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뚫고 하이킥', 저녁시간 유쾌해질까

'지붕 뚫고 하이킥'은 여러모로 기대작이다. 그것은 국내 시트콤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김병욱 PD의 작품인데다, 숱한 화제를 낳았던 전작 '거침없이 하이킥'의 시즌2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대감은 첫 회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었다. 배우들이 가진 기존 이미지를 비트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김병욱표 시트콤의 유머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석이 야쿠르트 아줌마에게 돈을 지불하며 나누는 '이상한 계산법' 에피소드는, 정보석이 가진 정극의 이미지를 비틀었다. 반듯한 얼굴과 태도와는 상반되는 빈 구석이 많은 말과 행동은 특별히 짜내려하지 않아도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이현경을 연기하는 오현경은 기존 비련의 여인의 이미지를 180도 뒤집었다. 씩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제목에 걸맞게 하이킥이 예감되는 캐릭터다.

이순재는 정극과 코미디를 오가는 연기경력이 있어서인지 기존 이미지를 비틀기보다는 강화하는 쪽에 가깝다. 야동순재로 이름이 난 그는 이번 시트콤에서는 김자옥과 만들어가는 로맨스 그레이에서 액션을 방불케 할 비밀데이트를 통해 액션순재의 탄생을 예고하게 만든다. 신신애 역할을 맡은 서신애는 '고맙습니다'에서 보여주었던 순박한 시골소녀의 이미지가 한층 강화된다. 서울 상경을 통해 도시의 문명을 신기하게 접하는 그녀의 순수한 모습은 이미 산골에서 콜라가 뭔지 몰라 이리 저리 입으로 물어보는 콜라 캔 에피소드에서 복선을 깔아놓았다.

이미 각각의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대책 없이 들이대는 양수경 역할로 눈길을 끌었던 최다니엘은 이 시트콤에서는 남일 신경 안 쓰고 자기중심적인 순재의 아들 이지훈 역을 맡아 엉뚱한 웃음을 기대하게 만들고, 오랜 만에 다시 보는 반어법 교장선생님 특유의 말투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웃음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은 이러한 화려한 출연진과 믿음이 가는 연출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작금의 유쾌한 웃음이 사라져버린 저녁시간대에 제대로 된 가족 시트콤 한 편이 그리운 까닭이다. 언제부턴가 막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저녁 시간대의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패륜적인 설정의 이야기들 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자극적인 드라마들 속에서 건강한 웃음을 주는 시트콤이 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졌다. 게다가 시트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뛰어난 작가들이 선뜻 이 분야에 뛰어들지 못하게 함으로서 시트콤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트콤을 했다면 무언가 낮게 보려는 시선은 이 가능성이 충분하고, 가치 또한 충분한 장르를 힘겹게 하는 요인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그런 편견 자체를 하이킥 하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을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을 갖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토크쇼 전성시대, 토크쇼가 토크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토크쇼 전성시대다. 월요일에는 MBC의 ‘놀러와’, SBS의 ‘야심만만2’, KBS의 ‘미녀들의 수다’가 경쟁을 벌이고 있고, 화요일에는 KBS의 ‘상상플러스’, 수요일에는 MBC의 ‘황금어장’, 목요일에는 KBS의 ‘해피투게더’, 금요일에는 SBS의 ‘자기야’, 토요일에는 MBC의 ‘세바퀴’ 같은 토크쇼들이 포진해 있다. 실로 거의 일주일 내내 토크쇼를 볼 수 있는 시대다.

이렇게 된 것은 물론 토크쇼라는 형식이 비용 대비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토크쇼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의 형식보다 비용이 적게 들어간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크쇼가 갖추고 있는 형식, 즉 호스트가 게스트를 초청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답변을 듣는 과정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연예계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이른바 신비주의의 해체기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연예인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고, 대중들은 그 솔직 대담한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고 있다. 이른바 리얼 토크쇼가 대세가 된 것이다.

리얼 토크쇼는 시청자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그 시청자들을 등에 업은 호스트가 게스트를 압도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즉 게스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시청자를 대신하는 호스트가 원하는 이야기를 게스트가 하게 된 것이 리얼 토크쇼가 등장한 배경이다. 여기에 연예인들의 신비주의 콘셉트가 무너지면서 오히려 솔직한 모습이 인기를 끌게 되자, 게스트들의 솔직한 이야기는 자발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이 리얼 토크쇼는 또한 문제점도 갖고 있다.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 속에서 솔직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폭로성의 이야기들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억지로 게스트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까지 들춰내기도 하고, 심지어 게스트를 윽박질러서 울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나친 사생활 침해라고 할 수 있는 집요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리얼 토크쇼가 태생적으로 갖는 단점이다. 리얼 토크쇼의 토크 양상은 자극적으로 흐르게 마련인데, 바로 이 자극은 반복되면 둔감해지고 따라서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크쇼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거의 연예인들의 가십 수준에 머문다는 건, 현재 우리의 토크쇼가 가진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토크쇼는 사람을 출연시켜 그 사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진솔한 모습을 추구하는 리얼 토크쇼에서는 그 사생활적인 부분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는 토크쇼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끄집어내려 하거나, 또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억지로 말하게 하는 토크쇼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토크쇼가 그저 쇼가 아니라, 한 시대의 화법을 대변해 보여주고 어떤 면에서는 교육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이들 같은 경우에 이런 형식에 반복 노출되면 대화의 방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물론 토크쇼들도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잡담이 아닌 다른 것들을 담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릎팍 도사’는 지금 현재 가장 진취적인 토크쇼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의 화법으로 자리 잡은 직설어법을 쓰면서, 게스트에 대해 시청자가 알고 싶은 점을 피하지 않고 질문하는 공격적인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그 게스트를 통해 어떤 시사점까지 찾아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로 중요한 것이다. 사생활은 그저 가십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중요한 정보가 되기도 한다. 사생활로 제시된 개인적인 삶이,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삶으로서 어떤 공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십이 아니다. 토크쇼는 이처럼 개인에 집중하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연예인으로 한정된 직업군에서 계속해서 어떤 보편적으로 공감을 주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무릎팍 도사’가 시도한 게스트의 외연을 넓힌 작업은 토크쇼에 있어서 큰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도 연예인이 아닌 비연예인이 출연했을 때, 시청률이 더 높은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보아 대중들은 좀 더 다양한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연예인에 편중된 게스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스트들도 너무 몇몇 MC에 국한되어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실제로 현재는 강호동과 유재석 이 두 개그맨이 거의 토크쇼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토크쇼의 진행 자체가 녹록치 않게 된 상황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박중훈쇼’의 추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토크쇼의 성공은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이것은 시청률 보증수표인 이 개그맨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새로운 형식을 개발하기 보다는 유명 개그맨을 기용해 쉽게 시청률을 가져가려는 것이다.

토크쇼는 문제와 해법을 계속 제시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고 지금도 그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토크쇼는 과거 가장 기본적인 형식인 1인 토크쇼에서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자니윤쇼’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집단으로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었다. 서세원이 진행했던 ‘토크박스’ 같은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는데 ‘야심만만’이 대표적이다. 설문 형식을 가져와서 자연스럽게 연예인들의 속내를 끄집어냄으로써 새로운 토크쇼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리고 직설어법의 시대에 와서 토크는 좀 더 독해졌고 과감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것도 저물어가고 있다.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체된 느낌의 토크쇼는 이제 자극적인 웃음만이 아닌 어떤 공감을 찾고 있다. 진솔하면서도 사람의 스토리가 살아있는 토크쇼, 이런 게 그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연예인들의 영역파괴, 더 이상 성역은 없다

KBS '생방송 뮤직뱅크'의 한 풍경. '인디언 보이'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부르는 MC몽과 화려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몇몇 아이돌들 사이로 이색적인 얼굴이 보인다. 본래부터 가수를 꿈꾸다가 개그맨이 되었고, 그 관성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고음불가'나 '야야야 브라더스' 같은 음악 개그를 선보였던 개그맨. '1박2일'의 앞잡이, 이수근이다. 그는 새로 낸 싱글앨범 '해피송'의 타이틀곡 해피송을 불렀다. 잠시 후, 가요프로그램에서는 보기 어려운 또 한 명의 얼굴이 무대에 올랐다. '주몽', '이산'에서 특유의 굵직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견미리. 그녀는 1집 '행복한 여자'를 내고 가수 데뷔를 했다. 음악 프로그램 속에 들어온 개그맨과 연기자. 그 풍경은 이색적이지만 이미 더 이상 이상한 풍경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개그맨과 가수, 그리고 연기자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봐왔다. 거기에서는 개그맨 이수근과 함께 MC몽이 형 동생 해가며 1박2일간 포복절도의 여행을 떠난다. 그러니 '생방송 뮤직뱅크'에서의 MC몽과 이수근이 같은 프로그램에 서는 모습이 우리에게 익숙할 수밖에. 그런데 '1박2일'에서 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인물 중에는 '찬란한 유산'에서 한효주와 가슴 떨리는 멜로를 보여주었던 이승기도 있다. 가수이면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면서 동시에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승기는 작금의 연예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영역 파괴(?)를 상징처럼 보여주는 인물이다.

드라마를 보면 이제 가수들의 주연급 캐스팅은 일반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아가씨를 부탁해'의 윤은혜, '태양을 삼켜라'의 성유리, '혼'의 이진은 아예 가수활동에서 연기활동으로 선회했고, '드림'의 손담비, '혼'의 티아라 지연, 또 앞으로 방영될 '맨땅의 헤딩'의 유노윤호는 가수이면서 연기에 도전하는 인물들이다. 한편 개그맨들의 드라마 출연도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선덕여왕'에서 뛰어난 감초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류담, '스타일'에서 에디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개그맨 한승훈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연예인들이 자기 영역을 넘어서 타 분야까지 넘나드는 퓨전 경향은, 연예인 당사자들과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연예인 입장에서 보면 과거 이미지는 겹치지 않아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었지만 신비주의가 지나간 리얼리티 세상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수정되었다. 연예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즉 다양한 얼굴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연기든 노래든 개그든 그것은 하나의 퍼포먼스일 뿐이라는 것을 대중들은 인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박예진이 정극에서 멜로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패밀리가 떴다’에서 웃음을 주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솔직한 모습이 되었다. 하나가 아닌 복합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호감을 준다는 이야기다.

한편 제작진들은 영역 바깥의 인물들이 갖고 있는 인지도와, 새로운 영역 속에 들어왔을 때의 신선함을 주목했다. 개그맨이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것은 당연한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반면, 가수나 배우가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것은 새로운 호기심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영역 속에서 그 영역에 익숙해진 이들은 리얼이 대세인 현재의 쇼 속에서 자칫 인위적인 모습을 연출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그 분야의 프로보다는 타 영역에서의 프로(따라서 그 분야에서는 아마추어가 되는)가 오히려 각광받는 상황은 연예인들의 영역 파괴 열풍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러한 영역파괴의 경향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잘 나가는 특정 연예인에 대한 집중도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은, 이제 새롭게 진입하려는 신진 연예인들에게는 커다란 장벽으로 작용한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면 타 분야까지도 영역이 넓어지지만, 이것은 결국 몇몇 연예인들이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장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드라마에서 젊은 배우들의 입지는 점점 좁혀지고 있는데, 그것의 한 원인은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무한도전’의 ‘강변북로 가요제’ 앨범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가수로서의 성공이 음악적인 성취보다 이러한 이벤트적인 요소에 좌지우지된다는 허탈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영역파괴의 경향은 바꿀 수 없는 흐름이다. 따라서 이 변화를 거부한다는 것은 아예 연예 생태계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앞으로 연예인은 말 그대로의 ‘탤런트(talent :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함)’의 의미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달라진 생태계는 벌써부터 거기에 맞는 탤런트들을 포진시키기 시작했다.

‘혼’을 담은 문제작, 왜 마침표를 못찍었나

“사람들은 작은 것에는 분노하지만 큰 것에는 분노하지 않아. 왜?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까.” 백도식(김갑수)은 진정 분노해야할 대상에는 분노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분노함으로써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그러면서 불쑥 정치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래서 정치를 좀 해보려구 해.” ‘혼’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백도식이란 인물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그저 공포극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거든.” 법과 정의에 대한 그의 대사는 아프게도 현실이다. 그러니 법을 이길 수 없는 피해자들은 법 외부의 힘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하려 한다. ‘혼’이라는 공포물의 탄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가해자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같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으로 혼령의 힘을 비는 빙의와 처단자로서의 연쇄살인을 동원한다는 것이 이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 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덱스터’라는 미드를 통해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혼이 복수를 하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많은 ‘전설의 고향’ 귀신이야기의 단골메뉴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한 군데 얽혀있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프로파일링 기술을 가진 신류(이서진)가 혼령에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임주은)를 이용해, 법으로 이길 수 없는 살인범들을 제거해나가는 이야기는 확실히 신선한 면이 있다.

게다가 공포 코드 이면에 사회적인 부조리를 넣어 그 공감의 울림을 키운 것도 이 작품을 명품으로 만든 요인이다. 우리는 사람(물론 살인범들이지만)이 혼령보다 더 무섭고, 그 사람을 혼령이 처참하게 죽이는 것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가 그런 경험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령에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여기서 공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분노가 자리하게 된다. 무섭기보다는 화가 나고, 살인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저런 자는 죽어도 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공포물이 사회극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은 저 백도식이 경고한 부분이다. 엉뚱한 분노가 결국은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예언처럼 들리고, 결국 그 예언에 따라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결말에 있어서 신류와 건일(정시우)의 죽음은 공포극으로 본다면 지나치게 허무하게 보인다. 무언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도식은 그 누구에게도 응징을 당하지 않했다. 그는 스스로 건물에서 밖으로 뛰어내렸고, 거기에서도 살아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공포극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공포의 끝장, 즉 절대 악의 죽음, 문제의 해결 등이 보여지지 않은 채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극의 틀로 보면 말이 달라진다. 신류와 건일의 허무한 죽음은 흔한 말일 수 있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그 복수의 순환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처단한다는 것이 가진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그것에 분노하며 결국에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하나는 이 복수의 비극적인 순환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준다. 게다가 사라져버린 백도식은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다”고 그가 말한 바 있는 그 현실을 그대로 우리 앞에 들이민다.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현재 상태로 돌려놓은 이 결말은 사회극으로서는 그 울림이 크다. 해결된 것은 없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목도했고, 결국 현실의 문제는 드라마 같은 판타지가 서둘러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혼’은 사회극을 꿈꾼 공포극이다. 겉으로 공포극의 외관을 하고는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그러니 공포극으로서는 여러 모로 그 장르가 갖는 재미를 빗겨간 면이 있다. 하지만 ‘혼’은 충분한 사회극으로서의 재미를 주었던 드라마다. 적어도 공포와 현실이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는지, 이 드라마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혼’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에 남았지만, 그 시도만큼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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