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 야구단', 야구보다 캐릭터인 이유

'천하무적 야구단'이라는 스포츠 버라이어티는 그다지 새로운 형식은 아니다. 하지만 야구라는 소재는 확실히 지금까지의 스포츠 버라이어티들과 이 프로그램이 선을 긋는 지점이다. 누구나 다 알 것 같지만, 꽤 많은 룰을 갖고 있는 야구라는 스포츠는 보다 넓은 시청층 확보가 쉽지 않다. 야구는 '날아라 슛돌이'의 축구처럼 공을 상대방 골문에 넣으면 점수가 오르는 단순한 지식만 갖고도 충분히 버라이어티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종목은 아니다.

이것은 WBC나 베이징 올림픽에서 후끈 달아올랐던 야구에 대한 관심과는 또 다른 문제다. 야구는 겉으로 보기엔 이미 대중성을 확보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어가면 잘 모르는(특히 여성들에게는) 그런 스포츠다. 따라서 폭넓은 대중성을 지향하는 '천하무적 야구단'은 시작부터 몇몇 숙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자세히 알지 못했던 야구의 룰들을 쉽게 알려주어야 하고, 동시에 야구만이 갖는 스포츠 버라이어티의 재미요소를 찾아내야 한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세운 것은 마르코라는 캐릭터다. 그는 시작부터 아르헨티나 출신이란 점을 강조했고, 그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가 야구와는 별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마르코는 야구의 문외한으로 '천하무적 야구단'에 입성하는 캐릭터다. 그런 마르코가 이 팀의 주장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눈높이를 야구를 잘 모르는 시청자에게 낮춰 맞추겠다는 이 프로그램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내기를 걸고 제작진이 내는 야구 퀴즈에 마르코가 나오는 이유는 그의 성장(야구지식을 알아가는)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시청자들에게 야구지식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 그가 야구를 잘 모르면서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캐릭터가 '짐승'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짐승'이란 룰은 몰라도 선천적인 감각,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써 마르코는 '천하무적 야구단' 캐릭터에서 어쩌면 강한 중요한 부분을 맡게 된다. 리얼리티를 올려주는 강한 캐릭터인 동시에, 야구의 기초를 세워주는 역할이다.

이하늘은 마르코와 함께 이 프로그램의 강하고 야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늙은 사자'다. 그는 특유의 반항적인 모습을 내내 드러내면서 프로그램에 긴장감을 만드는 사자지만, 그 앞에 '늙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 해서 그것을 웃음으로 전화시키는 존재다. 이하늘과 마르코가 벌칙을 수행하기 위해 타이어를 매고 달리고, 뻘 밭에서 뒹굴며 심지어는 최루가스실에 들어가는 모습은 이 프로그램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김창렬과 임창정은 특유의 깐죽 캐릭터로 자리하고, 오지호와 김준은 보기와는 달리 구멍이 많은 이 프로그램의 허당 캐릭터들이다. 동호가 최연소 출연자로 말 그대로의 초딩 캐릭터라면 한민관은 뼈다귀즘으로 의외로 강한 면모를 보여주면서 개그맨 특유의 입담과 몸개그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다. 마리오는 아직 캐릭터가 잡혀있지 않지만 어쩌면 그것 자체가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1박2일'의 김C가 그런 것처럼.

단장으로 들어온 백지영과 감독이 의심되는(?) 해설가 김C 역시 빼놓은 수 없는 캐릭터다. 백지영은 이 프로그램의 여성 시청층의 눈높이를 대리해주는 역할로 팀원들을 쥐락펴락 하는 동시에, 유일한 여성으로서 팀내의 분위기를 알콩달콩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수행한다. 김C는 '1박2일'에서와는 달리, 이 프로그램 속에서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특유한 입담이 살아나는 해설은 프로그램의 진짜 리얼 요소인 실제 경기가 가지는 박진감과 쇼적인 요소인 웃음을 모두 잡아내고 있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이로써 캐릭터 야구버라이어티의 진용을 갖춘 셈이다. 흔히들 각본 없는 드라마라 하는 스포츠로서의 야구가 갖는 리얼리티 요소들은 이제 이 캐릭터들이 강화되면서 좀더 흥미진진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WBC같은 스포츠 경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이면의 이야기들, 예를 들면 연습과정이나 인간적인 면모들 같은 것들은 이 프로그램만의 매력이다. 만일 이 '천하무적 야구단'이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또한 야구의 저변을 넓힌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남장여자 설정, 실보다 득이 많다

'선덕여왕'의 덕만(이요원)은 남장여자다. 시청자들은 덕만을 연기하는 이요원이 여자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지만, 드라마 속 인물들은 아직까지 그녀가 여자임을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약속이다. 하지만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그 드라마 속 리얼리티는 충분히 있어야 수긍이 갈 것이다. 낭도로서 동료들과 오래도록 함께 지내면서 훈련을 하고 전쟁까지 수행하면서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 사극의 리얼리티에 꽤 큰 빈틈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약점이 예기되는 상황 속에서 굳이 덕만을 남장여자로 설정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유는? 실보다 득이 많으니까.

먼저 덕만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극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으로 전쟁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덕만은 사막에서 암살자에게 쫓기면서 성장했고, 신라로 들어오면서 가야의 유민들에게 붙잡혀 또 한 번의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극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가장 큰 성장의 계기는 역시 전쟁이다. 아무리 주인공이 정치적으로 뛰어난 지략을 발휘한다고 해도 그것은 전쟁만큼 극적일 수는 없고, 또 그만한 시각적인 효과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덕만이 남장여자인 것은 그녀가 전쟁에 투입되는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도드라지며, 그 속에서 여성적인 카리스마(공포보다는 희망으로 이끄는 카리스마)를 발휘해 위기를 넘어서는 이야기에도 부합한다.

대체로 사극이 다루는 재미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전쟁 같은 미션을 직접 몸으로 수행해나가는 것이 주는 볼거리의 재미고, 또 하나는 대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팽팽한 정치적인 대결구도의 재미다. 대체로 지금껏 남성사극 속의 남성들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나갔다. 전쟁을 수행해나가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포석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마련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 사실상 전쟁이 주는 스펙타클한 재미는 포기될 수밖에 없다. 여성이 전쟁이 참전하는 것은 거의 예외적인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천추태후'의 경우는 바로 그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녀는 전쟁에도 참전하고 정치에도 관여한다. 그런데 '천추태후'의 이런 면모는 여성적인 카리스마를 끄집어내기가 어렵다. '천추태후'는 생물학적인 성별구분으로서는 분명 여성이지만 캐릭터로 봤을 때 남성성을 더 많이 가진 여걸이기 때문이다.

덕만이 남장여자인 점은 이 두 가지를 여성성을 유지하면서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그녀는 겉으로는 남자이기 때문에 전쟁에 직접 투여되어 미션을 수행할 수도 있고, 그 미션 수행 과정에서도 여성성(실제로는 여성이기 때문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이렇게 입지전적인 인물로 성장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녀는 아마도 실제 선덕여왕의 면모가 그러했을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덕만의 이 남장여자라는 설정은 그녀와 짝패를 이룰 천명(박예진)과 정적인 미실이 가지지 못한 이 두 가지 측면의 매력을 모두 가지게 해주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천명과 미실은 모두 정치적인 면모만을 보일 뿐,덕만 같은 실전적인 매력은 보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 사극 속에서 천명과 미실은 말만 하고 있지만 덕만은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남장여자 설정의 활용은 연기자의 입장에서도 유용하다. 여성 연기자의 이미지 변신에 있어서 남장여자라는 캐릭터만큼 힘을 발휘한 것도 드물다. 윤은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고은찬이라는 남장여자로 연기력 논란을 불식시켰고, 문근영은 '바람의 화원'에서 남장여자로 설정된 신윤복을 통해 비로소 국민여동생이라는 족쇄를 풀어내고 온전히 연기자의 이름을 얻어냈다. '선덕여왕'의 이요원 역시 마찬가지다. 늘 어딘지 가녀린 이미지로 굳어져 있던 그녀는 덕만이라는 남장여자 캐릭터를 만나 연기의 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발군의 아우라를 구축했던 아역 남지현의 호연으로 더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요원이 그나마 그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바로 이 남장여자라는 캐릭터가 가진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덕여왕'의 남장여자 설정은 물론 역사 왜곡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작금의 사극이 이제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있는 상황으로 보면, 사극에 대한 지나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역사가 권위로 자리하지 못하는 시대에, 사극은 어떤 진실(사실 무엇이 진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을 주장하기 보다는 스토리가 갖는 재미에 더 천착하고 있다. 사극은 이제 역사와 결별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의 남장여자 설정의 유용성을 따지는데 있어서 봐야할 것은 역사 자체 보다는 드라마에서 그 설정이 갖는 득과 실일 것이다. '선덕여왕'의 남장여자는 드라마적으로 봤을 때, 물론 실도 있지만 득이 더 많다.

결혼,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 사이에서

나이 마흔에 접어든 독신남녀. 의사와 건축가라는 전문직의 그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툭탁거리면서 정이 들어가는 두 사람. 무엇보다 시종일관 배꼽 빠지게 웃게 만드는 엉뚱한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그리고 이들 앞에 놓여진 지상과제 결혼. '결혼 못하는 남자(이하 결못남'가 갖고 있는 이러한 구도와 소재와 설정은 우리로 하여금 한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바로 '트렌디 멜로드라마'다.

실제로 이 드라마의 연출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따르고 있고, 구도 또한 현재 트렌드라 할 수 있는 40대의 화려한 독신을 다루고 있으니 이러한 호칭이 그다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결못남'을 그저 트렌디 멜로드라마라고 지칭했을 때, 그 호칭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이 드라마가 가진 의미 있는 시선 하나를 놓치지 않을까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결못남'은 트렌디 멜로가 담아내지 못했던 현대인들의 특징적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결혼 못하는 남자', 조재희(지진희)는 이 드라마가 그를 '못하는' 남자로 지칭하지만, 스스로는 '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혼자 앉아 있는 것조차 민망할 고깃집에서 태연히 고기 맛을 음미하는 남자고, 불꽃놀이로 다들 인파에 시달릴 때 자기만 아는 장소에서 혼자 그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남자다. 즉 사회적인 통념 속에서 나이 마흔인 그는 '못하는' 남자지만, 자기 스스로는 분명 혼자임을 즐기는 '안하는' 남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 속 조재희가 혼자 완벽한 시간을 즐기는 모습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또 한 측면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그것은 '관계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이다. 조재희가 말하는 것처럼 결혼이란 자유로운 혼자만의 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홀로 살아가는 모습은 물론 외로움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부러움을 갖게도 만든다. 그는 조직의 스트레스가 없는 인물이다. 그 스트레스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친구인 윤기란(양정아)의 몫이다.

또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다. 이 성역이 되어버린 집은 물론 사십의 남자가 궁상을 떠는 모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는 그 혼자 지내는 시간을 만끽한다. 그는 자기에게만 충실할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을 그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것은 그 나이대의 결혼한 남자들(혹은 여자들)이 갖는 시간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임을 즐기는 조재희가 부러운 상황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관계에 지쳐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조재희라는 캐릭터가 가진 이러한 면모는 현대인들의 단면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따라서 이 "독신이 즐겁다"는 엉뚱한 캐릭터는 독특한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즉 웃기는 대상이 되면서도 부러운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괴물처럼 여겨지는 결혼 권하는 사회는 어쩌면 그 자체로 이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집착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혼자 자유를 구가하자니 괴물 취급을 받고, 그렇다고 결혼을 하자니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딱히 결혼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이 아닐까.

조재희의 모습은 거꾸로 혼자이면서 그 혼자임을 즐기지 못하는 장문정(엄정화)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녀는 퇴근시간에 함께 저녁먹을 사람을 고민하는 입장이고, 주말이면 갑작스런 직장의 호출에도 흔쾌히 시간을 내줄 만큼 혼자인 주말이 걱정스런 입장이다. 그런 그녀에게 저 혼자임을 즐기는 이 남자는 괴물이면서도 부러운 대상일 수 있다. 그녀의 입장은 사실 사회적인 통념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조재희와 장문정이 그려내는 '결못남'의 멜로는 그저 결혼적령기를 넘은 남녀의 멜로물과는 다른 구석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는 신데렐라에 대한 판타지도 없고 성공에 대한 판타지도 없다. 오히려 이 드라마가 가진 판타지는 결혼을 했을 때의 판타지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재희와 장문정의 부딪침은 이 두 판타지의 부딪침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트렌디 멜로 그 이상을 담는 것은 이 양측의 판타지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로부터의 탈주 혹은 관계 속으로 편입. 이것은 현대인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감동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MBC 스페셜’의 다큐멘터리

‘MBC 스페셜’의 ‘목숨 걸고 편식하다' 편은 꽤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습관적으로 말하는 “건강을 위해 골고루 먹으라”는 그 상식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약을 끊게 하는 대신 식이요법을 시키고, 대장암으로 시한부인생 판정을 받았지만 식습관을 고쳐 삶을 되찾고,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서 반드시 먹어줘야 하는 면역억제제를 끊고 대신 금욕적인 삶과 먹거리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 강도로만 보면 어느 르뽀보다도 고발 프로그램보다도 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과영양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편식하라’는 말은 과영양 시대의 역설을 담고 있다.

하지만 ‘MBC 스페셜’은 이 소재를 르뽀나 고발 프로그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 집중하는 것으로 모든 메시지에 대한 강변을 대신한다. 대신 이야기는 마치 ‘인간극장’이나 ‘휴먼 다큐 사랑’처럼 일상 속의 특별함 정도를 말해주는 것 같은 편안함과 친근함을 갖게 된다. 이처럼 강변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다큐의 진짜 미덕인지도 모른다. ‘MBC 스페셜’의 다큐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중심에 늘 사람을 놓기 때문이며, 또 메시지를 스스로 강변하기보다는 다큐 속의 인물들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만드는 것 때문이다.

‘MBC 스페셜’의 연중 기획이랄 수 있는 ‘휴먼 다큐 사랑’은 바로 이런 점이 폭발력을 가지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면서도 적절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는 인물에 대한 집중과 거리두기가 꽤 잘 균형을 잡고 있다. 실제 메시지는 따라서 늘 뒤편에 서 있게 마련이지만(예를 들면 워킹맘을 다루면서도 그걸 전면에 세우지는 않았던 ‘풀빵엄마’처럼)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그 메시지야말로 진정한 공감에 이르게 하는 묘책이 되기도 한다.

‘MBC 스페셜’이 다루어왔던 일련의 셀러브리티(celebrity) 다큐 또한 연예인이나 스포츠맨 같은 유명인사들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함을 포착함으로써 호평을 받아왔다. 김명민 편이 그렇고 박지성 편이 그러했다. ‘최민수, 죄민수 그리고 소문’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울한 근거 없는 소문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린 최민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하면서도, 동시에 소문에 대한 사회심리학적인 객관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MBC 스페셜’은 특별한 보통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늘 보여왔다. ‘곰배령사람들’에서는 도시에서 살다가 곰배령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들의 특별한 삶을 포착함으로써 거꾸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 같은 것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 해녀’는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해녀들의 삶과 애환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두 측면의 메시지를 모두 담아냈다.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그 인물이 처한 환경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 기법은 종종 환경 다큐멘터리로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인물 대신 북극곰을 카메라의 중심에 놓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문제를 드러낸 ‘북극의 눈물’이 그 대표작이 될 것이다. ‘북극의 눈물’은 이로써 시리도록 아름다운 북극의 자연을 보여주면서도 감동적으로 환경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새로운 환경 다큐멘터리의 한 지점을 그려냈다.

‘MBC 스페셜’은 7월3일 밤 ‘노견만세’라는 제목으로 죽기 전까지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은퇴견들과 그들과 삶의 한 부분을 함께 해온 사람들 간의 눈물겨운 마지막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것은 역시 지금까지 인간-자연(동물)에 집중해온 ‘MBC 스페셜’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휴먼다큐 사랑’의 동물 버전처럼 여겨지는 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은 지금까지 ‘MBC 스페셜’이 걸어온 그 길이, 강변하지 않으면서도 늘 우리에게 어떤 감동으로서 메시지를 전해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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