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폿집 소주 그 소통의 맛, ‘엄마가 뿔났다’

‘엄마가 뿔났다’의 자식들 때문에 잔뜩 뿔이 난 엄마, 김한자(김혜자). 그녀에게 남편 나일석(백일섭)이 소주잔을 건네며 묻는다. “한 잔 할텨?” 김한자는 남편의 살뜰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소주잔을 거부감 없이 받아든다. 집안에서 엄마가 마시는 소주는 아버지가 마시는 소주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엄마는 소주 한 잔에 속내를 수다로 풀어내지만, 아버지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시커먼 속을 드러내는 것이 가족들에게 하등 좋을 것이 없기에 혼자 곱씹을 뿐이다.

주사라도 정겨운, 품위라도 갑갑한 술
‘엄마가 뿔났다’에서 술을 마시면 거침없이 속엣말을 해대는 쪽은 따라서 여자들이다. 김한자네 집에서 술을 권하는 사람은 나이석(강부자)이다. 그녀는 오빠와 아버지(이순재)를 찾아와 입버릇처럼 “술 한 잔 할래요?”하고 묻는다. 바람나서 남편이 도망가버린 이후로 그녀가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권하는 술은 자신의 풀 길 없는 속내를 받아달라는 신호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술만 마시면 주사를 부리는 나이석이 나일석은 늘 곤혹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예의 없는 행동이라도 그저 그뿐인 것은, 나일석 역시 그녀의 상처투성이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석과 나일석은 어딘지 모자란 듯 정이 가는 소주의 서민적인 얼굴을 그대로 닮았다.

반면 입만 열면 ‘품위’를 들먹이는 상류층 사모님, 고은아(장미희)가 닮은 것은 그녀의 손  위에 품위 있게 올려져 있는 와인이다. 그녀는 와인을 품격 있는 귀족적인 행위로서 마신다. 물론 이것은 그녀만의 시각이지 이 드라마가 와인을 보는 시각은 아니다(영수(신은경)와 종원(류진)이 함께 마시는 와인은 그런 부담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와인 정말 맛있어요”하고 말하는 고은아 앞에 억지로 앉아 와인을 홀짝이는 며느리 영미(이유리)는 그 자리가 고역이다. 그것은 고은아의 남편 김진규(김용건)나 아들 정현(기태영)도 마찬가지다. 그저 편하게 즐기면 되는 것이지만, 고은아가 마시는 것은 그저 술이 아니라 그 술에 잔뜩 품위라는 의미를 부여한 격식이기 때문이다.

소주와 와인, 그 충돌과 소통
이것은 저 격식은커녕 위아래도 없어 보일 정도로(?) 편안한 서민적인 모습의 나이석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영미와 정현이 결혼하기 전, 서로 상견례 자리에서 나일석의 잔과 김진규의 잔이 부딪쳐 깨지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나일석이 잔을 강하게 부딪친 것은 서민적인 소주문화에서는 그만큼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이지만, 와인문화의 외피에 경도된 고은아에게는 늘상 입에 달고 다니는 ‘품위 없는 행위’로 치부된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똑같은 와인 잔이었지만, 그 잔을 들고 있는 사람이 가진 문화적 차이가 서로 충돌했던 것이다. 바로 이 부딪침은 결혼 과정에서 벌어질 고은아와 김한자의 갈등 상황을 미리 예시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술은 그러나 태생적으로 이러한 계층 간 문화의 차이로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나일석네 막내로 잠깐 등장했던 나삼석(김상중)의 주사 에피소드를 통해 볼 수 있다. 나삼석은 가족의 뒷바라지로 성공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의사로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권위자이다. 이미 상류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그를, 나일석네 집을 대표해 몰아세우는 이는 다름 아닌 가장 서민적인 모습을 보이는 나이석이다. 계속 해서 파렴치한 인간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나이석에게 잔뜩 기분이 상해 술에 취해버리는 나삼석은 품위고 뭐고 내동댕이친 채 주사를 부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장면에서 이들은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며 정을 확인하게 된다.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술은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지만 무엇보다 속내를 드러내게 해주는 술은 서민적인 술, 소주다. 그것은 빈부와 계층을 막론하고 그렇다. 그러니 품격 있는 자리보다 마치 대폿집처럼 어딘지 허술한 자리가 더 정겨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가진 것 없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는 한, 그 곳에는 적어도 소통과 대화가 있다. ‘엄마가 뿔났다’의 김한자네 집이 보여주는 풍경은 바로 그 소주를 나누는 대폿집 풍경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수수한 정이 느껴지는 그 곳은.

‘1박2일’의 ‘서커스’, ‘우리 결혼했어요’의 ‘화분’

예능 프로그램이 점점 드라마화 되어가고 있다. ‘무한도전’이 포문을 연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리얼리티 상황극으로 시작됐지만, 이를 벤치마킹하면서 등장한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은 차츰 스토리를 쌓아 가는 드라마 형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특정한 소재에 천착하지 않는 ‘무한도전’과는 달리, 여행이나 결혼 같은 한 가지 소재를 통해 이야기의 일관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로드무비 ‘1박2일’, 로맨틱 코미디 ‘우리 결혼했어요’
여행이라는 소재로 구성되어 있는 ‘1박2일’을 하나의 드라마로 본다면 로드무비에 해당될 것이다. 로드무비란 여행을 통해 인물들이 예측 불허의 사건들을 만나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게 하는 형식의 영화(이 형식은 드라마에서도 활용된다)다. 1박2일 동안 독특한 개성의 캐릭터들이 겪는 야생의 추억은 회를 거듭할수록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한다. 처음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듯 보였던 그루밍족의 표상이었던 이승기는 차츰 야생에 익숙해지면서 지금은 어엿한 허당으로서의 캐릭터를 구축해냈다. 이것은 은지원이 가진 초딩 캐릭터나, MC몽이 가진 야생 원숭이 캐릭터와 마찬가지다. 이제 허당이나 은초딩, 야생원숭이 하면 그 캐릭터 이면에 있었던 어떤 사건과 그 스토리를 떠올리게 된다.

‘1박2일’보다 더 드라마적 요소를 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 ‘우리 결혼했어요’다. 이 프로그램은 결혼이라는 설정을 통해 네 쌍의 알콩달콩한 신혼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형식은 로맨틱 코미디와 거의 같다. 알렉스가 뭇여성들의 로망이 된 것은 그의 상대방이었던 신애에 대한 배려와 풋풋하면서도 성실한 사랑의 모습이 많은 여성들의 환타지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떤 환타지를 주지 못한 정형돈이 하차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진영을 완전히 갖추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크라운제이-서인영은 싸워가면서 정이 들어가는 커플을, 김현중-황보는 엉뚱한 연하와 누나 같은 연상 커플을, 앤디-솔비는 귀엽고 예쁘게 살아가는 커플을, 이휘재-조여정은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연상연하 커플을 캐릭터로 보여주면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간다.

드라마화된 예능을 통해 부각되는 노래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드라마처럼 스토리를 만들어가면서 그 안에서 불려지거나 OST처럼 활용된 노래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이 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가수인데서 비롯된다. ‘1박2일’의 이승기나 은지원, MC몽이 그렇고, ‘우리 결혼했어요’의 알렉스, 크라운 제이, 서인영, 김현중 등이 모두 가수들이다. 이렇게 된 것은 노래만 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려운 가수들의 현실적인 상황과, 상대적으로 배우들보다는 보여줄 게 많고(즉각적인 노래나 댄스 같은) 개그맨들보다는 신선한 가수들에 호감을 보이는 예능 프로그램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1박2일’을 통해서 이승기는 리메이크 앨범으로 발표된 ‘다 줄거야’나 ‘추억 속의 그대’같은 노래가 자주 소개되었다. 때론 배경음악으로 깔렸고, 때론 형들의 요청(복불복 게임의 벌칙 같은)으로 즉석에서 불려졌으며, 때론 갑자기 이루어진 게릴라 콘서트에서 불려지기도 했다. 이것은 은지원의 ‘ADIOS’도 마찬가지다. 각종 순위 차트에 이들의 노래들이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것은 노래 자체가 좋기도 하지만 ‘1박2일’의 OST(?)로서 얻은 프리미엄 효과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폭발력을 얻은 것은 MC몽의 ‘서커스’다. 이 노래는 게릴라 콘서트에서 불려진 날, 이원 생방송으로 ‘1박2일’에 ‘뮤직뱅크’ 1위 소식을 전했다.

MC몽의 ‘서커스’나 이승기가 리메이크해 부르는 ‘여행을 떠나요’가 ‘1박2일’의 성격 상 그 OST의 메인 타이틀에 해당한다면, 알렉스가 역시 리메이크해 부른 ‘화분’은 ‘우리 결혼했어요’의 메인 타이틀이 될 것이다. 프로그램을 하차하게 된 알렉스가 신애 앞에서 마지막이라며 부른 이 노래는 ‘우리 결혼했어요’에서의 그네들 커플의 이야기와 맞아떨어지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로맨틱 코미디의 라스트 신을 보는 듯한 극적인 효과를 주었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그 강화된 드라마적 구성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도 출연한 가수들의 새로운 입지의 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노래는 예능을 타고 온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예능과 가수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것은 한 때 드라마 형식의 뮤직비디오가 인기를 끌었던 현상과 유사하다. 같은 노래라도 어떤 설정이나 스토리가 가미된 영상과 함께 불려진다면 그 감흥은 배가 된다. 게다가 이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스토리는 뮤직비디오가 가졌던 짜여진 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 물론 그것은 가상이고 설정이겠지만, 그것을 보는 이들은 가짜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허구이지만 기꺼이 시청자를 빠져들게 만드는 드라마적 설정이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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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의 눈이 되려는 카메라의 눈

MBC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의 한 장면. 서우진(손예진) 기자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그들을 대상으로 짝퉁 명품을 팔아온 일당들을 잠입취재 한다. 이것은 ‘스포트라이트’의 ‘탐사저널’이라는 코너로 뉴스 심층 취재의 한 방식인 ‘탐사보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탐사보도란 사실보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사건 그 이면을 파헤치는 적극적인 언론보도방식을 말한다. 탐사보도가 주창하는 것은 사실은 진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명제다. 그 진실을 캐기 위해 기자들은 현장으로 직접 다가가며 그 과정을 잡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몰래카메라다.

대중들의 눈이 된 TV
우리에게 이러한 탐사보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추적60분’이나 ‘PD수첩’, ‘그것이 알고싶다’같은 코너들은 늘 사실로 포장된 것들을 파헤쳐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사회적 이슈로 끄집어올리는 역할을 해왔다. 정치인의 문제나, 권력 비리 같은 거대담론들이 탐사보도의 도마 위에 올려져 부끄러운 속살을 보인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 탐사보도는 이러한 거대담론에 주로 붙박여 있던 시선을 생활 저변으로 넓히고 있다.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관련 보도와 그 파장으로 알 수 있듯이 이제 정치적, 사회적 사안은 국회에서 벌어지는 ‘저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우리 생활이 되었다. 카메라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눈이 되어준다거나(‘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이나 ‘불만제로’), 인권에 있어서 사회적 폭력에 집중됐던 카메라가 가족 내 폭력에 눈을 돌리는(‘긴급출동 SOS’) 것은 이제 카메라의 시선이 좀더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거대담론에서부터 생활까지 전방위에 걸친 ‘고발하는 TV’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그만큼 신뢰성이 사라진 사회를 말해주는 동시에, 그만큼 대중들의 눈을 장악한 TV의 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심심찮게 이러한 ‘고발하는 TV’의 영상 속에서 사건에 연루된 관할 공무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이제 법망보다 카메라의 신뢰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인, 심지어는 대통령의 말보다 TV가 해주는 말을 더 신뢰한다. 이렇게 된 데는 불신의 사회와 그것을 파헤쳐 고발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온 TV의 유리한 입지가 만나서 생긴 결과이다. 이 때 그 영상을 잡아낸 몰래카메라는 대중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눈이 된다.

대중들의 욕망이 투영된 눈
하지만 이 TV의 공공성을 대변하는 듯한 탐사보도 형식의 ‘고발하는 TV’가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면을 들추어낸다’는 이 말은 진실을 찾는다는 지적 호기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한 감추어진 것, 혹은 금기된 어떤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이것은 영상과 만나면서 더 폭발력을 갖는다. 종종 탐사보도에 대해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상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최근처럼 이제 카메라가 거대담론이 아닌 생활을 비추게 되었을 때, 영상에 노출되는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영상들이 자극으로만 흐르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공익성이다. 공익성이 없이 ‘고발하는 TV’의 형식만을 취해 자극적인 엿보기 영상을 끄집어낸 대표적인 것이 케이블TV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페이크 다큐나 유사 다큐 프로그램들이다. 여기서 탐사보도의 시선을 따르는 카메라는 마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런 스튜디오를 활용한다) 사실은 엿보기라는 드라마의 자극적인 코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차용된 것뿐이다.

이것은 시사연예 프로그램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있는 ‘리얼스토리 묘’같은 프로그램이 고수하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과 동일하다. 이러한 프로그램들 속에서 카메라는 사실 이면의 진실을 파헤친다기보다는,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하는 은밀한 욕구의 대리자가 된다. 카메라를 두고만 봤을 때, 몰래카메라는 진실을 포착해내기 위한 훌륭한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과 은밀한 볼거리를 잡아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몰래카메라의 두 얼굴이자 ‘고발하는 TV’의 두 얼굴이다.

TV 전반에서 보이는 고발의 흔적들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고발하는 TV’의 영향은 탐사보도 프로그램만이 아닌 TV 전반에 걸쳐져 있다. 이것은 TV라는 영상매체가 프로그램을 막론하고 새로운 카메라의 등장이나 그 기법들에 거의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의 등장 이후부터 차츰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TV에 노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야심만만’이나 ‘상상플러스’ 같은 연예인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토크쇼 형식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리얼리티쇼가 봇물이 터진 것도 마찬가지다.

취재형식으로 초청된 게스트를 궁지에 몰아넣는 ‘무릎팍 도사’가 가능했던 것은, 연예계에 대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알고 싶은 대중의 욕구들이 이른바 ‘고발하는 예능’과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런 면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명랑히어로’는 ‘고발하는 예능’이 연예인 사생활 폭로 위주에서 시사문제 같은 공익적인 포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도 TV의 힘을 느낄 수가 있는데,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서 ‘100분 토론’이 100분 이상의 시간을 써가며 토론했던 이야기만큼, ‘명랑히어로’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시원스럽게 쏟아낸 말에 대한 반향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드라마마저 이런 기법들을 활용하고 있다. 종영한 ‘온에어’는 드라마 제작 과정에 벌어지는 연예계의 뒷얘기들을 폭로하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전략을 썼다. ‘온에어’ 자체는 환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갖고 있을 뿐이지만, 바로 이 ‘드라마가 드라마를 고발한다’는 이 부분에서 리얼리티라는 착시현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현재 방영중인 ‘스포트라이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포트라이트’가 고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탐사보도를 하는 방송기자들 자체다. 진실을 파헤치지만 그 진실은 정치적인 판단(드라마 상에서는 회장의 호화저택에 대한 진실과 방송기자의 성추행 문제를 서로 무마하기 위해 보도를 하지 않는다)에 의해 저지 당한다는 걸 드라마는 보여준다.

TV는 태생적으로 ‘보여준다’는 기능을 하고 있기에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양면성, 즉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거나 혹은 감춰진 시각적 욕망을 들추어내는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 이것이 점점 더 TV가 대중의 눈이 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시청자의 예리한 눈과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이유다. 카메라의 전략은 점점 현란해질 것이고 그만큼 영상이 전하는 정보에 대한 해독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의 눈은 더 밝아져야 한다.

왕을 사적인 존재로 다루는 이점과 한계

‘이산’은 정조라는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한 인간에 더 주목한 사극이다. 어린 시절, “이름을 불러다오”하고 이산이 요청하고, 거기에 대해 어색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성송연이 “산아”하고 답하는 장면은 이 사극의 입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러한 왕이라는 공적 존재에서 이산이라는 사적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이산’은 조선시대라는 위계질서 속에서도 수평적 관계 같은 현대적 맥락을 가져갈 수 있었다.

왕이 되기 전까지 사적인 존재로서의 이산의 행적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장점이 된다. 실제로 끊임없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이서진)의 몸부림과 그런 이산을 돕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은 이 사극이 주는 재미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도화서의 다모로 일하는 성송연(한지민)이 그림을 통해 이산을 돕는 설정 같은 것들은 이 사극만이 줄 수 있는 묘미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사극에 힘을 준 인물은 이산의 할아버지인 영조(이순재)와 홍국영(한상진)이다. 영조는 이산을 시험에도 빠뜨리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도 한다. 또한 노론 세력들의 위협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영조의 역할만으로는 이산을 보호해줄 수 없는 입장이 되자, 급부상하는 인물이 홍국영이다. 이 착하기만 한 이산을 돕기 위해 기꺼이 진흙탕 속에 뒹굴 수 있는 홍국영은 현실적인 인물로서 주목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영조가 죽고 이산이 정조라는 왕이 되었을 때부터 불거진다. 아무리 사극이 조명하는 것이 이산이라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왕은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존재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즉 이제 정치를 해야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데, 정치란 사적인 행적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만일 정조의 정치 자체를 이렇게 사적인 얘기로 풀어낸다면 자칫 조선시대 한 성군의 치적을 정치적 개혁과 타협의 성과가 아닌 끝없는 음모론과 밀실정치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즉 사적인 약점들을 캐내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만 강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산’은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개인을 다루겠다고 할 때부터 ‘이산’은 정치드라마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미묘한 입장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들이 나타나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는 복잡한 상황들은 저 ‘대왕 세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정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열광을 하겠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정치라는 단어 자체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이산’이 정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다루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예를 들면 금난전권 폐지 같은)에 더 중점을 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에 대한 시청자들의 혐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이 등장하는 박제가, 이덕무 같은 실학파 인물들이 사극의 중심으로 오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이산’이라는 사극에서 이산이 정조가 되었기에 반드시 해야할 정치적 책무들을 복잡한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인물들의 면면으로 쉽게 해결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 등장한 정약용(송창의)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라기보다는 오히려 발명가나 과학자의 면모로서 더 부각된다.

왕이 되었으나 사적인 얘기에 천착함으로써 ‘이산’이 사극 후반에 집중한 것은 홍국영과 성송연이다. 홍국영의 개인적인 야심을 부각시켰고, 그것이 정조와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에 더 집중했으며, 성송연의 의빈으로의 성장과정과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또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사극의 대부분이 할애되었다. 정조의 왕으로서의 정치적 업적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나 막연히 규장각 인물들이 하고 있거나 열심히 일하는 정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처리되었다.

‘이산’이 후반부에 와서 초반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산이라는 인물에만 집중하려 했다면 정조로 즉위되는 그 순간까지만을 사극으로 다루었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정조가 되는 그 순간부터는 이야기를 좀 다른 패턴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더라도 새로운 실학파 인물들과의 관계를 더 주목하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업적이 드러나게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극의 연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아쉬움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은 이러한 결과로 ‘이산’에서 더 주목된 인물들은 정조보다는 영조, 홍국영, 성송연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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