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박기자, 왜 여자로 돌아갔나

‘스타일’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대한 논란은 초기부터 벌어졌다. 이서정(이지아)이라는 캐릭터는 너무 수동적으로 그려지면서 심지어 ‘민폐형 캔디’라고까지 불려졌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단연 박기자(김혜수).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서정의 성장드라마를 꿈꾸는 이 드라마는 초기 멘토이자 대립자로서 박기자를 세워두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한없이 박기자의 카리스마에 짓눌린 이서정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차츰 이서정이 박기자를 넘어서는(그러면서 닮아가는) 과정을 그려내야 드라마는 엣지있는 결말로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서정이라는 캐릭터가 박기자를 넘어서기도 전에 삐걱거렸다는 것. 이서정은 물론 박기자의 카리스마를 넘어서기는 어렵지만, 자신만의 매력으로 그 상황을 뛰어넘어야 했다. 이것은 작가가 잘못 풀어낸 캐릭터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 캐릭터를 연기한 이지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캐릭터도 매력이 없고, 연기자도 그 캐릭터를 재해석해내지 못하자 이서정은 중심에서 밀려났다. 물론 이것은 이서정이라는 캐릭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서정은 상대적으로 남성들을 통해 매력을 보여야 하는데, 그녀의 주변에 있는 남성 캐릭터들이 역시 매력이 없었다.

서우진(류시원)은 이 상업적인 바다에 던져진 ‘스타일’이라는 잡지의 세계에 와서 순수를 외치는 인물이다. “읽을 것 없는 잡지가 잡지냐”고 말하는 것은 물론 보편적인 먹물들의 사고방식이지만, 이것은 패션잡지다. 패션잡지는 읽는 것보다 보는 것, 그 보는 것을 어떻게 스타일있게 보여주는가가 관건이다. 서우진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마크로비오틱이라는 요리 스타일로 패스트푸드계에 들어가 훈계를 했던 셈이다. 게다가 이 인물은 훈훈한 듯 싶다가도 사람을 갖고 노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서정의 마음을 흔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결국에는 박기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식이다.

김민준(이용우) 역시 마찬가지다. 게이라는 설정은 그렇게 숨겨놓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드러내놓고 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했다면 김민준과 박기자의 관계가 쉽게 이해되었을 테고, 인물 관계도 보다 명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은 도무지 누구를 사랑하는지 또 왜 그런지 잘 이해가 가지 않게 그려졌다. 이처럼 이 드라마에는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 있는 남성 캐릭터들에서 별로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류시원이나 이용우는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캐릭터 선택의 잘못이거나 연기력 부족의 문제다.

이렇게 되니 이서정이라는 캐릭터는 고립무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성 캐릭터들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지도 못하고, 박기자의 카리스마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 결국 남은 것은 박기자라는 캐릭터의 독주 체제다. 여기서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린다. 박기자가 중심이 되자, 그녀와의 대립각으로 손병이(나영희)가 세워지는 식이다. 박기자와 손병이의 싸움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사건이 되고, 박기자-서우진-김민준-이서정의 이야기는 간간이 섞이는 멜로가 되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박기자를 중심으로 세우려 했다면 말 그대로 엣지있게 세웠어야 했다. 하지만 결말이 보여주는 것은 이서정의 자리에 박기자가 서는 미완의 아쉬움이다. 이서정의 웨딩드레스를 박기자가 입는 것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결말이다. ‘스타일’이 애초에 하려고 했던 두 가지 축의 이야기, 즉 직장 내에서의 권력의 충돌 속에서 어떤 멘토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기자와, 그 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이서정의 이야기는 이렇게 박기자 하나의 캐릭터로 봉합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박기자라는 당당한 직장여성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평범한 여자처럼 웃음을 짓는 장면이다.

물론 그렇다고 직장여성이 모두 결혼보다는 일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것은 드라마다. 스타일있고 엣지있던 박기자가 여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드라마는 실로 맥이 빠져버린다. 어쩌다가 이런 결말에 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스타일’의 문제는 어느 한 부분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대본의 문제에서부터 연기와 연출의 문제까지 총체적으로 빗나가버린 데서 생긴 결과다. 그토록 엣지를 부르짓던 ‘스타일’은 그렇게 엣지없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선전을 기대하는 이유

웃음을 낮게 보는 시선은 아마도 오랜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우스워도 큰 소리로 웃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되던 그 문화 속에서, 웃음은 어딘지 비천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따라서 웃음을 주는 자 역시 광대로 하대되었다. 이것은 21세기 지금에 와서 상당부분 바뀌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찬사는 이제 웃음이 주는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웃음을 조금은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트콤이다.

시트콤은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준말이다. 즉 상황별 에피소드를 담은 희극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코미디라는 표현이 주는 뉘앙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미디는 드라마의 영역일까, 예능의 영역일까. 과거 예능에는 코미디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콩트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예능에서 코미디라는 말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의 예능 프로그램은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무대개그 정도로 분류되고 있고, 코미디를 지향하는 ‘희희낙락’ 같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것 역시 과거의 콩트 코미디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코미디라는 단어는 드라마에 더 어울리게 되었다. 우리는 정극이라고 하는 드라마 속에서 쉽게 코미디를 발견하곤 한다. 로맨틱 코미디나 블랙 코미디가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시청자들의 요구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과거처럼 신파적인 구도 속에서 질질 짜는 드라마에 식상한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에서 어떤 경쾌한 웃음을 기대하게 되었다. 시트콤은 당연히 전형적인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 시트콤이 드라마가 아니라 예능으로 분류되는 데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웃음에 대한 낮은 시선이 자리하는 게 사실이다.

과거에 잘 나가던 시트콤 작가였다가 현재는 정극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작가는 “시트콤을 하위장르로 보는 시선이 좋은 시트콤 작가들을 시트콤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트콤은 일일극으로 편성되기 때문에, 매주 2회씩 편성되는 미니시리즈보다 더 강행군을 하기 마련. 거의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다시피 하면서 작업을 하기 일쑤다. 그렇다면 정극과 비교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시트콤이라는 작업이 용이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선의 작가들은 ‘눈물보다 만들기 어려운 것이 웃음’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해서 작업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도, 여전히 시트콤 작가를 낮게 취급하는 시선은 여전하다고 한다. 그러니 같은 고생을 하더라도 정극으로 시트콤 작가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좋은 작가를 확보하지 못한 시트콤의 추락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시트콤이라는 장르는 정극에 비해 그 상업적 가치나 작품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어떤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트콤이라는 장르는 현 융복합되어 가고 있는 퓨전장르의 시대에 더욱 주목받아야할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시점에 ‘지붕 뚫고 하이킥’이 보여주고 있는 가능성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정극 드라마들도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10%대 중반 시청률을 이미 확보하는 대중성을 갖고 있는데다가, 작품으로만 봐도 다채로운 세대를 아우르는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웃음 그 이상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왠만한 트렌디한 드라마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물론 김병욱 PD 같은 믿음직한 시트콤 장인의 힘이 작용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시트콤이라는 장르 자체의 약진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지붕 뚫고 하이킥’의 선전을 바라게 하는 것은 모쪼록 이 시트콤의 성공이 시트콤이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을 깨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시트콤은 하위장르로 폄하될 존재가 아니다.

장르의 경쟁적인 소비가 낳은 트렌디한 스토리의 문제

지금 드라마들은 장르가 가진 트렌디한 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스포츠 에이전시의 세계를 들고 온 스포츠 드라마, '드림'은 이종격투기라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스토리는 스포츠 드라마가 갖는 전형적인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심에서 벗어난 남자들의 성공을 향한 질주, 권력을 쥔 자와의 대결구도 그리고 적절한 멜로구도가 반복된다. 새롭게 시작한 '공주가 돌아왔다'는 줌마렐라를 내세운 전형적인 트렌디 멜로드라마다. 발레라는 소재를 집어넣었지만, 드라마의 핵심 스토리는 이 트렌디 멜로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선덕여왕'이라는 발군의 사극과 경쟁하고 있지만, 5%에도 미치지 못하는 '드림'이나 6% 정도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는 '공주가 돌아왔다'는 자체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딘지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는 기획에 지나치게 트렌디한 드라마 스토리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캐릭터들을 조합하는 것만으로는 애초부터 답이 나오기가 힘든 상황이다. 화제성은 어느 정도 갖고 있으나 드라마 내적으로 보면 트렌디한 장르 그 이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러한 드라마들의 문제는 수목 드라마에 오면 더욱 심각해진다.

새로이 시작한 '맨땅의 헤딩'은 축구를 소재로 한 청춘드라마지만, 드라마는 소재만큼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차봉군(유노윤호)의 성장 스토리에 사각관계로서의 트렌디 청춘 멜로를 엮어놓았을 뿐, 축구라는 소재의 디테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에이전트라는 직업이 갖는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 연기에 도전하면서 부족해도 열심히 하는 자세가 돋보이는 유노윤호의 노력이 아까울 정도로, 스토리는 캐릭터를 살려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청률은 6%대. 스토리 없이 젊은 배우들의 맨땅의 헤딩만으로는 시청률 반등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가씨를 부탁해'는 초반 윤상현과 윤은혜가 출연하고 '꽃보다 남자'가 갖는 판타지 드라마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차츰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미 봐왔던 트렌디한 설정들과 상투적인 멜로로 인해 시청률은 점점 가라앉고 있다. 이제 13%대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는 이 드라마는 기획 단계부터 트렌디 판타지 멜로를 예고했고, 그것은 또한 이 드라마의 한계를 애초부터 지어버린 격이 되었다.

후반으로 오면서 시청률이 반등하고 있는 '태양을 삼켜라'는 이 수목드라마의 공백이 주는 반사이익을 가장 많이 본 드라마다. 아프리카와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제주도를 넘나드는 엄청난 스케일에 제작비를 감안해 보면 이 드라마가 현재 갖고 있는 17%대의 시청률은 오히려 초라하다고 봐야 할 정도다. 완성도 높은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가 부재한 까닭이다. 이미 많이 봐왔던 전형적인 남성드라마의 성공, 복수를 전형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결국 '출생의 비밀'이라는 카드를 내세웠다. 스스로 드라마 스토리가 가진 문제를 자인한 셈이다.

주말드라마로 오면 스토리의 트렌디함은 심지어 막장으로까지 치닫는 느낌이다. '솔약국집 아들들'은 애초에 훈훈한 드라마로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와 트렌디한 시어머니를 내세우는 등, 방향을 선회함으로써 38%에 가까운 시청률을 일궈냈다. 하지만 이것은 드라마 스토리의 성공이라고 보기 어렵다. 시청률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호평 받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비정상적인 스토리진행을 통해 얻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스타일'은 제목처럼 스타일은 있었지만 스토리는 없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이서정(이지아)은 그 캐릭터가 매력이 없었고, 따라서 그 자리에 박기자(김혜수)가 서게 되었다. 본래 박기자 같은 캐릭터의 역할은 이서정 같은 캐릭터를 세워주고 성장시키는 것이지, 그 자신이 드라마를 끝까지 끌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후반부로 갈수록 드라마의 힘은 빠질 수밖에 없다. 시청률이 점점 떨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주말에 아쉬운 드라마는 '탐나는도다'다. 이 드라마는 물론 실험적이기는 하지만 아기자기한 스토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탐나는 드라마를 아깝게 만드는 것은 편성이다. 이 드라마는 주말이라는 시간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주말에 편성됨으로써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만일 이 드라마가 지금의 수목드라마에 배치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보다는 더 많은 주목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선덕여왕'을 빼고 현재 드라마들은 지리멸렬하게 장르라는 틀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어떨까. 이 사극은 장르의 틀을 벗어나고 또 다양한 장르를 끌어들임으로써 어떤 통합장르의 가능성마저 보여주고 있다. 에피소드별로 구성되는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성격에 전체를 꿰뚫고 나가는 시리즈극이 적절히 균형을 맞춘 이 사극 속에서 우리는 추리극을 발견하기도 하고, 멜로드라마를 발견하기도 하며, 미드식의 장르 드라마의 문법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 어떤 면에서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가족드라마 특유의 코드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복잡한 구조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신라시대를 다루는 미션사극의 새로움과 가족드라마나 멜로드라마의 코드를 숨겨놓는 익숙함이 적절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 드라마의 작가들이 얼마나 대중들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 드라마들은 화제성 있는 소재에 이른바 장르화된 성공 코드를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손쉽게 시청률을 끌어 모으려는 안이한 방식에 젖어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미 코드들은 대중들이 보기에도 쉽게 인지되고 있고, 따라서 장르 자체가 급속히 소비되면서 피곤해진 상황이다. 늘 될 만한 장르들만 반복해서 경쟁적으로 드라마를 만들어온 탓이다. 이 시점에서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통합장르의 가능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르와 장르들의 경계를 넘어서거나 또는 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스토리를 모색하는 것은 현 위기로 인식되는 드라마 시장의 새로운 대안이 되지 않을까.

'애자'의 최강희, '내 사랑 내 곁에'의 김명민

말기 암 판정을 받았지만 그 남은 짧은 시간마저 병치레로 자식이 고생할까 수술조차 받지 않으려는 엄마. 그 엄마 앞에서 늘 투덜거리기만 했던 딸이 억누르고 억눌렀던 눈물을 터뜨린다. 영화 '애자'의 한 장면. 전형적인 신파의 한 장면 같지만, 실상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신파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예쁘게 눈물 흘리기보다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잔뜩 일그러져 심지어 못생겨 보이는 최강희의 얼굴을 보면 거기서 분명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의식과 감각은 그대로인 채 근육만 마비되어 가는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는 종우(김명민).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나 끝가지 그 곁의 사랑이 되어준 지수(하지원).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의 구도는 역시 병원 소재의 전형적인 신파 같다. 하지만 김명민의 목숨을 건 연기투혼 앞에 절절한 종우의 심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진다. 온 몸을 던지는 그 김명민의 연기 속에는 이미 루게릭병 환자인 종우라는 존재가 들어서 있다.

신파는 최근 들어 새롭게 하나의 흥행코드로 자리하고 있다.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올 최고의 흥행작 '해운대'가 신파 코드와 재난 블록버스터를 적절히 조화시켰다면, 그 뒤를 따라 여름 영화 시장의 쌍끌이를 했던 '국가대표' 역시 스포츠영화에 신파 코드를 접목시켰다. 결과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과거 신파라고 하면 먼저 고개부터 돌렸던 관객들은 왜 이런 변화를 보인 것일까.

그것은 지금의 신파들이 과거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에서 우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눈물을 뽑아내려는 지상과제 하에 억지설정으로 일관하던 과거의 신파와는 달리, 이들 영화들은 눈물을 전제하되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물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루게릭병에 걸려 움직일 수조차 없는 종우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핑클의 노래를 부르는 하지원의 모습은 발랄하지만, 가슴 뭉클함을 안겨준다. '애자'의 최강희는 그 톡톡 튀는 캐릭터를 백분 소화해내면서, 신파마저도 상큼하게 만들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신파 코드가 대중문화의 신주류로 부상하게 된 것은 여러 모로 불황이 만들어놓은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대중들은 억눌린 감정을 풀어줄 대체제를 요구하고 있다. 끊임없이 웃던가, 아니면 울던가, 그것이 어느 것이든 가슴 속에 쌓아둔 감정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관객들은 만족감을 느낀다. 무언가 사회적인 메시지 같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신파는 어쩌면 이 시기에 그 본래의 뜻인 뉴 웨이브(新派)라는 의미를 갖게 될 지도 모른다. 할리우드적 볼거리가 주는 마비적인 블록버스터처럼, 우리의 눈물샘과 웃음보를 자극하는 감정의 블록버스터는 그 밑바닥에 신파가 가진 끈끈한 관계성의 실타래를 무기처럼 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이 신파가 가지는 작위성을 뛰어넘어 그 눈물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무리 작품이 그 진정성을 보여주려 한다고 해도, 그것을 구현해내는 연기자가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자'의 최강희나 '내 사랑 내 곁에'의 김명민은 신파를 넘어서는 진정성을 연기를 통해 보여준 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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