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프라다 사이에 선 현대여성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뉴욕 자체도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그것은 뉴욕이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면서, 또한 뉴요커로 대변되는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중심이 주는 화려함과 귀족적인 분위기의 기저에는 그것에 대한 욕망이 자리한다. 우리는 그런 삶을 욕망한다. 엄청난 고가에 사치일 뿐이라고 욕을 한다 해도 누구나 프라다를 입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사실 프라다를 입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얻기 위해서는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다른 가치들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악마와의 거래다. 이것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드리아가 처한 입장이자 커리어 우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네 현대여성들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이 처한 입장이다. 그녀는 악마와 거래를 한 후 프라다를 입게 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옷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는 결국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영화 속 미란다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대로 이 영화는 ‘그것이 다(That's all!)’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아닌 뉴욕의 이야기에, 단순해 보이는 스토리의 이 영화가 국내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한다는 사실은 영화 밖에서 그 흥행의 이유를 찾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이역만리 떨어진 이 곳과 뉴욕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관객들을 이 영화에 열광하게 하고 있는 걸까.

아바타 놀이 재미있으셨나요
앤드리아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갖고 있지만, 패션으로 보면 전형적인 시골출신의 촌닭이다. 그러니 그런 촌닭이 세계 최고의 패션지, ‘런웨이’에 입성하는 것 자체에 관객들은 욕망에 마음을 내주게 된다. 그녀가 주인공인 까닭에 관객들은 그녀에게 자신을 감정이입시키고 앞으로 온갖 명품으로 변신할 그녀를(자신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이 간교하여, 처음에는 자신과 너무 다른 세상에 있는 욕망을 거부한다. 자신을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란 굳건한 성으로 방어하면서 오히려 그 닿을 수 없는 욕망을 폄하한다. 영화는 이러한 관객들의 심리적 반응까지 고려해가며 극을 진행시킨다. 그러면서 그 욕망을 정당화해줄 계기를 기다린다. 그 계기를 주는 사람은 바로 나이젤이다. 그는 패션계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의 직장생활에서도 통용되는 단어를 끄집어낸다. 바로 ‘프로의식’이란 단어다. ‘당신은 프로가 아니야. 그러니 그런 걸 비판할 자격도 없어.’

이러한 질책은 기다렸다는 듯이 억압해온 욕망을 풀어내는 구실로 작용한다. 또한 이 곳은 패션잡지사이기에 이것은 단지 구실이 아닌 진짜 프로가 되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변신은 폭발적이다. 화면은 몇 초 간격으로 그녀의 옷을 바꿔 입혀준다. 구찌, 돌체&가바나, 로베르토 카발리,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칼 라거펠트, 제이 멘델, 베르사체... 여성들이라면 꿈꿔왔을 명품들로 말이다. 앤드리아로 분신한 관객들은 이 장면들이 주는 아바타 놀이에 푹 빠져버린다.

뉴욕에서 우리나라까지의 거리만큼 큰 환타지
이 아바타 놀이에 중요한 것은 그 배경이 뉴욕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뉴요커의 입장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미국 개봉시 이 영화에 내려진 호평들은 주로 메릴 스트립의 명연기와 패션업계를 제대로 조명한 그 리얼함에 이유를 두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리얼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 관객들이 몇이나 될까. 물론 패션업계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본 이 영화는 ‘리얼함’보다는 ‘환타지’쪽에 더 무게를 두는데, 거기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바로 뉴욕이라는 공간이다. 잘 생기고 부유하며 매너 있고 지성적인 남자들과 성공한 커리어 우먼들의 로맨스가 이루어지는 곳. 그 환타지의 실체를 우리는 이미 저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목격한 바 있다.

그 뉴욕이 가진 환타지의 기저에 또 한 가지를 포함시키자면 그건 우리가 사는 이 공간과의 거리가 될 것이다. 만일 이 공간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잔치였다면 그것이 ‘섹스 앤 더 시티’의 자유로운 성 담론이든, 이 영화의 명품에 대한 욕망이든 어느 것이나 현실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런 무거운 현실 속에서 환타지는 잘 생기지 않는다. 대신 뉴욕은 어떤가. 그 먼 거리에 있는 곳에서의 환타지는 마치 해외여행에서 보다 대담해지는 사람들의 편안한 공기가 있다. 남의 나라 얘기면서 잠깐 내 얘기로 차용하는 것. 여기에 뉴욕이라는 공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주는 환타지의 힘이 있다.

보편적 정서로의 회귀
그런데 이러한 명품을 갖고 하는 아바타 놀이와 뉴욕이라는 공간이 주는 환타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에는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것은 환타지의 진원지인 패션이라는 코드를 이 영화에서 뚝 떼어놓고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에게 리얼한 것은 패션이 아니라 직장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미란다 같은 악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배우의 열연에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많은 대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습관적으로 하는 몇몇 동작들과 시시때때 바뀌는 의상들을 소화하는 것만으로 영화의 한 축을 만들어버린다. 악마 같지만, 성공한 상사, 자신을 온통 구렁텅이로 빠뜨릴 것 같지만, 때론 그것을 통해 사회생활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만드는 상사, 어떤 때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금세 다시 악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런 상사의 모습을 굳이 뉴욕이 아닌 곳의 사람이라도 공감하게 만들 정도로 리얼하게 연기해낸다.

이로 인해 우리는 환타지의 한 축에서 공감이라는 다른 축을 얻게 된다. 이러자 그저 환타지를 즐긴 후 극장을 빠져나가면 됐을 관객들은 공감의 틀 속에서 앤드리아의 선택(환타지와 현실, 여기서 환타지는 미란다며 현실은 미란다의 화려한 삶의 정반대축에 있는 앤드리아의 애인 요리사 네이트가 된다)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 삶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로써 앤드리아의 한바탕 환타지는 면죄부를 받게 되고, 거기에 동참한 관객들 역시 극장을 벗어나면서 느끼게 될 현실의 허탈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화는 경쾌해진다!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건 그만큼 욕망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려야한다는 걸 말한다. 성공하려면 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네 이 독한 현실 속에서 매일 악마와 직면해야 하는 현대여성들, 그들이 한 두 시간쯤 편안하게 환타지에 빠져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이 귀여운 악마와 만나는 게 뭐가 대수일까.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그 유쾌함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여우들은 그래도 마음가는 사랑을 한다

‘여우야 뭐하니’는 고현정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과 함께 음지에 머물던 성을 드라마라는 장으로 끌어냈다는 데서 시작부터 호평과 비판이 잇따랐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를 우리는 요즘 세대의 성 담론을 담은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드라마 종영에 와서 생각해보면 성 담론은 하나의 소재였을 뿐,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엉뚱한 곳에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요즘 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33세 여성들의 고민
‘여자 서른, 자신있게 사랑하고 당당하게 결혼하라’의 저자이자, ‘노처녀 통신’ 운영자인 최재경씨는 현재 한국의 여성들은 노처녀의 연령대를 대체로 33세로 본다고 한다. 여성들이 결혼보다는 사회생활을 통한 자아성취에 더 가치를 두면서 ‘결혼은 서른 너머’라 생각하는 만혼이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33세를 노처녀로 생각하는 걸 보면 서른을 넘으면서 나름대로 결혼에 대한 강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최재경씨에 의하면 이 나이의 문제는 ‘괜찮은 총각들이 하나 둘 어린 여자들과 결혼을 해버려 결혼할 상대는 점점 줄어드는걸 알면서도 여자는 전혀 눈이 낮아지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자아성취를 위해 노력과 시간을 들여 얻은 지위와 재력, 학력 등으로 웬만한 평범한 남자로는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우야 뭐하니’의 33살 고병희는 좀 ‘색다른’ 노처녀이다. 33살이지만 뭐 하나 이룬 것도 없고, 연애라는 걸 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처럼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전작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그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인’ 캐릭터가 가진 로망의 힘이 더 공감을 주고 설득력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김삼순의 문제가 ‘뚱뚱함’과 ‘촌스러운 이름’에 있었다면, 고병희의 문제는 ‘나이’와 ‘현실적인 능력, 지위 따위’에 있다. 왜 작가는 하필이면 보통(?)의 노처녀가 아닌 이런 경쟁력 떨어지는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세운 걸까.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는 33살이란 나이는 보통 여자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른 모양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 드라마가 마치 성 담론을 다루는 드라마처럼 보인 것은 나이에 늘 육체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몸도 늙기 마련이고 이것은 결혼이라는 문제에 봉착하면 더 구체화된다. 나이 차로 인해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그 숫자 때문이 아닌 ‘몸의 다름’ 때문이다. 직원인 오필교(박병선 분)가 어깨에 손을 얹자 ‘어머 주책이야’라고 조순남(윤여정 분)이 화들짝 놀라는 이유는 가장 큰 것이 외모에서 드러나는 나이 차에 대한 외부의 시선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구도는 고병희와 박철수(천정명 분), 배희명(조연우 분)의 삼각관계와, 고준희(김은주 분)와 박병각(손현주 분)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나이와 그 나이에 대한 주변의 시선들이다.

그러나 주책이라고 여기던 고병희가 드라마 중반 이후부터 박철수를 향해 ‘마음가는 대로하자’고 말하는 대목부터 드라마는 육체에서 마음으로 선회하며,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고준희와 박병각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상으로는 실제로 결혼과 같은 구체적인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 드라마는 분명 나이가 아닌 마음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작가는 이들 캐릭터들의 몸의 나이와 마음의 나이가 다르다는 것을 통해 마음가는 대로해야 하는 확고한 이유를 보여준다. 고병희는 숫자로서의 나이가 주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있을 뿐, 그 마음은 여전히 풋풋한 소녀이며, 박병각 역시 소년 같은 면모를 불쑥불쑥 보여준다. 심지어는 고병희의 엄마인 조순남은 아직도 오드리 햅번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현실 따위도 중요치 않아
아무리 소녀의 마음을 갖고 있어도 나이에서 오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그래서 배희명이라는 캐릭터는 이 불안한 마음을 파고드는 ‘현실과 안정’을 상징한다. 고병희가 처한 상황은 어찌 보면 ‘배부른 노처녀의 갈등’같지만, 거기서 그녀가 안정된 현실을 선택하기보다는 불안하지만 마음이 가는 사랑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부분에서 ‘여우야 뭐하니’라는 생뚱 맞은 이 드라마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33세 살 먹은 노처녀들을 여우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고병희처럼 용기 있게 마음가는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사실은 나이, 현실, 조건 사람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 숫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먼저 스스로 나이가 주는 강박을 버리고, 마음을 직시하라고 한다. 그들에게 ‘여우야 뭐하니’하고 묻는 것이다.

사랑과 마음을 선택해야한다는 이 당연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긴장감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작가가 구축한 탄탄한 캐릭터와, 어디선가 보았던 인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해낸 주연에서부터 조연까지의 출연진들 몫일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공감의 이유는 이 당연한 질문에 당연하지 않게 살아가게 되는 우리사회의 나이에 대한 편견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 아닐까. 이 드라마는 나이, 현실, 조건을 자꾸 따지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여우들에게 용기를 내라며 등을 토닥여주는 드라마다.

여성적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황진이

과거에 흔히 카리스마를 말하면 우리는 남성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건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KBS 드라마 ‘황진이’가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그 어떤 남성들의 그것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칼만 든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황진이’는 전개상 세 단계의 변신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것은 첫째, 첫사랑과 그 실패를 겪는 황진이, 둘째 그로 인해 세상에 독을 품는 황진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독이 세월에 녹아 한 커다란 인간으로 거듭나는 황진이가 그것이다. 지금 두 번째 단계를 지나고 있는 황진이에게서 그 카리스마가 물씬 풍겨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단계적인 변화의 원인으로 볼 때, 그녀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의 원천은 바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한(限)에 근거한다. 그 한은 자신의 운명과 그런 운명을 만든 세상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다. 은호(장근석 분)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가짐으로는 세상과 싸워 백전백패라는 뼈아픈 결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 속에 칼날 하나를 품는다.

그 칼끝은 바로 저 조선 사내들의 위선을 향해 있다. 그녀는 부드럽고 아찔한 웃음을 지으며 이른바 세도가라는 자들의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고는, 거침을 뽑아들고 그네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것이 단지 사내가 아닌 ‘조선 사내’의 이중성을 꼬집는다는 데서 그녀의 칼은 조선 자체를 향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는 당대로 보면 일개 기녀이다. 천출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조선 전체를 향해 마음 속의 비수를 뽑아드는 그 지점이 그녀의 카리스마가 불을 뿜는 순간이다.

무예만 출중하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저 백무와 매향에서부터 비롯되어 황진이와 부용의 대결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황진이와 세상(여기에는 사대부집 양반네들을 비롯해 명나라의 사신까지를 포함한다)의 대결로 연결된다. 그녀는 세상과 겨루기 전 교방에서 그 무기를 키워왔다. 그것은 바로 시와 음악, 춤과 같은 재주(예술)이다. 이 재주를 얻기 위해 그녀는 저 무예를 수련하는 사극 속의 남성 캐릭터만큼 혹독한 시간들을 보냈다.

향악을 폐하려는 명나라 사신 앞에 거문고를 들쳐 메고 나타나는 황진이의 모습은 전쟁터에 나가는 그 어떤 캐릭터보다 더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거문고 연주가 아니다. 그녀는 ‘마음의 거문고 연주’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그녀는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재주는 헛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상대방을 제압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로운 의상과 신들린 듯한 연주, 날아갈 것 같은 춤사위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무술 동작 몇 개만으로 얻어지는 카리스마란 실상 너무나 관습적이며 장면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게 마련이다. 허나 마음에서 비롯된 이 강렬한 카리스마는 외상을 넘어서 내상을 입히기 마련이다.

갑옷만 입는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여기에 하나 더 황진이의 카리스마의 원천을 덧붙인다면 그 유려한 미장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사극의 복장들은 과거보다 더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패션쇼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볼거리가 그저 화면을 왔다 갔다 밋밋하게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황진이’의 화면들은, 그 어떤 화려한 CG 전투장면이나 색색의 갑옷보다도 더 아름답고 다이나믹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우리네 한복이 제대로 빛을 발하고 동작 하나하나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볼거리들을 진정 볼거리로 만들어주는 영상 미학에 있다. 타 사극에서 보여주는 나란히 장수들이 서서 화면 쪽을 바라보며 적의 동태를 얘기하는 화면 같은 관습화된 장면들은 극의 긴장감을 그만큼 흐트러뜨리기 일쑤다.

황진이는 사극이 포기한 유려한 미장센을 끌어들이면서 캐릭터와 극의 긴장감을 되살렸다. 카메라는 밑에서 위로, 또 위에서 아래로, 때론 극단적인 클로즈업에서부터 롱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로 변화하며 인물들의 감정선을 잡아낸다. 그 아름다운 장면들 속에 마치 칼처럼 흐르는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사극이라고 다 같은 사극이 아니다
사극전성시대라고 한다. 흥미를 끌만한 소재와 캐릭터를 갖고 잔재주를 통해 시청률만 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사극은 아니다. 진정한 메시지와 함께 동시에 흥미로운 전개, 절제되면서도 강력한 대사들, 영상미학이라 해도 좋을 만한 화면 구성, 연기자들의 혼이 느껴지는 연기, 이 모든 것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훌륭한 사극이 탄생한다. 저 ‘대장금’의 힘은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이다.

극에서 우리가 느끼는 카리스마란 사실 극의 긴장감과 집중도와 다른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대결구도를 갖는다고 해서, 칼을 들고 휘두른다고 해서, 굉장한 무예를 갖고 있다고 해서, 화려한 갑옷을 걸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 본연의 힘인 드라마성(갈등구조와 진정성 그리고 실험정신)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주몽’이 ‘황진이’에게 배워야할 점이다.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

사극 전성시대에 홍일점처럼 빛을 발하는 드라마가 ‘황진이’다. 칼과 화살이 날아다니고 성벽을 오르는 군사들과 그걸 저지하려는 군사들간의 피 바람이 부는 사극의 현장에서, 오색이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화려한 한복에 나풀나풀 돌아가는 춤사위, 입만 열면 달콤한 향내가 날 것 같은 풋풋한 연인들의 부드러움으로 등장한 ‘황진이’가 눈에 띄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단지 그 남성적인 사극과 여성적인 사극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황진이’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일까. 그 속에는 무언가 다른 아름다움의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역사가 발견한 현대여성 혹은 한 인간
이것은 수많은 남정네들을 갈아치운 ‘색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한에 사무쳐 남정네들을 자신의 치맛폭에 쥐락펴락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한 악명 높은 기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운명이라는 굴레 속에 세워진 마음의 줄 위에 올라 한바탕 최고의 연희를 벌였던 한 여인, 예술가, 혹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운명에 맞서는 여인의 모습은 당찬 현대여성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하지원이라는 카드는, 아주 여성적이면서도 그 안에 남성성을 누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가 존재하는 황진이 캐릭터에 힘을 부여했다. 하지원의 등뒤에 든든히 선 김영애(임백무 역)와 전미선(황진이 모역)은 황진이 속에 존재하는 두 성격의 모태가 될 만큼 특징적이다. 그 양분을 먹고 자라난 황진이는 여성적인 카리스마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보다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황진이가 운명과 벌이는 싸움은 다분히 예술가의 삶을 닮았다. 그녀는 가슴속에 생긴 커다란 상처를 예술로서 풀어낸다. 이러자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아름다움으로 확장된다. 칼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칼을 가슴에 품어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갖고도 당당히 서서 제 갈 길을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적인 미적 가치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드라마
그 사랑과 운명 사이에 세워진 마음 줄은 그저 장난스런 유희가 아니다. 자칫 발 하나를 잘못 디뎌 균형을 잃는 날에는 살 판이 죽을 판이 되는 그런 줄이다. 사실 칼과 화살만 없다 뿐이지, 조선시대 기생이라는 황진이가 처한 삶은 피비린내 나는 마음의 전쟁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기녀는 교방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부터 삶이 결정된다. 그것은 법도라는 사회적 굴레 속에서 사랑도 할 수 없고, 혼례 또한 치를 수 없는 그런 삶이다. 그들은 재주를 익히고, 미색을 키우며 그 재주와 미색을 무기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황진이가 처한 상황이다. 그러니 황진이의 어미인 현금이 그녀를 어린 시절 절로 보낸 것은 바로 그런 세습되는 굴레를 벗어나게 하고자 함이었다. 현금의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은 바로 자식이 겪을 마음 고생에 대한 회피이다.

이 드라마에서 절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한데, 그것은 저 마음과 욕망의 전쟁터인 세속으로부터의 해탈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이 드라마 황진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절을 빠져나와 교방에서 재인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마치 자기완성을 위해 속세로 뛰어드는 불승과 유사하다. 황진이의 마음은 사랑에 이끌리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운명을 거부하려 하나 벗어나지 못한다. 차라리 전쟁이라면 싸워 이기거나 지면 끝날 것이지만 이 마음의 전쟁은 그 운명을 이겨내고 벗어나서 자유로워져야 끝나는 것이다. KBS 드라마 ‘황진이’는 바로 그 마음 줄 위에 서서 줄의 굴레를 넘어서 오히려 자유로워진 한 영혼을 노래한다.

한복만 입히면 다 사극인가
굵직한 캐릭터와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를 무기로 가진 황진이는 아름다운 화면으로 옷을 입는다. 최근 들어 사극에 등장하는 복식은 점점 역사라는 굴레를 벗어나 화려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것이 분명한 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은 우리네 복식을 화면구성이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가 방영되기까지 사극은 그 화려한 CG 전투장면을 빼고는(이것도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야기 전개에 급급한 화면처리를 해왔다. 나란히 장수들이 서서 화면 쪽을 바라보며 적의 동태를 얘기하는 화면은 너무나 연극적이어서 드라마가 과거로 퇴행하는 느낌마저 준다. 또한 누가 누군가를 찾아가고 인사를 하고 앉기를 권하고 앉아 대사를 처리하는 장면도 너무나 관습화되어 있다. 말이 달려가고 기습을 하고 사로잡히고 하는 모든 사극의 장면들은 이제 영상미학을 포기한 지 오래다.

황진이는 드물게도 이들이 포기한 유려한 미장센을 다시 끌어들였다. 춤사위에 살짝 움직이는 손끝과 발끝에도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것은 화려한 복식의 색 때문이 아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길을 걸어오는 황진이의 모습은 부감으로 잡혀 우리네 담장과 조화를 이루며 한국적인 미를 보여준다. 정자 끝에 걸린 파란 하늘과, 정자 아래로 언뜻 보이는 연꽃들의 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황진이와 백무가 탄 배가 화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동양화 속으로 한발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한복이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것을 잡아내는 섬세한 카메라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교방 이야기로 인간의 길을 조명
또한 이 드라마가 가진 미덕은 그 흥미진진한 대결구도의 교방생활과 조선시대의 연애 풍경이라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벼운 소재들을 엮어 ‘인간의 길’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기생의 삶을 그렸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교방 풍경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교방생활은 수련자와 구도자, 그리고 예술가의 길과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 그들은 호흡을 길게 하려고 물 속으로 잠수를 하고, 손끝 발끝의 선을 살리기 위해 줄에 매달려진다. 걸음걸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줄타기를 하며, 가야금에서부터 거문고까지 밤낮 없이 연습에 몰두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조선시대의 연애풍경을 그림에 있어서도 그 절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남과 이별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고풍스러운 멋으로 잘 포장되어 보여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드라마가 호기심 충족과 자극적인 재미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황진이는 재주와 미색과 더불어 한 가지 무기를 더 갖는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부릴 줄 아는 힘’이다. 이 힘은 그녀의 스승인 백무의 표현대로 ‘고통’에서 나온다. ‘고통과 벗해야 진정한 기녀이자 예인’이라 할 수 있다는 백무의 말은 사실 ‘인간의 길’과 다르지 않다. 허태휘가 한 “당신의 삶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에, 황진이가 했다는 그 말,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고 답한 그 말과 일맥상통한다. 황진이가 처한 삶이 주는 고통은 예술을 통해 승화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 ‘황진이’는 전하려는 메시지와 그걸 담는 영상문법이라는 그릇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 아름다움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궁극적인 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황진이’가 앞으로 보여줄 인간의 길이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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