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빨리 잊어버리는 세태 꼬집은 닭치고

 

아 반갑다. 넌 누구니? 난 니 동생이라고 해. 넌 누구니? 난 니 형이라고 해. 반갑다. 친하게 지내자.” 쌍둥이 닭이 나누는 이 만담만을 떼고 보면 <개그콘서트>에서 새롭게 시작한 닭치고라는 코너가 그저 언어유희 개그이거나, 아니면 바보 캐릭터들이 나오는 개그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심지어 방금 인사한 선생님에게도 넌 누구니?”라고 묻고 선생님도 난 니 담임이라고 해라고 말할 정도니 바보들도 이런 바보들이 없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닭을 캐릭터화 하고 반복되는 닭치고!”라는 말이나, 잠깐 등장해 자신의 이름이 꽉끼오라며 엉덩이에 낀 바지를 보여주는 김준호, 또 누가 아프다고 하자 벌써 달려와 대충 약과 물을 얼굴에 마구 끼얹는 양호선생님 후다닥같은 캐릭터들은 실제로 이 개그가 꺾기도같은 류의 언어유희 개그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이 학교가 뭐든 잘 잊는 상징으로서 닭들을 캐릭터로 내세우고 있는 점이나, 자신이 얘기해 놓고는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까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교실 위쪽에 적혀진 교훈, ‘지난 일은 잊자는 문구는 이 코너를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게 만든다. 이 뭐든 까먹는이야기는 그 자체로는 유치한 바보 개그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면 고품격 정치풍자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면이 있다.

 

선거 때만 되면 뭐든 이뤄줄 것처럼 줄줄이 내세우는 공약들이 단 몇 개월만 지나도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는 걸 목도해온 대중들에게 닭치고는 그래서 정치인들의 희화화처럼 읽혀질 수 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당선된 후에는 헌신짝 취급하듯 버리는 행태는 이제 정치인의 캐릭터처럼 굳어져버린 상황이 아닌가.

 

이명박 정권이 그토록 강조했던 경제를 살린다는 말이 그랬고, 박근혜 정권이 내세웠던 창조경제민생이 그렇다. 그 어디에서도 살만하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고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민생? 없는 자들은 더 힘겨운 현실을 토로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니 닭치고같은 개그가 고품격 정치 풍자로 보일 수밖에.

 

게다가 세월호 참사를 떠올려 보면 지난 일은 잊자닭치고양념 반 프라이드 반의 교훈이 아프게도 다가온다. 그 아픔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부모들의 품에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있는데. 미래와 꿈을 얘기하자며 지난 일은 왜 자꾸 들춰 내냐는 식의 논리들이 정치든 경제든 어느 곳에서나 꺼내지는 건 통탄할 일이다. 그 아픈 지난 일은 결코 잊을 수도 또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지방선거 치르고, 월드컵 끝나고 하면 또 다 잊혀질 거라고들 말한다. 삶이 어려우니 현실이 어려우니 그렇게 살면서 실제로 잊혀져 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닭과 다른 것은 기억의 힘이 있어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닭치고의 닭들이 했던 말을 끝없이 반복하며 마치 바보들처럼 무감하게 웃는 모습은 그래서 뭐든 빨리 잊어버리는 세태를 아프게도 꼬집는다.

 

물론 닭치고는 그 어디에도 정치 풍자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던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바보 같은 닭들의 언어유희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때로는 개그의 완성은 관객의 참여에 의해 이뤄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닭치고를 고품격 정치 풍자로 만드는 것은 오롯이 관객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저 닭들의 언어유희를 즐겨도 무관하지만, 현실을 빗대 바라보면 더더욱 재미있는.

김민준 논란, 그 선정성과 연예언론의 현실

 

기사를 먼저 접했던 이들이라면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김민준이 버젓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사진이 들어가 있고, 기사 내용은 그 욕이 기자는 물론이고 팬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상식적이다. 제 아무리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라도 팬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연예인이 있을까.

 

'나혼자 산다(사진출처:MBC)'

그것은 아마도 팬이 아니라 기자를 향해 날리는 불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표현이 나왔을 정도라면 그만한 촉발의 이유도 있었을 법하다. 기자들의 요구에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거나 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상식적이니까.

 

하지만 기사 내용은 거의 일방적이다. 김민준이 욕을 했다면 왜 그런 반응까지를 보이게 됐는지에 대한 전후 사정이 충분히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기사가 이유로 제시한 것은 김민준의 성격이 다혈질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기사는 이전에 있었던 서브남주논란까지 덧붙여 이 모든 행동이 김민준이 본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몰아세웠다.

 

연예인은 공인이라는 논리가 내세워졌다. 하지만 과연 연예인은 공인인가. 연예인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연예인에게 마치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공인의 책임을 무는 것은 과도하다. 여기서 공인이라는 논리에 여지없이 등장하는 건, 이른바 대중들의 볼 권리’, ‘알 권리. 하지만 언제 대중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볼 권리를 주장했던가. 그것은 언론이 부추긴 욕망일 뿐이다. 대중들은 심지어 공해처럼 쏟아지는 사적인 사진들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연예인이 공인도 아니고, 그 자리가 공적인 자리도 아니었다면 김민준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것은 사적인 자리에서의 지극히 사적인 행동이라는 얘기다. 그것이 적절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적인 행동에 대해 공적인 잣대를 드리워 매도하는 건 부적절한 일이다. 그리고 기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거기에는 악의적인 뉘앙스마저 묻어난다.

 

기사가 처음 올라왔을 때 대중들의 반응은 대부분 김민준의 행동에 대한 비난이 많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사 자체가 그것을 상당부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린 김민준의 사진은 마치 그 기사를 읽는 대중들에게 욕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민준이 욕을 날린 건 대중들이 아니라 기자일 것이다. 즉 기사는 기자에게 날아온 욕을 대중들에게 날린 욕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초반에 비난하던 대중들이 차츰 김민준보다 기자와 언론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은 결국 이 사안의 실체를 조금씩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사화된 김민준 사진이 주는 충격이 조금씩 가라앉는 순간에, 기자들의 과도한 연예인 사생활 취재경쟁의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최근 들어 연예인의 사적인 생활을 찍어대는 이른바 파파라치성 기사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그 책임이 해당 기자에게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번 김민준의 사진을 찍은 기자들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생각해보면 왜 자신이 그토록 경쟁적으로 셔터를 눌러대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기자들도 불편해 하는 상대방을 즐기듯이 사진을 찍는 이들은 없다. 그것은 연예인의 사생활 사진에 대한 언론사들의 과도한 경쟁구도가 부추겨 억지로 만들어진 일일 가능성이 크다.

 

기자를 기레기라고까지 표현하며 욕을 하지만 사실 기자들 역시 언론사의 방침에 의해 하기 싫어도 욕먹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목구멍이 포도청인 생활인들이다. 결국 이런 문제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 위해서 변화되어야 할 것은 언론사들이다. 물론 연예 언론의 특성상 스캔들과 가십에 민감할 수 있다는 건 이해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경쟁적으로 이뤄지는 건 적어도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자제되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이번 김민준 논란에서는 안타깝게도 지금 현재 연예 언론이 처한 현실이 묻어난다. 어떤 기자도 파파라치식의 사진과 글을 쓰고 싶어 기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적인 현실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김민준 논란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그 사진이 주는 선정성이 아니다. 그런 사진조차 찍혀 기사화되는 안타까운 우리네 언론의 현실이다.

실체는 없고 장밋빛 계획만 무성한 <디워2>

 

“100억을 투자하지만 1,000억이 돼서 돌아 올 수 있는 상황이다.” JTBC <연예특종>에 나와 심형래 감독이 영화 <디워2>의 제작준비를 하고 있다며 밝힌 말이다. 심형래의 말대로라면 엄청난 수익률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제작 첫 단계에서부터 돈 얘기부터 나오는 건 어딘지 섣부른 느낌이다. 영화감독이라면 돈 얘기보다는 영화 얘기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연예특종(사진출처:JTBC)'

심형래 감독에 따르면 최근 <디워2>는 제주 비스타케이호텔그룹과 100억 원 투자 협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투자 결정 이유는 중국에서 <디워>가 보인 흥행이 <디워2>로 이어지면 투자 수익은 물론이고 홍보효과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란다. 역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다.

 

그는 또 현재 “<디워2>1차 시나리오가 나온 상태이며 CG감독으로 <고질라><스파이더맨3>의 시각효과를 맡은 데이비드 에브너와 함께 작업하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오는 7월 중순에는 미국에서 할리우드 스태프들과 영화의 제작 방향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데이비드 에브너와의 계획은 구두 협의된 상황이라고 한다.

 

또 캐스팅에 있어서도 영화에 아시아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일본의 유명 여배우와 중국 여배우를 포함해 여러 배우들이 물망에 올라 있다고 말했다. 캐스팅을 하고 있지만 아직 논의 사항이고 결정된 건 없다는 얘기다.

 

심형래 감독의 이야기는 대부분 얼마를 투자받을 계획이고 그것이 얼마의 수익을 낼 것이며 또 누구와 작업할 것이고 어떤 연기자를 캐스팅할 것이라는 얘기에 집중되어 있다. 정작 <디워2>가 어떤 영화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막연하게 1969년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미국과 소련이 치열한 우주과학기술경쟁을 벌이던 시대에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실체는 없고 주변 얘기만 무성하다.

 

사실 <디워2>에 회의적인 것은 <디워>를 그다지 성공작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애국주의와 논란이 뒤섞인 마케팅으로 국내에서 흥행하기는 했지만 이미 관객들은 그 실체를 보았다. 전작에 실망감을 갖는 관객이 속편을 찾아볼 까닭이 있을까. 아니 실패한 전작의 속편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심형래 감독의 말대로 1000%의 수익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거대 투자사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거대 투자사가 <디워2>에 투자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심형래 감독의 이야기들은 실제 이루어진 것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에 더욱 집중되어 있다. 미리 1000%의 수익을 예상하는 것처럼 미래에 대한 계획은 넘쳐나지만 실제 성사된 구체적인 일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100억대, 아니 그 이상의 투자가 오고가는 작품이라면 향후 실패하거나 엎어졌을 때 그 파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CG 작품은 지금의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더 정교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투자비는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직원 임금과 퇴직금 체불 혐의로 기소되고 파산신청까지 한 심형래 감독이다. 그는 왜 이렇게 <디워2>에 집착하는 것일까.

오디션? 스타? 대학문화 실종도 문제다

 

MBC 대학가요제는 결국 폐지를 결정했다. 작년 폐지 이야기가 나왔다가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그래서 올해 다시 재개할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었다. 하지만 최종 폐지 결정이 내려진 데는 더 이상 대학가요제를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학가요제(사진출처:MBC)'

알다시피 오디션 트렌드는 기존 가요제를 구식의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같은 가요제가 가수의 등용문이 되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버렸다. 최근 몇 년 동안 가요제 출신 스타가 배출되지 못했던 현실은 이러한 변화를 잘 말해준다.

 

기존 가요제가 구식이 되어버린 이유는 오디션 트렌드로 가수의 탄생과정이 결과 자체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가요제는 마지막 무대에서 기량을 선보이고 심사위원이 상을 결정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오디션이 일반 대중들의 참여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과는 사뭇 폐쇄적인 방식이다. 결과에만 집중하는 가요제의 구태의연한 형식이 달라진 대중들의 욕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

 

물론 이런 형식의 문제는 언제든 가요제가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오디션 트렌드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대학생들만의 가요제라는 틀은 어딘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준다. 대학을 들어가건 못 들어가건 노래 잘하고 음악 잘 만드는 지망생들은 넘쳐난다. 그러니 대학생들만의 가요제는 저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과거 대학가요제가 대중들에게 주목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이라는 선망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런 지성인들이 벌이는 음악의 향연이라는 점이 어떤 특별한 정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을 보라. 대학이 과연 선망의 대상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치열한 전장터가 되어 있다. 대학이 사회의 변화에 선봉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도 이미 지나버렸다. 청춘의 도전과 낭만? 그런 게 지금 대학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가.

 

대학생이라는 특권적 위치에 대해 대중들이 납득할 수 있는 분위기라면 어쩌면 대학가요제가 존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문화가 점점 실종되어가고 대학을 특권으로 바라보기를 원치 않는(정서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대중들에게 대학가요제는 저들만의 리그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결국 대중들이 참여할 수 없는 가요제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대학가요제 폐지는 물론 아련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다. 이제는 대학가요제 폐지를 두고 방송사의 공영성을 운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대학가요제가 없어서 가수 지망생들의 등용문이 사라지는가. 그게 아니라면 대학가요제가 없어서 대학문화가 실종되는가. 가수 지망생들의 등용문은 오디션쪽이 훨씬 넓어졌고 더 효과적인 방식이 되었다. 대학문화? 대학가요제 살린다고 생겨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학가요제의 폐지는 그래서 시대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 것을 말해주지만 동시에 대학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가 이제는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대학이 지성인의 공간이 아닌 미래의 스펙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대학생들만의 축제란 대중들에게는 위화감만을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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