서 '나는 배우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SNL코리아'는 그래서 그것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 자체로 기존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코미디에 대한 폄하의 시선을 상당부분 없애줄 것으로 보인다. 코미디 역시 그 어떤 정극보다 힘겨운 고도의 연기라는 사실. '나는 배우다'라는 성격을 가진 'SNL코리아'는 그 형식 자체로 그 코미디의 본질을 드러내는 프로그램이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코미디 연기의 진수를 재발견할 수 있다.


‘뿌리’, 세종은 현재와 어떻게 소통했나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문제에나 나올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창제에 관한 일화들이 21세기인 현재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실제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세종과 한글창제가 갖는 의미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 몇 백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한 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첫 도입에서 글자를 몰라 죽게 되는 한 선량한 백성의 이야기에서 화두를 던지고, 그 일을 계기로 달라지는 세 인물을 끄집어낸다. 강채윤(장혁)과 소이(신세경)와 세종(한석규)이다. 강채윤은 그 글자를 몰라 죽은 백성의 아들로서 세종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소이는 그 죽음에 관여된 인물로서 한글 창제에 투신하게 되며, 세종은 그 두 백성(으로 표상되는 채윤과 소이)의 고통을 바라본 인물로서 역시 한글 창제를 하게 된다.

먼 길을 돌아온 강채윤이 세종의 진심을 알게 되고, 옆에서 임금이란 자리에서 겪는 고독과 또 한글 창제에 깃든 세종의 진심을 소이가 읽어내는 그 과정이 모두 소통이다. 즉 채윤과 소이가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라면 이것은 왕과 백성이 갈망하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글은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란 세력이다.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여진 자신들 같은 신하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제 백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또 백성과 왕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역병 같은 글자’의 파급력에 정기준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즉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소통과 불통의 대결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환경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 같은 새로운 소통체계는 기성 소통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일종의 왕이 해야 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 부친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걸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의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에 대한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소통체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그 담론들을 몇 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건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건 이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이다. 물론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를 세종이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소이가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소이는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적을 통해, 또 아이들의 노래를 통해 한글을 전파시킨다. 이것은 확실히 지금 현재 SNS시대가 갖고 온 새로운 소통체계에 대한 알레고리다.

어렸을 적 한 번쯤은 읽어봤을 위인전 속의 세종 이야기가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건 바로 이 사극을 통해 과거가 아닌 현재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세종과 소이, 강채윤이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한글 전파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그 모습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보여주는 소통에 대한 염원을 현대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뿌리 깊은 나무’는 그렇게 세종의 한글창제와 반포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넘어 조선조의 백성과 현재의 대중들을 소통시키고 있다.


'브레인', 이강훈이라는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

'브레인'(사진출처:KBS)

신하균은 '브레인'에 등장하며 '하균신'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가 가진 발군의 연기력이 한 몫을 한 것이지만, 더 큰 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강훈이라는 캐릭터의 힘이다. 별로 착해보이지도 않고 성격이 좋아보이지도 않는 이 인물.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간다. 그의 끝없는 추락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마음 한 구석을 허물어뜨린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 캐릭터의 무엇이 이토록 대중들을 들끓게 만들까.

사실 이강훈에서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다. 불나방처럼 기꺼이 욕망의 불꽃에 몸을 던지는 인물. 그래서 성공을 위한 동아줄이라면 서슴없이 잡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 하지만 자꾸만 들여다보면 어딘지 연민이 생기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토록 성공에 집착하게 만드는 '더러운' 사회의 부조리를 통찰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 이강훈에게선 분명 장준혁의 냄새가 난다.

장준혁처럼 이강훈이 태어난 곳은 개천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개천이다. 가난한 집안, 일찍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뇌질환으로 수술을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 다시 돌아왔지만 끊임없이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가난을 환기시키는 어머니. 게다가 그 어머니는 자신의 라이벌 서준석(조동혁)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여동생은 자신의 병원 커피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황. 이 태생적으로 결정된 비운의 가난한 삶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 트라우마가 성공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태생적으로 삶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그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실력뿐. 그래서 누구보다 더 철저히 실력을 갖추고 그것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다. 어디 세상이 실력만으로 버텨낼 수 있는 곳인가.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조직 내에서의 정치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강훈도 고재학(이성민)의 밑으로 줄을 서고 충성을 다한다. 하지만 정치로 맺어진 관계란 영원할 수 없다. 고재학은 결국 이강훈을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먹고는 팽해버린다.

여기까지는 장준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브레인'이 흥미로운 건, 김상철(정진영)이라는 우리가 흔히 의술이 아니라 인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행하는, 마치 히포크라테스가 다시 되살아난 듯한 인물에서 나온다. 그는 끊임없이 이강훈에게 '욕망'이 아니라 '환자'를 위한 의술을 펼치라고 말하고, 바로 그렇게 이강훈을 '인간이 되지 못한' 심지어 '파렴치한' 자로 몰아붙인다. 더 이상 비전이 없는 이강훈은 다른 병원을 알아보려 하지만, 그것마저 김상철 교수가 내린 평판에 의해 좌절된다.

마치 김상철 교수는 천사 같고 이강훈은 욕망에 걸신들린 악마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진짜 그리는 것이 이런 권선징악일까. 과연 이강훈은 개과천선할 것인가. 그런 결론을 향해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재미없는 도식이다. 그것보다는 김상철 교수와 이강훈으로 대변되는 선과 악이 뒤집어지는 반전이 훨씬 재미있고, 또 그 반전이 주는 의미도 더 깊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복선은 이강훈 아버지의 죽음이 김상철 교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암시를 통해 이미 깔려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이강훈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이강훈 같은 괴물(?)의 탄생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강훈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잘못이다. 이강훈이 그렇게 고통스런 괴물이 된 것은 태생에 의해 비롯된 트라우마(이를테면 아버지의 죽음 같은) 때문이란 점이다. 사실 김상철 교수는 이강훈의 그 괴물 같은 심성을 질책하기만 했지, 왜 그런 욕망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됐는지 이해해보려 한 적이 없다. 수많은 환자들 앞에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김상철 교수는 정작 자신의 제자인 이강훈이 가진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지는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브레인'이 가진 진가가 드러난다. '브레인'은 뇌 질환을 수술하는 외과의사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의 겉면에 불과하다. 실제는 이 의사들이 겪고 있는 정신질환이다. 이강훈이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그의 뇌리에 남긴 트라우마이고, 어쩌면 김상철 교수의 끝없는 환자에 대한 희생과 봉사 역시 젊은 시절 한 때 잘못했던 일이 남긴(이를테면 이강훈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깊은 트라우마의 결과일 수 있다. 결국 '브레인'에서 환자는 뇌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들만이 아니다. 의사들 역시 똑같은 '기억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이강훈이라는 캐릭터가 악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우리네 마음 속의 깊은 공감과 연민을 끌어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네 서민들도 이 낮은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아마도 이강훈 같은 트라우마를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보처럼 선량해지기보다는 어딘지 악착같이 살아보려 하는 것이 아닌가. '브레인'은 바로 이강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한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끄집어내는 드라마다. 신하균이 하균신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토록 우리네 대중정서를 건드리는 이강훈이란 캐릭터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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