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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정덕현
에 나타난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구질구질한 관계도 궁상맞은 눈물도 안녕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자 이제 ‘여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간에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아줌마들의 등장이다. 이름하여 ‘발칙한 여자들’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했다. 1970년대에는 말 잘 듣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같은 시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며느리는 심지어 다른 남자와 바람났다고 모함 받기까지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을 정도다(1972년 드라마 ‘여로’에서). 이러..
연천 전곡리선사육적지 깊어 가는 가을 날, 한적하게 그 가을의 색을 느끼고 싶다면 연천으로 가라. 교과서 속에서만 보았던 그 현장을 직접 발로 디뎌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또한 가을의 향을 만끽해보자. 그리고 신북 열두개울에서 가을의 풍류를 느껴보자. 선사의 땅, 전곡리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시원하게 하고, 파란 하늘이 눈을 시원하게 하는 가을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연천으로 달린다. 그곳에 있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인 전곡리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픈 마음 때문이다. 물론 연천을 찾는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유적지에 펼쳐져 있을 파란 잔디밭이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그 넓은 잔디밭은 사람도 별로 없으니 오롯이 우리 가족 차지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잔디 위를 맘..
와 소수자의 문제천하장사와 마돈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할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이미지는 그러나 오동구라는 한 뚱보 소년 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근거 없이 가졌던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천하장사와 마돈나, 남성성과 여성성, 소년과 기성세대, 꿈과 현실, 소수자와 다수자 등등. 전혀 한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결구도를 보여 전혀 결합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편견에 의한 것이라는 걸 꼬집는다. 마돈나와 동구 사이 영화는 어린 동구의 허밍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마돈나의 ‘like a virg다. 그의 귀..
양양 법수치 계곡, 하조대, 기사문항 발을 물에 담그는 행위는 그간 지치고 힘든 나날들에 대한 스스로의 위안이다. 양양 법수치 계곡 그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흐르는 강물처럼 마음도 저 바다로 흘러간다. 그 물이 닿는 하조대에서 철지난 바닷가를 느끼고 기사문항으로 달려가 구수한 어촌풍경에 젖어보자. 고기가 지천인 어성전으로 가자 얼마나 고기가 많았으면 이름을 어성전(漁城田)이라 붙였을까. 말 그대로 ‘물고기가 많은 밭’이란 뜻이다. 대관령을 넘어가면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풍광에 눈멀어 그저 지나치고만 곳, 어성전.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다 어성전이란 이정표에 끌려 산골로 접어든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한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만나는데 그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하다. 한 여름이었으면 ..
비뚤어진 시각으로 각설탕 보기 ‘각설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달리는 천둥이일까, 아니면 그 말 위에 있는 시은이일까. 반려동물영화라면 당연히 그 포커스는 천둥이와 시은 양쪽에 맞춰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드라마 흐름은 그 포커스를 시은쪽에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는 참혹하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퇴색되고 ‘우정을 빙자한 동물 학대’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이 영화는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극처럼 보여진다. 눈물을 나오지 않고 대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달콤한 이미지의 ‘각설탕’이라는 제목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화적 맥락 속에서 그 제목은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동물’의 주종관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홍상수의 속 이미지의 문제 해변이 주는 이미지는 발랄하다. 그래서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이란 제목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강요한다. 여름, 바닷가,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등등.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단 몇 분만 지나면 알게될 것이다.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들은 사실 우리들의 해변에 대한 잡다한 기억들이 만든 편견이라는 것을. 홍상수 감독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흔히 극장 안은 환상의 세계고 극장 밖이 현실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홍상수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여름? 아직까지 황사가 날리는 봄이다. 바닷가..
김기덕 vs 괴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 ‘1000만’ 관객을 ‘단 21일만’에 돌파한 괴물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며 너도나도 ‘괴물 보자’고 달려가는 지금의 현상은 숫자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것은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숫자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괴물을 보지 않으면 수준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딜 가도 화제가 되는 그 이야기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결과적으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기저에는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일반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날아온 ‘영화제에서의 호평’이라는 외신은 ..
내 청춘에게 고함흔히 ‘마이너리티’라고 하면 숫적으로 적은 집단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마이너리티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건 영화계만 봐도 극명히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계 전체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메이저’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개봉 21일만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전국을 강타한다고 해도 그건 단 한 편의 영화일 뿐이다. 빛의 이면, 즉 그림자 속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인생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다면 ‘청춘’은 어디에 속할까.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속에 잘 적응되어 그 주류사회에 편입한 노회가 메이저라면, 청춘은 단연 모든 것이 미숙하고, 그래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가 될 것이다. 게다가 메이저 사회는 이들 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