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연애시대’를 꿈꾸다

불륜이나 신파 없이 금요일 밤의 드라마를 채울 수 있을까. 한 때 이 질문의 답은 ‘없다’였을 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금요일밤의 트렌드를 장악해버린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강력한 불륜 앞에 그 어느 방송사의 드라마도 대적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8시 뉴스를 방영하고 곧바로 9시부터 그것도 2회에 걸쳐 파격 편성된 SBS의 드라마들이 성인드라마(거의 불륜이 많은)를 연달아 기획해왔던 이유는, 그 금요일이란 시간대 때문이었다.

한 편에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 버티고 서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주5일 근무제로 공백이 된 안방극장의 젊은 시청층 대신 남게된 중장년층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트렌드는 이제 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 본격적인 변화의 기류는 새로 시작한 금요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부터 비롯된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이제 31살 도시 직장여성들의 솔직 담백한 연애담을 담고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제목에서 보이듯이 ‘도시’와 ‘연애’다. 이 제목만으로 언뜻 떠오르는 건 바로 최근에 영화화된 ‘섹스 앤 더 시티’라는 미국 드라마다. 여기에는 뉴욕이라는 도시와 거기서 생활하는 네 명의 여성들의 연애담이 등장한다. 대신 ‘달콤한 나의 도시’에는 세 명의 여성, 오은수(최강희)와 남유희(문정희), 하재인(진재영) 이렇게 세 명의 여성의 이야기들이 중첩된다.

중요한 것은 ‘도시’라는 키워드다. 그것은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시티’가 뉴욕의 문화적 트렌드를 기본 바탕에 깔고 가는 것처럼, ‘달콤한 나의 도시’도 서울로 대변되는 도시의 문화적 트렌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주로 도시적 공간, 즉 영화관이나 카페, 술집, 혹은 원룸형 집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도시적 감성들을 잡아낸다. 바로 이런 세련된 부분들이 같은 금요일 밤의 연애 드라마라고 해도 질척하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드라마가 되는 이유다.

‘달콤한 나의 도시’가 꿈꾸는 이런 도시적 연애의 감성은 한때 명품드라마로 주목받았던 ‘연애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가 ‘연애시대’에서처럼 프리미엄드라마를 주창하고, 정이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며, 도시와 여성과 연애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박흥식 영화감독이 연출을 하고 있다는 점은, 역시 영화인들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었던 드라마 ‘연애시대’의 연장선상에 이 드라마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첫 1,2회를 통해 판단되는 것은 금요드라마가 이제는 불륜 없이도 된다는 것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31살의 연애담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의 수위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진한 딥키스와 처음 만나 하룻밤을 지내는 이야기는 파격적이지만 그것이 무리 없이 읽히는 것은 저 ‘섹스 앤 더 시티’가 무기처럼 들고 나왔던 그 솔직대담함 때문이다. 솔직한 주인공들의 대담한 이야기는, 오히려 감춰지고 숨겨짐으로써 구질구질해지는 멜로 드라마의 틀을 벗어나게 해준다.

이렇게 금요 드라마의 중심부에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게 된 것은 그간의 금요일 밤 성인 드라마들이 어떤 한계를 보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불륜드라마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점차 화제에서 비껴나게 된 금요드라마는 잘 하면 불륜에서 연애로, 금요트렌드를 바꿀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를 통해 제 2의 ‘연애시대’를 꿈꾸게 되는 것은 가장 비판받았던 금요 드라마를 가장 찬사 받는 명품 드라마 시간대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 역발상에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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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들의 두 가지 얼굴

‘일지매’로 새로 돌아온 이준기가 선택한 것은 이번에도 ‘두 얼굴을 가진 존재’였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을 잃고 과거와 현재, 그 두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역할은 ‘개와 늑대의 시간’에 이어 ‘일지매’로 이어진다. 이준기가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에 서 있었다면, ‘일지매’에서는 겸이와 용이 사이에 서 있다. 이런 야누스의 얼굴은 베테랑 연기자들마저 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이준기에게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준기의 두 가지 얼굴
한 드라마 속에서의 배역뿐만이 아니라 이준기 개인이 연기자로서 걸어온 길 또한 변신의 연속이었다. ‘마이걸’에서 곱상한 외모와 털털한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이던 이준기는 ‘왕의 남자’를 통해 여성적인 이미지로 변신한다. 그 이미지로 이준기는 각종 CF를 통해서 그루밍족의 표상처럼 구획된다. 문제는 ‘왕의 남자’를 통해 일약 1천만 관객의 스타가 된 이준기가 그 굳어진 이미지를 어떻게 벗어버리느냐는 데 있었다. 하지만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해 이준기는 연기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것은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이는 것이었다.

‘일지매’의 일지매 캐릭터가 갖는 야누스적인 성격, 정체성의 문제 같은 것은 역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빼 닮았다. 하지만 ‘일지매’의 두 얼굴이 갖는 의미는 ‘개와 늑대의 시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정체성의 혼동을 통한 관계의 역전을 이수현이란 캐릭터의 끝없는 변화과정을 통해 포착하고 있다면, ‘일지매’의 두 얼굴은 혼동의 시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찾고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일지매의 두 가지 얼굴
첫 회에서 멋진 갑의를 걸치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일지매는 저 스스로 말하듯 ‘못할 게 없는 존재’다. 하지만 이 못할 게 없는 일지매가 어떤 기억의 자각 이전으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청년, 용이(이준기)가 서 있다. 충격적인 아버지의 살해장면을 목격한 겸이가 기억을 지우고 용이가 되었을 때 그 앞에 던져진 삶은 쇠돌(이문식)의 자식으로서의 천한 삶이다. 천하다는 이유로 양반자제들에게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용이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한다. 그저 “살려주십쇼”하고 애걸할 뿐이다.

하지만 용이가 기억을 되살려내고 천한 존재로 치부되었던 자신이 귀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일지매가 탄생한다. 하지만 이 일지매라는 존재는 단순히 겸이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일지매는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 듯이 저 저잣거리에서 자신 때문에 기꺼이 이빨 하나 정도는 빼주고 바보처럼 웃어주는 쇠돌 같은 민초들이 더 이상 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일지매 속에는 겸이와 용이 이 두 인물이 교차한다.

천함과 귀함 사이에서 이 두 인물이 한 몸 속에서 갈등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저 세상의 잘못된 선 가르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일지매가 하는 것은 그 선을 넘는 일이다. 그가 서는 자리는 양반과 서민들 사이에서, 도적과 의적 사이에 서서 자신처럼 갈라진 정체성을 가진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보고자 함이다.

이 시대 청춘들의 두 가지 얼굴
이 일지매의 이중적인 의식(귀한 존재지만 천덕꾸리기 취급을 받는)은 이 사극이 왜 지금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서자 의식을 일깨운다. 386이 80년대 민주화를 통해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 깊은 경제 불황의 나락 속에서 ‘88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역사에서도 빗겨나 있고 현실에서도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일지매의 ‘기억을 잃고 부유하는 용이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꿈꾸는 세상은 용이도 아니고 겸이도 아닌 일지매이다. 즉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미래라는 뜻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이준기라는 연기자가 일지매를 통해 만나는 자신의 얼굴이다.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에 강렬한 피를 끓게 하는 남성적 이미지를 공유한 이준기는, 이제 이미지를 넘어서 이 시대의 청춘들이 공유한 두 가지 의식, 즉 청춘으로서의 쾌활함과 그 쾌활함 이면에 현실로서의 어두움을 공유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연기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현실참여에 적극적인 이준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지매의 이중적인 캐릭터와, 이준기의 이중적인 이미지, 그리고 이 시대 청춘들이 갖는 이중적인 얼굴은 모두 닮았다. 그래서 일지매가 웃고 있거나, 배우이자 한 청년으로서의 이준기가 웃고 있거나, 혹은 이 시대 청춘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것은 바로 그 아래 숨겨진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저들만의 역사를 허구 속에서라도 그려내고픈 ‘일지매’라는 파격적인 사극이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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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대화의 시대, 토크쇼에서 살아남기

‘투나잇쇼’로 잘 알려진 자니 카슨이나, 그 계보를 이어받은 제이 레노, 그리고 역시 토크쇼의 귀재로 동명의 쇼를 진행하는 데이비드 레터맨 같은 이들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1인 MC 체제를 꽤 오랜 세월 동안(‘투나잇쇼’는 거의 50년 가까운 전통이 있다) 유지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1인 MC체제의 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자니윤쇼’, ‘주병진쇼’, ‘이홍렬쇼’, ‘이주일쇼’, ‘서세원쇼’, ‘김형곤쇼’ 등등이 그것이다. 그 이름만 봐도 한 시대를 풍미한 개그맨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토크쇼는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대세는 집단 토크쇼다. 한 명의 MC가 아닌 여러 MC들이 나와 말들을 쏟아낸다.

인터넷 환경을 닮은 집단 토크쇼
이것은 정확히 쏟아낸다는 표현이 맞다. 과거의 1인 MC 체제의 토크쇼에는 기본적으로 질문-답변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하지만 집단 MC 체제에는 이러한 순서는 거의 무시된다. ‘명랑히어로’에서 김성주가 좀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김구라는 아예 그 이야기 자체를 끊어버리고 자신의 이야기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김구라의 이야기 도중에도 신정환은 계속 엉뚱한 이야기로 맥을 끊으려 노력한다. 심지어 카메라가 신정환을 잡고 있는 와중에도 말들을 계속 튀어나온다. 그것은 자막의 형태로 마치 만화를 보는 것처럼 화면 속에 들어온다.

집단 토크쇼의 묘미는 비록 글자로서라도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말의 상찬에 있다. 아마도 과거의 토크쇼에 더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 정신산란한 말과 글자가 범람하는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의 홍수와 그 홍수 속에서의 순간적인 집중에 대한 훈련을 늘 디지털 사회 속에서 해오고 있는 요즘의 시청자들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정보가 너무나 일목요연한 1인 체제의 토크쇼를 보며 그 단순함에 하품을 할 지도 모른다.

과거의 중앙 집중식 토크쇼 형식이 점점 사라지고, 중앙이 없이 서로 주장들이 난무하는 집단 토크쇼로의 변화는 작금의 인터넷 환경을 닮아있다. ‘라디오스타’에서 서로 자신이 메인 MC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스란히 인터넷에서의 대화방식을 닮았다. 인터넷에서의 대화 방식이란 중앙이 없고 대신 무수한 중앙들이 서로의 주장을 하며 부딪치는 형태다. 이처럼 수직적인 대화구조가 수평적인 형태로 변모하면서, 어느 한 사람의 주도 하에 끌려가는 1인 MC체제의 토크쇼는 점점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집단 토크쇼, 달라지는 MC들
이렇게 대화방식이 달라지고 그 방식을 수용한 집단 토크쇼들이 등장하자 MC들도 달라졌다. 물론 집단 토크쇼에서도 메인 MC는 존재하지만 그 힘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해피투게더’의 유재석은 메인 MC임이 분명하지만, 프로그램에서 너무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그 날 출연한 게스트들의 웃음 포인트를 콕콕 집어내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이것은 유재석이 이 시대에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 MC 0순위의 자리에 올랐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최근 주목받는 MC로서 강호동도 마찬가지다. 강호동의 스타일이 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유재석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할은 그렇지 않다. 강호동은 좀 공격적인 방법으로 게스트들의 웃음 포인트를 끄집어 내주고 있을 뿐이다. 공격적인 질문만큼 답변에 대한 과장된 리액션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은, 씨름을 했던 선수라면 당연할 ‘천부적인 균형감각’을 토크쇼에 있어서도 강호동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호동의 장점은 좀더 강한 토크의 세계 속에서도 유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초창기 ‘무릎팍 도사’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원인이다.

집단 MC 체제는 그 형태가 기본적으로 이야기 배틀의 구조를 가져가기 때문에 그 상황 속에서 특유의 재능을 가진 MC들을 주목시킨다. 그 대표적인 MC가 신정환이다. 신정환은 특유의 순발력과 재치로 TV에 등장하자마자 토크쇼의 강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물론 탁재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근 탁재훈은 메인 MC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생기면서 오히려 초창기의 이미지를 아쉽게 만들고 있다. 지금은 옆자리에 앉아서 툭툭 던지는 촌철살인의 말들이 가장 중심에 서서 하는 말보다 더 주목받게 되는 시대다.

옆자리 토크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
바로 이 ‘옆자리 토크’가 우세한 시대가 낳은 스타가 김구라다. 그는 누군가 하는 말을 받아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었다. 받아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강렬한 인상을 줘 독한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지만 김구라는 그 부분을 솔직함과 공감으로 넘어선다. 실제로 가끔씩 던지는 사회에 대한 쓴 소리는 그것이 의미가 있든 없든 간에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다.

오랫동안 메인 MC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해온 이경규는 이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 스스로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명랑히어로’에 나온 이경규가 박미선에게 “너랑 같이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미선은 메인의 입장에서 한참 동안의 공백을 통해 변방으로 내려와 집단 토크쇼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해피투게더’에서 후배 박명수를 웃기기 위해 굴욕을 거듭하며 한없이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박미선은 편안한 아줌마의 이미지로 집단 토크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 돌아온 김국진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시대의 대화방식을 차용한 집단 토크쇼는 거기에 걸맞은 MC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 변화는 바로 수직적 체계에서 수평적 체계로의 이행이다. 라인 문화가 공공연히 프로그램 속에서 회자되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수직적인 체계인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라인 문화(일단 이 용어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보다는 팀 문화가 더 어울리는 시대다. 옆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이 변화된 토크쇼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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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아버지들, ‘되고송’을 불러라

아버지는 늘 한 자리 물러나 앉아 계셨다. 다들 모여 밥을 먹을 때도, 함께 놀러갈 때도, 심지어 저녁에 모처럼 모여 TV를 볼 때도 늘 한 자리 뒤쪽에 앉아 계셨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우처럼 보였다. 특별대우 말이다. 하지만 퇴직 전에도 그랬지만 퇴직 후에도 아버지는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가족 중 누가 말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실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자기 삶을 늘 뒷전에 두고 계셨던 아버지는 새삼스레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주어진 것이 못내 어색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늘 뒷전에 있는 아버지에 익숙해진 가족들의 관성은 아니었을까.

이른바 아버지 수난 시대에 살아가는 지금의 아버지들은 가장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혀 살아왔다. 젊어서는 경제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산업의 현장에서 밤낮 없이 일했고, 이제 그 결실을 얻어야 할 나이에 IMF를 맞았다. 평생 등골 휘게 살아온 대가로 돌아온 보상이라곤 구조조정으로 일찌감치 명퇴한 아버지가 앉을 뒷전뿐이었다. 어린 시절 권위의 상징처럼 보였던 아버지, 그 자리에 자신이 와 있건만 자꾸 뒤로 밀려나면서 가슴 한 편에 남는 공허함은 도대체 뭘까. 권위의 끝자락에서 보게 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엄마가 뿔날 때, 아버지는 왜?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엄마 김한자(김혜자)다. 제 맘대로 되는 자식 없다고 김한자는 자식 하나 하나가 미덥지 못하다. 참다 참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김한자는 결국 뿔을 낸다. 엄마의 뿔은 온 가족을 비상으로 몰고 간다. 가족들은 모두 엄마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뿔을 가라앉힐까 고민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어떤가. 같은 부모 입장이 다를 리 없겠지만 나일석은 그 와중에도 아내 김한자의 심기를 살피기에 바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아내를 뿔나게 한 자식에게도 똑같이 마음을 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늘 어느 한 편만을 고집하지 않는 이 몸에 밴 습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회생활 속에서 위로 눈치보고 아래로 눈치보며 살아왔던 세월의 흔적은 아닐까.

이렇게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마인 김한자는 축복 받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뿔나는 일이 있어도 늘 살뜰히 신경 써주는 남편이 있고,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발견할 수 없는 멋진 시아버지(이순재)가 있다. 게다가 시누이(강부자)는 거의 친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격이 없고 친근하다. 이 뿔난 엄마네 가족을 찬찬히 살펴보면 가장 쓸쓸한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낮이면 세탁소 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가 저녁이면 밥상머리에서 아내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바로 그 존재다.

엄마의 세상, 지워져버린 아버지들
요즘은 이른바 엄마의 세상이라고 한다. ‘엄마마케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자잘한 선택의 순간에까지 엄마의 파워는 그만큼 강력해졌다. TV드라마는 바로 이런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최근 들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는 아줌마드라마의 배경 역시 바로 이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엄마들은 서민적 삶이 주는 끈끈함을 체험하다가(엄마가 뿔났다), 바람난 남편에 대한 상쾌한 복수를 하고(조강지처클럽), 상류층의 삶을 대리경험(행복합니다)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에 잘 생긴 젊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아줌마 신데렐라(천하일색 박정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왜소해지고 있다. ‘천하일색 박정금’의 박정금이나 ‘온에어’의 서영은(송윤아)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 싱글맘이고, ‘행복합니다’에서의 남자들은 여자에게서 선택받는 신데렐라거나(이준수, 이훈역), 아이까지 갖게 하고는 도망친 남자거나(박상욱, 이종원역), 그 버려진 아이까지 떠맡아 기르려는 남자이거나(이용재, 김철기역), 죽은 아내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진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남자(이철곤, 이계인역)들이다.

아버지들이여 ‘되고송’을 불러라
“부장 싫으면 피하면 되고, 못 참겠으면 그만 두면 되고, 견디다보면 또 월급날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통신사의 ‘되고송’. 특유의 긍정어법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노래 가사의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하다. 그것은 ‘○면 ☆되고’가 반복되는데 여기서 ‘○면’의 ○은 부정적 상황을 말하고, ‘☆되고’의 ☆는 그 부정적 상황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말한다. 그러니 가사가 계속 반복되면서 안 좋은 상황들은 하나하나 긍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쐐기를 찍듯이 후렴구처럼 ‘생각대로 하면 되고’로 끝나면서 ‘모든 건 생각에 달렸다’고 되짚는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아버지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이제 이 달라진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긍정 속에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책하면서 뒷전을 찾아 서는 아버지들의 진짜 자리를 찾는 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잊고 있던 꿈이라도 들춰내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자. “회사 잘리면 내 생활하면 되고, 누가 뭐라면 그저 웃어주면 되고, 삶이 힘들면 잠시 쉬면 되고, 못 참겠으면 뿔 내면 되고,” 그렇게 되고송을 부르자. 뿔이라도 내보자.
(이 글은 한국원자력연구원 (http://www.kaeri.re.kr/) 사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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