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예능이 주말극보다 더 좋은 이유

드라마가 가지는 진정성과 리얼리티는 이제 옛말이 된 걸까. 주중의 드라마들이 그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시청률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나 '천만번 사랑해' 같은 주말드라마들은 이 진정성과 리얼리티를 이제는 포기한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오히려 진정성과 리얼리티는 적어도 주말에는 드라마보다 예능에서 찾아진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가 전하는 이야기가 이들 드라마보다 더 진정성이 있고 리얼리티가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드라마의 퇴행은 어디까지 가고 있는 것일까.

주말 전체 시청률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는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저녁 8시라는 시간대에 방영되어도 좋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자극적이다. 문영남 작가의 개성이 그대로 묻어있는 이 작품은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지지고 볶는(?) 이야기가 끝없이 반복된다. 이 드라마 속에서 연적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랑을 방해하고, 시어머니는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착한 며느리를 구박하고, 새로 들어온 못된 며느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손아래 며느리를 골탕 먹인다.

지질한 캐릭터들은 이 드라마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동인이 된다. 이 민폐형 캐릭터들은 열심히 살아가려는 다른 가족의 삶을 파탄 낼 정도의 패악을 보여준다. 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는 두 가지다. 포기하거나, 그래도 제 자식이라고 두둔하거나. 그러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가족드라마의 가족은 시청자에게 하나의 대안가족처럼 감정이입이 되기 마련인데, 그 속에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식이다.

물론 가족드라마는 이러한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갈등은 현재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 공감대가 형성된다. '수상한 삼형제'의 갈등은 그러나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거의 것들을 반복하고 있다. 불륜, 장남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가 만드는 짐, 천편일률적인 고부 갈등 등등. 게다가 이 드라마의 갈등 상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에 있다는 점에서 작위적인 느낌마저 준다. 즉 "저런 인간은 늘 저렇게 살아 간다"는 상투적이고 인위적인 설정이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물론 공감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가족드라마에서 그토록 예전부터 반복되어온 갈등의 양상이다. 현재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반복적인 갈등 상황을 제시해 시청자의 눈과 귀를 붙잡아 놓는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퇴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주말 드라마에서 두 번째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천만번 사랑해'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대리모라는 설정을 활용해 전형적인 모성 신파극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관계를 살펴보면 실로 거의 거미줄 같은 복잡함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대리모를 해서 아이를 준 집안이 하필 자신이 사랑해 결혼한 남자의 집안이라는 사실, 한 남자를 두고 자매가 동시에 사랑하게 되었던 상황, 대리모를 주선한 여자의 딸이 하필 그 아이를 준 남자와 불륜관계가 되는 상황 등은 아무리 양보해도 지나친 우연의 남발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어 놓았기 때문에 물론 갈등 상황은 끊임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상식적인 선을 이미 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 주말극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나 '천만번 사랑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작위적이라는 것이고, 그 주창하는 메시지 역시 현재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미 닳고 닳은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 주말극들이 가지는 퇴행적인 모습에 주말 예능이 보여주는 리얼리티와 진정성은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무한도전'이 보여주는 실험성, '1박2일'이 그려내는 작위성 없는 리얼리티, '일밤'이 보여주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못지않은 진정성. 이들 주말극이 갖지 못한 것들을 주말 예능들이 갖고 있는 형국이다. 주말극, 주말 예능처럼은 못하는 것일까.

'자체발광'의 궁금증, 꼭 쓸모 있어야 돼?

도대체 이런 실험과 도전은 왜 하는 것일까. 지금 TV에서는 '자체발광'이라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요상한 도전이 펼쳐지고 있다.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시도된 것은 오리 배를 타고 완도에서 제주도까지, 즉 바다를 건너는 도전. 이 도전이 시작된 것은 한 신입사원이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무동력으로 태평양을 건넌 25세 미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접한 그는 "자가 동력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 것. 결국 이 호기심 때문에 그는 죽을 고생을 해가며 오래 배의 페달을 밟아야 했다. 결과는? 오리 배의 처참한 침몰로 끝이 났다.

'자체발광'은 파일럿에 이어 본격적인 실험과 도전에 돌입했다. "화장 어디까지 가능할까'하는 의문 때문에 실험자들은 자이로 드롭에 올라타고 팽팽 돌아가는 그 속에서 화장을 시도하는 엽기적인(?) 실험을 선보였다. 결과는 엉망진창. 하지만 그 실험이 주는 웃음만큼은 신선했다. "정말 사슴이 썰매를 끌 수 있을까"하는 크리스마스에 즈음해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빠 산타 정종철은 명동에서 청계천을 거쳐 왕십리까지 사슴을 끌어야 했다.

궁금증을 위해서라면 무협소설에서나 보았던 소림사로 날아가는 일도 이들은 서슴지 않는다. "당랑권과 취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하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선발된 2명의 도전자는 소림사에서 죽기 살기로 수련을 해야 했다. 한편 사진만 찍었다 하면 눈을 감는 그 굴욕의 순간을 넘어서기 위해 도전자들은 양파를 썰며, 물 속에서 그리고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자체발광'의 '발광'은 물론 스스로 밝힌다(光)는 뜻이지만, 거기에는 "미쳤다(狂)'는 뉘앙스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어떤 궁금증은 쓸모 있게 밝혀지지만(실험光), 어떤 궁금증은 쓸모없어 보이고(도전狂),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한 도전과 실험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쓸데없이 고생한다는 '생고생'이라는 말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그러니 이런 형식은 시사교양 프로그램보다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하지만 분명, '자체발광'은 예능이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즉 무모한 도전이지만 '자체발광'은 어떤 식으로든 궁금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 예능과 교양 사이에 걸쳐있는 지점이 '자체발광'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이유가 된다. 교양인 줄 알고 쳐다봤더니 웬만한 예능보다 더 웃기는 도전과제가 제시된다. 도전과 실험은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연상시키고, 그 회의 궁금증을 제시하는 영상물은 독특한 '하오체'의 내레이션과 공감을 자아내는 편집으로 마치 '남녀탐구생활'의 다른 버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자체발광'이 교양이 갖는 정보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정보가 갖는 실용적인 가치는 물론 낮은 것이지만.

이 실용적인 가치를 벗어난 질문과 거기에 엄청난 도전과 실험으로 답변을 제공하는 '자체발광'은 작금의 정보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을 깨뜨린다. 즉 정보라고 하면 그것의 실용가치를 떠올리던 것에서, 이제는 즐거움(fun)의 가치로의 이행을 보게 되는 것이다. '스폰지'가 실용성과 상관없이 정보가 가진 즐거움을 퀴즈 형식으로 프로그램화했다면, '자체발광'은 그것을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갖는 실험 형식으로 프로그램화했다고 볼 수 있다.

궁금증이 꼭 쓸모 있을 필요는 없다.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정보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늘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해오던 익숙한 것들이 아닌가. '자체발광'이 왠만한 예능을 능가하는 재미를 주는 이유는 정보에 대한 실용적 접근을 벗어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이 변해가고 있고 또 앞으로 변해가야 할 방향을 예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정보는 즐거움이다.

'추노'에서 몸이 의미하는 것

'추노'의 몸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 초콜릿 복근이란 표현이 선정적이라고 해도 딱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멋진 몸. 그 멋진 몸이 때론 공중으로 붕 떠오르고, 때론 뛰어내리며, 때론 바람을 가르듯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짐승의 눈을 가진 레드 원 카메라와 강렬한 배경 음악은 이 몸의 동작들을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만든다. 이건 액션이 아니라 무용에 가깝다. 그 속에서 몸은 멋지다 못해 아름답다.

한바탕 도망친 노비를 잡고 여각으로 돌아온 추노꾼, 최장군(한정수)이 땀에 젖은 몸을 씻는 그 모습을 훔쳐보며 설레는 마음은 큰 주모(조미령)뿐만은 아닐 것이다. 장군의 몸이 되고 싶었으나 한낱 노비 사냥꾼의 몸이 되어버린 그 몸은 장군의 갑옷은 입지 못했어도 갑옷 못지않은 멋진 몸을 갖게 됐다. 최장군의 몸은 냉철한 판단력에 맏형으로서 대길(장혁)과 왕손이(김지석)를 생각하는 그 따뜻한 캐릭터처럼 군더더기 없이 멋지다.

독종 중의 독종으로 불리는 대길의 몸은 슬프다. 한때는 양반집 자제로 백면서생의 뽀얀 살결을 가졌을 그 몸은 이제 여기저기 난 칼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그는 애꿎은 자신의 몸에 벌을 주고 있는 중이다. 그가 좋아했던 노비 언년이(이다해)의 오빠에 의해 멸문지화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찾아다닌다는 그 사실이 그를 인간 말종 추노꾼의 삶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몸은 상대방을 잔혹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가격해대지만, 뒤에서는 자신이 잡아온 노비를 몰래 빼내 풀어줄 정도로 가슴 한 구석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한다. 그의 몸에는 분노와 자포자기와 연민이 뒤엉켜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되어버린 이 혼돈의 애증 속에서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언년이를 찾는다. 그것이 복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 채.

왕손이의 몸은 한 순간의 쾌락을 좇는다. 몸은 그저 늙어가는 것. 그러니 살아있을 때 즐기기 위해 그 몸은 쉴 새 없이 여자를 찾는다. 아직 젊기 때문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 순간을 살아온 몸에 마치 상이라도 주듯. 젊은 치기로 번득이는 이 몸은 그래서 웃긴다. 그 몸이 추구하는 방탕한 삶이란 한낱 한 때의 좌충우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청춘이 주는 시행착오 속의 몸은 그래도 유쾌하다.

'추노'의 멋진 몸, 슬픈 몸, 웃기는 몸은 이 시대 민초의 삶을 설명하지 않고도 보여준다. 늘 머리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몸의 운명. 그 몸이 생채기를 입어도 허허 웃으면서 다시 아물고 더 팽팽해지면서 멋진 몸이 되는 것은 몸의 항변인 셈이다. 세상에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 뿐인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는 그 몸은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힘겨운 노동의 상처를 오히려 힘으로 아름다움으로 전화시키는 몸은 그래서 이 땅의 민초들을 그대로 닮았다. 그들의 살갗이 칼날에 찢기고, 그 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그 상처가 아물어 더 단단한 피부가 되는 그 과정을 담은 몸은 그래서 왜 그 몸이 그렇게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추노'는 그래서 정치를 얘기하지 않아도 정치적이고, 전쟁을 보여주지 않아도 더 참혹한 이야기를 몸의 언어를 통해 전한다. 레드 원 카메라의 저속 고속 촬영은 단지 식스 팩의 몸을 전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몸이 전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아주 미세한 떨림까지 전하기 위한 것이다.

 '제중원', 의학의 초심을 묻다

무엇이 도망치던 그의 발길을 돌려 세웠을까. 자신의 첫 시술(?) 과정에서 형조판서가 죽자 충격에 빠진 황정(박용우)은 석란(한혜진)의 설득으로 등 떠밀리듯 도망치다 나루터에서 발길을 돌린다. 그것은 궁금증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그 길로 자신이 판 서양의학책이 있는 서책점으로 가 밤새도록 서양의학책을 읽어나간다. 그 때의 마음은 또 얼마나 간절했을까. 자신의 시술이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수도 있다는 그 끔찍한 생각.

"인간의 몸에는 피가 세 되가 들어있다. 피가 한 되가 빠지면 죽게 된다." "마취를 하게 되면 혈압이 떨어진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또 심장은 얼마나 쿵쾅댔을까. 이미 혈압이 떨어진 환자에게 마취를 함으로써 더 혈압을 떨어뜨린 것이 사인일 지도 모른다는 그 마음은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또 알렌(션 리차드)이 "혈관을 잡아 피를 멈추게 하면 혈압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는 또 얼마나 가슴을 쓸었을까.

이것은 의학도의 초심이다. 그 첫 발을 디디는 그들에게 모든 것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의 손길 하나 하나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니 어찌 작은 생명이라도 숭고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정말이죠? 내가 안 죽였죠?"하고 계속 물어대는 황정의 마음 속에 깃든 의학의 초심을 이미 알렌은 읽었을 것이다. 갑자기 체온이 떨어진 민영익(장현성)을 밤새도록 간호하고는 그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활짝 웃는 그 얼굴 속에서도 이미 알렌은 황정의 초심을 읽었을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학이 들어온 당시에서부터 1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군들 의학에 첫 발을 디디는 그 애틋한 초심이 없었을까.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던 그 마음. 하지만 의학이 인술이 되지 못하고 의술이 되어버린 작금의 세태는 그 초심이 무색할 지경이다. 늘 힘겹지만 돈은 되지 않는 일반외과의가 늘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몇몇 과에 지원자들이 늘어가는 상황은 작금의 의학이 처한 위기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위기는 기술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초심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생명 앞에 마치 자신이 그 당사자인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학의 마음이다. 그래서 알렌은 황정에게 묻고 황정은 알렌에게 그 초심을 답한다. "만약 미스터 황 앞에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있어요. 누굴 먼저 치료할 건가요?" "더 아픈 사람 먼저 치료하겠습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있으면요." "그 또한 더 아픈 사람 먼저 치료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한 가지예요. 의원은 환자를 거부해서는 안돼요. 그게 바로 의원의 처음이고 끝이에요." 이 두 사람이 나누는 이 질문과 답변은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그 간단한 것을 지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제중원'이 구한말까지 달려가 서양의학의 그 첫발에서 다시 찾으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초심. 처음 서양의학으로 환자를 대하던 그 떨리던 손길 속에 들어있던 그 간절한 마음. 모든 이들의 생명을 제 어머니의 그것처럼 여기는 황정의 마음.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무게가 적지 않은 것은 작금의 현실이 그 초심에서 너무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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