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부숴야 리메이크가 산다

최근 들어 대중문화에 국적이 사라지고 있다. 국내 영화계에서 제작되고 있는 컨텐츠들은 국경을 넘어서는 원작들로 가득하다. 먼저 ‘올드 보이’는 일본만화가 원작이지만 칸느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주었고 이 영화는 지금 헐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인 유니버설 픽쳐스가 리메이크 중이다. 우리네 ‘시월애’는 ‘레이크 하우스’란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어 역수입되었고, 일본 YTV에서 방영된 드라마 <Pure Soul>은 우리나라에서 ‘내 머릿속의 지우개’로 리메이크 되어 다시 일본으로 역수출되었다.

또한 같은 원작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나란히 영화화된 ‘플라이 대디’를 기점으로 일본 T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이 국내에서 영화화됐고, 앞으로도 일본의 드라마들이 줄줄이 국내에서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그러한 원작들이 바다 건너 이역 땅에서 다시 영화화되는 것은 그것이 그곳에서 성공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패의 이면에는 분명한 공식 같은 것이 존재한다. 아무리 국적 없는 대중문화 환경이라고 해도 리메이크된 영화는 국적이 있어야 산다는 것이다.

국적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영화들
이준기, 이문식 주연의 ‘플라이 대디’는 재일교포 소설가인 가네시로 가즈키의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도 영화화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영화는 참패했다. 물론 당시 개봉했던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상당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참패의 원인을 모두 ‘괴물’로 돌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당시 개봉된 ‘각설탕’, ‘다세포소녀’, ‘스승의 은혜’ 등이 선전을 한 것에 비하면 ‘플라이 대디’는 이준기라는 굵직한 카드를 갖고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진짜 이유는 ‘작품의 현지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주인공 박순신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사회적인 위치와 스즈키라는 전형적인 일본 가장의 위치가 만난다는 그 설정에 있다. 이들은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마이너리티라는 재일교포의 정체성은 일본 소시민의 정체성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그들의 복수가 유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 굵직한 이야기 속에 만화적인 전개를 용인하는 일본적 정서도 한 몫을 담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리메이크되어 국내에 걸리자 관객들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우리네 정서는 일본과는 달라 이 무거운 주제를 만화적인 전개로 다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상황과는 전혀 다른 우리네 상황을 영화 속에 녹이는 데도 실패했다.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니 정서가 공유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우리 상황에 맞는 마이너리티를 찾아서 원작의 틀만 유지한 채 전혀 새로운 영화로 만들었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았을 지도 모른다.

성공한 컨텐츠들의 이유
반면 스치야 가론의 일본 만화 원작을 들여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꾸며낸 ‘올드 보이’는 그 양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란 내용보다는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가진 영화 스타일로 인해 박찬욱표 ‘올드 보이’가 만들어졌고, 그것은 국지적인 적응의 성공을 넘어 보편적인 정서로의 적응에도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칸느에서 울려온 축포는 바로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원작을 5천만 원에 사들여 영화로 만든 뒤 일본에서만 약 250억 원의 흥행수익을 올린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우리 식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더 경쟁력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이 ‘멜로’라는 한류의 중심 축에 선 소재를 갖고 있다는 장점을 차치하고라도, 한국화된 멜로가 벌어들인 흥행수익이 주는 의미는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한류가 앞으로 고수해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국적을 고수해야 산다
한류가 더 이상 먹히지 못하고 일류가 몰려온다는 ‘한류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최근 일련의 국내의 영화들이 일본에서 잇따라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본 영화계가 자체 제작을 늘리고 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식의 정서를 제대로 영화 속에 풀어내지 못한 원인이 크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일본 원작들이 들어와 영화 혹은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다. 그 전초병 역할을 하는 것은 일본 만화와 소설이다. 이렇게 일본 컨텐츠들이 국내에 범람하는 것을 가지고 영화계는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식 정서가 우리네 정서와 맞을 거라는 착각 말이다.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최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문근영·김주혁 주연의 ‘사랑 따윈 필요 없어’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랑 따윈 필요 없어’의 가장 중심 축은 김주혁이 맡은 호스트라는 직업이다. 그런데 이 속에는 일본식 정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일본 도쿄의 가부키쵸를 이해해야 하고, 호스트를 직업으로 인정하는 일본의 문화를 이해해야 그 드라마에 대한 공감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을 고스란히 호스트라는 이름으로 국내로 들여오자 영화적 공감이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일본식 정서에나 적합할 것 같은 극도로 절제되어 현실감이 없는 대사나, 오빠 동생이라는 코드 등은 묘한 불쾌감마저 들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익숙한 얼굴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역도 마찬가지며(진구는 남미 어디선가 본 듯한 건달 이미지를 풍긴다), 하다 못해 지나가는 엑스트라까지 그렇다.

이렇게 철저히 우리네 정서가 빠져있는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이런 작품을 보느니 차라리 원작을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것은 원작을 보는 관객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일본이라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드라마나 만화, 소설을 원작으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 식의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없을 때, 리메이크는 베끼기가 되거나 늘 삼류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국적 없는 대중문화의 교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국적을 고수해야 한다. 원작은 늘 부서져야 하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살아나야 리메이크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사극의 영웅 뒤에 등장하는 그 부모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극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뒤에는 영웅을 키워낸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희생이 있다. 최근 고구려 사극 트로이카 시대를 열고 있는 고구려 사극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는 ‘부모, 가족 코드’가 시청자들의 피를 끓게 만들고 있다. 드라마 상에 등장하는 이들 부모들은 모두 똑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의 존재감은 각각 다르게 느껴진다. 이들 사극들은 영웅의 부모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다
사극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가족들은 모두 해체되어 있다. 주몽과 해모수, 그리고 유화부인이 그랬고, 연개소문과 연태조가 그랬으며, 대조영과 대중상, 그리고 달기가 그랬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한다. 주몽은 해모수를 만나기까지는 그저 철없는 왕자에 불과했고, 연개소문은 연태조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했다. 또한 대조영은 달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개동이가 아닌 대조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가족이 이렇게 해체되고 영웅이 자신의 신분을 모르게 된 것은 출생의 비밀과 연관이 있다. 주몽과 함께 등장하는 삼족오와, 연개소문과 대조영의 심상치 않은 탄생에는 모두 국가를 위협하는 대역(大逆)의 기운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들 가족이 온전할 리가 없다. 영웅의 탄생에 대역(大逆)이라는 모티브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시련을 따르게 하고 그 시련을 넘어서는 순간, 대역이 예고한 것처럼 거대한 국가, 혹은 영웅의 탄생을 예감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웅을 다루는 신화나 전설에는 가족의 해체가 그 기본 전제가 되곤 한다.

부모들은 자식을 부정한다
그런데 이들 가족은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자신의 신분을 영웅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만나는 순간에 부모들은 자식을 부정한다. 주몽 앞에서 해모수는 자신을 아버지로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죽어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돌궐에서 자식인 연개소문을 만나게 된 연태조는 고구려에 대한 유업만을 남겼을 뿐, 홀연히 떠나버린다. 죽음 앞에서 달기는 자식인 대조영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어미임을 부정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는 다시 부모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이다. 드라마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해준다. 부모의 자식을 위한 거짓말과 그 거짓말이 탄로 나며 헤어지는 과정은, 갈망하던 가족의 인연이 막 생겨나는 그 즈음 다시 끊어버리는 효과를 준다. 그러자 영웅은 자신의 유업을 알게되고 그 의지를 한층 불태울 수 있게 된다.

자식을 위한 죽음 앞에 당당하다
이 마지막 순간에 영웅의 부모들은 기꺼이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유화부인은 대소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몰려 있으면서도 절대로 자신을 구하러 오지 말라고 주몽에게 서찰을 보내며, 달기는 대조영의 앞에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 연개소문은 양상이 조금 다른데 그것은 연태조가 가진 자식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그는 연개소문을 자신의 자식이 아닌 고구려의 자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행보 또한 결국 그 자식을 위한 포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에게 유언처럼 남기는 말은 바로 대업이다. 사사로움보다는 대의를, 혈연보다는 백성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들의 희생을 통해서 자식은 드디어 자신의 범주를 넓히게 된다. 한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은 연후에나 영웅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고구려 사극들은 그 영웅의 탄생에 있어서 부모들의 희생이라는 기본 모티브를 모두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드러나는 과정에서의 힘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어떤 부모의 드라마가 가장 강할까
‘주몽’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은 드라마 초반부 주몽이 갖지 못한 카리스마의 보완 기능이 컸다. 그런데 이 카리스마가 주몽으로 전이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주몽은 강한 카리스마로 부하를 이끄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의견을 묻고 지시하는 쪽에 가깝다. 죽은 해모수를 다시 살리고, 아직까지도 해모수의 잔영이 계속 드라마의 구석구석을 떠도는 것은 주몽의 부모가 주몽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반면 ‘연개소문’의 연태조는 부모라고는 하지만 선인 같은 인상을 갖고 있다. 이것 때문인지 부자 간의 드라마가 그다지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작가의 잘못된 해석이거나, 놓치고 지나간 드라마 요소처럼 보인다. 그 수많은 세월을 이역을 떠돌다 만나게 된 자식에게 그다지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태조가 속세를 벗어난 인물이라는 말은 되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아마도 가장 적합하게 부모의 코드를 활용하고 있는 건 ‘대조영’인 듯 싶다. 대조영과 달기의 만남과, 눈앞에서 웃으며 죽어 가는 달기와 그걸 보며  흘리는 대조영은 일단 드라마적으로 가장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타 사극이 아버지와의 조우를 그린 데 비해 ‘대조영’이 어머니를 택한 데 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강력한 힘 앞에 두 영웅들이 무력했던 반면, 어머니의 모정 앞에서 대조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받게된다.

재미있는 것은 대조영이 아버지 대중상을 만나는 장면에서 자신도 아들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때가 되기까지(이것은 또한 자신 스스로 충분한 카리스마를 만들 때까지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숨길 것이다. 주몽과 연개소문의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임을 숨기고 있을 때, 대조영은 거꾸로 아버지에게 자신이 아들임을 숨기는 것으로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는 힘을 얻고 있다.

드라마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다르지만 고구려 사극들이 최근 그 힘을 받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혈연, 가족이라는 카드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최근 우리네 드라마들의 화두이기도 하다.

‘가을로’는 사회적인 멜로

멜로 영화가 달라졌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시작된 멜로의 변신은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로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멜로 드라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와 자살시도를 해온 여교수의 사랑을 그린 ‘우행시’. 이 멜로드라마는 그 기저에 ‘사형제도’폐지 논란의 불씨를 심어두었다. ‘가을로’ 역시 마찬가지. 이 영화는 잃어버린 사랑과 상처, 그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끌어안았다. 이 사회극과 멜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멜로 드라마라는 전통적인 장치에다 사회적 공감까지 얻어내려는 시도일까. 혹은 사회극의 무거움을 멜로 드라마의 감상으로 중화시키려는 의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 개인적 차원의 멜로가 사회적 코드 안에서 읽히는 확장된 멜로의 결과일까.

멜로+사회적 공감, 두 마리 토끼 잡기
‘우행시’의 절묘함은 그것이 사회적 코드를 끝까지 쥐고 가면서 동시에 신파라는 전통적 코드 또한 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이 사회적 공감 때문인지, 신파 때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즉 ‘우행시’에서 흐르는 눈물에는 여러 층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멜로와 사회극은 웬만해서는 한 몸이 되기가 어렵다. 멜로로 흐르다보면 자칫 감정 과잉이 되기 쉽고, 사회극으로 흐르다보면 너무 이성적으로 되기 쉽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 잡기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행시’는 보기 좋게 그 성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사실 그 눈물이 관습적 장면이 만들어낸 신파로 강요된 것이라 하더라도, 영화가 제시한 사회적 공감의 틀 안에서 용서해주었다.

‘우행시’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멜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가을로’는 사회극쪽에 더 무게를 준다. 대부분의 영화평이나 영화 소개는 이 영화가 이번 가을의 대표적 멜로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멜로와는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 아픔과 상처를 이겨내는 그것은 멜로로 읽히지만 영화의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앞에 벌어진 재난이다. 만일 이 재난이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예를 들면 불치병 같은)이었다면 이 영화는 온전히 멜로의 틀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천재가 아니고 인재인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다.

한 인간의 죽음을 대하면서 겪을 수 있는 반응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 분노, 죄의식, 공포와 불안, 피해의식 등을 꼽는데, 살아남은 최현우(유지태 분)는 분노의 반응을, 윤세진(엄지원 분)은 공포의 반응을 보인다. 정상적인 멜로의 상황이라면 죽음을 겪은 주인공은 이러한 반응들을 거처 결국에는 긍정의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상황에 그들은 여전히 분노와 공포 속에 놓여있다.

본래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노
감독이 영화 시사회에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듯이 이 영화는 분노, 즉 하루아침에 수많은 삶을 앗아가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정부와 사회를 통틀어 벌어지는 총체적인 불감증에 대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다큐멘터리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이지 영화가 할 일은 아니다. 김대승 감독은 이 사회적인 부조리와 거기서 발생하는 분노 끝에 멜로를 붙여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되자 멜로와 사회극의 경계가 절묘하게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최현우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가 서민주(김지수 분)를 잃었던 그 상처의 치유과정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깊은 심연 속에 묻어두었던 분노를 끄집어내고, 그 분노를 다시 삭이며 치유하게 된다(그것이 미완의 치유일지라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멜로
영화 ‘가을로’는 개인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멜로의 일반적인 틀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영화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사회적 멜로’라고나 할까. 이 사회적 멜로는 저 ‘우행시’에서 먼저 선을 보인 바 있고, ‘가을로’에서 더 깊어졌다. ‘우행시’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서 멜로의 코드를 과용해 무언가 화장기가 가득했다면, ‘가을로’는 화장기 없앤 보다 다큐적인 접근을 한 본격 사회적 멜로가 될 것이다. 이 이른바 사회적 멜로가 갖는 힘은 바로 연애감정에서 오는 감정적 발로의 차원에 머물던 개인적 멜로에서, ‘사회적 공감’의 차원으로 보다 확장된 멜로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그것은 멜로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감정적 해결의 문제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까지는 긍정적 역할을 해내지만, 그것의 해결에 있어서 너무나 미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 ‘가을로’라는 영화의 시도가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오래도록 빠져있어 도저히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사회적 불감증을 다시 환기시켜주는데 어쨌든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을로’는 마치 너무나 끔찍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멜로라는 틀을 빌려 부드럽게 끄집어내고 있다. 만일 영화를 보면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장면에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동안 스스로 묻어버린 분노의 한 조각을 찾아냈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TV가 추구하는 바는 ‘욕망’이 되었다. 즉각적이고 직설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면 시청률 경쟁에서 밀려나는 작금의 매체 환경이 부추긴 결과이다. 물론 TV라는 매체 자체가 인간 본연의 욕망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드러나는 양태는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것은 앞뒤 정황, 혹은 인과관계 없이 순간적인 장면 장면의 자극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하드 코어적이다.

너무나 노골적인 식욕
TV의 하드코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른바‘식욕자극 프로그램’들이다. 주말 점심시간 직전을 장악하고 있는 SBS의 ‘결정! 맛대맛’과 ‘찾아라! 맛있는 TV’는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과거의 ‘식욕자극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는 ‘6시 내 고향’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저녁 6시라는 식욕의 최고점에 방영된다는 이점을 갖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그 본질에 있어서 최근의 식욕자극 프로그램과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 같은 것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 본태적인 육체의 욕망인 식욕과 ‘시장을 살린다’거나 ‘농촌을 살린다’는 취지를 결합시켜 어느 정도 수위를 조절한다. 그들 역시 음식을 소개하지만, 그 이면에는 음식의 재료인 농촌에서 나는 농작물의 소개가 기반이 되어 있다. 즉 음식 소개의 진짜 목적은 그 자체의 자극보다는 다른 취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식욕자극 프로그램’들에서 그런 취지는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말 그대로 식욕을 어떻게 하면 자극시킬까하는데 프로그램의 목적이 있다. 색색으로 치장하고 시청자를 유혹하는 음식들, 음식을 먹는 장면에 대한 극단적인 클로즈업, 그 장면을 보며 침을 삼키는 출연자들은 이 프로그램의 공식이다. 이 장면들은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때론 하드 코어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하지만 ‘식욕자극 프로그램’은 그다지 사회적인 문제(비만이나 될까)를 양산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없는 식욕을 만들어준다거나 먹거리를 발굴하는 순기능도 한다는 점에서 하드코어적 접근은 방송의 최근 경향을 보여줄 뿐 그다지 비판적 소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타 프로그램들의 자극적인 경향은 관대하게 보아줄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점점 더 노골화되는 도둑촬영
몰래카메라는 이제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 르뽀 프로그램의 사회 고발 수단으로서 활용되다가, 연예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장치가 되었고, 최근 이 수위는 이제 일반 개인들의 사생활까지 넘보고 있다.

‘몰래카메라’라는 공전의 히트상품을 스스로 접었던 개그맨 이경규씨가 다시 ‘몰래카메라’를 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시청자들의 시선을 끈다는 데 있다. 과거의 사생활 침해 비판은 몰래카메라를 접게 만들었지만, ‘튀지 않으면 사장되는’ 논란 마케팅의 중심에 서 있는 지금의 연예계는 이를 용인하다 못해 오히려 만들어내는 상황이다.

여기에 케이블TV에서 앞다투어 만들어내는 유사 프로그램들은 모두 그 기반을 ‘도촬(도둑촬영)’에 두고 있다. ‘리얼스캔들-러브캠프(코미디TV)’, ‘아찔한 소개팅(Mnet)’, ‘연애불변의 법칙(올리브 네트워크)’, ‘러브액션WXY(수퍼액션), ‘달콤살벌한 대결(XTM)’등의 프로그램이 말해주는 것은 이제 도촬의 대상이 일반인에게까지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시청자들이 도촬의 자극에 그만큼 익숙하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도촬 영역의 확대는 사회고발프로그램에서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다. SBS의 ‘긴급출동 SOS24’가 그 선두주자다. 이 프로그램이 그런 자극적인 도촬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시청층의 비판과 함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프로그램 자체의 시도에 대한 박수라기보다는, 사회와 국가가 하지 못한 것을 TV가 이런 식으로라도 음지에서 양지로 끄집어냈다는 부분에 있다. 즉 이 프로그램의 공감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사회에 대한 시청자들의 분노와, 그걸 자극적으로 끌어내는(이성적인 접근이 아니다) 프로그램의 수위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자극만을 쫓는 드라마들
“이제 이런 설정이 지긋지긋하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듣고 있는 KBS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는 드라마에도 이제는 이러한 하드 코어가 하나의 ‘시청률 올리기 수단’으로 쓰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래 구성 자체가 얽히고 설키는 긴밀한 상황전개에 있지 않은 이 드라마는 그 느슨한 상황 속에 자극적인 장면과 구도를 연속적으로 늘어놓는다. 이것을 드라마로 봐야 할지 아니면 ‘사회 고발 프로그램’으로 봐야 할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이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그 특유의 자극적인 낚시질 때문이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딱 걸리게 되면 그 답답함과 분노로 인해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채널을 돌리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채널 고정의 원인이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얘기하려는 내용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하드 코어가 언제고 어느 순간에 보아도 자극적인 것처럼, 단지 에피소드적인 순간적 설정이 주는 아찔함에 눈이 가는 것뿐이다. 이런 드라마들의 역기능은 시청자들의 입맛을 강한 자극으로만 반응하게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이렇게되면 우리의 드라마를 보는 미각은 단맛, 쓴맛, 신맛 같은 걸 다 제쳐두고 오로지 자극적인 매운 맛에만 길들여지게 된다.

경쟁이 불러온 하드코어, 그 끝은?
이렇게 하드코어가 난립하게 된 것은 과도한 경쟁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사간의 경쟁에 케이블의 도전장이 던져지고, 여기에 외주제작사들의 경쟁까지 겹쳐지면서,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이다.

이 속에서 연예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 하드코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심지어는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쌩얼 전략’의 등장은, 신체적, 정신적 굴욕의어가 이제 TV를 장악했다는 걸 말해준다. 이것은 또한 좋은 캐릭터, 좋은 이미지보다는 튀는 캐릭터와 이미지가 더 우선하는 작금의 연예계 상황을 보여준다.

끊임없는 자극, 그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흐름이고 본래 TV의 존재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함이 남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시청자들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는데 있다. 하드코어의 끝에 남는 것은 카타르시스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허탈함과 더 큰 자극에의 희원뿐이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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