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찰나의 소중함을 묻다

청춘시절의 한 때를 생각해보면 꽤 강렬했을 감정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장면들은 단순하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이라든지, 그 하늘을 유유히 움직이던 구름이라든지, 방과후 텅 빈 운동장에서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받던 그 단순한 시간들 같은 그림들이 갈무리된 감정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그 시절에는 너무 강렬했거나, 따분했거나, 때론 급박하게 움직여 볼 수 없었던 시간의 풍경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과 시간들, 그리고 그것들 위로 등장해 우정의 이름으로 스치듯 지나가 버린 사랑의 감정 따위는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라는 능력을 갖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사랑스런 애니메이션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그 아름다움조차 기억나지 않는 청춘이란 시간대를 마코토라는 소녀를 통해 여러 번 되돌려보기로 한다.

다행히도 마코토라는 캐릭터는 지구를 구한다거나 하는 거대한 욕망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 능력은 오로지 우리가 흘려보낸 일상 속에서만 발휘된다. 타임리프라는 능력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루종일 부른다거나, 동생이 먹어버린 푸딩을 먹는데 사용된다. 그렇게 여러 번 자신의 시간대를 되돌려보자 일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들이 피어나면서 툭툭 던지곤 했던 말들과 행동들에 감춰졌던 청춘이란 열병의 실체가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애니메이션은 시간의 풍경을 담아내기에 정지된, 혹은 정지된 듯한 장면들이 유난히 많이 보여진다. 호소다 마모루라는 섬세한 눈의 소유자는 그 정지된 장면 속에 고즈넉이 서 있는 집, 운동장, 하늘, 구름, 언덕, 강물 같은 풍경을 집어넣는다.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장면 속에 주인공들이 가진 감정의 떨림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멈춰선 시간의 풍경 속을 유영하는 주인공들을 넣어 마치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싶은 안타까운 감정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누구나 흐뭇한 감회에 젖는 것은 소년 소녀에서 남자와 여자로 성장하는 그 과도기의 작은 떨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반추해내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가 자칫 추억이라는 웅덩이에서 허우적댈 수 있는 위험성을 이 애니메이션은 ‘일상을 되돌아보는 타임리프’라는 획기적 아이디어로 뛰어넘는다. 잔잔함에 젖어 잊고 있던 청춘의 추억 속에서 물 흐르듯 빠져들다가, 수면 위로 불쑥 솟은 열병을 발견하곤 급박한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역시 귀여운 반전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애니메이션이 얻은 성취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메시지를 가진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아포리즘에나 나올 법한 이 메시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과연 이 메시지가 평범한 걸까. 그것은 오히려 중요한 메시지조차 평범하게 되어버린 우리의 둔감한 이성과 감성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마코토가 그랬듯이, 바로 그 평범과 일상이 되어버린 시간을 다시 소중한 것으로 환원시켜주는 애니메이션이다.

돈더미 앞의 금나라 혹은 연예인들

역시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드라마 ‘쩐의 전쟁’은 마동포(이원종)가 사무실 지하비밀금고에 숨겨둔 돈더미로 첨예한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두 욕망이 부딪치면서 시청자들은 돈에 대한 은밀한 쾌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마동포가 숨겨놓은 돈이 몇 장의 수표도 아니고, 은행계좌의 수치도 아닌, 만 원짜리 돈더미란 점은 금나라(박신양)가 그 돈을 찾는 이야기를 자본주의라는 섬에서 보물을 찾는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돈 다발이란 구체적인 돈의 형태는 수치로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그것은 보물이 아니고 돈이라는 점이다. 보물이야 낭만이라도 있겠지만, 돈 다발은 무언가 어둡고 음침한 구석이 있다. 그것도 사채업으로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서 모아진 돈 다발은 더욱 그렇다. 비공개적인 돈의 흐름이 가능한 돈 다발에는 사실 그 돈을 벌기 위해 떨어진 땀 냄새보다는 누군가 흘린 피 냄새가 더 진동한다. 그 돈더미 앞에서 금나라는 갈등한다. 아니 그 어느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갈등하게 될 것이다.

마동포가 서민들의 희망을 짓밟아가며 지하 비밀금고에 쌓아놓은 돈 다발의 적나라함은,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덧씌운 대부업체 광고의 포장을 벗겨버린 이 드라마의 적나라함을 고스란히 닮았다. 손만 뻗으면 자기 손에 잡히는 그 돈 다발 앞에서 갈등하는 금나라의 모습은, 대부업체들의 광고 앞에 선 연예인들을 연상케 한다. “무이자 무이자-”를 외치며 유혹하는 돈은 자칫 이미지 실추라는 살인적인 이자로 되돌아올 판이다.

적어도 ‘쩐의 전쟁’을 두고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란 얘긴 하지 못할 것 같다. 연예인들은 줄줄이 대부업체와의 광고 계약을 거절하거나, 취소했고, 대부업체들은 벗겨진 실체로 인해 추락된 이미지를 금리인하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넘어서려 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살인적인 이자율에 대한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쩐의 전쟁’의 인기는 이런 현실까지 움직이는 리얼한 스토리, 연출, 연기 때문이거나, 드라마가 그리는 현실 자체의 지독함 때문이다. 혹은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그저 ‘쩐’을 다루는 게 아니고, ‘쩐의 전쟁’을 다룬다. 즉 쩐에도 ‘좋은 쩐’과 ‘나쁜 쩐’이 있어서 서로 전쟁을 벌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선악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란 욕망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가 그걸 구분하는 기준이다. 금나라는 바로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드라마 속 대사대로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주먹보다는 돈이 앞서는” 세상에서 돈의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가 그리는 쩐의 전쟁의 승리자는 아마도 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사람이 아닐까. 돈더미 앞에 앉아 갈등하는 금나라도, 많은 연예인들이 광고라는 유혹의 쩐의 전쟁 속에서 포기함으로써 승리한 그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될까. 아마도.

그녀가 절을 한다. 방귀 깨나 뀐다는 부잣집 양반님네들 앞에서도,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가진 사또 앞에서도, 글 깨나 읽었다며 위선 떠는 선비 앞에서도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녀가 절을 한다. 그녀가 절을 하는 곳은 하녀들이 매일 닦아 반짝반짝 빛나는 마룻바닥이 아니다. 신음과 고열에 젖은 피비린내와 땀 냄새 심지어는 똥 냄새, 오줌 냄새 그것이 뭉뚱그려진 죽음의 냄새가 배어나는 옥사의 맨바닥이다. 그녀가 절을 하는 대상은 가장 천하디 천한 ‘놈이(유지태)’란 남정네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놈이는 저잣거리 왈자패, 색주가의 기둥서방, 그리고 화적 두목으로 살아가는 그 시대, 이 놈도 되고 저 놈도 되는 대부분의 천민들이 그러했던 양반네 눈에는 그저 잡놈인 비천한 사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가슴속에 “사람 사는 곳 어딘들 못 가겠냐”는 호기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

그 놈은 양반집 아기씨로 자라온 황진이(송혜교)의 태생을 밀고해 하루아침에 그녀를 천한 기생으로 만들어버린 놈이다. 빗나간 사랑으로 비롯된 그 일로 인해 그녀는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반면 그 놈은 낮아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가장 낮은 사람들을 돕는데 남은 인생을 건다. 높은 데서는 몰랐던 낮은 자들의 처지를 알게된 황진이의 마음 속으로 점점 놈이가 들어온다.

낮은 사람들을 돕는 화적패 두목 놈이와 천한 기생으로 살아가는 황진이는 지체 높은 양반네들에겐 가슴속에 칼 하나씩을 품고, 낮은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삶에 매진한다. 그래서 양반들조차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그런 그들이 무릎을 꿇는다. 누굴 위해서? 이름마저 비천한 괴똥이(오태경)를 위해서다. 황진이는 그를 볼모로 잡고 있는 사또에게 몸을 허락하고, 놈이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허락한다. 그런 그들이 옥사에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다. 황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잔을 건네고, 가장 비천한 놈이란 놈에게 절을 한다.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는 이처럼 신분의 정점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황진이를 그려낸다. 그리고 결국엔 저 서화담(김응수)이 화두처럼 던졌듯이 신분도 귀천도 없는 자연의 일부로 끝을 맺는다. 황진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먼저 했던, 드라마 ‘황진이’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드라마에서는 낮은 신분의 황진이가 점차 예인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진이라는 인물에 있어서도 드라마 속의 양반들을 농락하는 카리스마보다는 삶을 탐구하는 듯한 진중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메인 카피,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이란 문구는 영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드라마 속의 황진이라면 모를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황진이는 20세기적 가치였으나 지금은 찾아볼 길 없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21세기 여인은 희생보다는 행복을 꿈꾸는 좀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묘한 부조화는 그래서 21세기 여인들이 보기에는 좀 낯선 것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의 한없이 낮아지는 혁명가의 모습에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은 아직도 그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까. 놈이 같은 비천한 놈을 향해 절을 올리는 황진이의 모습이 좀체 잊혀지지 않는 것은. 황진이가 내뱉는 수많은 대사들이 이제는 오래된 향수처럼 느껴지는 문학으로 읽히는 것은.

준표가 지수의 밥을 그리워하는 이유

‘내 남자의 여자’, 두 여자가 만난다. 남편과 눈맞은 여자, 아무리 한 때 절친한 친구라 해도 만나서 제일 먼저 하는 얘기는 생뚱맞게도 밥 얘기다. ‘그 남자’의 에고에 대해 얘기하자며 자연스레 밥 얘기를 꺼낸다. 지수(배종옥)는 어느 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밥을 챙겨먹지도 못하던 남편 준표 얘기를 한다. 그 때 이 후 그녀는 “밥 때는 거의 밖에 안 있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대해 화영은 “지금은 혼자서도 잘 차려먹더라”고 말한다.

또 다른 장면, 준표의 어머니의 호출로 화영과 외출하려는 준표에게 지수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저녁 집에 와서 먹어. 해줄게.’ 만나서 할 얘기가 있는 지수는 만나자는 말도 밥 얘기로 시작한다. 준표의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화영은 준표에게 묻는다. “저녁 뭐 먹고 싶어?” 그러자 준표는 6시 반이 넘었다며 그냥 시켜먹자고 한다. 그러자 화영이 발끈해서 말한다. “꼭 6시 반에 저녁 먹어야 해? 한 시간쯤 늦게 먹으면 안돼?” 결국 냉면에 떡갈비를 시켜먹는 그들. 준표가 말한다. “좀 불었다.” 화영의 대꾸, “나도 알아. 그냥 좀 먹어. 지금 음식 투정하게 생겼어?” 잘못했다며 그래도 좀 먹으라는 준표에게 화영은 쏘아댄다. “돼지야? 혼자 많이 먹어!” 결국 준표는 남은 음식을 버린다.

‘내 남자의 여자’는 유난히 식사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실생활에서라면 그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드라마 상에서라면 말이 다르다. 김수현 드라마의 묘미가 대사에 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그냥 대사를 주고받으면 되지 왜 굳이 ‘밥을 먹으며’ 대사를 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밥’이 가진 일상의 무게감을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첫 회에서 준표와 화영의 외도가 발각되는 장면에서도 역시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비큐 파티를 하는 중에 잠시 집안으로 들어간 둘은 애정행각을 벌이다 은수(하유미)에게 덜미를 잡힌다. 화영과 살림을 차리기 전 지수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준표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하지만 준표는 화영과 살면서 감자 하나 제대로 찌지 못하는 그녀를 타박하고, 지수가 해주는 밥을 그리워한다. 시켜먹고 대충 때우는 화영의 부엌에서 잠시 해방(?)된 준표는 허겁지겁 지수가 해주는 밥을 두 그릇씩 뚝딱 해치우고 생전 안 해보던 고맙다는 말을 한다.

지수가 홀로 서기 위해 찾은 자신만의 일은 다름 아닌 ‘먹는 장사’다. 샌드위치는 바로 만들어 먹어야 제 맛이라는 그녀는 미리 만들어 대량으로 팔 수 있는 기회도 저버린다. 장삿속으로 장사를 하는 게 아니고 진짜 사람들이 먹을 걸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밥을 해주고 먹을 걸 차려주는 행위는 그녀의 존재 이유 그 자체다. 준표를 지겹게 만든 것은 바로 그녀가 밥을 차려주는 행위로서 고착된 모든 걸 챙겨주는 심성에서 비롯되었다. 준표는 그런 그녀가 자신을 숨막히게 한다고 말하고, 반면 화영은 자신을 남자이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밥이 가진 이중성을 보여준다. 매일 먹는 밥은 때론 지겹지만 그 밥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집에서 해먹는 밥이 질려 외식을 하고 나면 먹을 땐 좋았는데 꼭 속이 좋지 않다. 조미료가 가득 든 음식이 입에는 달아도 몸에는 영 맞지 않아서이다. 밥으로 얘기한다면 준표가 하고 있는 외도는 꼭 외식과 닮았다. 자극적인 맛에 정말 맛있어 먹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막상 먹고 나면 소화시키기 어려운 음식.

준표가 지수를 떠나오기 전 그 밥해주는 행위를 무시했던 것처럼, 화영이 밥 먹으라는 사람에게 “돼지냐”고 쏘아붙이듯, 사람들은 밥을 무시한다. 하지만 밥은 오히려 숭고하다. 늘 필요한 곳에 있어 칠뜨기에 밥순이로 무시됐던 지수가 점차 숭고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내 남자의 여자’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다른 부엌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는 대부분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가족이 해체되는 것은 그 중심에 선 부엌으로 상징되는 모성애에 대한 무시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는 것만 같다. 부엌에서 된장국 하나 제대로 끓여내는 일은 입으로 조잘대는 사랑보다 더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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