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발견한 문학의 가치, '신데렐라 언니'

"은조야-" '신데렐라 언니'에서 은조(문근영)의 이름을 부르는 이 대사는 여러 번 반복된다. 하지만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에 불과한 이 대사가 가지는 뉘앙스와 의미는 사뭇 다르다. 독하게 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회초리를 맞고는 술도가 창고에서 술독에 귀를 대고 왠지 서글프고 왠지 편안해지는 그 술 익는 소리를 듣는 그녀에게 기훈(천정명)은 맞지 말고 앞으로는 도망치라면서 은조를 부른다. "은조야. 대답 좀 해주지. 은조야. 응. 아프지?" 그 때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 맘을 열지 않았던 은조는 "어"하고 답을 해준다.

"은조야"라고 묻고 "어"하고 답을 해주었을 뿐인데, 그 소통의 순간이 짠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 "은조야" 라는 부름 속에 들어가 있는 기훈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기 때문이며, 그렇게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어'라고 답하는 그녀의 조금은 열려진 마음이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술독 안에서 아프게 익어가며 제 소리를 내는 '술의 노래'는 이 짧은 순간의 추억을 다양한 차원의 감각으로 기억되게 만든다. 이 짧은 순간의 강렬함은 훗날 기훈이 소식 한 점 없이 떠나간 날, 은조의 독백으로 이어지며 시적인 여운마저 남긴다.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서 나는...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듯이 따오기가 따옥 따옥 울듯이 새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이것은 드라마라기보다는 한 편의 문학작품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이 문학적인 방식은 다이내믹한 스토리 전개보다는 정중동의 압축적이고 폭발적인 대사의 힘으로 흘러가는 '신데렐라 언니'가 가진 특징이다. 효선(서우)이 뭐든 자신보다 잘하는 은조에게 절망감을 느끼면서 내레이션과 대사가 서로 상반되게 터져 나오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에 맹세하고 땅에 맹세하는 건데 내가 얘한테 뱉은 말은 100% 거짓말이었다.' "언니야. 언니야 죽지마라. 죽지마라 언니야." '죽어버려라. 말이 헛나온 거다.' "언니야. 내가 잘 할게. 내가 너 예뻐해줄 게. 죽지마라 언니야" '너 코 파다가 코피난거지 이렇게 묻고 싶은 게 내 진심이었다.' 글로 적어놓으면 좋은 소설의 한 구절을 읽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드라마 대본이라면 흔하디 흔하게 적혀있을 '온다', '웃는다', '간다' 같은 말들도 '신데렐라 언니'에서는 그 속에 많은 감정과 의미들이 겹쳐져 다가온다. 대성(김갑수)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던 기훈이 절에서 사죄하듯 삼천 배를 하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다 문득 은조를 마주치는 장면에서 은조는 단 두 마디만을 속으로 내뱉는다. '왔다. 웃는다.' 하지만 이 두 마디가 주는 울림은 크다. '왔다'는 언젠가 굳게 닫혀져 있던 자신의 마음을 열게 해주고는 훌쩍 가버린 기훈이 '왔다'는 그 의미이고, '웃는다'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던 은조에게 아침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그 기훈의 웃음을 본다는 의미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어. 하지만 가더라. 그런데 또 간대. 차라리 잘됐어. 이번에 가면 다시 오지 않겠지. 다시 오지 않으면 다신 가지 않겠지." 그렇게 다시 와서 웃음을 지어주는 기훈이 또 떠난다는 사실에 울먹이며 이렇게 말하는 은조에게 '간다'는 의미는 이처럼 남다르다.

'신데렐라 언니'가 구사하는 대사는 그저 마구 던져지는 대화체의 문장들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인물들이 켜켜이 쌓아놓은 관계의 감정들이 더깨처럼 앉아 있다. 흔하다 못해 상투가 되어버린 그런 단어들조차 깊은 울림으로 만드는 그 마법은 바로 문학의 힘이다. 흔히들 문학은 죽었다고들 말하고 또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어디 그럴까. 세상이 죽은 상투어로 점점 쌓여갈수록 우리는 어쩌면 상투어마저 특별하게 만들어내는 문학의 힘을 갈구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신데렐라 언니'는 드라마지만, 바로 그 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검사 프린세스', 소현경표 멜로드라마의 사회성

"좀 전에 골라든 그 수백만 원 하는 가방, 그 동안 당신의 명품들, 인우 인생 짓밟은 대가라는 거 알아요? 인우 거 뺏은 거라는 거." '검사 프린세스'에서 인우(박시후)의 친구인 제니(박정아)가 마혜리(김소연)에게 던지는 이 말은 드라마의 시점을 살짝 돌려놓는다. 그동안 마혜리의 입장에서 진행되어오던 드라마는 제니의 이 역지사지를 제안하는 대사를 통해 인우의 입장을 풀어놓는다. 수백만 원 하는 가방에 명품들 속에서 공주로 검사로 살아오던 마혜리가, 자신의 삶이 사실은 한 가족의 인생을 파탄 낸 대가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를 개인적인 차원을 다루는 멜로에서 사회극으로 옮겨놓는다.

마혜리는 사회화가 덜 된 무개념의 공주 검사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검사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고,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게 뭐가 나빠"하고 말하며, 산적한 업무에도 6시면 무조건 칼퇴근을 주장하는 이 무개념 공주 검사는 사회를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적인 삶 속에 머물며, 그 삶이 사회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마혜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는 부모가 만들어놓은 단단한 출세 코스의 길 안에서만 자라왔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삶(즉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적 삶에 몰두하는 마혜리의 모습은, 고속 경제 성장 끝에 부자의 반열에 오른 부모를 갖고 걱정 없이 자라온 이른바 상류층 자제의 모습을 표상한다. 그 부모인 마상태(최정우)는 대물림되는 그 가난이 싫어 독하게 한 시대를 살아내고 결국 성공의 길에 선 이전 세대의 치열한 삶을 담고 있는 인물이다.

"가난이 좋았다 이거야? 나는 아니야? 진짜 싫었어. 아주 끔찍하고 징그럽게 싫었어. 5대를 머슴살이에 날품팔이만 하는 집안, 그 대물림된 가난을 내 대에서 끊기 위해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당신 아냐? 내 자식부터는 이 마상태를 믿고 태어난 새끼, 토실토실한 살집에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석보다 더 예쁜 눈에 해리부터 그 새끼도 그 새끼의 새끼들도 떵떵 거리고 대대손손 잘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뭔가 잘못됐어. 이럴려구 한 게 아닌데 내 딸을 망치게 생겼어."

마상태가 던지는 참회 섞인 이 말은 '검사 프린세스'를 그저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마상태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만들어놓은 그 부 위에서 마혜리가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나 누구나 우러러보는 검사라는 직업에 선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로서의 직업조차 부에 의해 대물림되는 우리네 사회를 잘 보여준다. 그 타인에 대한 이해 없이 갖게 된 그네들의 검사라는 직업에서 진정한 사회정의를 행하는 일이 어찌 쉽게 바랄 수 있는 일일까.

하지만 '검사 프린세스'는 이 대물림되는 부와 지위의 세상에서 그래도 희망을 꿈꿔보는 드라마다. 마혜리는 차츰 검사로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성장하는 캐릭터. 그녀가 '무늬만 검사'에서 차츰 진짜 검사가 될 때, 그녀가 궁극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의 숨겨진 과거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서 있는 부가 사실은 개인적인 성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인식은 아프지만 이 단단한 대물림의 시스템에 균열을 낸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마혜리 곁에 생겨난 윤세준(한정수) 검사와 서인우 변호사라는 존재는 그래서 단순히 '검사 프린세스'라는 드라마의 삼각 멜로 구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윤세준 검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한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인물이고, 서인우 변호사는 이제 검사로서의 삶을 이해하게 된 마혜리가 가족과 사회정의 사이에서 갈등할 때, 복수나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그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검사 프린세스'는 어쩌면 소현경 작가의 일관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은 대물림 되는 유산으로 표징되는 우리 사회의 진한 핏줄의식을 가족드라마라는 틀 위에서 뒤집었다면, '검사 프린세스'는 부는 물론이고 지위까지 대물림되는 사회 속에서 세워지기 어려운 사회정의를 멜로드라마라는 틀 위에서 뒤집고 있다. 무개념으로 시작한 마혜리라는 캐릭터의 성장과정 속에서 우리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사회성을 띠는 소현경표 멜로드라마가 가진 진면목이다.

맛좋은 카푸치노 같은 퓨전드라마, '커피하우스'

커피 특유의 진한 맛에 부드러운 우유, 게다가 달콤함을 더하는 계피가루... 표민수 PD의 새 드라마 '커피하우스'는 그 여러 재료들이 잘 섞여 부드럽고 달콤 쌈싸름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한 잔의 카푸치노를 닮았다. 커피 특유의 향을 내는 정극의 분위기는 톡톡 튀는 계피가루 같은 시트콤과 만났고, 탄탄한 쓴맛을 내재한 드라마는 달콤한 맛의 만화를 곁들였다.

과장됨과 진지함이 넘나드는 연출은 깔끔하고 세련된 영상미 위에 코믹함을 덧붙였다. 티아라 함은정의 연기도전과 강지환의 4차원 연기는 가수와 배우가 벌이는 독특한 앙상블을 선보였다. '커피하우스'는 표민수PD와 '거침없이 하이킥'의 송재정 작가가 만났다는 점만 보더라도 시트콤과 정극을 넘나드는 퓨전의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을 쉬 짐작할 수 있다.

'커피하우스'의 승연(은정)은 궁전커피숍 집 딸. 그녀는 가슴 설레는 순정만화 속의 스토리를 꿈꾸지만 현실은 코믹만화의 너저분함으로 넘쳐난다. 취업도 못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진 그녀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캐릭터. 궁전커피숍의 망가진 출입문 벨소리처럼 청춘은 삐걱대고, 마치 고장 난 화장실 문 때문에 갇혀버린 신세다.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매너 있어 보이는 남자 앞에서 자신의 못난 치부를 드러내보이게 되는 그녀의 삶은 멋진 드라마를 꿈꾸지만 현실은 한 편의 시트콤이다. 그녀에게 비서를 제안한 이진수(강지환)에게 일과 사랑의 판타지가 넘쳐나는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은 취직도 로맨스도 아닌 기분 나쁜 거짓이다.

"당신은 아마추어잖아." 아무리 빚진 후배의 부탁이지만 비서로 취직시켜놓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진수가 '웃으면서 회를 뜨는' 그 말에 승연은 현실로 내쳐진다. '궁전커피숍'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에 아마추어의 향기가 넘쳐나는 커피를 끓여대며 살아온 그녀의 삶. 이 드라마는 그 시트콤 같은 아마추어적인 삶을 살아온 승연이 이 '웃으면서 회를 뜨는' 재수 없는 프로페셔널을 만나 일과 사랑에서 성장해가는 드라마다.

로맨틱 코미디가 가진 웃음의 코드는 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대립과 성장을 만나면서 진지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시트콤에서 시작해 정극으로 향하고, 만화적인 설정에서 시작해 드라마로 변해가고, 과장된 웃음에서 시작해 진지함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승연이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어가는 성장과정과 맞닿아있다.

'커피하우스'를 흔히들 '커피 프린스 1호점'과 '풀하우스'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즉 '커피 프린스 1호점'이 갖고 있는 달콤한 판타지와 '풀하우스' 특유의 순정만화적인 로맨틱 코미디가 뒤섞여 있다는 것. 이것은 일정 부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단지 그 두 작품의 접합이 '커피하우스'인 것은 아니다. '커피하우스'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형식들(예를 들면 시트콤과 정극, 만화와 드라마, 웃음과 진지함, 아마추어와 프로 같은)이 퓨전되어 경쾌하면서도 자못 진지한 이야기를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그 맛의 조화가 오묘한 한 잔의 카푸치노 같은 드라마를 맛보게 될 지도 모른다.

1960년 '하녀'와 2010년 '하녀', 뭐가 달라졌을까

'하녀'라는 말은 이제 우리의 일상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아래 하(下)자와 계집 녀(女)자를 쓰는 이 단어는 다분히 계급적으로 읽힌다. 즉 신분제도가 있던 시대에 사용되었던 이 '하녀'라는 단어는 지금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동일한 제목의 원작 영화인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개봉되던 1960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대에 사용되던 말로 제목을 바꾼다면 '식모'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하녀'라는 단어가 1960년에도 또 50년이 지난 2010년에도 그대로 제목의 자리에 앉아있을까.

아마도 김기영 감독은 '하녀', 즉 새롭게 등장하는 식모라는 직업군(?)에서, 당대 산업사회의 태동기에 물질주의가 가져올 욕망의 표상을 발견했을 것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분명 그 속에 계급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질 자본주의의 욕망으로서의 의미다. 작은 집에서 이층집으로 이사한 후, 벌어지는 사건들은 바로 그 물질적 풍요가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걸 암시한다. 좁은 집에서(물질적 풍요가 없는 시점에서) 하녀는 없어도 되는 직업군이지만, 넓어진 집에서는 하녀라는 새로운 욕망이 탄생한다.

그 잉여의 욕망을 표상하는 하녀가 한 가족을 파탄내는 이야기는, 물질의 주인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속 삶에서, 바로 그 물질이 거꾸로 주인을 속박하고 파탄내는 그 현실을 하나의 섬뜩한 우화처럼 그려낸다. 재미있는 건 이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액자식으로 구성함으로써 한 사내의 내적인 욕망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정신분석적인 구성은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보인다.

50년이 지난 현재, 임상수 감독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하녀'가 50년 전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당대는 자본주의의 태동기였지만, 지금은 고도 자본주의의 중심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돈(물질)에 의해 탄생하는 자본주의의 하녀(계급) 역시 좀 더 견고해졌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공장에서 일하다 소박한 중산층의 이층집으로 들어오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저자거리의 왁자한 소음과 어떤 절망으로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소란 속에서 살아가다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초상류층의 이층집으로 들어온다. 양극화는 더욱 첨예해졌다.

계급의 첨예함은 이 2010년 '하녀'의 공간연출로 더 도드라진다. 카메라는 종종 부감에서 주인이 하녀를 내려다보듯 거기 서 있는 인간군상들을 내려다본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이층의 한 켠에 마련된 방에서 남자의 욕망의 손길을 기다렸다면,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아예 계급에 맞게 1층엔 하녀가 2층엔 주인이 산다. 주인은 늘 하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하녀는 주인을 올려다본다.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그 상황은 잠시 역전되지만 그 역전은 오르지 못할 공간을 점유한 자의 파국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이제는 하나의 시스템이 된 계급이 절대로 바뀌어지지 않을 견고함으로 절망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한 가정을 파탄내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하녀만 희생된다. 견고한 자본주의의 시스템 속에서 하녀란 돈이 있으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소모품 같은 존재다. 주인집 사람들은 모든 일이 마치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무표정하게 살아간다.

임상수 감독의 지독히도 냉소적인 시선은 철저히 판타지를 거부하면서 아프지만 섬뜩한 작금의 자본주의 상황을 그려낸다. 원작에는 없는 유일한 인물로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가 돋보이는 건, 그녀의 투정과 화풀이가 이 꽉 막힌 시스템을 펼쳐놓은 숨 막히는 영화 속에 유일한 숨 쉴 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시스템 앞에서 어찌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위안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마도 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살아가는 주인집 가족들의 그 무표정일 것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고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 역시 돈의 하녀이긴 마찬가지니까. '하녀'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늘 밑에 있었다. 저 위에 자본이란 주인을 세워두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