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라는 뿌리 중의 뿌리는 역시 스토리다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1시간이 너무 짧다. '뿌리 깊은 나무' 3회는 그 속도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쏟아지는 화살비 속으로 걸어 들어간 세종(송중기)의 마지막 장면의 긴박감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어느새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토록 빠른 속도감을 주는 드라마가 있었던가. '뿌리 깊은 나무'의 이 미친 속도감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제 고작 4회가 진행됐지만 이 사극은 엄청나게 많은 연기자들이 투입되었다. 세종만 해도 어린 이도(강산), 젊은 이도(송중기)를 거쳐 이제 나이든 세종(한석규)까지 무려 세 명이다. 세종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채윤 역시 어린 채윤(채상우), 소년 채윤(여진구), 그리고 성장한 채윤(장혁)까지 세 명이다. 태종(백윤식)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젊은 이도와 대결구도를 만들었으나 이미 죽음을 맞이했고, 잠깐 등장했던 정도전의 아우 정도광(전노민)도 바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한 역할에도 많은 연기자가 투입되는 이유는 그만큼 속도감 있게 극을 전개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초반 속도감을 만들어낸 가장 큰 공적은 아무래도 태종과 세종에게 주어야 할 것 같다. 왕권을 중심에 세워두려는 태종(백윤식)의 인정사정없는 피의 숙청은 이 속도의 전제가 되었다. "왕도와 패도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라고 주장하는 태종 앞에서 세종은 "칼이 아니라 말로써 설득하고 기다리는 조선을 세울 것"이라 말한다. 또 경연이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태종 앞에, 세종은 사대부들의 왕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그 경연이야말로 고려와 다른 조선의 실체이자 성리학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 태종이 생각하는 조선과 세종이 생각하는 조선의 대립은, 이제 세워진 지 겨우 26년이 된 조선에서 왕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시각이다. 태종은 칼을 동원해서라도 강력한 왕권을 세워 빠르게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꾸려나가야 고려와는 다른 조선이 세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대화는 갑자기 '밀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밀본(密本)'. '숨겨진 뿌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태종과 함께 조선을 건국했으나 태종에 의해 제거된 정도전이 남긴 글귀 속에 등장한다. 정도전의 아우인 정도광의 집 지하에서 발견된 이 글귀는 왕과 재상의 관계를 꽃과 뿌리에 비유해, 왕이 그저 '화려한 꽃'일 뿐이라면 재상은 뿌리라고 말한다. 즉 이 화려한 꽃은 부실하면 꺾으면 그만이지만 뿌리가 부실하면 나무가 죽는다는 것. 그만큼 나라를 살리는 것은 왕권이 아니라 재상들의 견제에 달렸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태종과 세종이 대립하는 그 사상의 차이와도 그대로 맞닿아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정도전의 정치세계를 표현한 글귀가 그저 글이 아니라 실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밀본'은 정도전이 만든 사대부들의 비밀결사라는 것. 이 밀본의 실체가 밝혀진 후 사극은 숨 가쁘게 이것을 현재의 상황으로 되돌려 놓는다. 즉 '밀본지서'가 등장하고 그것을 갖고 도망치려는 정도전의 아우 정도광과, 그를 잡으려는 태종의 명을 받은 조말생과 부하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세종에 의해 움직이는 무휼. 그리고 이 일에 휘말리게 되는 반촌 사람들과 똘복이(채상우)까지.

드라마의 속도감은 물론 팽팽한 대립구도에서 비롯된다. 태종과 세종의 대립,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도전의 밀본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입장은 이 사극에 강한 내적 동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사극이 정치적이고 심지어 이념적인 대립을, 눈에 보이는 행동의 대결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태종과 세종의 대결을 행동으로 보여준 조말생과 무휼의 대결은 대표적이다. 이것은 앞으로 채윤으로 이어져 집현전에서의 한글 창제라는 역사 속 글귀가 어떻게 추리와 액션이 섞인 극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인가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다. 이렇게 한 바탕 숨 가쁜 달리기를 해온 '뿌리 깊은 나무'는 4회에 이르러 잠깐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숨고르기는 집현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어지며 다시 숨 가쁜 달리기를 예고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주는 놀라운 몰입과 속도감은 바로 이 복잡한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대결을 하나의 움직이는 행동의 이야기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저 사상의 대결이라면 얼마나 지루한 논쟁 장면들의 연속이겠는가.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이 사상의 대결을 실체로 보여준다. '밀본'은 그런 특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세계의 표현이면서 비밀결사라는 실체로 존재하는 '밀본'.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의 핵심적인 메시지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를 끝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하고 달리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결국 뿌리 중의 뿌리, 드라마를 팽팽하게 만드는 뿌리는 역시 잘 짜여진 대본인 셈이다. 밀본지서를 빗대 말한다면, 아무리 겉이 화려한 꽃(캐스팅에서부터 연출까지)이라도 그 뿌리(이야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위탄2', 통편집이 가진 문제

'위대한 탄생'(사진출처:MBC)

'위대한 탄생2(이하 위탄2)'의 지원자 수는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오디션장에 몰려든 인파들을 원경에서 찍어 보여준 것으로 그 규모를 가늠할 뿐이다.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는 1차 오디션이 통편집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어느 정도 걸러진 인물들을 2차 오디션부터 보여주는 것이 훨씬 집중도가 높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은 물론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에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이미 2차 오디션으로 걸러져 이제 137개 팀으로 좁혀진 위대한 캠프에서 여전히 통편집이 등장하는 건 왜일까. 2차 오디션에서 심사위원들의 말끝을 잘라서 오히려 주목받은 김태극이나 회계사 출신으로 일찌감치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배수정 같은 인물이 상당한 시간을 할애 받은 반면 같은 무대에 선 몇몇 지원자는 거의 얼굴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편집은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슈퍼스타K3'와 비교해보면 이러한 통편집은 '위대한 탄생2'의 특징처럼 읽힌다. '슈퍼스타K3'가 무모할 정도로 많은 지원자들을 빠른 편집을 통해 짧게 짧게라도 보여줬던 반면, '위대한 탄생2'는 지원자들 중 될 성부른 이들만 쏙쏙 뽑아 편집해 보여주고 있다. '슈퍼스타K3'의 많은 지원자들의 빠른 편집분은 분명 시청자들의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또 '위대한 탄생2'의 통편집은 시청자들을 보다 쉽게 몇몇 지원자들에게 집중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편집은 '다양성'의 차원으로 보면 잘못된 선택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좀 더 다채로운 인물들의 경연이지, 잘 하는 몇몇 사람들만 쏙쏙 빼서 보여주는 경연은 아닐 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집중이 시청률을 높이는 데는 좋다. 그만큼 정돈된 스토리의 일관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깔끔하게 잘려진 영상은 그렇게 소외되어 버린 지원자들에게는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위대한 캠프'처럼 집단으로 나와 한 명씩 경연을 보여주고 거기서 당락을 결정하는 방식에서 이러한 통편집은 결과를 미리 알려주는 잘못된 선택이기도 하다. 즉 당락 결정에 앞서서 심사위원들은 합격과 불합격이 될 지원자들을 따로 분류하는데, 누가 봐도 통편집된 지원자가 서는 쪽이 불합격이라는 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심사위원들의 심사 방식이 어떤 긴장감을 유발하려는 노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집에 의해 그 긴장감이 깨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통편집이 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부여하는 뉘앙스다. 이것은 어딘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물론 오디션 과정이나 심사 과정은 공정하겠지만, 방송이 오디션 참가자들을 비추는 방식이 승자 독식의 게임처럼 보여주는 건 불공정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중들이 바라는 것에 전면으로 위배되는 것일 수 있다. 대중들은 오디션을 통해 그것이 판타지라도 희망이 보고 싶은 것이지, 불공정한 현실을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다.


'계백' 어쩌다 치정극이 됐나

'계백'(사진출처:MBC)

아무리 최근의 사극들이 역사를 재해석하고 상상력의 틈입을 더 많이 허락한다고 해도 '계백'은 너무 지나치다는 인상이 짙다. 실제 역사에서 무왕(최종환)이 그토록 나약한 존재였을까. 그래서 사택가문에 의해 왕권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을까. 백제와 신라가 원수지간이었던 당시, 선화공주는 과연 실존하는 인물이었을까. 교활할 정도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 하는 의자(조재현)는 어떤가. 게다가 은고(송지효)라는 여인 한 명을 두고 벌이는 볼썽사나운 왕과 신하 사이의 줄다리기라니.

'계백'은 도대체 주인공이 누구인지 종잡기 어려운 사극이다. 제목을 '계백'으로 잡았다면 그 인물이 가진 역사성에 천착해야 할 텐데, 이 사극은 계백을 그저 한 여인에게 목매는 평범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나마 사택비(오연수)와 대결하는 국면에서 계백은 성충(전노민), 흥수(김유석)를 만나 그 꿈을 슬쩍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사택가문이 모두 물러나고 의자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런 꿈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백제의 삼대 충신들로 불리는 성충과 흥수 역시 기존 권력에 편입되어 살아간다.

사실 역사의 디테일들이 바뀌는 것은 사극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바뀐 디테일이 역사적 인물들을 폄훼하거나 한 국가를(그것도 당시 엄청난 힘을 가졌던 백제라는) 소국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꿈을 갖지 못한 '계백' 속의 인물들은 멜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그 속에서 계백은 의기도 충절도 잘 보이지 않는 평범한 남자가 되어버렸고, 의자는 한 여자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이는 소인배가 되었으며, 무왕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사택비를 닮아가는 은고를 제거하고자 할 정도로 사택가문 앞에 약해지는 졸장부로 그려졌다. 삼한일통을 꿈꿔야할 성충이나 흥수마저 이러한 사적인 치정에 휘말려 있으니, 이렇게 패배주의적으로 그려진 백제를 어느 후대가 수긍할 수 있을까.

이건 차라리 사극이 아니라 치정극에 가깝다. 사극에 멜로나 사랑이야기가 불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극 역시 드라마이기 때문에 멜로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멜로가 역사적인 인물 자체를 우습게 만들어버릴 때, 그 사극은 도를 넘은 것이다. 도대체 왜 '계백'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신라를 다뤘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조차 백제는 강성한 나라로 그려졌었다. 이토록 힘없고 지리멸렬하며 용렬한 왕과 왕자들이 우글대는 나라라니. 이것이 과연 진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백제라는 나라가 맞는 것일까.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이다. '계백'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통해 볼 때 새로운 이야기를 그다지 발견하기가 어렵다. 백제를 다룬다면(우리 사극에 백제를 다룬 것은 그다지 없었다) 뭔가 백제만의 기상을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를 덧붙였어야 하는데, 초반 사택비 설정부터 '선덕여왕'의 틀을 거의 답습해버렸다. 하지만 이 억지 설정이 그대로 문제로 드러나는 건 그 눈 꼬리 분장 논란에서 여겨지는 것처럼, 깊이 있는 캐릭터의 창출이 아니라 그저 분장 같은 외적 장치로 그런 효과를 내려 하는 이 사극의 태도에 있다. 이런 태도로 어찌 캐릭터가 살 수 있을까. 물론 이렇게 살아나지 않는 캐릭터는 역사 속 인물 자체도 폄훼할 가능성이 높다.

'계백'이 사극이 아니라 치정극에 빠져버린 것은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원대한 꿈을 꾸는 영웅의 부재는 그렇다 쳐도, 그들이 치정에 얽혀 소인배로 그려지는 것은 차마 바라보기가 어렵다. 아이디어가 사라졌을 때 대부분 작가들이 그 빈 공간을 멜로로 채우려는 것은 그것이 손쉽게 분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채워진 멜로가 계백이라는 비운의 영웅을, 의자라는 백제의 마지막 왕을, 또 무엇보다 강성했던 백제라는 나라를 이토록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10%에 머물러 있는 시청률이 말해주듯이 '계백'은 대중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백제의 모습을 너무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역사왜곡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역사의식이다.

아이들이 타고난 연기자라는 건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누구나 아는 일일 게다. 원하는 걸 안 해줘서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데 정말 슬프게 우는 아이에게 "연기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부모의 얘기는 실로 농담이 아니다. 아이들의 표정연기는 리얼 그 자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정도니까. 우는 연기를 하다가 진짜 울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물론 가짜로 웃다가 진짜 웃음이 멈추지 않아 배가 아플 정도로 웃는 건 예삿일이다. 이 정도의 몰입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명품 연기(?)'를 해낼 수 있는 기초가 잡힌 셈이다. 물론 표현력에 한계가 있겠지만, 이것이 적어도 요즘 아역들에게서 쉽게 '발연기'를 발견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의 연기와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는 확실히 다른 법. 여행을 가서 잘도 뛰어놀던 아이도 "사진 찍자!"하고 얘기하면 부동의 자세가 되어버리던 시절이 있었다. 순간 '얼음!'이 되어버린 그 사진들은 마치 누군가 약속이라도 정해놓은 것처럼 그 시대의 포즈가 되어 있다. 산에 가면 하늘 어디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바다에 가면 꼭 일렬로 죽 서서 차렷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것이 참 세월이 많이도 변했다. 이제 사진 찍자고 하면 아이들은 저마다 기발한 포즈를 취하려고 안달이다. 아니 아예 자연스럽게 찍기 위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센스도 보여준다. 이른바 '스냅샷'의 시대를 넘어서 이제는 '셀프 카메라'의 시대가 아닌가.

가끔 촬영 현장을 찾아가면 보게 되는 아역들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는 '연기신공'을 보여준다. 그래서 과거 아역들은 그저 성인역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치부되었지만 요즘은 확실히 달라졌다. 아역의 놀라운 연기력에 그 바톤을 이어받는 성인역이 부담을 느낄 정도니 말이다. 카메라와 함께 태어나고(요즘은 아예 출산장면까지 동영상으로 담는다고 하지 않는가!), 생활한 그들은 카메라 렌즈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여기에 아이들 특유의 몰입능력과 일찍부터 TV를 통해 깨우친 다양한 얼굴 표현의 경험이 덧붙여지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너무나 어른 뺨치는 연기를 선보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딘지 '이건 좀 아닌데'하는 생각이 드는 건 너무 일찍 '연기'를 실제가 아니라 '연기'로서 하는 아이들의 조숙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게 정녕 아이의 연기란 말인가' 하는 놀라움 속에는 그래서 약간의 탄식이 섞여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를 키우는 건 실상 TV라는 얘기가 나오는 미디어 세상이니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어딘지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 옛 사진 속의 아이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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