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닝맨', 일요예능 새 강자의 조건

'런닝맨'(사진출처:SBS)

'런닝맨'의 상승세가 심상찮다. 급성장한 시청률이 '나가수'를 앞지르고 '해피선데이'를 코끝가지 추격하고 있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이 프로그램은 나날이 진화하는 게임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 날의 미션 방식을 알려주지 않는 게임 형태에 스파이라는 변수를 집어넣자 이야기는 끝없이 반전으로 치닫는다. 송도에서 벌어진 미션에는 더블 스파이라는 개념을 넣어 반전에 반전을 주었다.

스파이가 되고 싶은 지석진과 이광수에게 스파이 미션을 주고, 사실은 김수로와 박예진이 진짜 스파이 역할을 하게 한 이 미션은 흥미로운 트릭이 엿보였다. 즉 도시를 가득 메운 풍선 속에서 런닝맨들이 미션의 단서를 찾는 과정에서 '수'자와 '진'자를 먼저 발견하게 한 것. 이 두 글자는 지석진과 이광수에게는 자신들의 이름에서의 한 자씩을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김수로와 박예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실로 절묘한 제작진의 트릭이 아닐 수 없다.

게스트로 등장한 김수로와 박예진은 확실히 이 '런닝맨'이라는 프로그램에 활기를 만들었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유재석과 김종국 등과 함께 한 패밀리로 예능을 겪었던 그들인지라 그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 김수로가 가진 '게임마왕' 캐릭터는 능력자 김종국을 능가하는 '초능력자' 캐릭터로 되살아났고, 달콤 살벌 박예진은 제대로 된 타이밍에 송지효를 아웃시키며 그 캐릭터가 허명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들이 출연한 지난 주부터 급격히 시청률이 오른 것에는 분명 이들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런닝맨'의 급상승에는 타사 경쟁 프로그램인 '남자의 자격'이나 '바람에 실려' 같은 프로그램의 부진이 한 몫을 하는 게 사실이다. '남자의 자격'은 청춘합창단 이후 급격히 힘이 빠지고 있다. 이어서 했던 '야구' 소재는 프로야구에 묻혀버렸고, '시' 소재는 참신했지만 '귀농일기' 마지막편은 급작스런 느낌이었고, 모터바이크 편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문제는 소재도 소재지만 웃음의 포인트가 너무 개인기에 집중되는 인상이다. 무언가 '남자의 자격'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소재발굴과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바람에 실려'는 음악이라는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예능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음악 이외에 다른 부분들은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특히 임재범이 무대에 섰을 때와, 무대 바깥에 있을 때의 호불호는 확실히 갈린다. 이번 레이크 타호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다 벌어진 김영호와의 마찰은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무슨 일인지 편집이 좀 과도하다는 인상이 짙다. 그래서 이 마찰은 프로그램의 주제곡인 'Saddle the Wind'를 처음 발표한 감동조차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즉 음악의 탄생과정을 보여주는 건 흥미롭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임재범의 잠적이나 멤버들 간의 갈등이 편집 없이 보여진 것은 과연 이 프로그램에 어떤 이익을 주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사의 같은 시간대 일요 예능 프로그램들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동안, '런닝맨'은 뚝심 좋게 줄곧 앞으로만 달려온 느낌이다. 게임은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되었고, 시청자들도 룰이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엄밀히 말하면 '런닝맨'의 이런 조금은 복잡해 보이는 게임이 시청자들에게 이해되기 위해서 사실은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런닝맨'은 그 캐릭터도 어느 정도 구축되고 있고, 그 게임의 흐름 역시 시청자들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바탕으로 계속 새로운 반전(의외의 전개)을 만들어온 것이 현재 '런닝맨'의 승승장구를 만들어낸 요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능은 역시 웃음과 즐거움이 그 첫 번째라는 사실이다. 주말 예능의 소재가 다양해지면서 웃음만이 아니라 감동을 추구하는 예능이 지속적으로 등장했지만, 결국 예능의 바탕은 웃음에 있다는 것을 '런닝맨'은 보여주고 있다. 물론 추격전과 일종의 서스펜스, 스릴러 같은 예능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결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도 늘 웃음을 잊지 않는 '런닝맨'. 이것이 이 프로그램이 향후 일요 예능의 새로운 강자가 될 가능성인 셈이다.


'하이킥', 짧은 다리로 어떻게 역습이 가능할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시리즈는 2006년부터 2011년 현재까지 방영되며 당대의 현실을 그린다. 시트콤이 시추에이션 코미디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지를 눈치 챌 것이다. 시트콤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대한 공감은 당대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과거의 하이킥 시리즈들과 비교해 어떤 현실의 풍경을 그리고 있을까.

먼저 제목을 보자.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뚫고 하이킥(2009)',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2011)'.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하이킥'이란 동작은 밑에서 위로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차는 행위다. 즉 이것은 밑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수직적인' 행위다. 즉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의 기본 바탕은 이 수직적인 사회가 갖고 있는 권위나 계층적이고 세대적인 갈등을 깔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이킥'의 캐릭터 설정은 이 수직적인 체계를 통해 시트콤이 만들어내는 웃음의 방식을 잘 설명해준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뚫고 하이킥'에는 이른바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이순재나 나문희, 그리고 김자옥 같은 캐릭터가 있었다. 그들을 거기 세워둔 이유는 분명하다. 이 가부장적인 수직적 체계의 캐릭터를 세워두고 그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무너뜨림으로써 웃음을 만들기 위함이다. '야동순재'는 바로 이 수직적 체계를 무너뜨리는 웃음의 코드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는 딱히 권위라고 할 수 있는 기성세대가 등장하지 않는다. 안내상이나 윤유선이 연장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시트콤 내에서 어떤 권위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니다. 안내상이 어느 날 갑자기 주눅이 들기 시작하면서 윤계상의 눈치를 보고 가장의 자리를 버거워하고 쪼그라드는 모습에서는 그 어떤 권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대신 안내상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건 궁상 그 자체다. 이 시트콤에서 안내상은 청년백수 백진희와 거의 비슷한 수평적인 위치에 서 있다.

과거 수직적인 체계에 대한 조롱이나 해체를 다루던 시기의 '하이킥'은 그래도 어떤 희망이 엿보였다. 적어도 그 동작이 '거침없었고', 심지어 '지붕을 뚫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저 위를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다. 적어도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바로 눈앞에 도래하는 하루하루를 생존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현실은 태생적으로 고착된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다. '짧은 다리'라는 태생적 한계는 제 아무리 하이킥을 날리려 해도 당도하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우울한 시트콤이 다루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저 위를 바라보며 희망하던 시절이 지나고, 이제 '짧은 다리'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이 현실 속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캐릭터 구성은 수직적인 체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 고만고만한 캐릭터들이 양적으로도 더 많이 포진하고 있는 건 그런 이유다. 그들은 상승을 꿈꾸기보다는 하루하루 교사생활을 버티며 그저 그런 고시생 남자친구와 만나면서 그럭저럭 부딪치며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유일하게 이 우울한 세계에서 하나의 희망을 만들어주는 건 바로 '땅굴'로 표상되는 일종의 소통체계다. 한없이 바닥을 치고 결국은 땅굴로 주저앉은 그들이 그 밑바닥에서 서로와 서로를 연결시키는 이 밑그림은 처절하지만 '짧은 다리'들이 역습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 마치 출구 없는 청춘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묶여지고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때로는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이 우울한 제목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읽고 싶어진다. 다리가 발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그 다리였으면 하는 생각. 그것이 비록 짧게 느껴지더라도 그 수평적인 연결고리들이, 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듯 구축되어 있는 저들만의 수직적인 세상을 지반으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김병만, 예능 정글을 바꿀까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김병만이 '달인' 폐지를 선언했다. '달인'은 김병만이라는 코미디언의 존재감을 세워준 코너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무려 4년 간이나 지속해오면서 소재고갈로 힘겨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어떤 면으로는 김병만의 다양한 가능성이 '달인'이라는 틀에 갇혀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여러 모로 '달인' 폐지는 아쉽기는 하지만 시의적절한 선택임에 분명하다. 김병만은 이제 그의 캐릭터가 되어버린 '달인'이라는 무기를 들고 좀 더 넓은 예능의 정글로 나가고 있는 중이다.

'김연아의 키스 앤 크라이'가 그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었다면,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예능이라는 정글에 하나의 깃발을 꽂은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정글의 법칙'은 작금의 정체되어 있는 예능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먼저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그간 '리얼 버라이어티'가 주창하곤 했던 '야생'이나 '리얼리티'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리라는 점이다. 사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연예인들이 노숙을 하고, 끼니를 굶고, 아침에 퉁퉁 부은 민낯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야생'이라 불릴 만큼 충분히 신선했다.

하지만 '정글의 법칙'을 보라. 김병만을 위시한 리키 김, 류담 그리고 광희가 처한 상황을 보면 리얼 버라이어티의 '야생'이니 '리얼리티'니 하는 얘기가 실로 우습게 여겨진다. 그들은 먹을 것도 주어지지 않고, 텐트도 하나 없이, 낯선 땅에서 생존해야 한다. 게다가 이 땅은 뱀과 악어와 벌레들이 득시글대는 곳이다.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은 그래서 그 자체로 기존 예능의 형식들을 압도해버리는 면모가 있다.

이것은 또한 어찌 보면 '연예인 리얼리티쇼'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리얼리티쇼'란 주로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말하지만,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은 연예인이 그 특수한 상황 속에 들어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드러낸다. 김병만은 '달인'이라는 캐릭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글 속에 들어가서도 그 캐릭터를 실제로 보여준다. '달인'의 정글 버전인 셈이다.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은 또 다른 연예인 리얼리티쇼의 탄생을 예고한다. 특정 캐릭터를 가진 연예인이 있다면 그가 가진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나 상황을 만들어 하나의 리얼리티쇼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바람에 실려'는 물론 짜여진 틀이 너무 촘촘해 보이는 것이 리얼리티쇼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지만, 그래도 임재범의 리얼리티쇼라고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연예인 리얼리티쇼의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과거 예능 프로그램이 주로 형식을 만들고 그 속에 세울 인물을 찾았다면, 연예인 리얼리티쇼는 거꾸로 한 인물에 주목하고, 그에 맞춰진 쇼를 구성함으로써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은 리얼의 강도라는 측면에서, 또 연예인 리얼리티쇼의 기점이라는 측면에서 현 정체된 예능의 새 판을 짤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일 이 새 판이 시작된다면,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면서 유재석과 강호동이 그 투톱으로 섰듯이, 김병만과 같은 독특한 자기 개성을 가진 연예인들이 이 새 판의 중심으로 들어올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되면 예능의 축이 달라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예측은 김병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병만이 가진 성실성과 남다른 재능, 그리고 포부를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이 예측이 그저 허망한 바람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달인'의 폐지는 이제 좀 더 다양한 예능이라는 정글의 환경과 일상 속에서의 달인을 기대하게 만든다. 김병만은 그 첫 번째 발자국을 떼고 있는 중이고, 이것은 무수한 또 다른 달인을 꿈꾸는 이들이 지나다닐 새로운 길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달인 김병만은 그렇게 예능의 정글을 향해 자신만의 족적을 만들며 들어서고 있다.


'천일', "나는 고장 나고 있어"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두 여자가 운다. 한 여자는 갑자기 생긴 존재의 허기를 채우겠다는 듯, 한 바구니 사온 꽈배기, 도넛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으며 울고, 한 여자는 무언가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모두 뱉어내겠다는 듯이 끊임없이 토해내며 눈물을 흘린다. 한 여자는 채우면서 울고 한 여자는 비우면서 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눈물 흘리게 하는 걸까.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그려내는 기막힌 풍경이다.

존재의 허기를 느끼는 여자는 이서연(수애)이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다.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은 점점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다. 그녀는 그 떠나가는 기억을 부여잡으려 작가들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수첩에 빼곡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어 넣는다. 그런 그녀지만 떠나 보내야할 기억도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박지형(김래원)이다. "당신의 삶까지 삼켜버릴 수는 없어."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이 그의 삶마저 삼켜버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빼내려는 듯 토하고 또 토하는 여자는 노향기(정유미)다. 그녀는 아무런 삶의 질곡 없이 말끔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 인생 위에 오롯이 박지형이라는 남자만을 주름으로 채워 넣은 채. 그녀의 삶의 기억은 온통 그 남자다. 그런데 그가 떠나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는 것이 그녀가 하는 사랑의 방식인지라, 그녀는 그를 보내주려 한다. 그래서 자신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마저 토해내려 한다. 그럴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 기억의 주름이 남긴 상처일 것이지만.

'천일의 약속'은 두 여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네 삶에서 기억이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는 드라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만큼 잊고 싶은 존재다. 기억은 달콤한 삶의 추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독한 고통의 악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똑같은 사랑의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기억이란 놈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라져가는 기억이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 그 무엇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다 잊게 되고 누구나 다 잊지 못하게 된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억으로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그래서 '천일의 약속'은 그 상투적일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사랑을 표피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삶의 잣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큰 차이다. 삶이 결국 하나의 짧은 기억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기억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 누구의 기억으로 채우며 누구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가는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파혼선언을 해버리는 남자 박지형을 이해할 수가 있다. 박지형의 선택은 결혼식이라는 그 짧은 순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양가 가족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인생 전체를 두고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의 기억일 수 있는 여자의 마지막 기억 속에 남고 싶고, 그녀의 마지막을 자신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은 그 삶의 욕망.

'천일의 약속'은 제목처럼 시간(천일)과 기억(약속)에 관한 김수현 작가의 진중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와 함께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트림을 하며 밀어를 나누던 이서연의 그 일상적인 기억들은 지극히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녀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아련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직업이 책을 만드는 출판이라는 사실은 이 지극히 한 개인의 이야기를 우리네 삶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그 기억을 잡고 싶고 남기고 싶은 욕망. 책이라는 인간의 욕구.

"나는 고장 나고 있어."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이미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아직 멀쩡하지만 '고장 날' 것도 아닌, 현재 '고장 나고' 있는 상황. 이 한 줄의 대사는 우리네 삶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서연은 알츠하이머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기억의 관점에서 이 '고장 나고' 있는 인생을 깨달았던 것뿐이다. 사실 그 누구도 '고장 나고' 있지 않은 인생은 없지 않은가. '천일의 약속'이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고장 나고' 있는 우리네 삶의 운명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기억을, 추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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