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는 ‘그놈 목소리’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는 여러 모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뉴스앵커라는 설정 이외에는 거의 실제상황과 같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던 199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아릿한 기억 속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고 스쳐지나갔던 한 아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경배와 관객에게 남 일이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뉴스앵커 한경배(설경구 분)가 한 아이의 유괴 살해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한시도 아이를 마음놓고 내보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화면 밖에서는 함께 진행하던 여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받는 한경배 앵커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때까지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내 일이 아닌 남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관객의 상황과 동일하다.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은 한경배 앵커가 뉴스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처럼 관객들에게도 지나간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유괴된 상우의 부모들과,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타인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당사자들만 내 일로 여기는 사회
과학수사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잠복수사에 이골이 난 김욱중(김영철 분) 강력계 형사는 오히려 ‘그놈’에게 붙잡히고, 노반장(송영창 분)은 감으로 엉뚱한 인물들을 혐의자로 잡아 심문한다. 그들은 목소리 분석이나 필체 분석을 통한 과학수사를 무시해버린다. 그들이 입만 열면 냉소적인 목소리로 ‘과학수사’를 떠들어대는 것은 당시 과학수사라는 것이 실종 상태였다는 걸 거꾸로 보여준다.

그러니 상우의 부모는 이 형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직접 돈 가방을 들고 ‘그놈’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우의 부모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무나 많다.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들로 시간에 맞춰 ‘접선장소’로 갈 수 없는 장면들은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급한 건 당사자뿐이다. 타인들은 이 유명한 앵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만 든다. 아무도 모르게 ‘그놈’과의 약속장소로 나가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교회로 뛰어드는 한경배에게 사람들은 자초지종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그저 “이러시면 안된다”, “여기는 교회다”라며 밖으로 내쫓는 게 일이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영화는 그다지 처음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만큼 좀더 극적인 연출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탓이라기보다는 관객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출 속에서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영화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방관 내지는 ‘남 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진다. 그것은 도대체 저 평범한 부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토록 고통받아야 하고, 우리는 왜 그 고통을 남 일처럼 방관하고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
그리고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요령부득의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저 애타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절절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차츰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의 아버지이자 앵커인 한경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앵커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진술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 TV 뉴스를 잠깐 본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애초에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이나 혹은 한경배가 타인의 유괴사건을 보도하던 그 때의 마음처럼 “저건 뭐야?” 하는 정도로 그 눈물을 흘리는 앵커를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부터 보아온 관객으로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화 속의 사건은 그 순간, ‘남 일’에서 ‘내 일’이 된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한경배가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한번만 도와주세요”하며 오열하는 동안, 영화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랗게 자막을 올려놓는다. ‘지금부터 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여기서 영화는 그 안전한 스크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갑자기 현실로 파고든다. 언제든 돈 내고 보거나 보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화라는 ‘남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남 일’을 ‘내 일’로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그 놈 목소리’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남 일’의 환타지가 되어 가는 최근의 우리네 영화들 속에서 오랜만에 ‘내 일’로 보여지는 ‘쓸 모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분들이 있었다면 최소한 이 영화는 제 가치를 해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놈 목소리’는 여전히 ‘남 일’인가. 아니면 ‘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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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을 대변하는 캐릭터들

기존 삼각 사각으로 이어지는 멜로의 구조 없이도 병원드라마는 될 것인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한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 병원드라마에서 정치드라마로 그리고 이제는 법정드라마로 진화해가는 ‘하얀거탑’은 마치 전문직 드라마의 모든 실험을 해 보이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하얀거탑’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그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드라마의 캐릭터와 스토리 구조를 엮어 가는 전문직 드라마다운 솜씨이다.

장준혁에 더 방점이 찍힌 ‘하얀거탑’
우리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주목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 초기에 등장한 장준혁(김명민 분)을 위시한 인물들과, 여기에 안티테제로 등장한 외과과장 이주완(이정길 분)과 그 일파들의 대결구도에서 우리는 선악의 구분이 없는 냉정한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선한 인물 없이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되는 이 상황 속에서도 시청자들은 장준혁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었다. 이주완과 비교했을 때 장준혁이 그다지 선한 인물도 아니고 싸움 방식에 있어서도 정정당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그가 가진 명분 때문이다.

그는 최고의 실력자이나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현실에 시청자들은 공감했고, 그러므로 그의 승리를 기원하게 되었던 것. 그렇게 보면 초반부에서 이 드라마의 선한 인물, 정의의 인물을 대변하는 최도영(이선균 분)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았던 것은 치밀한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원작에서는 이 두 인물이 시작부분부터 어느 정도 비슷한 중량감으로 등장했던 반면, 우리의 ‘하얀거탑’에서는 장준혁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

장준혁을 앞세운 극적 구성
이러한 선택은 좀더 드라마를 극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었다. 만일 초기부터 장준혁과 최도영을 치열하게 맞서게 했다면 드라마는 선악구도로 흘러가면서 장준혁에 대한 감정이입이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최도영을 살짝 후반부를 위해 밀어놓자, 장준혁이라는 선도 악도 아닌 인물의 거침없는 돌진에 더 많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환자들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매진하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최도영이라는 의사보다, 차라리 권력을 추구하면서 진흙탕도 마다 않는 의사 장준혁이 더 리얼한 캐릭터라는 점도 한 몫을 한다. 쉽게 말하자면 현실에서 매일 조직의 쓴맛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고매하고 이상적인 최도영의 모습은 ‘잘난 척하는 인물’ 정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현실 vs 이상, 장준혁 vs 최도영
그러나 드라마가 ‘장준혁의 외과과장되기’라는 정치드라마를 지나 ‘장준혁이라는 오만불손한 권력과의 한판 승부’라는 법정드라마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적인 캐릭터인 최도영은 사실 리얼한 현실의 캐릭터인 장준혁의 가장 싸우기 힘든 인물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극단적인 이상과 극단적인 현실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두 인물을 보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의료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장준혁과 그걸 캐내려는 최도영이 마주하는 순간, 시청자들이 갖는 감정이다. 분명 고전적인 드라마였다면 이 대결구도에서 권선징악의 형태로 최도영쪽에 마음이 가야 마땅할 것인데, 실제로는 자꾸 장준혁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이유는 단지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동안 계속 시청자들은 그에게 감정이입이 된 상태이며, 거기에는 권력추구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최도영이라는 선한 인물은,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된 장준혁의 권력추구를 가로막는 인물이 된다.

현실적 욕망의 패배자 vs 이상적 욕망의 승리자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은 드라마를 좀더 팽팽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욕망추구형의 장준혁에 집중시키면서 시청자의 현실적인 욕망의 환타지를 끄집어냈다. 그러니 그 전반부에서 현실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최도영이라는 인물에게 그다지 큰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이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최도영이 전면으로 나선 이상 그 역시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정의는 이긴다’는 이상에 대한 욕망이다.

결국 장준혁의 끝없는 욕망의 질주는 어떤 식으로든 파국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장준혁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현실적 욕망의 추구는 삶의 동인이지만 그 끝없는 욕망의 추구는 파국(죽음)이 될 때에만 끝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상에서 장준혁은 패배자가 되고 결과적으로 최도영은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드라마가 던지는 자기 성찰의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누구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현실적 욕망을 추구하는 패배자인가, 아니면 이상적 욕망을 추구하는 승리자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도대체 어느 쪽에 가까운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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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희, 장준혁이 보여주는 의사의 모습

‘병원드라마’의 새 장을 열어 가는 ‘외과의사 봉달희’와 ‘하얀거탑’. 하지만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 드라마들의 봉요원 분)와 장준혁(김명민 분)으로 대변되는 의사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물론 이 두 드라마에 나타난 의사의 모습은 극화된 것. 실제 의사와는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이 두 드라마는 모두 의사에 대한 환타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혹은 욕망하는 의사의 모습을 드라마라는 형식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현실적인 전문가 vs 이상적인 풋내기
장준혁이란 캐릭터에 투영된 의사상의 한 단면은 권력이다. 장준혁 스스로 얘기했듯이 “자신은 최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처럼 거기에는 늘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 ‘하얀거탑’에서 그려지는 1인 체제의 구조는 극화된 것일 뿐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장준혁이란 캐릭터에 매료되는 것은 그것이 의사사회를 떠나 우리 사회가 가진 권력 지향적인 조직의 모습을 고스란히 대변하기 때문이다.

실력만큼, 혹은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처세라는 현실은, 어찌 보면 우리 의사사회와는 거리감이 있는 이 드라마의 구조조차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는 똑똑하고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자가 그 능력을 약자를 위해 쓰기를 바라지만 실제 현실은 그런 자들이 그 힘을 권력을 잡는데 사용한다는 것.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 살 떨리는 리얼한 현실에 있다.

반면 봉달희라는 캐릭터는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게 한다. 실력은 없지만 환자를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모습은 우리가 이상으로서 꿈꾸는 의사상이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 의술보다는 인술이라는 것. 이 이상적인 풋내기는 모든 환자들의 질병을 자기 몸처럼 아파하며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생과 사를 오가는 환자를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부자들을 위한 vs 가난한 자들을 위한
권력에 올인하는 의사와 오로지 인술에만 매진하는 의사의 모습을 그리다 보니 이 두 드라마가 살려내는 환자들은 그 대상이 달라졌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은 세계외과학회장의 부인을 수술하기 위해, 평범한 권순일 환자를 희생시킨다. 드라마는 이 두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짧게 끊어가면서 교차편집을 했는데, 그 대비되는 모습이 보여주는 현실은 역시 섬뜩한 것이었다.

수 차례의 수술을 시도했고 이젠 더 이상 고치기 힘든 상태의 세계외과학회장 부인은 장준혁의 노력으로 살아났고, 이상징후를 보였지만 재빨리 처치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권순일 환자는 죽었다. 이것은 시쳇말로 “부자들에게 암은 병도 아니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감기도 두려운 병이다”라는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반면 ‘외과의사 봉달희’에 등장하는 환자들은 저마다 사연도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특히 봉달희는 말단 의사이다 보니 접하는 환자들이 평범 이하일 경우가 많다. 당연히 ‘외과의사 봉달희’가 보여주는 현실은 가난한 자들의 그것이다. 그것은 돈 5백 만 원이 없어서 자살 기도한 환자의 치료비가 2천만 원이 넘고, 치료비에 허덕일 부모를 위해 자살을 기도하는 아이의 현실 같은 것이다.

수직적인 조직 vs 수평적인 조직
두 드라마의 상반된 조직형태의 모습은 또한 의사상의 한 단면들을 보여준다. ‘하얀거탑’에 등장하는 의사조직의 구조는 피라미드형. ‘하얀거탑’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에서 전형적인 수직적 권력구조가 보여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과장이라는 꼭대기에 있는 ‘직책’을 얻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도 마다 않는 장준혁의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반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단지 욕망을 쟁취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장준혁에게 그 과장이란 ‘직책’을 부여하는 것이다. 나머지 반은 따라서 이 피라미드 구조 꼭대기에 불안하게 선 장준혁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 구조에서 시청자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현실적인 욕망의 추구에 따른 카타르시스와 함께, 그 절정에 오를수록 더 절실해지는 이상, 즉 의사로서의 본분에 대한 양가감정이다. 이것은 우리가 조직생활을 통해 갖는 두 감정과 일맥상통한다. 상승욕구와 함께 그럴수록 더 증폭되는 회의감과 불안감 말이다.

반면 ‘외과의사 봉달희’가 그려내는 의사조직의 구조는 수평적이다. 물론 교수, 부교수가 있고 수련의가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구분일 뿐이다. 봉달희는 그 긴장된 수직적 체계 속에서도 자신의 할 이야기를 다 하는 당찬 여자다. 심지어는 교수와 ‘연애하자’고 말할 정도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외과의사라는 ‘직업’이지 ‘직책’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시청자들이 조직의 모습에서 바라는 환타지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조직체계 속에서 진정으로 찾아가고 싶은 병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환타지
언뜻 보면 이 두 드라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상에 대한 서로 다른 환타지를 그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 드라마들이 주제를 전달하는 다른 방식에서 비롯될 뿐 궁극적으로 하려는 이야기는 같다. ‘하얀거탑’은 부정적인 코드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즉 ‘욕망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한 의사의 추락’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외과의사 봉달희’는 긍정적인 코드로 ‘이런 의사가 있다면 병원 가고 싶은 캐릭터의 성장’을 보여준다. 한쪽은 추락하고 다른 한쪽은 성장한다. 두 드라마에서 우리가 결국 원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그럼에도 이 의사에 대한 환타지를 통해 보여지는 우리네 의사들의 모습은 참으로 혹독하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천재의사들은 인술보다는 권력에 눈멀어 있고, 마음만은 환자 이상이라 자기간이라도 빼줄 정도로 뛰는 풋내기 의사들은 실력이 없다는 것. 그래서 ‘부자들은 살아나고 가난한 자는 죽는다’는 것. 또 그네들을 위한 양극단의 의사, 즉 오로지 권력과 부를 축적하기 위한 부자의사와, 의사 본연의 사람 살리는 길만을 고수하는 가난한 의사가 존재한다는 것. 실제 의사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이것이 병원드라마라는 환타지 속에서 우리네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막연한 의사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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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 아닌 원류 선택한 ‘록키 발보아’가 시사하는 것

전 세계적인 배급의 파이프 라인을 갖고 수시로 자국의 영화를 쏟아내는 헐리우드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헐리 갖고 있던 컨텐츠의 색채는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자국만의 색채를 갖는 컨텐츠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헐리우드는 전 세계의 영화에 늘 촉수를 열어두고 다양한 컨텐츠와 소재들을 자국의 살로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것은 상업적으로는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영화가 어디 상업적인 요소만 있을까. 영화는 동시에 문화를 담고 있고 그러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헐리우드만이 가진 색채가 옅어지는 건 또한 저들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속편이 난무하는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원류로 회귀하는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는 이유가 아닐까. 최근 육순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실버스타 스탤론의 ‘록키 발보아’는 그 헐리우드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른바 헐리우드를 대표하던 일련의 헐리우드표 대작들은 2편, 3편의 속편들을 쏟아내다가 최근에는 모두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그런 현상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배트맨’은 ‘배트맨 비긴스’로 돌아갔고, ‘수퍼맨’은 ‘수퍼맨 리턴즈’로 돌아왔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다시 처음부터 다시 제작되고 있고, ‘007 시리즈’는 다시 원류인 ‘카지노 로열’로 돌아왔다. ‘록키 발보아’는 물론 나이든 록키의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내용은 ‘록키’ 원류로 돌아간 그대로다.

‘록키’가 실버스타 스탤론의 입지를 마련해준 영화가 된 것은 그것이 단지 헐리우드식 복싱 액션을 담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록키’는 아메리칸 드림을 다룬 영화다. 누구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그 기회를 잡아 성공할 수 있다는 이 단순명제가 관객들을 사로잡은 요소다. 영화는 따라서 반 이상이 저자거리를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록키의 모습에 할애한다. 그런 록키가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트레이닝에 들어가고, 장중한 음악과 함께 계단을 뛰어오르며 손을 치켜올리는 장면에서 비로소 권투영화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진 ‘록키 발보아’와 똑같은 구조이다. ‘록키 발보아’ 역시 영화의 반을 이제는 퇴역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록키의 생활에 할애한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레스토랑을 찾는 팬들 앞에서 록키는 수없이 무용담을 풀어놓지만 어쩐지 자꾸 퇴물로 취급되는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들은 자꾸 ‘과거’에만 집착하는 아버지가 영 안쓰럽다. 즉 영광은 껍데기만 남은 허울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육순을 넘은 실버스타 스탤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든 저 링 위에서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록키’에서 젊은 록키가 저자거리에 떠돌던 3류 인생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섰던 것처럼, ‘록키 발보아’의 노익장 록키 역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선다. 무엇을 위해서? 반대편에 선 메이슨 딕슨은 록키가 싸우고 있는 대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록키는 과거를 지나간 퇴물로 여기는 젊은이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중이다. 링으로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강렬한 랩뮤직과 시나트라의 곡이 부딪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록키’와 ‘록키 발보아’의 미덕은 그것이 헐리우드식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영화는 둘 다 승리가 아닌 ‘끝까지 버티는 모습’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더 리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애초부터 하려던 이야기는 링 위에 있었던 게 아니라 링 밖에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모습이, 마치 비대해졌지만 자국의 문화 컨텐츠를 새롭게 보여주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리메이크하는 경향을 보이는 헐리우드를 닮았다는 점이다. 리메이크는 상업적인 선택이지만 거기에 과거로의 향수가 달라붙으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또한 2탄, 3탄 무한히 이어지는 재탕이 본질(원작의 힘)을 흐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락적인 재미만으로는 ‘그 얘기가 그 얘기’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 본류로 돌아가, “나 아직 건재해”라고 외치는 ‘록키 발보아’ 아니, 헐리우드의 일면에서 재탕 삼탕으로 얻으려는 상업적 선택이 가진 딜레마를 엿보게 된다. 이것은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늘 속편으로 유혹 받는 우리네 영화계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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