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영이 가장 원하지만 얻기 힘든 것

어찌 보면 화영(김희애)은 ‘내 남자의 여자’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사랑해. 보고싶어. 나 사랑해? 화영은 친구 지수(배종옥)의 남편, 준표(김상중)에게 늘 그렇게 말한다. 준표의 표현대로라면 “늘 도도도도도도...” 이렇게 같은 톤의 표현만 하는 지수하고는 전혀 다르다.

어리석게도 준표는 그 화려하고 다채로운 표현법에다, 식물 같이 보이는 지수와 전혀 다른 동물적 육탄공세의 화영에게 정신이 홱 돌아버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화영과 딴 살림을 차린 준표는 완전히 갈라서기까지 자꾸 고개가 지수에게 돌아간다. 함께 있을 땐 실감하지 못했던 지수의 모습을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그렇게 지겨워했던 일상의 반란이다.

일상과 관계는 힘이 세다
화영과 함께 사는 준표에게 지수는 새벽 3시에 전화를 한다. 편도선염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아들 경민을 데리고 병원에 가달라는 것. 준표는 두말 않고 새벽길을 달려간다. 그런데 그 새벽 준표는 깨닫는다. 자신은 공짜로 살았다는 것. 이런 새벽길을 지수는 10년 넘게 해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준표는 차에서 조수석에 앉아 “목말라”하고 말하는 화영에게서, “그냥 물 줘? 녹차?”하고 지수가 하던 말을 떠올리고, “졸려”하고 말하는 화영에게서, “잠이 얼마나 전염성이 강한 건데 잠을 자”하는 지수를 떠올린다. 카라얀은 큰 소리로 들어야 제 맛이라는 화영에게서 논문 쓰는데 방해된다며 숨죽이며 살던 지수를 생각한다.

밥의 기억은 더 지독하다. 화영이 아침으로 주는 빵이나 인스턴트 음식, 심지어는 설익은 감자에 준표는 불평을 하면서 지수가 해주던 밥이 그립다. 심지어 아들 핑계를 대면서 밥 좀 먹여달라며 찾아간 지수네 집에서 두 그릇이나 비우고 생전 안 하던 말, “저녁 잘 먹었어. 고마워.”하는 진심 어린 말을 건네기까지 한다. 준표에게 지겨움으로 인식되던 일상은 그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부메랑처럼 자신을 공격한다.

사는 것과 사랑하는 것, 어느 게 어려울까
아이러니하게도 준표가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던 일상을 깨뜨려 친구의 남자를 얻은 화영이 바란 것 역시 거창할 것 없는 일상이다. 화영은 준표가 주는 생활비에 감동해 울먹일 정도로 뭇 여성들이 갖는 일상을 원하는 여자다. 그러나 화영이 원하는 준표와 ‘슈퍼마켓 가기’나 ‘저녁 산보 가기’는 번번이 일상과 관계의 그물망에 걸린다.

슈퍼마켓에서는 은수에게 걸려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하고, 저녁 산보 중 들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아들 친구에게 딱 걸린다. 그것도 모자라 불륜사실을 알게된 집주인에게 거의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하게 된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원하지만 준표는 거기에 진저리를 친다. 모든 여성들이 갖는 일상을 원하는 것이지만 그녀는 거기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자격도 없다.

일상은 힘이 세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 그리고 어려운 것은 사는 것이다. 그러니 화영은 사랑을 쟁취한 연후에 일상마저 얻으려 애쓴다. 요리학원도 다니고 운전면허 시험도 보고 어울리지 않게 “절약!”을 외치기도 한다. 그런다고 그녀가 평온한 부부의 일상을 얻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상처를 주고 빼앗은 관계에서 그건 흉내낼 수는 있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빼앗은 거라면 더더욱. 그래서 그녀는 늘 도망중이다.

지수의 일상에 담은 사랑, 살림의 사랑법
‘내 남자의 여자’에서 가장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건 지수다. 그녀는 남편과 친구를 동시에 잃었다. 그 둘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더 힘들게 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지수의 사랑법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은 남녀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다. 말로 백 번 사랑한다 말하는 것보다 그녀는 평범한 일상 속에 사랑을 담아 전한다. 밥 차리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그 모든 행동이 사랑이다. 흔히 일상이란 이름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서 그녀가 준표에게 했던 사랑은 그녀의 일상 거의 대부분에 남겨져 있다. 그런 준표가 배신을 한 상황이니 그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밥을 하다가, 청소를 하다가, 빨래를 하다가 눈물이 나는 건 살뜰했던 일상이 주는 반격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차츰 회복된다. 아무리 상처를 주었다지만 그것마저 끌어안아 긍정으로 고통을 넘어서려 한다. 살림하는 사람들의 본능이다.

장사를 시작하려는 지수에게 준표는 “살림만 했던 사람이 무슨 장사냐”고 말한다. 지수가 차려준 밥상에서 밥을 허겁지겁 먹는 그가 살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사람. 삶. 살림. 이 세 단어는 모두 ‘살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가만 놔두면 죽게되는 것을 살리는 것, 그것이 살림이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림’이라는 말은 그저 불평이 아니라, 그 속에 행동으로 담겨지는 사랑을 남자들이 잘 보지 못할 때 하는 주부들의 말이다.

지수의 아버지(송재호)가 하듯, 말없이 정원의 풀을 뽑아주고, “넌 된장국을 정말 잘 끓여!”하며 말해주는 것이 ‘사랑한다’는 백 마디보다 더 값진 것이란 걸 알게 해주는 것이 지수의 사랑법이다. 그녀는 석준(이종원)의 화실을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난 밥순이였나봐. 누가 내가 해준 밥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더라.” 그것이 바로 살림하는 사람의 사랑법이다. 바로 이 시대 대부분의 가정을 지키고 있는 주부들이 하고 있는. 그리고 화영이 가장 원하지만 얻기 힘든.

디지털 극장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운 이유

영화티켓 하나 꼭 쥐고 냄새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그저 스크린만 쳐다봐도 좋던 시절은 가버렸나. 영화가 너무 좋아서 연거푸 몇 번씩 보고 또 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멀티플렉스로 거대해진 극장은 체인화되고 시스템화된 지 오래며 이젠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점점 고급화되어가는 추세다.

이제 레스토랑처럼 보이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최고급 요리를 즐기는 시대다. 250평 규모의 공간에, 일반 스크린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의 고급 스크린이 설치되고, 바닥 스피커까지 갖춘 완벽한 음향시설까지 갖춘 극장은 영화 한 편에 10만 원이라는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연인들을 위한 특별 커플석은 기본이고, 아예 극장 하나를 통째로 빌려 이벤트를 할 수 있는 소규모 극장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극장은 이제 더 이상 영화만을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다. 복합레저공간이라고 해야할까. 테마파크 라고 해야할까. 여기에 이른바 팝콘무비로 불리는 블록버스터가 만나면 극장은 완벽한 놀이공원(?)이 되는 셈이다.

디지털 시대, 극장의 생존법
디지털이 가져온 변화는 극장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디지털 배급(중앙서버에서 여러 스크린으로 영화파일을 전송하는 시스템)’은 선명한 화질로 무한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장 수에 맞게 프린트를 해서 배급하던 과거의 시스템은 한 벌에 들어가는 2백만 원 상당의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여러 번 프린트하면서 발생하는 화질 저하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 디지털 배급으로 그런 문제는 사라졌다. ‘필름 없는 극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것은 극심한 극장의 위기였다. ‘홈 시어터’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스템은 극장으로 가려는 관객들의 발길을 가정에 묶어두었다. ‘황후화’를 감독한 장이모우 감독은 그 엄청난 스케일을 만들어낸 데 대해 꼭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볼거리’가 이제 영화에 필요해진 상황을 에둘러 말한 적이 있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거대해지고 블록버스터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극장의 변신은 바로 이것과 맞물려 있다. 그저 스크린에 영상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는 디지털 시대에 생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극장과 팝콘무비가 만나는 지점이다.

극장과 팝콘무비의 공존, 좋기만 할까
하지만 그것이 좋기만 한 걸까. 국내 영화의 위기론에 불을 붙인 최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극장 점유는 가히 놀라울 정도다. ‘스파이더맨 3’가 전국 816개 상영관을 잡은 데 이어, ‘캐리비안의 해적3’는 이보다 100개가 넘는 912개의 상영관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런 현상은 디지털 배급이 가진 장점인 무한복제가 스크린 독점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극장주들이 돈을 벌겠다는 데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은 또한 소비자의 선택의 권리를 원천 봉쇄한다는 점에서 그저 상업의 논리로만 내버려두긴 어려운 문제다. 그것도 이른바 팝콘무비, 즉 킬링타임용 영화에 대부분의 극장 스크린을 내준다는 점은 자칫 영화의 본질을 뒤흔들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물론 “재미만 있으면 되지 팝콘무비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는 문화라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재미있는 놀이기구’로 생각하지 문화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팝콘무비와 극장의 변신이 만나 만들어 가는 이 놀이공원화 되는 극장은 영화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의 정윤철 감독은 최근 한 영화 잡지에 “극장에서 영화만 보고 나오기, 콜라와 팝콘 사먹지 않기 운동을 펴자”는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한국 영화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이른바 ‘팝콘무비’라 불리는 천편일률적인 블록버스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자는 뜻이다. 그는 이어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칸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밀양’같은 작품도 극장을 못 잡아 관객들이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말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잇따른 상영관 독점 현상을 꼬집었다.

물론 극장의 변신은 서비스 차원에서 보면 관객의 선택 폭을 넓혀주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변신이 마치 저 ‘팝콘무비’를 위한 준비처럼 보여지게 만드는 헐리우드 영화들의 잇따른 스크린 독점은 오히려 관객의 선택 폭을 줄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점점 디지털화되고 세련되어지는 극장에서 자꾸만 조금 어수룩해 보여도 정이 가는 옛날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교보생명 사외보 <다솜이 친구>7월호

한류의 위기, 일류의 도전, 그 이유

우리가 물건을 팔면, 돈은 일본이 벌어간다는 말이 있다. 과거 제품 생산에 있어서 부품을 국산화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거의 수입해 조립하면서 벌어졌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금 우리네 문화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 부지불식간에 들어온 일본 문화들은 이제 우리 문화 저변 속으로 폭넓게 퍼져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복제되어 유통되며 저변을 넓혀온 일본 만화에서부터, 대학생들의 가벼운 읽기 수요를 채워주고 있는 일본소설, 일드로 대변되는 일본 드라마는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우리 사회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것들이 수면 위에 올라온 우리 문화 속의 일본 문화라면, 일본영화들은 수면 아래서 한류로 대변되는 우리 문화의 근간을 뒤흔드는 요인이다. 2001년 1천만 달러 정도에 머물던 우리 영화의 수출 성적표는 2005년 7천6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류의 영향이었다. 그런데 이 2005년 빛나는 성적표를 만들어준 나라는 다름 아닌 일본. 2005년 일본에서 벌어들인 것만 6천만 달러에 이르러 전체 수입의 약 80%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한류 위기의 주범이 되었다. 2006년 일본으로부터 거둬들인 수입이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한류 열기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한 것.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중론은 하나다. 한류열기로 상품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높아지는 반면, 양산된 작품들은 그들의 기대를 맞춰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일본인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남북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빼면 대부분, ‘스캔들’, ‘달콤한 인생’, ‘내 머릿속의 지우개’, ‘외출’ 같은 한류스타들이 포진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의 거품은 차츰 빠지게 됐고 ‘야수’, ‘태풍’. ‘연리지’. ‘형사’ 같은 작품들이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한류의 원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의 경우에는 ‘겨울연가’와 ‘대장금’이후 ‘풀하우스’ 정도를 빼고는 그다지 한류로서 주목할만한 작품들이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국내에도 일드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늘고 있어, 일드와 한드(한국 드라마)의 상황이 역전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런 예견들이 나오고 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한류의 언저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일류가 가진 득의의 미소이다. 한류가 일본에서 인기를 끈 것은 일본 드라마에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순애보 같은 향수 섞인 전통적인 이야기 소재가 직설어법으로 일본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덕이다. 즉 한류의 인기는 거꾸로 말해 당시 일본 드라마나 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봉착하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어찌 보면 한류는 일본의 침체되어 있는 시장을 일깨운 공이 크다. 현재 한류가 몇몇 스타들에만 의지해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와중에, 일본영화가 그 공백의 대부분을 대체하는 상황이 그걸 말해준다. 한편 한류라는 전 세계 마켓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포장을 뜯어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본 부품들(일본 만화, 소설 같은 원작들)’은 한류의 이면에서 일류가 얻어간 이득의 실체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류에 들뜬 상황에서 일류는 두 가지를 얻은 셈이다. 대내적으로는‘겨울연가’ 열풍 같은 자국의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고, 대외적으로는 한류라는 흐름에 자연스럽게 자국의 문화 부품들을 띄워 세계 시장을 두드린 격이 됐다. 여기에 국내에서 불고 있는 일드 같은 일본 문화에 대해 갖게 된 호감은 덤이다. 아직 국내에 개봉된 일본영화들의 성적표는 좋지 않지만, 전보다 몇 배나 많이 일본영화들이 상영관이 걸리는 것은 앞으로도 그 성과가 미미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한류든 일류든 그것을 과거와 같은 한일전의 양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일본의 것이든 중국의 것이든 이젠 작품의 질이 국가의 차원을 넘어 개인에게 직접 소구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기론이 대두되는 상황을 외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그것이 샴페인 일찍 터트리고 실익은 주변에서 다 채가는 상황을 막는 길이며, 그것만이 좀더 좋은 우리네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쩐의 전쟁’, ‘내 남자의 여자’가 뜨는 이유

역시 돈(쩐)과 여자는 되는 소재인가. 불륜이란 자극적인 상황에서 여자들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내 남자의 여자’에 이어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사채업자들의 지독한 이야기 ‘쩐의 전쟁’도 30%대의 시청률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주몽’의 장기집권(?)과 ‘하얀거탑’같은 새로운 시도에 힘입어 드라마왕국이라 불리던 MBC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히트’와 ‘에어시티’의 부진으로 주춤하는 사이, SBS는 오랜만에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다. 도대체 어떤 점들이 시청자들의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든 걸까.

독성이 강한 드라마들
시작부터 논란이 야기됐을 정도로 ‘내 남자의 여자’와 ‘쩐의 전쟁’은 독한 드라마다. 불륜이 그렇고 사채업이란 소재가 그렇다. 잘못 건드리면 불륜이나 사채업자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소재만이 아니다. 이 두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아름답거나 매력적이거나 귀여운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다. ‘쩐의 전쟁’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돈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전쟁이며, ‘내 남자의 여자’는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언어로 벌이는 전쟁이다.

이 두 드라마는 자극적인 상황으로 시청자들의 욕망에 직격탄을 날린다. 첫 회부터 내놓고 불륜사실을 드러내는 ‘내 남자의 여자’는 이 금기된 욕망이 가지는 양가감정을 건드린다.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시청자들로서는 이 ‘찢어 죽일’ 불륜에 이를 갈다가도, 또 한 편으로는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되고 길들여졌던 마음의 대리충족을 경험한다. 물론 전자에 더 무게중심이 실린다. 한편 ‘쩐의 전쟁’ 도 더럽다고 하면서도 숭배하는 돈으로 시청자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이 역시 양가감정이다.

두 드라마의 욕망에 대한 법칙은 라깡이 말했듯이 얻어질 수 없는 환상이다. 욕망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 깊은 허기에 시달리는 격이다. 이 두 독성 강한 드라마가 승승장구하는 이면에는 위에서 밝힌 독한 소재, 독한 이야기 전개가, 시청자들 속에 숨겨져 ‘지저분한 일’ 혹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던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일까. 이 독한 두 드라마가 논란드라마 혹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지함’이다.

욕망에 대한 진지한 접근
단지 욕망과 자극만을 추구한 드라마였다면 지금 같은 드라마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적당한 자극적 설정으로 시청률을 꾀해보려다 실패한 여타의 불륜드라마들이 단적인 예이다.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드라마 상황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이 두 드라마는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진지한 칼날을 갖다댄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드라마라는 오명에도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그 진지한 접근이 우리네 현실에도 와 닿았기 때문이다. ‘쩐의 전쟁’이 사채업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돈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성찰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자극적인 소재까지도 공감으로 끌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이 진정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다. 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동시간 대 여타의 드라마들과 상대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김수현이란 작가가 끌어가는 언어의 전쟁은 때론 살 떨릴 정도의 실감으로 다가온다. ‘쩐의 전쟁’ 역시 만화원작이 갖는 스토리성을 장태유 PD 특유의 속도감 있는 연출감각으로 풍자가 깃든 독특한 현실성을 끌어낸다. 여기에 힘을 듬뿍 실은 ‘쩐의 전쟁’의 박신양,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 배종옥 같은 선수(?)들의 연기는 완성도에 굵직한 방점을 찍는다.

‘쩐의 전쟁’과 ‘내 남자의 여자’의 시청률 독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진지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스토리의 탄탄함일 것이지만 이 역시 드라마에 취하고 있는 진지한 태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시청률이란 상대적인 것이며, 완성도와 비례가 되는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 드라마가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던 데는 지독함과 진지함 사이에서 벌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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