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위험지대에서 가능성의 지대로

이승기가 처음 '1박2일'에 출연했을 때, 그는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겨울 얼음장 같은 물로 머리를 감고, 야생의 생활(?) 속에서도 피부관리를 하는 그의 모습은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안간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라면 아이돌 가수가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비의 베일에 가려 있어야할 아이돌 가수가 맨 얼굴에 눈곱이 낀 채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시대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이승기가 들어왔을 때, 이미 한때(?) 아이돌가수였던 은지원은 은초딩으로 캐릭터를 잡고 있었다. 이승기는 그렇게 예능에 적응해나갔고, 2년여가 지난 지금 드라마에서도 주목받으면서 가수, 예능, 드라마까지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이승기 개인의 성공에 그치는 것일까. 이승기의 성공 과정은 현재 달라진 스타들의 롤모델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달라진 롤모델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 스타가 과거라면 도무지 용납되지 않을 상반된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갖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된다는 점이다. 한 편에서는 정극에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을 울리는 이승기는, 다른 한 편에서는 버라이어티쇼에 등장해 소녀 같은 가발을 쓰고 정각이 될 때마다 거리에서 시각을 외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웃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신비주의의 시대가 가고 친숙한 이미지가 대세가 된 현재, 다채로운 이미지는 그 자체가 진정성이 된다. 한 사람에게서 한 가지 이미지만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식이 된다. 하지만 여러 이미지를 보여줄 때,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속에 있는 다양한 모습들은 리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된다. '1박2일'에서 멜로의 중심에 선 이승기를 벌칙수행을 통해 예능의 중심으로 세우는 것은 오히려 이승기에게는 득이 되는 일이다. 과거 상반된 이미지의 겹치기가 용납되지 않던 시대와 달라졌다는 것을 이승기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승기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승기가 '찬란한 유산'에서 선우환 역을 잘 소화해내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배우로서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초반부에 이승기는 여러 모로 어색한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뒤집은 것은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 차츰 나아지는 연기를 보면서 이승기는 성장하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1박2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승기는 예능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로 초반부 이물질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차츰 형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세워나갔다. 특별한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드러나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승기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허당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열심히'와 '어색한'의 사이에 서 있는 캐릭터다.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이란 걸 이승기는 예능에서는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기를 통해 달라진 현재의 스타들의 롤모델을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팬층이 특정 세대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기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팬층이 넓다. '1박2일'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누나들 사이에서의 이승기'였지만, '1박2일' 출연 후에는 '형들 사이에서의 이승기'가 되었고, '찬란한 유산'에 출연하고는 '부모들 사이의 이승기'까지 되었다. 그는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팬층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승기가 본성처럼 갖고 있는 고급스런 이미지 위에 다양한 이미지들(허당으로서의 이미지나, 까칠한 이미지 같은)을 겹치는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이승기가 현재 스타들의 아이콘이 된 데는 이처럼 경계의 지대에 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계는 분야의 경계이기도 하고, 이미지의 경계이기도 하며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이기도 하다. 과거라면 위험지대가 되었을 경계가 가능성으로 바뀌었다는 것,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스타가 바로 이승기다.

'찬란한 유산', 핏줄의식에 대한 애증을 넘어서

'찬란한 유산'이 40% 시청률을 넘었다. 이런 드라마를 우리는 국민드라마라고 부른다. 도대체 무엇이 '찬란한 유산'을 국민드라마로 만들었을까.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극중 주인공인 고은성(한효주)이라는 캐릭터다. 고은성이라는 캐릭터가 국민들을 때론 울리고 때론 기쁘게 했던 것은 그녀가 가진 두 가지 측면, 즉 그녀의 추락과 상승 때문이다. 그녀가 추락할 때 우리는 그녀를 한없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상승할 때 그 승리의 기쁨을 함께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추락과 상승에 한 가지 모티브가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핏줄의식이다. 고은성을 추락시키는 것은 백성희(김미숙)의 친딸인 승미(문채원)에 대한 엇나간 모성애 때문이다. 자기 핏줄을 챙기기 위해 자식이지만 남의 핏줄을 내치는 비정한 모성애는 물론 극화된 것이지만, 우리네 스토리텔링 전통 속에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비뚤어진 욕망이다. 우리네 옛이야기 속에 무수히 다른 판본으로 등장하는 잔인한 계모의 이야기는 우리의 남다른 핏줄의식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한편 고은성이 그 핏줄의식으로 인해 떨어진 나락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것은 핏줄을 넘어서는 그녀의 사랑(이것은 거의 인류애에 가깝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바닥에서 봉변을 당한 할머니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데려와 극진히 보살펴주는 일은 혈연과 같은 핏줄의식의 배반이다. 핏줄의식으로 버려졌지만 바로 그 핏줄의식을 넘어서 자식 이상으로 인정받는 고은성의 성장담은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녀는 자신이 핏줄의식으로 인해 버려진 경험을 함으로써 비로소 그 핏줄의식을 버리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자기 핏줄만 챙기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존재들인가. 강렬한 핏줄의식 속에는 강렬한 죄의식 또한 자리한다. 고은성을 바라보며 핏줄의식의 사회가 내동댕이친 그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부채감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자기 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장숙자 여사(반효정), 그녀를 사랑하면서 변화하게 되는 선우환(이승기), 그녀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용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박준세(배수빈)는 모두 우리의 부채감을 대신해주는 분신들이다.

따라서 드라마는 바로 그 핏줄의식의 욕망을 넘어선 자리에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장숙자 여사는 친 자식이 아닌 고은성을 유산의 상속녀로 지목함으로써, 박준세는 아버지가 아닌 사회의 정의를 선택함으로써 그 핏줄의식의 욕망을 넘어선다. 물론 선우환의 사랑 역시 이것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유산(핏줄로 물려받게 될)을 빼앗아갈 지도 모르는 고은성을 그는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를 넘나드는 핏줄의식의 배반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진 혈연의 문제가 어느 특정 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숙자 여사는 잘못된 자식들을 일깨웠고, 박준세는 잘못된 아버지를 일깨운다.

'찬란한 유산'은 고은성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우리가 마음 속에라도 가지고 있었던 핏줄의식의 욕망들이 가진 죄의식을 일깨워 눈물로 정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찬란한 유산'이 40%가 넘는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고은성은 우리가 그토록 핏줄의식을 외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잊은 것처럼 저 편에 묻어두었던 타인에 대한 죄의식을 바라보게 만드는 캐릭터다. 우리가 그녀들에게 한 짓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줌마 팬을 따라가니 사회가 보이네

그녀들은 왜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이돌에 열광할까. 'MBC스페셜'이 던지는 질문은 최근 들어 새로운 팬덤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일명 이모 팬들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나 이민호, 김현중 같은 어린 친구들에 열광하고, 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거의 외듯이 보며, 팬 사인회나 콘서트장에 어김없이 찾아가는 것을 주변에서는 주책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일. 하지만 'MBC스페셜'이 포착하려 한 것은 단지 그 기이한 아줌마들에 대한 호기심어린 시선만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모 팬들의 인터뷰를 따라가면서 이들이 그렇게 스타에 열광하는 이유를 들여다 보다 보면 차츰 이 사회의 모습이 다시 그려지고, 그 사회 속에서 스타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도 다시 포착된다. 무엇보다도 이 사회 속에서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것이 갖는 무게감이 다큐멘터리를 자못 진지하게 만든다. 이것은 'MBC스페셜'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다큐의 방식이다. 사회의 현상을 다루되, 그 속에 있는 인간에 집중하는 방식.

이모 팬들은 저마다 "왜 이렇게 좋은 걸 이제야 알게 됐나"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반응 속에 숨겨진 것은 그동안 삶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그저 그 삶을 버텨내기만 해왔지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후회다. 점점 자기 자신에 집중하기보다는 누구의 엄마이자 누구의 며느리이자 누구의 아내로 자리하다 보니 차츰 자신에 소홀해진 것에 대한 한탄이다. 그러니 이모 팬들이 가진 젊은 그들에 대한 열광은 그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게 된다.

엄마도 아니고 며느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닌 한 여성으로서 자신을 위치지울 수 있다는 것은 스타라는 존재가 가진 힘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될 수 없어도 어떤 위안을 주고 변화의 계기가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지나간 청춘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팬으로서 스타에 열광하는 그 순간 현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모 팬들이 저마다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보다 밝아진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라는 존재를 분석하면서 '스타신화는 신앙과 오락 사이에 양자가 혼합되어 있는 지대에 위치'한다고 했다. 과학이 신을 몰아낸 현대사회에서 그 신의 위치를 대리해주는 건 다름 아닌 스타라는 것이다. 과거 종교의 시대에는 힘겨운 현실에 위안을 주고 희망을 던져주는 기능을 한 것이 종교였지만, 이제 그 시대는 저물었다. 이모 팬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들,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갖고, 변화를 겪고, 심지어 누군가를 위한 봉사의 손길까지 내미는 그 모습들이 어떤 면에서는 종교를 대체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MBC스페셜"이 보여준 이모 팬이라는 현상은 그 이면에 남겨진 우리 사회의 아줌마들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사회의 버팀목이랄 수 있는 그녀들의 침묵을 다시 듣게 해준다. 이것은 힘겨운 삶 속에서 어떤 위안과 희망을 얻는 그네들의 활동을 그저 주책으로 치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물론 신적인 존재로서의 스타 이면에 또 하나의 얼굴로 상품으로서의 스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작은 위안이 갖는 생각보다 큰 변화를 생각해본다면 이모 팬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MBC스페셜'은 자칫 이론적으로 접근했을 때 놓치기 쉬운 이런 감성적인 의미들을 인간에 집중함으로써 잘 포착해주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 '차우'와 '해운대'

무덤을 파서 사체의 머리를 먹어치우고, 어디선가 나타나 사람을 훅 채어 게걸스럽게 뜯어먹으며, 심지어는 인가에까지 내려와 무차별로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식인 멧돼지는 말 그대로 괴물이다. 그 괴물을 잡으러 숲 속 산장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비장해질 수밖에 없다. 긴박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 듯, 캠코더로 찍힌 듯한 영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순간, 캠코더를 든 사람이 말한다. "감정이 안 살잖아요. 다시 갈게요." 그러자 그 비장했던 사람들이 과장되게 연기를 한다.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온다. 공포에서 순식간에 풀려진 긴장이 만들어내는 웃음이다.

괴수영화를 표방한 '차우'에서 이런 웃음은 흔하다. 살인사건이라 판단되어 시골로 수사를 온 신형사(박혁권)는 엉뚱하게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행동은 장르 영화 속에서의 형사가 가진 긴장감을 해체시키면서 웃음을 몰고 온다. 포수 선후배 사이인 백만배(윤제문)와 천일만(장항선)이 심각하게 젊은 시절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설전을 벌이다가, 화를 내며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간 백만배가 다시 돌아와 놓고 간 총을 가져가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팽팽한 긴장감은 이처럼 어리숙한 행동 하나로 해체되고 순식간에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공포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거꾸로 기대한 만큼의 해체를 통한 웃음을 얻는다. 물론 긴박감 넘치는 멧돼지의 돌진과 그것을 피하려 달리고 달리는 인물들이 벌이는 사투는 장르 영화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과정을 지나가면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코미디로 버무려놓은 것이 다를 뿐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 기대감과 배반감이 동시에 어우러져 기분 나쁘지 않은 유쾌함을 주는 이 영화의 장르 변용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그 배반감이 너무 커 실망할 수 있겠지만 장르의 클리쉐가 파괴되는 순간을 즐기기만 한다면 의외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와 웃음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운대' 역시 재난영화라는 공식적인 장르에 걸맞지 않게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 '차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재난영화가 가진 재난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들어가는 드라마를 '해운대'는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다소 과장된 코미디로 채운다. '죽음 앞에 선 인간들'이라는 재난영화의 진지함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시종일관 터져 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 폭탄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 웃음은 의외의 수확을 얻은 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과정들을 촘촘한 웃음의 코드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수한 부산 사투리의 사람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일상들 위로 쓰나미가 밀어닥칠 때, 블록버스터로서의 면모는 비로소 드러난다. 해운대를 삼켜버리는 쓰나미를 연출한 CG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다이내믹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볼거리를 장악하는 힘은 영화 전반부 내내 쓰나미처럼 몰아친 웃음폭탄 속에 숨겨진 인물들 간의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들이 후반부를 덮치는 쓰나미 위에 겹쳐지면서 웃음은 고스란히 눈물로 전화된다.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볼거리의 재미를 부가시키는 것이다.

올 여름 우리식의 블록버스터로 지목되는 '차우'와 '해운대'가 모두 웃음을 주 무기로 갖추고 장르를 변용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되는 점인 동시에, 우리식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방향모색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공적인지는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볼거리의 롤러코스터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는 달리, 이 영화들은 시종일관 웃기고 울리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연출하는 것으로 색다른 재미를 구축한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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