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과 해방을 꿈꾸는 박해영 작가의 세계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화제다. “날 추앙해요”라는 비일상적인 대사가 일종의 밈이 되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을 정도다. 예사롭지 않은 <나의 해방일지>는 무슨 이야기고, 이 작품을 쓴 박해영 작가가 일관되게 그리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일지>와 <나의 아저씨>의 평행이론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속 인물들은 자주 길을 걷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길은 출퇴근길이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주로 퇴근길 풍경이 담겨졌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 스트레스에 쩔은 박동훈(이선균)은 그렇게 퇴근길에 정희네 선술집에 들러 그 곳에 모인 사람들과 술 한 잔으로 피로를 푼다. 그 곳에는 한때는 이사님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퇴직해 아파트 경비나 청소 같은 일을 하게 된 중년의 아저씨들이 모여든다. 아저씨들은 한바탕 술자리 후 얼콰해진 얼굴로 술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그 길이 훨씬 멀어졌다. 경기도 수원 근처 산포시의 외진 곳에 사는 삼남매는 매일 시골길을 걷고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간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터에서 지긋지긋한 스트레스를 버텨내고 퇴근 후 술을 마시다가도 전철 막차 시간에 맞춰 일어나 그 먼 길을 돌아온다. 하루 종일 출퇴근만으로도 피곤하지만, 주말에도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전원생활의 낭만 따위는 없다.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 속 길을 걷는 인물들은 자신의 일상 속에 갇혀 흔들리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 일상을 틈입하는 이질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범죄의 냄새를 풍긴다.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이 그렇고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손석구)가 그렇다. 이지안은 박동훈이 일하는 회사의 사무보조고, 구씨는 어쩌다 이 외진 곳까지 들어와 삼남매네 아버지가 운영하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이지안은 사채 빚 때문에 시달리며 박동훈에게 들어온 뇌물을 훔치는 것으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구씨는 매일 알코올중독자처럼 술만 마시는 그에게 삶이 답답해 미치겠던 삼남매 중 둘째 염미정(김지원)이 뜬금없이 “날 추앙해요”라고 요구하면서 그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박동훈과 이지안 그리고 염미정과 구씨는 각각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서로 얽히면서 서로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채워질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박동훈과 이지안이 40대와 20대의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인간애’에 가까운 휴머니즘의 관계를 그렸다면, 염미정과 구씨는 시작부터 사랑으론 부족하다며 ‘추앙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이처럼 <나의 해방일지>와 <나의 아저씨>는 그 구도가 평행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이 진짜 닮은 건 박해영 작가가 보여주는 태도다. 그는 마치 구도자처럼 화두를 던진다.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번뇌가 왜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탈주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편안함과 해방을 꿈꾸는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

사실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부터 이런 구도자 같은 태도가 생겼다. 물론 직장생활의 만만찮은 현실이나, 풍자적인 코미디 같은 요소들은 <올드미스 다이어리>부터 <청담동 살아요>, <또 오해영>으로도 이어지는 일관된 면모들이었지만, 이들 작품은 시트콤이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장르적 색깔과 재미에 충실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부터 <나의 해방일지>로 이어지면서는 코미디에 페이소스가 깊어졌고, 장르적 틀에 안주하기보다는 그 바깥으로 튀어나가 말하고픈 메시지를 좀 더 과감하게 풀어내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삶 속에서 끝없이 관계의 피곤 속에서 번뇌하는 현대인들에게 다분히 종교적인 느낌까지 묻어나는 초월적 관점이나 해법들을 던진다. 

 

<나의 아저씨>가 던진 화두는 애써 버티며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편안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질문이었다. 건물의 안전진단을 하는 건축구조기술사 박동훈은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며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이긴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내력으로 외력을 버텨내는 삶은 고단하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는 버텨내는 걸 포기함으로써 편안함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던 박동훈이 결국 회사를 나와 새로운 길을 찾는 모습이 그렇다. 정희네 술집에 퇴역한 아저씨들이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망가져도 더 이상 버티려는 욕망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편안해질 수 있다는 다소 불교적인 화두를 던진 것. 

 

<나의 해방일지>의 화두는 모두가 ‘같은 욕망’을 꿈꾸게 함으로써 가짜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거짓 삶으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질문이다.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미정이 구씨에게 어느 날 갑자기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를 꺼낸 건 ‘사랑’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오염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는가를 말해준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같은 말들이 어디서나 쉽게 튀어나오는 세상이 아닌가. 행복도 마찬가지다. 미정이 다니는 회사의 ‘행복지원센터’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동아리 모임을 지원하는 부서지만, 그런 지원이 과연 진정한 행복을 줄 것인지 미정은 믿지 못한다. 억지로 동아리를 만들라는 강권에 미정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해방클럽’에, 그 행복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 소향기(이지혜)가 들어오며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해방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단은 이 표정. 무표정이 안돼요. 눈앞에 사람이 보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이렇게 웃을 정도로 좋지도 않은데 사람만 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그래서 상갓집 가는 게 너무 힘들어요. 상갓집 갈 때마다 억지로라도 무표정 해보려고 애쓰는데... 힘들어요.” 가짜 웃음, 가짜 행복, 가짜 사랑. 자본화된 사회가 제안하는 평범으로 포장된 같은 욕망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이 드라마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모색한다. 그 해방클럽은 그래서 세 가지 강령을 제안한다. 첫째, 행복한 척 하지 않기. 둘째, 불행한 척 하지 않기. 셋째, 정직하게 보기.

 

뻔한 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드라마 작가

작품에 담긴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박해영 작가의 이런 태도는, 그의 작품이 통상적인 작법과 뻔한 틀로 그려지는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염미정의 입을 빌려 상투적으로 드라마에서 쓰이곤 하는 “심장이 뛰게 좋다”는 통상적인 표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난 그 말을 이해 못해. 심장 뛰게 좋다는 말.... 내가 심장이 막 뛸 때는 다 안 좋을 때던데. 당황했을 때, 화났을 때, 백 미터 달리기 전. 한 번도 좋아서 심장이 뛴 적이 없어. 정말 좋다 싶을 땐 반대로 심장이 느리게 가는 거 같던데? 뭔가 풀려난 것 같고. 처음으로 심장이 긴장을 안 한다는 느낌.” 즉 그에게 너무나 좋은 기분은 ‘두근거림’이 아니고 ‘편안함’이다. 따라서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구씨와의 관계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떤 갈망 때문에 심장이 뛰는 그런 순간들이 아니고, 어느 날 무심하게 구씨가 툭 던진 문자메시지로부터 확인되는 관계의 편안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특별한 말을 애써 하지 않아도 되거나, 혹은 이 말을 할까 말까 고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막 튀어나오는 대로 말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함의 순간. 당연히 이 드라마 속 염미정과 구씨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의 전개도 통상적인 드라마들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물론 박해영 작가 역시 아직까지 뻔한 드라마의 공식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처럼 끝없는 구도의 관점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정직하게 보려는 노력과, 오염된 일상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문학적 서사와 은유를 동원하는 방식은 그가 사유에서나 작품을 통해서나 뻔한 틀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모든 게 기획되고 효과와 결과로서 평가되는 시대에, 이런 자세와 태도를 꿋꿋이 밀어붙이는 작가가 있다는 건 실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어쩌면 틀에 박힌 우리의 허위로 가득한 삶과 그걸 반복하는 그렇고 그런 드라마들을 해방시켜주는 선구적 역할을 할 테니.(글:시사인, 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가 해방시킨 배우들의 무한 매력들

나의 해방일지

김지원 하면 먼저 떠오르던 작품이 <태양의 후예>였다. 윤명주라는 캐릭터는 서대영(진구)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사랑받았고 김지원은 인생캐릭터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제 김지원의 인생캐릭터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으로 경신되지 않을까. “날 추앙해요”라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거의 유행어가 된 대사가 한동안 김지원이라는 배우를 따라다닐 것일 테니 말이다. 

 

좋은 작품은 좋은 캐릭터들이 있기 마련이고, 좋은 캐릭터들은 배우들의 매력을 끄집어내기 마련이다. <나의 해방일지>가 그간 숨겨져 있던 배우들의 무한한 매력을 해방시키고 있다. 김지원이 염미정이라는 인생캐릭터로 툭툭 던지는 엉뚱한 말들은 묘하게도 이 배우가 가진 차분하면서도 내면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듯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배우의 매력을 해방시키는 건 예사롭지 않은 대사들이다. “날 추앙해요”도 그렇지만 염미정이 구씨(손석구)와 함께 밤중에 산길을 오르며 깔리는 내레이션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어려서 교회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염미정과 함께 이른바 ‘추앙커플’로 불리는 구씨도 만만찮다. 아마도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 이 인물은 대사도 별로 없고 일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는 게 대부분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다 갑자기 멀리 뛰기 선수처럼 훌쩍 어떤 무한의 경계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더니,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안하는 자신을 염미정이 “쫄게 한다”는 말로 기막힌 추앙의 감정을 드러낸다. 

 

<마더>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했던 손석구는 <최고의 이혼>에서 이엘과 호흡을 맞추며(그러고 보니 <나의 해방일지>로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를 보여준 바 있다. <멜로가 체질>과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로 이어진 손석구의 이런 분위기 있는 연기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드디어 귀결점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 

 

염미정의 언니로 왜 날 아무도 사랑하지 않냐며 시종일관 투덜대지만 어딘가 그래서 귀여운 염기정 캐릭터를 입은 이엘과, 그 염기정과 조금씩 가까워지며 연인이 되어가는 조태훈(이기우) 역할을 연기한 이기우도 마찬가지다. 차였지만 찬 것 같은 기분에 좋아하는 조태훈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염기정이 드디어 조태훈과 연인 관계가 되는 순간은 역시 예사롭지 않은 박해영 작가의 대사로 두 캐릭터가 빛을 발했다. 

 

엉뚱하게도 머리만 밀면 해방될 것 같아 올 겨울엔 ‘아무나’ 사랑하든 머리를 밀든 둘 중 하나는 하자고 결심했다는 염기정에게 조태훈이 던지는 대사가 심쿵 그 자체다. “머리 밀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아무나.” 머리 밀지 말라는 대사도 곱씹어보면 너무 웃기고, 아무나라는 표현도 웃기지만 이토록 심쿵한 사랑고백이 있을까 싶다. 이러니 이 배우들까지 반짝반짝 빛나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인생캐릭터’를 이야기하며 염창희 역할의 이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없이 조잘조잘 투덜대며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인물. 그런데 이 인물이 끝없이 던지는 이야기들은 기상천외하고 엉뚱하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간다.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차, 그것도 5억이나 가는 차를 구씨를 통해 얻어 타게 된 염창희가 그런 경험이 자신을 ‘여유롭게’ 바꿔놓았다고 말하는 대사가 그렇다. 

 

할머니 산소, 동네 저수지 같은 곳을 혼자 그 차를 타고 다녔다는 염창희는 의외로 자랑하러 다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자신을 우연히 만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털어 놓는다. “몰랏는데 나 운전할 때 되게 다정해진다. 희한하게 핸들 잡자마자 다정해져. 어려서 사회과부도 보는 거 좋아했거든? 희한하게 그것만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머릿속으로 막 다녀. 춘천도 가고 광주도 가고 부산도 가고 울릉도까지. 꼭 그 때 같애.” 갈망할 때는 투덜대기만 했는데, 막상 하게 되니 여유로워지는 마음. 그걸 ‘다정’이라고 표현하는 대사로 염창희라는 캐릭터가 그걸 입은 이민기라는 배우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삼남매의 동네 친구로 지긋지긋한 도시의 삶을 질깃질깃하게 살아내는 지현아 역할의 전혜진, 염기정의 동창이며 조태훈의 누나인 조경선 역할의 정수영, 염기정 회사의 로또 선물하는 이사로 갈수록 매력을 드러내는 박진우 역할의 김우형, 진짜 그런 곳에서 싱크대를 만들고 있을 것만 같은 염제호 역할의 천호진, 역시 딱 진짜 같은 삼남매 엄마 곽혜숙 역할의 이경성,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네 카페 사장 오두환 역할의 한상조, 가끔 찾아오는 초등학교 교사 석정훈 역할의 조민국까지... 배우들이 저마다 빛난다. 작품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인생캐릭터라니... 배우들이 추앙할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JTBC)

‘안나라수마나라’, 괴물신인 최성은의 마법이 던지는 질문

안나라수마나라

뮤지컬 드라마라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라수마나라>가 뮤지컬 드라마라는 이야기는 어딘가 이 작품이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진지한 장면에서 대사가 아닌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 풍경. 마치 인도 영화를 보다보면 갑자기 출연자들이 튀어나와 노래하고 춤추는 그런 광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나라수마나라>? 제목이 뭐 이래?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제목은 더더욱 이 드라마가 그릴 세계가 현실에서 몇 발짝 위 허공으로 띄워 올려진 그런 세계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그렇다.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빠는 빚쟁이에 몰려 역시 도망친 윤아이(최성은)가 어느 날 폐쇄된 유원지에서 대뜸 “당신은 마술을 믿습니까?”라고 묻고는 갖가지 마술을 보여주는 마술사(지창욱)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현실이지만 동생 유이까지 챙겨야 하는 윤아이는 가끔씩 찾아오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학교에서는 돈이 없어 구멍 난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알바를 전전하다 편의점 사장에게 성추행까지 당할 뻔한 윤아이는 다행히 마술사의 도움을 받고, 마술사가 보여주는 마법 같은 시간 속에서 잠시 현실을 잊고 행복해한다. 

 

하지만 그건 잠시 동안의 행복일 뿐, 부모 없이 살아남아야 하는 윤아이는 이름과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점점 어른 같은 고민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반면 어른이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해맑은 얼굴로 나타나 마술을 믿냐고 묻는 마술사는 윤아이에게 마술과 마법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무언가를 나타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건 마술이지만, 그걸로 누군가 행복해하고 웃는 건 마법이라고. 

 

<안나라수마나라>는 마술이라는 소재를 가져와 그걸 믿느냐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아이와 어른을 구분한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아이와 그런 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른의 차이를 마술이라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신기한 광경들로 구분해내는 것. 그러면서 마술이라는 어찌 보면 그다지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일과, 이른바 지위나 돈 같은 걸로 평가되는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일 앞에서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윤아이를 좋아하는 나일등(황인엽)은 검사장인 아버지(유재명)가 재력과 지위의 힘으로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앞서 달려 나가는 삶을 살아왔다. 늘 일등인 것만 중요하고, 그 끝에는 아버지가 원하는 법조인이 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삶. 하지만 윤아이를 통해 마술사를 만나면서 나일등을 깨닫게 된다. 정작 그 삶에 ‘나’는 없다는 걸. 내가 원하는 삶은 애초부터 지워져 있었다는 걸. 그는 윤아이가 마술사에게 마술을 배우며 행복해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자신도 그런 꽃밭 같은 길을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안나라수마나라>는 오로지 성공해 돈과 지위를 얻어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폭력을 이야기한다. 그 모두가 정해놓은 길과 틀을 벗어나며 실패자가 되고 정신병자가 되며 심지어 범죄자로 몰린다. 그래서 그 공포 속에서 아이들은 꿈을 꾸지 않고 그저 어른들이 정해 놓은 길을 더 앞서 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만든 건 어른들이다. 윤아이는 어른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도 제멋대로 왜곡되는 현실을 겪으며 말한다. 자신이 힘든 게 돈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른들 때문이었다고. 

 

과연 당신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안나라수마나라>는 부모 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윤아이와 부모가 깔아놓은 아스팔트 위만을 달려오며 정작 저 편의 꽃길로는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않았던 나일등, 그리고 무거운 현실로부터 튕겨져 나가버림으로써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처럼 되어버린 마술사가 겪는 사건들을 통해 그런 질문을 던진다. 

 

뮤지컬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던 요소들은 이러한 묵직한 현실적인 질문을 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던지는 과정에서 정말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한다. 믿을 수 없는 마술적인 풍경들이 음악과 더해지면서 오히려 믿고 싶은 광경으로 바뀐다고나 할까. 마술사 역할을 연기한 지창욱이야 이미 여러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 연기력이 잘 알려진 배우지만, 이 작품에서 놀라운 건 윤아이라는 역할을 연기한 최성은이다. 

 

아직 아이지만 어른들의 세상에 내던져져 갖게 되는 깊은 슬픔을 그가 작품 전체에 깔아줬기 때문에 마법 같은 많은 순간들이 ‘믿고 싶게’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그의 눈물과 환한 웃음에 담겨 강렬해진 이 작품의 질문이 그렇다. 끝내 버텨낸 윤아이는 그래서 이 작품 속 어떤 어른들과도 다른 어른의 면모를 갖게 된다. 

 

흔히들 마술에 비유되는 영화나 드라마의 영상들은 편집과 CG와 촬영술의 결합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건 현실에는 없는 판타지일 수 있지만 믿고 싶은 세계다. 꿈보다는 돈과 지위를 얻는 성공을 믿고, 마술 같은 행복감을 주는 경험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수치들로 채워진 경험들만을 믿는 세상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안나라수마나라>는 꿈을 믿고 산타클로스를 믿으며 마술을 믿는 아이 같은 순수한 세계를 화두로 던짐으로써 우리가 마주한 차가운 ‘어른들의 현실’을 보게 해준다. 6부작의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윤아이라는 인물이 외운 주문으로 마법 같은 위로를 주는. 안나라- 수마나라.(사진:넷플릭스)

‘붉은 단심’, 허성태와 손잡은 이준, 강하나 질녀삼은 장혁

붉은 단심

“국혼은 전하께서 세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KBS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에서 박계원(장혁)은 병판 조원표(허성태)와 술자리를 하며 국혼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한다. 실로 조선의 12대왕 이태(이준)는 중전 간택이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연모해온 유정(강한나)이 연심을 드러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에겐 혼인해야 할 여인이 있습니다.” 그렇게 유정을 밀어낸다. 

 

이태가 말한 ‘혼인해야 할 여인’이란 병판 조원표(허성태)의 딸 조연희(최리)다. 그는 좌의정 박계원과 대적하기 위해 거의 유일하게 자기 세력을 갖고 있는 조원표를 택한 것이고, 그래서 조연희와 정략결혼을 하려 한다. 일부러 조연희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마음을 흔든다. 이태에게 마음을 빼앗긴 조연희는 조원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혼에 처녀단자를 넣어달라며 중전이 아니면 죽어버리겠다고 떼를 쓴다. 

 

조원표는 이 일이 좌의정 박계원과 자신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비화될 거라는 걸 예감한다. 그래서 애써 이태가 국혼을 통해 만들어낸 박계원과의 틈새를 부정하려 하지만 이태는 이제 그 틈을 더욱 벌려 놓는다. 좌의정 사람이면서 병판의 명을 듣는 겸사복에게 자신이 병판의 여식을 만난다는 말을 전하게 한 것. 왕이 잠행 시 어딜 갔는지를 추궁하기 위해 겸사복을 고신하는 박계원과 이를 막으려는 조원표의 갈등은 정면에서 부딪친다.

 

결국 이태를 찾아온 조원표는 그런 계획이 무모하다며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 말하지만 이태는 조원표를 설득한다. “중전이 승하한 후 과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병판의 여식을 만나는 거였다오. 두 번째 만남에서 병판에게 발각된 것도 과인의 의도였소. 좌의정을 몰아서 겸사복장을 파직하게 만든 사람도 과인이오. 그래서 지금 병판이 여기 오게 만든 이가 과인이오. 병판을 여기까지 오게 만드는 게 과인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었소. 가장 힘든 판을 해냈으니 다음 판은 이보다 쉬울 터. 병판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과인을 믿고 이 손을 잡아 주시오.”

 

<붉은 단심>이 엮어내는 정치와 멜로는 유정을 연모하지만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정략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태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진다. 이태는 조정을 장악한 반정공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국혼을 이용해 그들 사이에 균열을 낸다. 병판의 딸을 중전으로 삼음으로써 병판과 손을 잡고 박계원과 대결하려는 것. 그래서 박계원이 자신의 숨겨둔 질녀를 중전으로 세우려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이태는 그에게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며 저주 같은 말을 쏟아낸다. 

 

“국혼은 과인을 가장 비싸게 사줄 집안과의 거래요. 좌상. 뭐라 해도 이번 간택만은 좌상의 뜻대로 안될 것이오. 어떤 여인이든 데려와 보시오. 안지 않을 것이오 만나지 않을 것이오. 얼굴조차 보지 않을 것이오. 평생 구중궁궐에서 지아비의 그림자도 못 본 채 늙어 죽을 것이외다. 하여 좌상은 후대의 권력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오. 후대의 권력을 잃으면 현재의 권력도 약해진다는 걸 잘 아시죠?”

 

이태가 꺼내든 칼 같은 말들은 추상같지만 만만하게 당할 좌의정 박계원이 아니다. 그는 이태가 데려와 보라는 ‘어떤 여인’으로 유정을 세우려 한다. 유정을 질녀로 삼고 국혼에 내보내 중전이 되게 하려 한다. 그가 오래 전부터 이태를 만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박계원은 차마 이태가 유정을 밀어내진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왕이 중전을 간택하는 국혼이지만, <붉은 단심>에서 이 일은 핏빛 권력다툼으로 그려진다. 누구를 중전으로 맞이하느냐가 누구의 세력을 갖는가의 문제가 되고, 그건 조정의 권력 구도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이 된다. 하지만 애써 마음속의 정인인 유정을 밀어내고 정략결혼을 하려는 이태에게, 유정을 질녀 삼아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박계원의 선택은 앞으로의 파란을 예고한다. 과연 이태는 권력을 선택할까 아니면 정인을 선택할까. 권력을 선택한다면 향후 맞서는 입장이 되어야할 유정과 어떤 관계를 이어갈까. <붉은 단심>이라는 정치와 엮어진 멜로가 갈수록 쫀쫀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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