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우울증의 심연 속으로 손을 내민 해녀 같은 

우리들의 블루스

“고등어 고등어- 오징어 오징어- 계란 계란- 순두부 순두부- 비지 비지- 시금치 시금치 윗도리 아랫도리...” 트럭을 몰고 제주 구석구석을 다니며 갖가지 물건을 파는 동석(이병헌)은 그렇게 녹음을 해 가져온 물품들을 알린다. 아마도 저마다 하루의 노동 속에 있던 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트럭으로 달려올 게다. 고등어도 사고 계란도 사고 옷도 사고... 그 순간을 놓치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외진 동네에서 나중이란 너무 멀다. 

 

tvN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이 하는 일은 바로 그런 일이다. 그런데 그가 깊은 우울증에 빠져버린 선아(신민아)를 마주한다. 어려서 서울에서 내려왔던 선아를 동석은 좋아했다. 재가한 엄마를 따라 함께 살던 배다른 형제들은 매일 같이 동석을 두들겨 패곤 했지만 동석은 그저 참고 맞기만 했다. 선아도 엄마가 죽고 나락에 빠져 있는 아빠 때문에 힘겨워하며 자신을 망가뜨리려 한다. 그래야 아빠가 정신을 차릴 거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그건 동석에게도 잊히지 않는 상처가 된다. 

 

결혼을 했지만 우울증 때문에 힘겨워하던 남편과 결국 이혼하고, 아이까지 빼앗기자 선아는 살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이만이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었지만 그마저 사라진 것. 그래서 제주도에 온 선아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우울증 증상이 물에 빠진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선아에게 물은 죽음과 심연의 이미지다. 그 깊은 어둠 속으로 저도 모르게 빠져든다. 

 

그런데 그렇게 바다 속에 빠졌을 때 마침 그 곳을 지나던 해녀들이 그를 찾아내 구해낸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동석은 119를 부르고는 괜한 심술을 부리듯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괜스레 차 안에 있는 침구들의 먼지를 거칠게 털어낸다. 바다에 빠진 선아를 해녀가 구해냈지만, 물밖에 나왔다고 선아는 산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우울의 심연 깊숙이 빠져 있다. 그게 못내 걱정된 동석은 그를 병원에도 데려다주고 모텔 방도 잡아주고 때때로 전화해 “살아있냐?”고 묻는다. 바다는 아니지만 지금 동석은 우울의 심연 깊숙이 빠진 선아를 끌어내려 안간힘이다. 

 

선아는 매 번 ‘나중’을 이야기한다. 나중에 아이를 다시 데려와 함께 살 집을 고치고, 나중에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말을 함께 탈 생각을 한다. 그런 선아에게 동석은 나중은 없다며 지금 당장 말을 타러 가자고 말하는 사람이다. 당장 말 탈 시간이 있으면 아들 열이와 함께 살 집을 더 짓고 싶다 말하는 선아에게 동석은 자기 말 타는 사진을 찍어 달라 한다. 막상 즐겁게 말 타는 동석을 보니 선아도 웃는다. 그리고 동석의 강권에 못 이겨 말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별 일 아닌 것처럼 찍은 말 사진은 그 날 아이를 만났을 때 의외의 즐거움으로 돌아온다. 수족관에 갔지만 아이는 거기 수조를 유영하는 가오리보다 말이 더 좋단다. 그래서 그날 동석 때문에 억지로 찍은 말고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즐거워한다. 그 때 동석이 ‘지금 하자’고 했던 그 일이 없었으면 선아가 말하는 지금 같은 ‘나중’도 없었을 일이다. 

 

동석은 선아에게 나중은 없다는 이야기를 어려서 죽은 누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아버지가 죽고 엄마랑 누나랑 셋이 살 때, 없는 형편에 엄마가 돼지 내장을 얻어다 볶았는데 그걸 누나가 다 챙겨먹어 화가 나서 요강 단지를 누나 얼굴에 부어버렸다고 했다. 그게 미안해서 다음날 학교 갔다 와서 미안하다 하려 했는데, 그 날 누나가 바다에서 물질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게 누나랑 나랑 마지막. 그 때 알았지 썅. 나중은 없구나...”

 

배를 타고 제주에서 뭍으로 나오면서 선아는 하염없이 바다만 쳐다본다. 그러면서 계속 파도만 보고 있으니 멀미가 난다는 선아에게 동석은 이렇게 말한다. “너도 울 엄마처럼 바보냐? 뒤돌아. 나중에도 사는 게 답답하면 뒤를 봐 뒤를. 이렇게 등만 돌리면 다른 세상 있잖아. 그저 바다만. 바보처럼. 아 우리 엄마 얘기야. 아버지 배타다 죽고 동희 누나 물질하다 죽고 엄만 매일 바다만 봤어. 바로 등만 돌리면 내가 있고 한라산이 저렇게 떡하니 있는데, 이렇게 등만 돌리면 아부지 동희누나 죽은 바다 안볼 수도 있는데, 매일 바다를 미워하면서도 바다만.”

 

엄마 얘기라고 했지만 그건 사실 선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일 터였다. 양육권을 두고 남편과 벌인 소송에서 진 선아는 절망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밥도 먹지 않는다. 점점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선아를 동석은 애써 잡아 끌어올리려 하지만 제아무리 설득해도 먹히질 않는다. 결국 동석은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선아를 인정하며 “그래 이렇게 살다가 죽든 말든 니 맘대로 해”라고 쏘아댄다. 그러면서 선아가 가장 아파할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아들도 우울증에 빠진 엄마처럼 될 거라는 것. 

 

너무 아픈 이야기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 그래서 오열하는 선아에게 동석은 말한다. “슬퍼하지 말란 말이 아니야. 울엄마처럼 슬퍼만 하지 말라고. 슬퍼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러다가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썅. 어쩌단 웃기도 하고 행복도 하고 애랑 같이 못사는 것도 대가리 돌게 승질나 죽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엉망진창 네가 망가지면 니 인생이 너무 엿 같잖아 새끼야!”

 

선아는 동석과 함께 걸으며 우울증을 치료해보겠다는 생각을 한다. 동석의 끝없는 너스레에 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 물건 파는 걸 녹음하는 동석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프라이판 프라이판 뺀찌 망치 도라이바 윗도리 아랫도리-” 그건 제주 구석구석에 사는 주민들에게 물건 파는 트럭이 왔다는 목소리지만 또한 지금 아니면 나중은 없다는 목소리처럼도 들린다. 자잘한 일상의 욕망들을 일깨우는 소리.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선아를 마치 해녀처럼 포기하지 않고 찾아낸 동석은 그렇게 그를 현실로 끌어올리는 중이었다.(사진:tvN)

‘어게인 마이 라이프’, 검사 미화? 검찰개혁에 칼 들었나

어게인 마이 라이프

세상에 이런 검사가 있나. SBS 금토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는 초반 김희우(이준기)라는 검사 영웅을 그린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검사를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온 바 있다. 실제고 김희우는 대통령도 쥐고 흔드는 조태섭 의원(이경영)에게 칼을 들었다가 오히려 죽음을 맞이했던 검사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던 김희우가 저승사자의 도움으로 또 한 번의 생을 얻게 되고,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 인생 전체를 새롭게 디자인(?)한 그가 검사가 되어 펼쳐가는 복수극은 어쩐지 검사 미화가 아니라 검찰개혁에 칼을 드는 모양새다. 조태섭 의원의 라인을 잡은 김석훈(최광일) 중앙지검장과 그 측근들인 장일현(김형묵) 검사 그리고 최강진(김진우) 검사를 김희우가 하나하나 날려버리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의도적으로 김석훈 중앙지검장의 눈에 들고 그 라인에 들어간 것처럼 꾸몄던 김희우는, 함께 뜻을 합친 전석규(김철기)와 함께 검찰의 비리들을 척결해 나간다. 장일현 검사는 그 첫 번째 타깃이 된다. ‘스폰서 검사’로 기업의 상납을 받아온 데다, 사귀고 있던 국대예술재단 성진미(박나은) 이사장의 비리를 덮어줘 온 일로 장일현 검사는 사면초가에 이르게 된다. 

 

결국 위기에 몰린 장일현 검사는 살아남기 위해 최강진 검사의 성상납 비리를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김희우는 최강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SHC 엔터의 비리를 캐고 소속 연예인들의 성상남 비리는 물론이고 조직적인 병역비리 또한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즉 <어게인 마이 라이프>가 그리고 있는 검찰은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갖가지 비리검사와 정치검사들이 판을 치는 곳이다. 김희우나 전석규 같은 인물만이 예외적일 뿐.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로 보면 김희우는 ‘판타지’를 캐릭터화한 인물이다. 그는 한 번 죽었고 되살아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이유는 조태섭 의원의 비리를 캐려 했지만 검찰 내부까지 다 손이 닿아 있는 영향력 때문이다. 이미 검찰은 썩어 있었고 김희우의 죽음은 그래서 일개 한 검사의 의지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검찰 개혁이나 사회 정의의 현실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드라마가 판타지로서 다시 살려낸 김희우가 긴 세월 동안 차근차근 힘을 키우고 자기편을 만들어가며 검찰로 돌아와 드디어 하나하나 비리 검사들을 척결해나가는 과정은 그래서 시청자들에게는 사이다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현실에서 벌어지기 힘든 일들을 말 그대로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어서다. 

 

그래서 <어게인 마이 라이프>의 이야기는 때론 결코 일어나기 어려운 우연과 기연들이 주인공 김희우에게는 벌어진다. 조태섭 의원과 맞서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황진용 의원(유동근)의 등장과 그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 그렇다. 우연히 길을 가다 마침 조태섭의 추종자에 의해 테러를 당하는 여자를 구해주는데 하필이면 그가 황진용 의원의 딸이었던 것. 

 

‘하늘의 뜻인가 이렇게 황의원과 연결되다니!’ 김희우는 이런 우연이 스스로 놀랍다는 듯 그렇게 생각한다. ‘하늘의 뜻’. 사실은 작가의 뜻이다. 이처럼 이런 우연이 개연성이 없다는 걸 작가도 알고 시청자들도 알지만, 이 이야기 자체가 일어나기 어려운 판타지고 무엇보다 김희우라는 인물 자체가 판타지적 존재라는 점에서 하늘도 돕는 이야기는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되돌아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가 드러내는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이 새삼스럽다. 결국 검찰개혁을 하고 이를 통해 조태섭 같은 비리 정치인을 척결하는 일을 하려면 이런 판타지와 우연까지 더해진 말 그대로 ‘하늘이 도와야’ 가능할 정도라는 걸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애초 검사 미화가 아닐까 생각됐던 이야기가 김희우 같은 검사는 판타지에나 존재한다는 이야기로 분명히 드러나면서 오히려 이토록 어려워진 검찰개혁에 대한 작가의 열망을 읽어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실로 드라마 속은 시원시원한 사이다지만 현실은 퍽퍽한 고구마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사진:SBS)

‘붉은 단심’, 이준과 강한나는 정인이 될까 정적이 될까

붉은 단심

“중전은 죄가 있어 죽었더냐? 힘이 없으니 내 사람을 잃는 거다. 그 사람을 잃고도 세자를 지켜야 하기에 난 아내의 죽음마저 외면한 비겁한 지아비다.” 반정공신의 수장인 좌의정 박계원(장혁)의 음모에 의해 중전을 잃은 선종(안내상)은 세자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자 세자인 어린 이태(박지빈)가 되묻는다. “하여 저도 아바마마처럼 비겁해지라 하시는 겁니까? 소자는 그리 못합니다.”

 

KBS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에서 선종과 세자 이태가 주고받는 이 짧은 대사는 앞으로 이 드라마가 어떤 갈등 구조를 가져갈 것인가를 암시한다. 박계원의 음모에 의해 궁지에 몰린 중전이 세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독이 든 차를 마셔 죽음을 맞이했을 때, 선종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힘이 없어서다. 하지만 어린 이태는 선종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이 마음에 두어 세자빈으로 맞음으로써 박계원에 의해 그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유정(신은수)을 이태는 구해내 궁 밖으로 탈출시킨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궁 밖 죽림현의 실질적인 수장이 된 유정(강한나)을 이태(이준)는 다시 만난다. 유정을 만나러 가는 이태의 얼굴은 밝고, 유정 역시 이태를 보고는 밝게 웃지만 과연 이 두 사람이 앞으로 마주할 운명은 과연 밝기만 할까. 두 사람이 만나는 다리 주변으로 마침 펼쳐진 불꽃놀이의 불빛들은 이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너무나 아름답지만, 언제나 이 둘을 삼켜버릴 것 같은 불꽃들이다. 그 위로 이태의 목소리가 얹어진다. ‘살아주어 고맙소. 나로 인해 몰락한 연모하는 나의 빈이여.’

 

단순하게 보면 <붉은 단심>은 결국 박계원을 향한 이태와 유정의 복수극처럼 보인다. 박계원의 모략으로 이태는 어머니를 잃었고, 유정은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태와 유정이 안팎으로 손을 잡고 함께 박계원을 몰아내는 그런 전개일까 싶지만, 어쩐지 그리 단순한 구도가 아닐 듯 보인다. 박계원 역시 만만찮은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내쳐야 하는 왕 이태와 살아남기 위해 중전이 되어야 하는 유정, 정적이 된 그들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며 펼쳐지는 핏빛 정치 로맨스’라는 작품 소개가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정인과 정적. 이것은 <붉은 단심>이라는 사극이 가진 두 개의 바퀴다. 그래서 이태는 유정을 연모하지만, (아마도 박계원의 계략에 의해) 유정과 정적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고 그래서 갈등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복수를 위해서는 유정마저 밀어내야 하지만, 그건 정인을 내치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저 선종과 어린 이태가 나누는 대화 속 ‘비겁한 지아비’라는 말이 울림을 갖는 이유다. 

 

오랜만에 보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사극이다. 그간 멜로에 있어서 ‘운명적인 사랑’ 같은 이야기는 현대극보다는 사극에 더 어울리게 된 면이 있다. 최근 들어 멜로를 다룬 사극들이 대부분 가벼운 로맨스를 다루던 것과 비교해보면 <붉은 단심>은 자못 비장미를 가진 사랑이야기를 담는다. 

 

이렇게 된 건 ‘정인과 정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멜로와 함께 정치가 절묘하게 엮어져 있어서다. 궁중에서 남녀 간의 관계는 사적으로는 멜로이지만 공적으로는 정치와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 엮인 부분들을 과연 이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 풀어낼까. 이태와 유정은 서로를 정인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끝내 정적으로 밀어낼까. 첫 방부터 몰아친 <붉은 단심>이 그 어떤 멜로 사극보다 기대감을 갖게 만든 이유다.(사진:KBS)

‘나의 해방일지’, 손석구에 대한 추앙이 말해주는 것들

나의 해방일지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되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은 구씨(손석구)에게 뜬금없이 ‘추앙’이라는 단어를 쓴다.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말.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 대사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붕뜬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2회 말미에 ‘추앙’이라는 대사가 나온 후 2주가 지나 5회 정도에 이르자 이 대사는 어딘가 유행어처럼 될 조짐을 보인다. 적어도 “날 추앙해요”라는 말 한 마디로 <나의 해방일지>를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을 쉽게 구분할 정도다. 

 

추앙이라는 단어는 미정이 뱉어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어는 구씨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전으로 추앙이라는 단어가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이라는 뜻을 찾아보는 구씨. 그리고 뜬금없이 미정에게 “확실해? 봄이 오면 다른 사람 돼있는 거? 추앙하다 보면 다른 사람 돼있을 거라며?”하고 툭 던지는 말이나, “하기로 한 건가?”하고 미정이 묻자 “했잖아. 아까 낮에.”라며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갖다 주려 넓이 뛰기 선수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던 일을 말하는 구씨.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라는 캐릭터는 독보적이다.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인물이고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투, 말까지 예사롭지 않다. 누군가 던지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가 갑자기 온몸으로 보이는 ‘추앙의 행위’는 그 답답함을 일거에 날려 보낼 만큼 더 강력한 힘으로 터져 나온다. 

 

미정네 집 밭일과 공장일을 도와 주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멀리 걸어 나가야 있는 마트에서 결국은 술이 모자라 또 나가야 할 걸 알면서도 꼭 두 병씩만 사서 집에 돌아오는 사람. 그리고 홀로 평상에 앉아 산 저편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러려니 멍하니 그 비를 맞고 있는 사람. 이상하게도 마음이 측은해지고 ‘추앙’ 같은 비일상적인 단어도 막 쓰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구씨다. 

 

도대체 이 미스테리한 인물의 정체는 뭘까. 왜 박해영 작가는 이런 인물을 미정네 집 근처에 포진해 놓은 걸까. 미정을 추앙하는 몸짓으로 웅크렸던 날개를 펴고 날았던 일 때문에 창희(이민기)는 하루 종일 구씨 이야기를 한다. “오늘 날 진짜 뜨거웠거든? 머릿 가죽 다 벗겨지는 줄 알았거든? 인간 염창희 이렇게 고추 따다 뒤지는구나. 고추는 뭐고, 나는 뭐고, 태양은 뭔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구씨 뛰는 거 보자마자 그냥 정신이 번쩍 드는데...”

 

창희가 추앙하기 시작한 구씨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작은 변두리 마을에 자신을 가둬둔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구씨라는 인물 때문에 이 변두리 마을과 서울을 오가며 매일 가짜 행복과 가짜 위안에 지쳐가며 ‘채워진 적 없는’ 미정과 창희가 조금씩 변화해간다. 미정은 대뜸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고, 비 오고 천둥치는 날 그가 걱정되어 그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창희는 구씨의 비상으로 무력하기만 했던 삶에 작은 활기를 찾아내고, 집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구씨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 눈빛이 반짝반짝하다. 

 

구씨라는 인물은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서 있음으로써 그와 관계하는 인물들을 반추해내는 그런 존재처럼 보인다. 미정이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고 말하며 겨울이 오기 전 “어떤 일이든 해야 되고” 한 번은 “채워져야”한다고 말한 건 그래서 마치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건 친구들에게 구씨 추앙을 늘어놓는 창희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짜 멋지고 싶다. 멋짐을 드러내려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진짜 멋진 그런 삶을 꿈꾸는 것. 

 

물론 그건 구씨의 실체가 아니다. 구씨는 결국 변두리 마을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둬놓은 알코올중독자일 수 있으니 말이다. 방 한 가득 채워진 빈 술병이 그걸 말해주고, 어쩌다 뜨거운 물을 발에 쏟아 다쳤어도 별 고통도 호소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오죽 무료하면 마트에 갔을 때 네 병을 사면 한 번만 가도 될 그 길을 굳이 두 병씩 나눠 사서 또 걷겠는가. 그는 마치 시간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데 그런 구씨에게 미정이 다가가고, 아무 조건 없이 “좋기만 한 사람”으로 구씨를 대하려 하면서 구씨도 변화한다. 주급을 받자 미정에게 문자를 보낸다. ‘돈 생겼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나 구씨’라고. 그 추앙의 문자 하나가 미정을 웃게 만든다. 두 사람은 변두리 당미역에서 만나 흔한 돈가스를 별 대화 없이 먹는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던 사람이 보내는 문자 하나와 함께 먹는 식사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흔하게 “언제 한 번 밥 먹자”고 말하는 그런 헛소리도 아니고 매일 의미 없이 보내고 맞장구치는 허망한 문자도 아니다. 온전히 ‘채워진 말이고 문자’일 테니.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 마음 속 한 구석에 무언가에 소외되거나 상처 입은 채 더 이상 달리거나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고 날개를 접고 있는 저마다의 ‘구씨’가 있는 지도 모른다. 가짜 위로와 가짜 행복 속에서 허망한 말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들을 버텨내며 꾹꾹 봉인해 뒀던 구씨.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구씨를 찾아내게 하고 추앙하게 함으로써 그 답답한 곳으로부터 해방해주라 말하고 있다. “날 추앙하라”는 말은 그래서 타인에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저 거짓 속에서 함부로 대해왔던 스스로를 추앙하라고.(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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